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관한 이야기는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편찬사료들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부의 공식기록이라는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를 위시한 여러 사료들뿐만 아니라 ‘유영부녀전계[柳営婦女伝系]’, ‘옥녀기[玉輿記]’와 같이 토쿠가와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에 대한 기록서에서 볼 수 있는 키요야스의 부인 케요우인[華陽院] 항목에서도 키요야스가 죽게 되는 모리야마의 변을 텐분[天文] 4년 즉 1535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와 개정 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따르면 키요야스의 미카와 군세는 당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각주:1]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키요스가 노부히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1535년 당시 키요스는 노부히데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입죠.

키요스

키요스는 당시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츠[織田 大和守 達勝]의 거성이었습니다.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텐분 원년(1532년)까지 키요스의 서쪽 쇼우바타[勝幡]에 있던 부하격인 단죠우츄우 노부히데[弾正忠 信秀]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죠.

이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집니다만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틈만나면 노부히데를 노렸으며 결국 오와리 제일의 실력자라는 노부히데가 1551년에 죽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좋을 리가 없었겠죠. 당시는 하극상의 시대. 야마토노카미 가문에서 보기에 치고 올라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예전 가신을 좋게 볼 리는 없을 터이며, 단죠우츄우 가문 쪽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요. 노부히데의 입장에서는 미카와의 키요야스가 키요스를 공략해 준다면 그 틈에 떨어진 떡고물을 취하려 할 지언정 도우러 갈 이유는 희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쇼바타 성[勝幡城]과 키요스 성[清洲城],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위치

어쨌든 이 키요스가 단죠우츄우 가문[弾正忠家]의 영지가 되는 것은 1555년 노부나가와 노부나가의 숙부이자 노부히데의 동생인 노부미츠가 손을 잡고 모략으로 키요스를 손에 넣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각주:2]

그렇다면 모리야마는?

자 그럼 모리야마는 누구의 영지였을까요?
위에 언급한 에도 막부의 기록들에는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성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이 모리야마도 노부미츠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지냐 하면, 바로 키요야스와 사이가 나뻤던 숙부 마츠다이라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의 영지였던 듯 합니다.

적어도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526년에 렌가사[連歌師] 소우쵸우[宗長]의 일기에 모리야마에 있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저택에서 렌가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는 1535년까지도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각주:3]

이 모리야마가 언제부터 노부미츠의 영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노부히데가 모리야마의 근방 나고야[那古野]를 손에 넣고 그곳에 있는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4]라는 절의 토지 영유를 인정한 1538년 이후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난 1535년 당시에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였지 노부미츠의 거성이 아니었단 말입죠.

썰렁한 결말

즉 이 모리야마의 변에서 오다 가문이 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츠다이라 종가[松平宗家]의 키요야스[清康]와 그 종가에 개기는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 간의 싸움이었습죠. 미카와∙마츠다이라 일족[三河∙松平一族]라는 책을 쓴 히라노 아키오[平野 明夫]라는 분은 마츠다이라 가문 종가와 분가의 다툼에 더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다툼과도 관련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마츠다이라 가문 내부의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 수상한 점.

◀왼편에 있는 그림은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기록된 모리야마 변에 관해 기록된 곳입니다. 모리야마에 진을 친 키요야스에게 나이젠 노부사다가 노부히데와 내통하여 키요야스의 거성을 노리고 종가를 빼앗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키요야스가 군사를 되돌리려 할 때 사카이[酒井], 오오쿠보[大久保]의 말에 따라 우선 군사를 되돌리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라고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에 관해선 토쿠가와실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오른편의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 가문의 면면들이 보이는군요.

사카이 사에몬노죠우 타다츠구[酒井 左衛門尉 忠次]와 오오쿠보 가문의 유명인인 오오쿠보 시치로우에몬 타다요[大久保 七郎右衛門 忠世],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 治右衛門 忠佐] 등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사카이 타다츠구 1527년생. 오오쿠보 타다요 1532년생 오오쿠보 타다스케 1537년생입죠. 그리고 모리야마 변이 일어난 해는 1535년.

그러니까 모리야마 변이 일어날 당시, 사카이 타다츠구는 9살. 오오쿠보 타다요는 4살, 타다스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입죠. 여담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개정미카와후풍토기의 저본인 미카와후풍토기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까지 등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모리야마의 변 당시 3살이옵죠.

