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가루 타메노부[
津軽 為信]는 난부 씨[南部氏]의 밑에 있다가 반항하며 독립하였기에, 후세에 이르러서도 히로사키 번[弘前藩]과 난부 모리오카 번[南部 盛岡藩]이 있던 곳의 사람들끼리는 지역감정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가서 볼 수 있는 곳의 살색이 히로사키 번, 그 오른 편 밝은 자주색이 난부 모리오카 번(링크)

 난부 측이 말하길,
 "츠가루의 선조 타메노부[
為信]는 원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의 부하인 주제에 모반을 일으켜 츠가루 지역을 훔친 것이며, 운 좋게 재빨리 당시의 천하인(天下人)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영토를 인정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백성, 아이,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츠가루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는 것이 번[
]의 풍습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츠가루 측의 반론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화려한 족보이다.
 "츠가루 씨의 선조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藤原 鎌足][각주: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자손 사다이진[左大臣] 우오나[魚名][각주:2]의 13대 후손 히데히사[秀久]가 부친인 친쥬후쇼우군[鎮守府将軍][각주:3] 모토히라[基衡][각주:4]의 명령에 의해 이루마 군[入澗郡] 토사 성[十三城[각주:5]]에 있으면서 츠가루 6개군(郡)을 영유하였다. 이 히데히사의 자손이 바로 후리와라노 타메노부[藤原 為信]인 것이다"

 또한 다섯 셋케[摂家][각주:6]의 필두 코노에 가문[近衛家]과도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다고도 한다.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가 츠가루에 왔을 때, 모리노부[盛信]의 딸과 인연을 맺어 낳게 한 것이 타메노부의 조부[祖父]인 마사노부[政信]라고 한다. 이 인연으로 인해 타메노부는 후에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양자가 되었으며, 사키히사의 아들 노부타다[信尹]에게서 모란꽃의 문장[각주:7]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이런 화려한 족보를 내세우며 츠가루는 원래부터 선조의 땅이었기에 그것을 되찾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렇기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8]가 편찬한 '한칸후[藩翰譜]'[각주:9]에 '우쿄우다이부[右京大夫] 후지와라노 타메노부는 대대로 난부 가문의 가신으로 츠가루 지역에 살았다' 고 적혀있는 것에 대해서도 츠가루 번은 이의를 제기했다.

 이런 난부-츠가루간 지역감정의 뿌리는 14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메노부의 선조 오오우라 미츠노부[大浦 光信]부터 3대 위가 전부 난부 씨의 모살 당해 살해되었다. 죽을 때도 미츠노부는 사무친 복수심으로, "갑옷으로 몸을 두르고, 큰 칼과 작은 칼 두 자루와 함께 난부 령을 향해서 묻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츠노부의 유지(
有志)는 대대로 이어져 후손인 타메노부에 이르러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타메노부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대대적인 예행연습을 행했다. 이와키 산[岩木山]의 산록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횃불로 민가를 불태우며, 실탄을 발사하는 식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이었다.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생각한 타메노부는 쿠노헤[]와의 험악한 분위기로 인한 난부 가문이 혼란스런 틈을 타 불시에 반기를 들어 우선 노부나오의 친아비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거성 이시카와 성[石川城]을 공략[각주:10]. 이어서 와토쿠 성[], 다이코우지 성[大光寺城]을 점령해 갔다.

 1590년 3월. 타메노부는 난부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던 나미오카 씨[浪岡氏]를 급습하여 나미오카 씨의 영토를 손안에 넣었다.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가 탈환하기 위해서 쿠노헤 마사자네[ ] 이하 십 여명의 부장[部將]들에게 출진을 명했지만 모두 출진을 거부하였다.

