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들 중에서도 용맹함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무사였다.
 나리마사가 죽은 뒤의 일이다. 나리마사가 일평생 혐오했던 정적(
政敵) 히데요시(秀吉)도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오다와라(
小田原) 정벌 때의 일화이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부대표식(馬標)을 [금박이 칠해진 삼단 갓(三階菅笠)]으로 바꾸고 싶다며 히데요시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부대표식은 대단한 무용(
勇)을 자랑하던 나리마사의 부대표식이다. 아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이것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줄 수도 있지"
 고 말했다. 우지사토는 그 말을 듣고 결사적인 활약을 펼쳐 명예로운 [삼단 갓]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선조는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명장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 盛綱[각주:1])라고 한다. 오다 가문(織田家)에서는 늦깎이 출세를 하였다. 노부나가의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에 발탁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이 즈음 노부나가는 옆나라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공격하였는데 나리마사는 이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함께 사이토우 측의 장수 이나바 마타에몬(稲葉 又右衛門)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급을 취하는 단계가 되어서 나리마사와 토시이에는 상대방이 더 잘했다며 서로 공을 미루기만 하였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서로 공을 미루는 말싸움을 지켜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주워서는 노부나가에게로 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명에게 각각의 행동에 대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각주:2].

 나리마사는 그 후 입신출세하여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각주:3])가 되어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자 그 후 자신의 운명을 카츠이에에게 걸었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를 혐오했다. 성격도 단순하여 한 가지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정치정세를 두루 살펴보고 행동하는 요령이 부족한 듯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후세에 나리마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전진미답의 일본 알프스[각주:4] 돌파였다.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1584년이었다. 이 전쟁이 화해로 끝난 것을 안 나리마사는 철저항전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엣츄우에 있던 나리마사가 하마마츠에 가기 위해서는 에치젠(越前)에서 오우미(近江)를 거쳐 미노, 오와리(尾張)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거기는 전부 히데요시의 세력이 있는 적지였다. 남은 길은 중부 산악지대를 종단(縱斷)하는 직선코스였다.

큰 지도에서 일반적인 토야마(富山) 하마마츠(浜松) 루트 보기

 때는 11월[각주:5]. 엄동의 계절이었다. 몸의 반 이상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덮인 험준한 일본 알프스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쉽지 않다. 살아서 하마마츠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리마사는 그것에 도전하였다. 나리마사 일행은 험난한 쿠로베(黒部)의 비경에 들어섰다. 자라토우게(ザラ) 고개라는 난소를 극복하여 하리노키토우게(木峠) 고개를 넘어 간신히 시나(信濃)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인기척 끊겨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과 계곡(るところ皆山谷えて人煙無し)]라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의 집 한 채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나무꾼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시모스와(下諏訪)를 거쳐 12월이 돼서야 하마마츠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와 만나자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하사 받아 보물처럼 여기던 작은칼(脇差)을 이에야스에게 바치며, "내 영지인 엣츄우에 히데요시가 공격해 온다면 부디 원군을 부탁 드리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한편, 토쿠가와와 삿사가 한 편을 이루면 예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합쳐진 만큼의 파괴력을 가져 히데요시 따위는 단번에 멸할 수 있을 것이오 – 하며 열변을 토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해 1585년 히데요시가 엣츄우에 침공했을 때는 결국 이에야스의 원군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까지 히데요시에게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여 히고(肥後) 전역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마사는 영내(領內) 호족 반란의 책임을 요구 받아 영지(領地) 몰수와 함께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자살을 명령 받았다.

[삿사 나리마사]
1516년생. 오와리(
尾張) 출신.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지만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秀吉)에 대항하다 패하여 항복. 1587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성주. 다음 해 1588년 5월 자살. 73세[각주:6].

  1.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최측근 중 한 명. 겐페이 쟁란기 때의 활약으로 후에 에치고(越後)와 이요(伊予)의 슈고(守護)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이야기는 [상산기담(常山記談)]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것으로,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의 '쥬우시죠우 전투(十四条合戦)' 항목에는 稲葉又右衛門を、池田勝三郎・佐々内蔵佐、両人としてあひ討ちに討ちとるなり(이나바 마타에몬을 이케다 카츠사부로우(나중에 코마키-나가쿠테에서 죽는 사람), 삿사 쿠라노스케 둘이서 물리쳤다)고 나온다. 저 마에다, 삿사, 시바타는 나중에 호쿠리쿠(北陸)에서 함께 활약한 무장들이라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다. [본문으로]
  3. 이 즈음 오다 가문의 경우 각 유력 부장에게 파견된 오다 씨의 직속 신하를 뜻한다. 물로 세세히 들어가면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노부나가나 노부타다가 영지를 인정하였다. [본문으로]
  4. 윌리엄 골란드(William Gowland)라는 인물이 이 산맥을 조사한 후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 알프스'란 이름이 붙기 전에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 현 '키타(北) 알프스'), 키소 산맥(木曽山脈 – 현 '츄우오우(中央) 알프스'), 아카이시 산맥(현 '미나미(南)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5. 일본 구력. 현재로 치면 12월 하순 쯤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덕편년집성(武徳編年集成)]과 [무가실기(武家事記)]에 따르면 1516년생으로 죽을 때 73세가 되지만,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과 [삿사 군기(佐々軍記)]에는 1536년생으로 되어 있어 죽을 때의 나이는 53이 된다. 일본어 위키는 1536년생을 채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일찍부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훌륭한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이 뛰어난 인물에게 국정을 맡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나오시게가 있었기에 류우조우지 가문의 융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1584년 3월.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에게 패하여 대장 타카노부가 전사하자 류우조우지 가문의 운명은 나오시게의 양 어깨에 달리게 되었다. 타카노부의 뒤를 이은 마사이에(政家)는 대장으로서의 기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히데요시의 천하였던 1587년, 이 마사이에의 범용함으로 인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모반혐의를 받게 된다.

