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우토(京都) 토우지(等持)원(院)에 현존하는 요시아키의 목상(木像)을 보면, 얼굴 아래쪽이 통통한 얼굴로 코가 크며 눈썹이 수려하고 콧수염이 아래로 쳐진 전형적인 귀족의 용모이다.


 진위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일으킨 [혼노우(本能)()의 변]의 흑막은 요시아키라는 것이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추방되어 빙고(備後) 토모노우라()로 망명해 있던 요시아키가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미츠히데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신을 쇼우군으로 만들고 추방했던 노부나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요시아키의 노부나가에 대한 증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쇼우군이 되었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1569 4월에 요시아키의 새로운 거처 니죠우() 저택이 완성되어 그곳에 그 저택을 만들어 준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로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돌아갈 때가 되자 문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하고 노부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 이치죠우()원(院)의 몬제키(門跡[각주:1])가 되어 카쿠케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불문의 생활이 - 요시테루(義輝=13대 쇼우군)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마츠나가(松永) 무리에게 살해당하자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카쿠케이는 미요시-마츠나가 무리를 피하여 오우미(近江)의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 칸논지(音寺)성(城)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와카사()의 타케다 요시무네(武田 義統[각주:2]) 등을 의지하여 방랑하다가 에치젠(越前)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에게 갔을 때 겨우 안정을 되찾아, 여기서 환속(還俗)하여 요시아키()’라는 이름이 되었고, 곧이어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요시아키의 운명은 노부나가로 인해 크게 비약한다. 1568 7, 둘은 기후의 릿쇼우(立政)사(寺)에서 회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쇼우군으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였다.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상락(上洛)하여 미요시 세력을 쫓아버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를 항복시켰다.


 드디어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에 임명된 것이다. 여러 지역을 유랑한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요시아키는 이 때 노부나가에게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인 [오동나무(桐)[각주:3]] [니히키료우(二引)[각주:4]]의 사용을 허락하였고, [아빠 오다 단죠우노죠우님(御父織田忠殿)[각주:5]]라는 명칭으로 쓴 직접 쓴 표창장()까지 보내었다. 얼마나 그의 기쁨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다. 다음 해(1569) 정월에 미요시 일당이 쇼우군의 거처인 혼코쿠()사(寺)를 습격하자 노부나가는 기후에서부터 눈 속을 삼일 만에 주파하여 미요시 군세를 쫓아낸 것이었다.

 거기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서 니죠우()에 새로이 쇼우군 저택을 만들어 주었다. 손수 공사의 감독관이 되어 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불과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우군과 노부나가의 좋은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우군이란 노부나가의 괴뢰(傀儡) 실권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시아키는 실권을 가지고 싶었다. 은밀히 에치젠의 아사쿠라(朝倉)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했다. 1570년 정월, 상경한 노부나가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강한 태도로 나왔다. [전중 법도(殿中御掟)]를 정하여 쇼우군이 다른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노부나가가 쓴 편지도 첨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걸로 쇼우군의 정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되었다. 쇼우군이라는 것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바야흐로 요시아키의 물밑 공작은 점점 심해졌다. 노부나가의 제약이 반대로 반발로 작용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다이묘우들에게 보내는 노부나가 타도의 밀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교전하며,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도 요시아키가 배후에서 선동한 것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아키의 적대적 행동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노부나가는 신겐이 서상(西上)하기 직전인 1571 9, 요시아키에게 17개조에 이르는 강경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 여러 지역에 밀서를 내려서는, 말() 같은 것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들(노부나가)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며 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쿄우() 전체가 시끄럽다. 이렇게 니죠우()의 저택이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가?
  • 노부나가와 친한 사람은 여관(女官)들마저도 잔인한 처벌을 하고 있다.
  • 소송을 노부나가가 청해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 다른 지역에서의 헌상품을 감추거나 쌀을 팔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 하시는 것인가?

 요시아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찌르는 힐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요시아키의 책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러한 쇼우군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진 중신(重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는 결국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의 신하로 들어간다.


 1573 2.

 요시아키는 결국 깃발을 선명히 하여 노부나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 타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토쿠가와()-오다(織田) 연합군을 대패시킨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타케다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로 노부나가를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를 잃고 있었다. 요시카가가 이미 포위 작전을 내팽개치고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때 (西) 오우미(近江)이시야마(石山)에서 잇코우 종도(一向宗徒)들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예전 형 요시테루(義輝)를 죽인 미요시, 마츠나가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적은 아니었다.

 7.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성(城)에서 농성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았지만 버티질 못하고 당시 2살의 아들 요시히로(義尋)를 인질로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15대가 이어졌던 아시카가 바쿠후(幕府)는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년 요시하루(義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외숙부 전() 칸파쿠(関白)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가 되어 나라(奈良) 이치죠우(一条)() 몬제키(門跡) 카쿠케이(覚慶)라는 이름으로 불문에 있었지만,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라 하고, 후에 요시아키(義昭)로 고친다. 처음엔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였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어 제15대 아시카가 쇼우군이 된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지자 쫓겨나 빙고(備後)로 도망쳤다. 머리를 깎고 쇼우잔 도우큐우(昌山 道休)라는 호를 칭하였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보호를 받으며 1만석을 하사 받는다. 1597년 죽다. 61.

