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나오마사[井伊 直政)]

1602 2 1 전상사(戰傷死[각주:1]) 42

1560 ~ 1602.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각주:2]]를 이끌고 용명을 떨쳤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주하는 시마즈[島津] 군세를 추격하지만 이 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이이의 적비대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이이 가문[井伊]의 '오우미[近江] 히코네[彦根] 30만석'이었는데, 이이 문이 당시엔 신참의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지위는 전적으로 초대 나오마사[直政]가 발군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이 가문은 토오토우미[遠江] 이이노야[井伊谷]의 호족으로 대대로 이마가와 씨[今川)]를 섬겼다. 그러나 1562년에 부친 나오치카(直親)가 이마가와 씨에게 살해 당하자, 2살인 나오마사는 이이노야에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각주: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각주: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각주: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 야마가타 중[山県], 오바타 당[小幡]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의 적비대[赤備]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이 가문의 후다이[譜代] 필두라는 지위는 에도 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각주: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각주: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 2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신영주 이이 의 거성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1602년 2월 1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은 히코네[彦根]의 세이료우 사[淸凉]에 묻혔다.


 비노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 마지막까지 지켜다오 대지의 신들이여
 
るぞよ 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맹장도 13살의 어린 장남 나오카츠[直勝][각주:8] 등의 장래와 이이 가문의 존속을 대지의 신들에게 빌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쿠가와 바쿠후[幕府]를 세우는 도중에 쓰러진 나오마사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나오마사 부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이에야스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가신단(家臣團)도 또한 확실히 그의 뜻에 응하였다.

  1.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로 인한 죽음 [본문으로]
  2. 무구 일체를 전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부대. [본문으로]
  3. 직속 부하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5.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1582년 당시 카이[甲斐] 등 옛 타케다 가문의 영지를 막 손에 넣었던 터라, 오다 가문[織田家]의 영주들은 거의 적의 땅이나 다름 없던 옛 타케다의 영지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터라 빈집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으로]
  6. 부대가 싸우는 모습이나 배반하는 지를 감시하는 역할. [본문으로]
  7. 이 때 나오마사는 처음 전장에 나서는 타다요시에게 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 구경하고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마사의 장남이나 병약했기에 후에 가독과 히코네 번을 배 다른 동생 나오타카[直孝]에게 양보하고 안나카 번[安中藩] 3만석에 봉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했다지만 나오카츠는 72살까지 산 반면 나오타카는 69살에 죽었다. [본문으로]

오부 토라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2. 23. 02:06 Posted by 발해지랑

오부 토라마사(飯富 虎昌)

1565 8월 모일 할복 나이 불명.


생년 불명 ~ 1565.

타케다(武田)후다이(譜代)의 신(). 노부토라(信虎), 신겐(信玄)을 섬겼으며 시나노(信濃) 우치야마(內山)성주를 역임했다. [아카조나에(赤備え)[각주:1]]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여겨지며 맹장으로서 유명했지만 신겐의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가 세운 모반(謀叛)에 관련되어 할복하였다. 신겐의 중신 야마카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는 동생.









영광스런 전력(戰歷)


 오부 효우부쇼우유우 토라마사(飯富 兵部少輔 虎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영광스러운 타케다 가문(武田) 중진(重鎭)으로서의 위엄있고 중후한 모습이었다.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휘하에서 갑옷과 투구는 물론 무구 일체를 붉은 색으로 통일한 소위 [오부의 아카조나에(飯富の赤備え)]라는 이름으로 적에게 공포를 안겨준 기마병단(騎馬兵団)을 조직해서는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시나노(信濃)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등과 싸워 승리하는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다 1541년에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와 함께 노부토라(信虎)를 순푸(駿府)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로 축출하여 하루노부(晴信 = 신겐(信玄))의 정권을 세운 일등공신인 것이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도 오부 효우부를 평하길 [지략발군(智略拔群)의 효장(驍将)]이라 기록하고 있다.