이런 이유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영무자설[徳川家康の影武者説]을 발표하며 모리야마의 변이 1535년 키요야스 때의 일이 아니고 156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키요스에 있던 것은 노부나가이며, 뒤에서 획책했던 것은 나이젠 노부사다가 아니라 당시엔 이에야스와 적대적이었던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 信元]라고 합니다.

1561년 이에야스가 죽어 영무자가 교체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기를 바꾸려다 보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된 것이며, 역시 미즈노 노부모토가 아닌 나이젠 노부사다가 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은 이는 키요야스가 아닌 이에야스였으며 이때 세라타 지로우사부로우[世良田 二郎三郎]라는 이가 역사상의 이에야스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라오카의 주장대로 1561년이라면 위에 사카이나 오오쿠보의 나이도 해결이 됩지요. 사카이 타다츠구 35세. 오오쿠보 타다요는 30세. 타다스케는 25세. 확실히 이정도 나이라면 옆에서 진언할 나이는 되겠지요.

뭐 저도 무라오카 씨의 주장에는 납득을 못합니다만 그가 이에야스 영무자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한 몇몇 것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군데가 있긴 합죠...뭐 이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기로 합죠.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의 이후

의심도 받았고 또한 자기 아들이 주군까지 살해하였다.
보통 이랬다면 바로 사형이고 실제로 현지 분위기도 그러했으며 아베 오오쿠라 자신도 대역무도의 죄를 지었다며 죽으려 했으나, 야시치로우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전편에서 언급했던 결백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 키요야스의 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용서를 얻어 이후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후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가 종가의 히로타다를 죽이려고 할 때도 히로타다를 탈출시켰고 히로타다의 복귀를 의해서 힘을 써 실현. 히로타다가 죽은 이후 히로타다의 아들인 이에야스[家康]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보호를 받을 때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오카자키 행정관[岡崎奉行人] 중 한명으로 오카자키 주변을 다스리다 죽습니다(생몰년 불명[각주:5]).

아베 오오쿠라는 주군을 죽인 대역무도의 핏줄이라며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그의 측실이 아베 오오쿠라의 씨를 임신한 채로 시나노[信濃]에서 미카와에 와 있던 이노우에 키요무네[井上 清宗]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후에 이노우에 키요히데[井上 清秀]라는 사람이 되며, 키요히데의 자식들은 대대로 에도 막부의 요직에 취하여 후다이[普代] 명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는 清洲,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는 清須 [본문으로]
  2.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 織田喜六郎殿御生害の事. [본문으로]
  3.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오와리∙오다 일족[尾張∙織田一族]”(新人物往来社),p82 [본문으로]
  4. 사족으로 이곳은 노부나가가 어렸을 적에 공부한 절이라고 함. [본문으로]
  5. 위키에는 1549년 죽었다고 하나 1553년에도 오카자키 행정관 중 하나인 사카이 키요히데[酒井 清秀]와 함께 미카와 절들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기에 1549년 사망설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번역 중인 센고쿠 무장 100에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이 다 등장했군요.
그걸 기념하여, macho를 그리라면 동양권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은 북두의 권 작가 하라 테츠오(wiki_jp)[原 哲夫]의 센고쿠 바이올렌스 만화 '꽃의 케이지(wiki_jp)[花の慶次]'에 등장하는 토쿠가와 사천왕입죠.


왼쪽부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순 입니다.

장면 설명을 좀 하자면 '혼노우 지의 변[本能寺の変]' 후 이에야스 일행이 '이가 도피행[伊賀越え]' 중 지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찌질대면서 배를 가르려 하자 안타까워 하는 사천왕 들입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사카이 가문[酒井家]은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혈연관계인 명문가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7~8대 전의 일이다. ‘토쿠아미[徳阿弥]’라는 이름의
행각승(行脚僧)이 미카와[三河] 서쪽 사카이 향[坂井鄕]에 흘러 들어와 마을 촌장[庄屋]의 신세를 지다 어느덧 그 집의 사위가 되어 아이를 만들었다. 이 아이가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각주:1].

 이 토쿠아미가 사카이 향을 떠나, 이번엔 역시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 촌장[庄屋]의 사위가 되어 역시 아이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조상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사카이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후에 토쿠가와 가문)은 밀접한 관계였다. 타다츠구의 부인도 이에야스의 숙모[각주:2]이다.