  1. 몬제키는 황족이나 고급 쿠교우(公卿)가 잇는 절을 말하며, 이치죠우 원(院)은 코노에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곳으로 외숙부인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로 들어갔다. [본문으로]
  2. ‘요시즈미’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3. 이것은 원래 황실의 것으로 쇼우군 가문이 하사 받은 것을 다시 노부나가에게 허용한 것. [본문으로]
  4. 후타츠히키(二つ引)’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사족으로 노부나가는 1534년생, 요시아키 1537년생. 세 살차이. [본문으로]

오다 노부나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2. 10. 08:14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다키가와 가즈마스(川 一)

1586 9 9 병사 62.

1525 ~ 1586.

오우미(近江) 코우가(甲賀)영주(小領主)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重臣)으로 출세. 이세(伊勢) 평정, 타케다(武田) 공략, 칸토우() 공략에서 전공을세워 칸토우 칸레이(管領)에 임명받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는 삽질을 연속. 히데요시(秀吉)에게 항복하여 실의(失意)속에서 방랑하다 병으로 죽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오다 군단의 군단장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를 평정했을 즈음부터 노부나가를 섬겨 오대군단장(五大軍團長)[각주:1]의 한 사람으로까지 승진했다. 철포와 군략에 뛰어나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함께 [정치는 이 네 사람의 손 안에 있다[각주:2]]고 평해졌으며, 뛰어난 지휘로 [나아가는 것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라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노부나가가 1582년 쿄우토(京都)의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죽음을 당한 후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코우즈케(上野)에 있었던 것도 있어 시도한 것이 전부 실패.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도 라이벌인 히데요시에게 뒤쳐져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


 코우가(甲賀) 닌쟈(忍者)의 마을 -오우미(近江) 코우가 군() 오오하라(大原) ()의 호족으로 타키()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오우미 겐지(源氏) 사사키() 롯카쿠 가문(六角)과도 친하였고 노부나가의 유모의 아들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와는 사촌지간[각주:3].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와는 고향의 친구 사이였다.


 1558 34세의 봄.

 사사로운 일로 숙부를 말다툼 끝에 죽이고 방랑을 떠났다.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하지만 사카이()에서 신병기인 철포를 배웠고 각지에서 축성 공사에 참가. 군략(軍略)도 배웠다고 한다.몇 년이 흘러 츠네오키나 시바타 카츠이에의 추천으로 노부나가를 섬기면서부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1567년.

 44살에는 노부나가군의 이세(伊勢) 평정의 선봉을 맡아 오와리(尾張)의 카니에(蟹江) 성주에 임명되었다.

 나가시마(長島) 문도(門徒) 토벌시에는 코우가 닌쟈(忍者)와 시마(志摩)의 수군을 이용하여 방화, 살육을 감행. 특유의 조략공작(調略工作)으로 북() 이세의 강력한 호족 48개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노부나가 군단에 편입시켰다.

 세 살 연상인 카츠이에에게 [철포의 달인]이라 상찬() 받았으며, 아홉 살 연하인 노부나가에게 신뢰받았다. 특히 3년에 걸친 이세 평정에서는 호소노 후지아츠(細野 藤敦)의 아노우즈(安濃津),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오가와치(大河內)성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공격뿐만 아니라 북부 이세의 칸베(神戶)씨에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信孝)를, 중부 이세의 쿠도우 나가노(工藤 長野)씨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 또한 남부 이세의 키타바타케씨에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각각 양자로 들여 보내는 교섭을 성공시켰고, 그들에게 가문을 상속시켜 각 가문의 정예 가신단을 단번에 노부나가 군단에 편입시키는 뛰어난 공적을 거두었다.


 1582 3월.

 노부나가의 코우슈우(甲州) 원정의 선봉을 맡아, 코우슈우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킨 후 [칸토우 칸레이(管領)]에 임명받아 코우즈케(上野)()시나노(信濃)의 2()을 받아 마야바시(厩橋)성에 본진을 두었다.

 당시 58.

 늙었으며 더구나 중앙에서 먼 칸토우에서의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비겁자가 되어 버린 후반생과 말로


 노부나가의 죽으면서 카즈마스의 운도 끝이 난다. 말년은 반대로 좌절과 패배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게된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반전]을 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토벌한 즈음에 코우즈케(上野)에서 [노부나가 죽다]라는 소식에 난폭해진 칸토우의 호족들과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 세력, 카이의 타케다 잔당,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세력에 둘러 쌓여 사면초가.

 소수의 부하로 혈로를 뚫고 겨우 오와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노부나가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淸州) 회의가 전부 히데요시의 바램대로 끝나 형님 격인 카츠이에도 에치젠(越前) 키타노쇼(北ノ庄)로 돌아갔었다.


