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후쿠이(福井)()에서 아스와가와(足羽川)()을 내륙 쪽으로 10k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평야(越前平野)가 끝나면서 산맥이 주위를 둘러싼 작은 골짜기의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가 이치죠우다니(). 지금은 한적한 농촌이지만, 센고쿠(戦国) 시대에 이곳은 에치젠 일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朝倉)()의 본거지였다. 근년[각주:1]이 되어 이 지역은 갑자기 주목 받았다. 아사쿠라 씨()의 저택이 발굴 조사되어 거의 그 전모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센고쿠다이묘우(戦国大名)의 생활 실태라는 것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었다.

 저택의 유적 전체가 탄 흙과 재로 구성된 층으로 덮여 주춧돌이나 정원석(庭園石)의 겉은 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573 8월 아사쿠라 가문이 괴멸될 때 이치죠우다니()는 큰 불에 휩싸여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그 종언(終焉)의 무시무시했었음을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이치죠우다니는 ‘호쿠리쿠(北陸)의 쿄우토(京都)’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이었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쿄우토를 피해온 상급 귀족(公卿)이나 문화인들이 모여있었다. 우다이진(右大臣) 산죠우 킨요리([각주:2])나 다이나곤(大納言) 아스카이 마사츠나(飛鳥井 正綱)가 와있었으며, 렌가(連歌)의 제1인자 소우기(宗祇), 소우쵸우(宗長)의 사제(師弟)도 방문했었다. 당대 제일의 국학(国学) 키요하라 노부카타( 宣賢)도 초대받았다.

 그 중에서도 거물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 요시테루(義輝)의 동생 요시아키(義秋)였다. 요시아키는 1567 11월에 이치죠우다니(一乗)를 찾아왔다. 2년 전에 형 요시테루가 미요시(三好)-마츠나가(松永) 일당에게 습격 받아 죽은 다음부터 바쿠후(幕府) 재건의 뜻을 세우고는 요시카게의 힘을 빌리려 찾아온 것이었다.

 요시카게는 이 귀공자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였고 일부러 안요우지(安養寺) 저택을 신축해서는 시가(詩歌) 모임, 눈구경 잔치, 꽃구경 잔치를 열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칸파쿠() 니죠우 하루요시(二条 晴良)를 초빙해서 성인식까지 치러주었다. 이때 요시아키()를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환영해주는 잔치보다 요시카게의 무력(武力)을 원했다. 아사쿠라의 힘을 빌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쇼우군() ()을 잇고자 했던 것이다. 요시카게에게 있어서도 천하를 바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이 모처럼의 찬스를 요시카게는 허사로 만들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일관하여 요시아키의 실망을 사고 말은 것이다. 얄궂게도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잡자마자 요시아키를 내세워 쿄우토에 올라가 쇼우군의 명성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요시카게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문화인의 색체가 강했다.

 그는 1548년에 16살의 나이로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군정(軍政)도 내정(內政)도 숙부인 노리카게()에게 맡겼다. 노리카게는 불문에 들어가 소우테키(宗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데 그는 일대의 걸물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며 주변에 무명(武名)을 떨쳤지만, 1555카가(加賀)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와의 싸움 도중 안타깝게도 병으로 전쟁터의 진영(陣營)에서 죽었다. 79살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토대(土臺)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대손실이었다.


 요시카게는 문약(文弱)으로 내달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관계도 화려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찌감치 죽었지만, 두 번째 부인은 코노에(近衛) 가문의 딸로 [미모가 견줄 이 없다(容色無雙)]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코사이쇼우노츠보네(小宰相局)라고 하며 두 딸을 낳았다.

 가장 요시카게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사이토우 효우부쇼우유우(藤 兵部少輔)의 딸로, 코쇼우쇼우(小少)라고 불렸다. 미녀에다가 말까지 잘하였기에 요시카게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였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은 그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원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요시아키를 쇼우군에 앉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이름으로 요시카게에게 상경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1570 4, 노부나가가 에치젠에 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오우미(近江)에 가까운 전선기지인 테즈츠야마(手筒山)성(城)이 하루 만에 낙성되어 성병 1400이 죽었다. 계속해서 오다 군()은 츠루가(敦賀)카네가사키(崎)성(城)으로 몰려들었다. 다행히도 이때의 위기는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아자이 군()이 노부나가의 배후를 공격,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아네가와(姉川) 천(川)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 2만과 오다-토쿠가와() 연합군 35천이 격전을 전개하여, 아사쿠라-아자이는 패했다. 이때 요시카게는 출진하지 않고 일족인 카게타케(景健)가 지휘하였다.