 토쿠가와 가문 후다이[譜代] 중에서도 최상급의 문벌이었다. 타다츠구 역시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부터 가로(家老)의 지위로 내정을 총괄하고, 전투에 나서면 선봉을 담당하는 등 중책을 맡았다.

 1564년. 이에야스는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를 평정하며 동부 미카와로 진출,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중요거점 요시다 성[吉田城]을 함락시켰다. 타다츠구의 노력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타다츠구는 이 공으로 인해 미카와 동부의 지배를 일임 받으며 요시다 성주가 되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중에서는 처음으로 성주에 임명된 것이다[각주:4]
.

 1567년에 행해진 가신단 편성을 보아도, 타다츠구는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와 더불어 '선봉군 대장[惣先手侍大将]'이라는 지위[각주:5]로, '이에야스 직속군 선봉대장[旗本先手侍大将]'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기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보다 상위에 있었다.[각주:6]

 그랬던 것이 –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지위가 역전되었다. 타다츠구는 이 시기 이미 은거하여 가독(家督)을 아들인 이에츠구[家次]에게 물려준 상태였지만, 사카이 가문은 시모우사[下総] 우스이[臼井]에 3만석밖에 하사 받지 못했던 것이다. 타다츠구보다도 아래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는 12만석.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각각 10만석에 봉해졌다. 타다츠구는 참을 수 없었다. 명문가인 사카이 가문이 신참인 이이 가문[井伊家]보다 아래에 놓인 것이다. 타다츠구는 마음을 정하고 이에야스를 만나 자기 자식 이에츠구에게 가증(加增)을 부탁하였다.
 “너도 니 자식이 소중한가?”
 뜬금없는 이에야스의 말이었다. 처음에 타다츠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들자, 이에야스는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타다츠구는 그제서야 그 뜻을 알았다.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1579년.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에 따라 살해 당한 사건을 말이다. 그때 노부나가에게 그 둘의 살해를 직접 명령 받은 것이 다름아닌 이 타다츠구였던 것이다. 어째서 노부나가에게 노부야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조명(助命)을 탄원하지 않았던 것인가? – 이에야스는 그 통한을… 여태껏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츠구는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 사카이 타다츠구에게는 의외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새우잡기[海老すくい]'라는 춤을 추게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싸운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전날 밤. 토쿠가와 진영의 사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죽어 현재 없다고는 하여도, 상대는 이름 높은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이었다. 너무도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무언가 떠올려 타다츠구를 불렀다.
 “’새우잡기 춤’을 추어 주지 않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타다츠구의 춤이 시작되자 그 절묘한 손동작, 몸동작에 모두 순식간에 빠져들어, 그 자리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걸로 코우슈우의 병사들에 대한 공포심은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칸토우[関東]의 패자(覇者)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의 주연(酒宴)에서도 이것을 추어, 너무나도 뛰어남에 우지마사는 사다무네[貞宗]의 명도(名刀)를 타다츠구에게 주었다 한다.

[사카이 다다쓰구(酒井 忠次)]
1527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에몬노죠우 타다치카[左衛門尉 忠親]’.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각주:7]] 중 한 명. 1586년 히데요시[秀吉]에게 재경료(在京料[각주:8]) 천석을 얻고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취임. 1588년에 은거, 1596년에 죽었다.

  1. 이때 아들을 둘 낳아, 첫째의 가문이 대대로 사에몬노죠우[左衛門尉]를 관도명(官途名)으로 하였기에 ‘사에몬노죠 가문[左衛門尉家]’이라고 하였으며, 둘째의 가문은 우타노카미[雅楽頭]를 관도명으로 하였기에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라고 한다. 타다츠구는 '사에몬노죠 가문' 출신. [본문으로]
  2. 이에야스의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로, 이에야스의 부친 히로타다[広忠]의 배다른 여동생.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4. 정확히는 사카이 가문 중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 출신인 사카이 마사치카[酒井 正親]가 1561년 니시오 성[西尾城]의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이 첫 번째. 타다츠구가 요시다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은 1564년. [본문으로]
  5. 미카와[三河]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의 이시카와 카즈마사, 동부의 사카이 타다츠구가 각각 휘하에 속하는 마츠다이라 일족, 호족 등을 통솔하였다. [본문으로]
  6. 한국 국군의 편제로 비교하자면, 타다츠구는 군단장, 타다카츠나 야스마사는 대대장급. [본문으로]
  7.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 네 명을 일컬음.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에 머물면서 생활하라고 주는 땅. [본문으로]
  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