 누구나가 그의 말년은 온갖 영광과 함께 흔들림 없는 중진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그가 하루노부(晴信)의 장남 타로우(太郞) 요시노부(義信)의 후견인 겸 스승에 임명되었기에 한층 더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했었을 것이다.

 타로우 요시노부가 16살에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을 때(初陣) 그에게 갑옷을 입힌 것이 오부 효우부였으며, 하루노부 즉 신겐은 오부 효우부 및 하라 미노(原 美濃), 오바타 야마시로(小幡山城),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助) 네 명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기에 부하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일이 없었다며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후일의 비극을 암시하는 듯한 사건이 발생한다.


반란일으키다.


 사건의 발단은 타로우 요시노부가 1561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 부친 신겐(信玄)의 전술을 비판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불쾌히 여긴 부친과 비판한 것을 당연히 여기는 아들 사이의 틈은 벌어져만 갈 뿐이었다.

 사태를 걱정한 코우후(甲府)의 다이센(大泉)()의 주지 코우덴(高伝)과 시나노(信濃) 이와무라타(岩村田)의 홋코우(払口)화상(和尙)이 부자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 없이 불화는 심각해져만 갔다.

 더구나 신겐은 요시노부를 약이라도 올리 듯이 측실 스와고료우진(諏訪御料人)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시로우 카츠요리(四郞 勝頼)를 이나군다이(伊那郡代) 겸 타카토오(高遠)성주에 임명하여 아토베 시게마사(跡部 重政)등을 포함한 믿을 수 있는 8명의 무장을 부속시켜 주었다. 이것을 보고 요시노부는 어떤 생각을하였을까?


 요시노부에 관해 [갑양군감(甲陽軍鑑)]너무 똑똑한 젊은 주군이라 기록하고 있듯이, 부친은 후계를 시로우 카츠요리에게 물려줄 생각인가? 고 나름 억측하여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더욱이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신겐은 스루가(駿河)로 진공(進攻)을 기도했다. 1560 5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패사하였고 그로 인해 이마가와 가문(今川)이 약체화 된 지금이야 말로 바라 마지않던 스루가(駿河)를 탈취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 신겐의 생각이었다.

 요시모토의 부인은 신겐의 누나이기에 이마가와 가문을 상속한 것은 외조카인 우지자네(氏真)였다. 더구나 요시노부의 부인도 우지자네의 여동생이었기에 요시노부는 스루가 침공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영토욕(領土欲)에 불타는 부친 앞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요시노부는 어두운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1564년 7월 15]이라고 [갑양군감(甲陽軍鑑)]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요시노부가 나가사카 겐고로(長坂 源五郞)와 메노토소네 수오우(乳母曽禰 周防) 두 사람과 함께 등롱(燈籠) 구경이라는 명목으로 오부 효우부의 저택을 방문하여 새벽 2 즈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이것을 목격한 밀정이 다음 날인 16 요시노부에게 수상적은 행동이 있다고 신겐에게 보고했다.


 그 때 신겐은 [오야마(御山)]에 있었다.

 오야마라는 곳은 목욕탕에서 사용한 물을 이용하여 더러운 것을 치울 수 있게 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여기서 신겐은 향을 피워놓고 여러가지 생각에 몰두하거나 서장을 읽고 밀정의 보고를 받았다. 물론 경계는 엄하였고 방문 뒤에는 하라 하야토(原 隼人), 오부 겐시로우(飯富 源四郞 =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등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을 항상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때마침 방 문 뒤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오부 효우부의 동생인 겐시로우가 품안에서 요시노부가 직접 반역의 뜻을 적은 편지, 즉 오부 효우부에게 보내진 편지를 꺼내어 신겐에게 받쳐 신겐 추방의 쿠테타가 밝혀지게 된다. 이는 효우부 자신이 희생하여 죄를 뒤집어 씀으로써 쿠테타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하는 형제공모설도 있지만 사실일지 어쩔지 어쨌든 영광스러운 말년이 준비되어 있던 듯이 보였던 오부의 말년은 일순간에 할복의 지옥으로 바뀌었다.

  1. 무구 일체를 붉은색으로 칠한 부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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