 이해, 히고(肥後)에 있던 삿사 나리마사의 영내(領內)에서 토착 영주(国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근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부 출진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며 출진하지 않은 것이다.(관련링크[각주:1])
 당시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나오시게는 서둘러 귀국하여 어쨌든 자신만이라도 출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히고(肥後)에 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등의 감찰관(軍奉行)들과 만났다. 감찰관들은,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나오시게는 열심히 그 사실을 부정했다. 곧바로 마사이에를 데리고 참전하겠습니다 – 하고 변명에 힘쓴 후 사가(
佐賀)로 돌아와 마사이에를 나무란 후 참전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마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와카미 다이묘우진(
河上大明神[각주:2]) 의 신탁이 이르길 참전은 쓸모 없는 일이라고 나왔으며, 요가 신사(与賀神社)에 있던 녹나무의 잎이 전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이모리 촌(飯森村)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타카노부)의 혼령이 씌어 출전하면 전사한다고 외쳤다더군. 성안에서도 여자의 우는 소리가 나는 등 이변이 끊이질 않네"
 나오시게는 너무도 어리석은 답변에 격노하며, 녹나무가 늙어서 잎이 떨어지는 것에 뭔 이상한 점이 있소 – 라며 불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자를 즉각 처형하고,
 "주군은 여우에게조차 좆병진 취급[각주:3]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 질타하곤 히고(肥後)의 전쟁터로 끌고 나간 것이다.

 이리하여 마사이에는 모반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이런 마사이에였기에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고 반대로 나오시게의 존재감이 커져만 갔다.
 1590년 결국 마사이에는 아직 3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병약함을 이유로 은거의 몸이 되었다.
 이때 일문과 숙노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마사이에의 친할머니인 케이긴니(
慶誾尼[각주:4])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오시게님 말고는 류우조우지 가문의 안태를 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마사이에 다음의 가독은 나오시게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라는 의견을 내놓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오시게가 가독을 이은 배후에는 히데요시의 뜻도 작용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오시게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조선의 왕자 둘[각주:5]을 포로로 잡는 대공을 세웠다. 후에 키요마사가 나오시게를 평하길,
 "내 생애에서 조선에서 싸운 것만큼 편한 적은 없었다. 모두 나베시마 나오시게 덕분이다. 공을 다투는 일 없이 군율을 엄격히 지키며 나에게 협력해 주었다"
 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오시게는 일찍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역량을 파악하여 세키가하라() 후엔 토쿠가와의 천하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혜안덕분에 막말(幕末)까지 35만석의 나베시마 가문은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비참했다. 마사이에의 아들 타카후사(高房)는 영지(領地)를 나오시게에게 빼앗긴 것을 원망하여 1607년 19살의 자기 부인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꾀하여 실패. 결국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후년 이야기꾼(講談)들에 의해 유명해진 [나베시마 냥이 소동(鍋島猫騒動)[각주:6]]은 이 류우조우지 가문의 원한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라 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583년생. 첫 이름은 노부나리(
信生). 류우조우지 가문(竜造寺家)의 가신이었지만 타카노부(隆信)의 죽음 후 실권을 장악하였고, 1590년 류우조우지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히젠(肥前) 사가 성(佐賀城)의 성주가 된다. 1618년 6월 죽었다. 81세[각주:7].

  1. 전국무장 말년과 최후. '삿사 나리마사'항목의 중간쯤 관련 사항이 나와 있습죠. [본문으로]
  2. '요도히메카미(與止日女神)'의 별칭. 바다의 신인 '와타츠미카미(大綿津見神)'의 딸 혹은 일본 판타지 주인공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여동생이라고도 한다. 히젠(肥前)에서는 가장 급수가 높은 신사(肥前一宮)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말로 "여우에 홀리다(狐憑き)"는 말이 있다. [본문으로]
  4. 류우조우지 가문을 위한다며 50가까운 나이에 나오시게의 부친을 강제로 취한 타카노부(隆信)의 모친. 즉 나오시게의 양엄마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함경도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 그들이 잡았다기 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함경도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넘겨졌다. [본문으로]
  6. 여러 버전이 있는데...대충 종합하면...나오시게의 아들 카츠시게(勝茂)가 사사로운 일로 가신을 죽였다. 그 가신에게는 늙은 모친이 있어 아들이 죽자 카츠시게를 저주하는 말을 기르던 고양이에게 하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고양이는 모친의 피를 핥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카츠시게는 병이 들거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또한 성안에 이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수상히 여긴 가신들이 불침번을 서다가 새로 성에 들어온 카츠시게의 측실 '토요노카타(豊の方)'가 고양이괴물로 변해 일을 꾸미는 것을 퇴치한 이후로 카츠시게의 병도 낫고 이변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타카후사가 기르던 고양이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죽을 때 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죽었기에 이것이 류우조우지 타카후사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나베시마 냥이 소동'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