 3년 후인 1573년은 아사쿠라 가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해가 되었다.

 아자이 씨()오다니(小谷)성(城)이 오다 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요시카게는 뭉기적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출격한 것이다. 따르는 군세는 15천이었다. 그러나 왕년의 위세가 없었으며 전년도부터 오다 측의 모략의 손길이 뻗쳤기에 이미 마에바 요시츠구(前波 吉), 토미타 나가시게(富田 長繁) 등의 유력 무장이 오다 측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거기에 막 출격할 때가 되어서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였으며, 미조에 나가야스(溝江 長逸)도 역시 출진을 거부한 것이다. 요시카게의 약화된 통제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사쿠라 군은 오다니 성()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오다 측의 활발한 모략의 손길이 계속 뻗쳐와 가신들이 계속해서 배신하였다. 요시카게는 도착한 지 3일만에 에치젠으로 도망쳤다. 본거지인 이치죠우다니()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패주해 온 요시카게에게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터인 카게아키라가 출두한 것이다. 충성스런 표정으로 오오노(大野)로 옮기라고 진언했다. 요시카게가 오오노의 도우운(洞雲)사(寺)로 옮기자, 또다시 카게아키라에게서 도우운 사()는 제 거성 이누야마(犬山)()에서 떨어져 있으니, 로쿠보우(六坊)의 켄쇼우(賢松)()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카게아키라의 덫이었다.

 요시카게가 켄쇼우 사()로 옮기자, 카게아키라의 군사들이 몰려와 포위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카게는, “네놈들 부자(父子)의 생명은 필시 3년 안에 끊어질 것이다[각주:4]고 저주를 퍼붓고는 자해(自害)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33년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에서 태어나 16살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처음엔 노부카게(延景)’라 하였지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의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 노신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가 죽은 후는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패배, 3년 후에 멸망하였다. 41.

  1. 참고로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책. [본문으로]
  2.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모반으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함께 죽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장인이다.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당 지역 내 반란군. [본문으로]
  4. 카게아키라는 다음 년도 1574년에 잇코우잇키 군에 공격받아 전사. [본문으로]


 아사쿠라 토시카게가 죽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느 귀족은,

아사쿠라 단죠우자에몬[朝倉 正左衛門]에치젠[越前]에서 죽었다고 한다. 굉장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하의 악사(惡事)를 시작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 외에도 다이죠우 원[院]의 진손[尋尊]이나 이치죠우 카네요시[ 兼良]가 토시카게의 행동에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을 정도로 당시의 귀족이나 중들에게 있어서 토시카게는 장원( - 귀족이나 사원의 영유지)을 빼앗아 갔기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토시카게는 구질서 아래서 온존되어 왔던 귀족의 특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렸던 것이다.

 아사쿠라 씨[朝倉氏]는 대대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각주:1]] 시바 씨[斯波氏]의 가신이었다. 토시카게 때 삼가로(三家老[각주:2])의 하나로 승진하였다. 토시카게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시바 가문의 가독 상속 싸움으로 인해서였다.


 1452.

 시바 요시타케[斯波 義健]가 죽자, 그의 양자(養子) 요시토시[義敏]가 필두가로인 카이 씨[甲斐氏]와 싸워 카이, 아사쿠라, 오다의 삼가로에게 추방당하였고 새로이 요시카도[義廉]가 양자로 들어왔다. 시바 가문의 이 두 양자간의 상속 싸움이 '오우닌의 대란[仁の乱]'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처음 토시카게는 요시카도의 밑에서 막부[幕府]의 실력자인 야마나 소우젠[山名 宗全]의 서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 토시카게에게 은밀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야마나에 대항하는 실력자인 동군의 총대장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 勝元]에게서였다. 서군을 배신한다면 에치젠 슈고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슈고 다이묘우[守護 大名]가 되는 것은 예전부터 토시카게의 꿈이었다. 토시카게는 이를 호기라며 주저 없이 동군으로 달려가 어제까지 주군이었던 요시카도와 카이 씨를 적으로 돌렸던 것이다.