 타메노부는 민첩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즈음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참진(參陣)하라는 명령을 받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근신 18명만을 이끌고 오다와라[小田原]로 달려가 히데요시에게서 영토를 인정받는 문서를 받아냈다. 항쟁중인 현실이 어떻건 당장 히데요시에게서 공인을 받아 내자, 난부 씨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 타메노부의 용모에 대해서 사서(史書)는, 턱수염이 길어 가슴까지 흘러내렸기에 사람들은 타메노부를 '수염공(どの)'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민정가로서도 뛰어나 영내 개척에 온 힘을 다했으며, 옻나무 재배 등 산업개발에도 힘썼다고 전해지다.

[쓰가루 다메노부]
1550년생. 오오우라 타메노리[
大浦 ]의 양자. 1590년 히데요시에게서 무츠[] 츠가루[] 3만석을 인정 받았고 후에 4만5천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동군에 섰다. 1607년 12월 죽다. 58세.

  1. 후지와라 씨의 시조(始祖) [본문으로]
  2. 여제(女帝)인 코우켄 텐노우[孝謙天皇]의 병을 고치며 승승장구 출세한 괴승 도우쿄우[道鏡]를 코우켄 텐노우 사후 쫓아냈다. 여담으로 야사에 따르면 도우쿄우는 코우켄 텐노우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도우쿄우의 거시기는 무릎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 율령제 시대에 일본 북방 오랑캐[蝦夷]를 대비하려고 만든 주둔군 사령관. [본문으로]
  4.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와 관련 깊은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 秀衡]의 부친. 참고로 히데히라는 친쥬후쇼우군에 임관되었지만 그의 부친 즉 모토히라는 친쥬후쇼우군이 아니다. [본문으로]
  5. 링크된 곳은 쥬우산고 호수[十三湖]이지만 성은 그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섭정[攝政], 칸파쿠[関白]에 임명 받을 수 있는 다섯 가문. 즉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条), 니죠우(二条), 이치죠우(一条)를 말한다. [본문으로]
  7.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코노에 가문의 문장. [본문으로]
  8.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9.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에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10. 이때 깡패들을 고용하여 이시카와 성 밑 마을에서 농성군 가족들을 약탈, 살해, 강간 등을 지시해서 농성군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로써도 캐막장적으로 행했는지, 타메노부의 측근 누마타 스케미츠[沼田 祐光]는 '다음부턴 절대 이러지 마슈'라고 한마디 했을 정도며, 후에 타메노부가 히로사키 성[弘前城]을 축성할 때는 자신들이 그렇게 당하지 않으려고 여성들이 피할 수 있는 곳을 특별히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야마우치 가즈토요[ 一豊]

1605 9 20일 병사(病死) 61.

 

1546 ~ 160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の戦い] 등을 경험하였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휘하에서 토오토우미[遠江] 카케가와[掛川] 성주(城主)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토사[土佐] 일국을 하사 받아, 토사 번[土佐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즈토요에게 말을 살 수 있는 돈을 건 낸 부인과의 일화가 유명.

 

 

 




세키가하라[ヶ原]와 카즈토요

 

 [쌈짓돈]으로 남편에게 명마(名馬)를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그 명마 덕분에 전공을 세워 출세한 일화가 유명해져 내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부인 치요[千代 와카미야 토모오키[若宮 友興]의 딸, 후의 켄쇼우인[見性院]].

 그런 현모양처가 이목을 끌기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장이 아니라 여겨지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이지만, 수많은 전공을 세워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가로(家老)에 임명되었으며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평정된 다음에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지(要地)인 카케가와 성[掛川] 5만석이 주어졌다.

 

 그렇게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받은 카즈토요였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이에야스[家康]에게 접근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 비축한 식량뿐만 아니라 아예 카케가와 성을 동군에게 통채로 바쳤다.[각주:1] 이것을 계기로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도 앞다투어 성을 받쳤다고 한다. 더구나 조카인 마사토요[政豊]를 오다와라에 인질로 입성시키고는 출진하였다.