 1472.
 토시카게는 에치젠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실직적인 슈고 다이묘우가 되었다. 이 때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城]에서 이치죠우다니[谷] 계곡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치죠우다니 계곡은 에치젠 지배의 요충지이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후츄우[府中], 키타노쇼우[北ノ庄], 오오노[大野]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후에 이치죠우다니는 '북국의 작은 쿄우토[小京都]'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로 발전하였다.

 토시카게는 그야말로 센고쿠 다이묘우
[
戦国 大名]의 선구자였다.
 이치죠우다니에 가신들을 집결시켜 살게 하는 등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중앙집권제를 행한 것도 토시카게가 제일 먼저였
.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등도 이를 모방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합리 정신은 토시카게가 정한
'가훈17개조'에서도 볼 수 있다.

 우선 문벌 타파와 인재의 등용이다
.

 가훈 제
1조는,
세습으로 이어지는 숙로(宿老)를 정하지 말 것. 기량과 충성심을 보고 임명할 것.
이었다.

 제
2조에서는 군비(軍備)에 대해서,
아무리 만금(萬金)에 필적하는 명도(名刀)라고 하여도 백전(白錢)의 창 100개에는 이길 수 없다
고 하였다.

 미신 타파에도 힘써
전투의 길일(吉日)과 방향을 고르거나 해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라고 당시의 풍습을 대담하게 무시하고 있다. 남도(南都 나라(奈良))의 사원령(寺院領[각주:3])을 태연히 빼앗은 것도 이 합리주의의 결과였다.

 사람을 쓰는 것에 있어서 규정한 조항을 보면
,
예를 들어 능력이 없는 자라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특별히 눈 여겨 볼 것. 게으른 사람이라도 풍채가 좋다면 그에 걸맞은 사자(使者)로 쓸 만하다
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불과
17개조 이면서도 토시카게의 가훈은 하극상(上)으로 일어난 센고쿠 다이묘우의 통치 방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굉장히 흥미 깊은 자료이다.

 아사쿠라 가문은 이런 토시카게 덕분
에 5 100년간 이치죠우다니[
]의 땅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아사쿠라 도시카게(朝倉 敏景)]

1428년 에치젠[越前]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에서 태어났다. 타카카게[孝景]라고도 한다. 1471년 주군인 시바 씨[斯波氏]를 대신해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가 되었다. 미신 타파에 힘쓰는 한편 당시 종교계의 신흥 세력인 렌뇨[蓮如[각주:4]]와 친교를 맺어 에치젠 요시자키[吉崎] 절을 만들어 주었다. 1481 54살에 죽었다.

  1. 무로마치 막부(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2. 에치젠 슈고다이[守護代 – 주로 쿄우토(京都)에 있는 ‘슈고’를 대신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카이 씨[甲斐氏],오와리[尾張] 슈고다이 오다 씨[織田氏]와 더불어. [본문으로]
  3. 절이 소유하는 땅. [본문으로]
  4. 혼간지[本願寺] 8대 교주. [본문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73 8 20 할복 41

1533년 ~ 1573년.
아사쿠라씨 제 5대 가주. 에치젠(越前), 카가(加賀), 노토(能登)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와 싸웠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과 대립.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와 손을 잡고 아네가와(姉川) 천에서 싸웠으나 패배. 본거지 이치죠우다니(一乗谷)를 노부나가에게 공격 받아, 친족인 카게아키라(景鏡)에게 배반당해 할복하였다.









이치죠우다니의 망명객


 1533년.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우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 孝景)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시카게는 1573 4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문가 아사쿠라에게 몰락의 징조가 나타난 것은 난을 피해 에치젠으로 도망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이치죠우다니를 떠나 오다 노부나가의 기후(岐阜)로 향한 1568 7월로 볼 수 있다. 이 때 요시카게는 36세였다.


 오히려 요시카게 자신은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전년인 1567 11월에 에치젠 츠루가(敦賀)에서 이치죠우다니로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이 때는 아직 義秋)가 아사쿠라 저택으로의 비공식적인 방문이 성사 되었으며, 새해가 밝은 1568 요시아키의 추천으로 요시카게를 낳은 모친의 위작이 이위(二位)에 서임되었다. 또한 봄에는 경치가 뛰어난 객관(客館)인 난요우(南陽)()로 요시아키를 초대하여 화려한 연회를 열어서는 화려하게 핀 벗나무를 주제로 요시카게는 참석한 귀족(公家)들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겼다. 이어 아사쿠라 저택에서 요시아키(義秋)는 성년식을 치르고 [義昭]로 개명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공식적인 방문이 실현. 요시카게는 최고의 명예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와는 달리 굉장히 정치적이며 야심가이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에치젠까지 내려올 리가 없었으며 아사쿠라 가()의 무력 지원을 받아서 쿄우()로 올라가 쇼우군()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8개월 정도 머물고 있는 동안, 요시카게에게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요시아키는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노력으로 새로운 지원자가 되어 준 노부나가에게로 향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다.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을 이루고 천하를 향한 발판을 마련했다. 반대로 요시카게는 요시아키를 놓쳐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되었다. 오히려 그 당시 요시카게는 세력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족끼리의 다툼이 방해를 하였다. 오오노(大野)()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와 츠루가(敦賀) 군(郡)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 景恒)와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며, 이 둘의 중재에 요시카게는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시아키가 떠나기 직전, 요시카게의 적자 쿠마키미(阿君)가 독살당하는 괴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진상은 확실치 않지만 요시아키를 둘러쌓고 요시카게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아케치 미츠히데 쪽의 책모는 아닐까 하는 말이 있다.


 다음 해인 1569년.

 쇼우군 요시아키의 어소(御所)를 만들기 위해 노부나가는 여러 나라의 다이묘우들에게 쿄우로 와서 건설에 참가하기를 원했다. 요시카게에게도 상경의 재촉이 있었으나 회의 결과 무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노부나가와의 적대 관계가 명확히 되어 1570년에 아네가와 전투라는 결과가 되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 1 5천과 아자이 나가마사 군() 5 ~ 6천이 아네가와를 사이에 끼고 오다-토쿠가와(德川) 연합군 3 4천과 대치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격전 끝에 아사쿠라-아자이측이 대패배를 당했다는 듯이 알려져 있지만 양 측 다 많은 전사자를 내며 물러났으며 나가마사도 오다니(小谷) 성을 지킬 수 있었으니 우선은 비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요시카게보다도 노부나가가 위기에 빠진다.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노부나가가 원망스러운 쇼우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아사쿠라, 아자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 잇코우잇키(一向一揆), 히에이잔(比叡山), 마츠나가(松永), 미요시(三好) 등의 세력과 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까지도 참가하는 강대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형성된 것이다. 요시아키의 생각을 받들어 요시카게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배반당한 요시카게의 최후


 하지만 노부나가군과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요시카게는 한 번만 더 밀면 되는 곳에서 철군하는 등 승기를 놓쳤다. 한 편 각개 격파로 포위망을 뚫고 위기를 탈출한 노부나가는 1573오우미(近江)로 쳐들어 온다. 오다니성 구원을 위하여 달려온 요시카게였지만 이미 노부나가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두 개의 지성(支城)이 함락되어 오다니성도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알고 구원을 중지하고 퇴각하였으나 추격해 온 노부나가 군과 오우미 토네사카(刀禰坂)에서 조우하여 요시카게군은 대패하였다.


  5 ~ 6기(騎)와 함께 이치죠우다니로 도망 온 요시카게는 사촌인 요시아키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에치젠 오오노로 도망가 토우운(洞雲)()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대하고 있던 헤이센(平泉)() 중도(衆徒)의 지원을 얻지 못하였고, 더구나 카게아키라의 꼬임으로 로쿠보우켄쇼우(六坊賢松)()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배반한 카게아키라의 군세에 포위되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된 요시카게는 8 20일 오전 10시경,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진 40년 인생.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七転八倒 四十年中
 無他無自 四大本空

 이라는 사세구를벽에 피로 쓴 후,배를 열십자로 그어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