 이런 카즈토요의 행동에는 처 치요의 조언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치요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동향과 여러 다이묘우[大名]부인이나 자녀의 정세 등을 기록한 밀서를 남편에게 보내면서, 밀서를 전하는 전령의 입을 통해서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토사[土佐]의 태수(太守)

 

 세키가하라[ヶ原]에서의 전공으로 토사[土佐] 20만석으로 가증(加增)된 카즈토요는 1601년 우라토[浦戸]에 입성했다.

 카즈토요는 영국(領國) 통치의 상징으로써 같은 해 10월에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 - 후에 코우치 성[高知城]]으로 개명 - 의 축성과 성 밑 마을[城下町]의 경영에 착수했다. 이 배경에는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 체제를 불식(拂拭)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쵸우소카베 유신(遺臣)의 습격을 경계해가면서 축성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각주:2]. 한편 이 축성과 성 밑 마을 경영은 야마우치 가문을 결속시켜 가신단 편성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코우치 성이 굉장히 실전적인 성곽인 것을 보면 카즈토요는 쵸우소카베 유신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카즈토요는 우라토 반란[浦戸 一揆][각주:3]나 타키야마 반란[一揆]의 평정에 고심했다.

 

 1603 3 25일.

 종사위하(四位下) 토사노카미[土佐守]가 되었지만 영내(領內)에는 여전히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11월에는 타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 左馬助] 등이 타키야마 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타키야마 잇키이다. 야마우치 나이키[ 記], 야마우치 카몬[ 掃部]을 파견하여 이를 간신히 처리했다.

 

 카즈토요는 성 밑 마을의 건설과 함께 도로의 정비, 중신(重臣)을 각지에 배치한 지배 체제의 강화, 검지([각주:4]), 인구 조사 등 농촌 지배, 법제의 시행 등 영국 지배의 확립에 정력을 쏟았다.

 1601년에는 가신의 적극적인 등용, 지배의 조직화를 꾀함과 동시에 영내(領內)순시하며 지형(地形), 풍토, 사람, 산업 등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힘썼다.

 

카즈토요의 후계자

 

 카즈토요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로 동생 야스토요[康豊]의 아들 즉 카즈토요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니마츠[松]를 양자로 삼았다. 쿠니마츠는 1605 5월에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를 알현했을 때 '타다[]'라는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타다요시[忠義]라 개명했다.[각주:5]

 

 그 이전인 4 17일.

 쿠니마츠(후의 타다요시)가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에야스의 양녀 쿠마히메[이에야스의 이부제(異父弟)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 定勝]의 둘째 딸)와의 혼약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안타깝게도 카즈토요가 죽은 뒤인 1606 4 17일에 행해졌지만 타다요시는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서임되어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관된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인척 관계를 맺는 것에 성공한 카즈토요는 야마우치 가문[山内家]의 장래를 걱정했던 만큼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안심하여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5개월 뒤인 1605 4 20(21일이라는 설도 있다) 죽었다. 향년 61(60세라는 설도 있음).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지주막하출혈의 가능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즈토요의 처가 쌈짓돈을 주어서 명마를 사게 했다는 내조의 공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야마우치 가문 사료 카즈토요공 기록(山内家史料一豊公記)]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당시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인지 어떤지 판단할 순 없지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6]]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7]], 무로 큐우소우[室 鳩巣[각주:8]]가 쓴 [큐우소우 소설(鳩巣小說)], 유아사 죠우잔[ 常山] [죠우산 기담(常山紀談)] 등에는 기록되어 있기에 에도 시대 중기 즈음에는 이 이야기가 유명했을 것이다.

  1.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항상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카게무샤[影武者]와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즈토요가 토사[土佐]로 입국하기 전에 토사[土佐]의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들이 우라토 성의 개성을 거부. 개성 조건으로 그때까지의 주군인 모리치카[盛親]에게 토사[土佐] 반국(半国)의 할양을 요구하다 몰살된 사건. [본문으로]
  4.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5. 상기에 세키가하라 때 인질로 받쳐진 마사토요(政豊)의 형이다. [본문으로]
  6.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7.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 번주[甲府藩主]로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 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8.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 8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브레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