 카즈마스는 지금 가진 자신의 실력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카츠이에에게 호응하여 1583 이세 나가시마성에서 히데요시 토벌의 병사를 일으키지만 병사가 모이지 않아 분루를 삼키며 항복했다. 카츠이에도 북 오우미(近江)의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北ノ庄)성에서 자살하였다.


 다음 해인 1584.

 이번에는 히데요시에게 속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합전에 참전하여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을 공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추태를 부리게 된다.

 한 때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오와리 카니에성에서 농성하는 마에다 타네토시(前田 種利)를 설득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인 후 입성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에야스에게 타네토시를 받쳐 할복시키고 자신은 목숨을 건졌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제 목숨만 귀한 추태]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받아 출가하여 깨평[각주:4]으로 에치젠 오오노(大野)에 은거료를 받지만, 이미 늙은 몸에 [공적이 없음을 창피해 하며] 반환하고 다시 방랑의 길로 떠났다. 몇 개의기록에는 [에치젠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고 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불명. 단지 오오노(大野)시의 호우쿄우(宝慶)()에 고문서가 내려져 와 1586년 9월 9 병사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를 이름 [본문으로]
  2. 政道四人の手にあり[老人雑話] [본문으로]
  3. 부친끼리 형제이나 츠네오키의 성이 다른 이유는 츠네오키의 부친 츠네토시(恒利)가 이케타 가문의 딸(노부나가의 유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과 결혼하면서 데릴사위가 되어 이케다 성을 계승했기 때문. [본문으로]
  4. 보통 捨扶持..라고 한다. [본문으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1581 6 2 객사(客死) 42

1541 ~ 1582.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친류중(親類衆[각주:1])필두로써, 타케다 가문(武田家)내에서도 발언권이 강했다. 타케다씨가 멸망할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항복하여 타케다씨 친족중에선 유일하게 살아 남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나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에서 토민에게 살해당했다.










배신의 배경


 어느새 이 인물의 마음에는 암암리에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결별할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 주가(主家)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는 것 이외에 카이 겐지(甲斐 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의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배신], [배반]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품은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라는 인물이 원래부터 주가(主家) 타케다 씨에 대한 충성심이 적었냐 하면 반대였다.


 바이세츠는 타케다 일문(一門)의 필두격으로 카이(甲斐) 남부의 후지가와(富士川) 천 유역에 펼쳐진 카와치(河內)령을 지배했던 아나야마 노부토모(穴山 信友)의 장남이었다.

 부친 노부토모의 부인이자, 바이세츠의 어머니인 난쇼우인(松院)은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 신겐의 부친)의 둘째 딸로, 노부토모는 자신을 [타케다 이즈노카미 노부토모(武田 伊豆守 信友)]라고 자칭할 정도로 타케다 일문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노부토모의 적남(嫡男)인 바이세츠는 아명을 카츠치요(勝千代), 성인식(元服)을 치른 후에는 노부키미(信君)라 했으며 후에 신겐(信玄)의 딸인 켄쇼우인(見性院)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기에 신겐은 외숙부이면서 장인이므로 혈통상으로도 아주 가까웠다. 당연히 부친 노부토모처럼 타케다 일문 필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1562년.

 약관 21세로 망부(亡父)의 뒤를 이은 바이세츠는 이후 신겐의 측근으로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를 시작으로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각주:2]에 출진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겐이 병으로 죽고서 카이슈고쇼쿠(甲斐守護職)를 시로우 카츠요리(四郞勝頼)가 상속한 후에도 젊은 카츠요리의 후견인격이 되어 타케다가()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1575 5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長篠)합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했을 때 역전(歷戰)의 중신과 여러 무장들이 계속해서 죽는 것에 흥분한 카츠요리가 여기서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말의 엉덩이를 때려 철퇴시킨 것도 후견인이라는 것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배반의 대가


 패전 후.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스루가(駿河)의 에지리(江尻)성을 지키며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침공에 대비했다. 최전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에지리(江尻)의 성장(城將)이 된 것이 바이세츠의 운명을 크게 변화시킬 줄은 카츠요리도 그리고 바이세츠 본인도 예상못했다.


 1579 9월.

 토쿠가와군()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 이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타케다군()에게서 탈취한 상태였으므로 그 다음이 카이(甲斐)가 될 것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노부키미가 중이 되어 [바이세츠사이후하쿠(梅雪斎不白)]라 칭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탄생으로 40세가 된 그가 타케다가()의 장래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증거이기도 했다.


 1581년.

 오다(織田)()의 침공에 대비하여 카츠요리(勝頼)가 신푸(新府)성을 축성했을 때에도 바이세츠는 일문(一門) 필두로써 거액의 건설자금을 기부하였기에 아직 이 시점까지는 여전히 후견인으로서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해 1582년 다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이 카이 공략을 개시하자,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의 운명에 내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카츠요리와 결별을 결의.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그는 카츠요리보다도 타케다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 자부하는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 - 카츠요리를 대신할 명문 타케다가()의 총수로 삼아 명문 타케다의 이름을 존속시키려 한 것이다.

 바이세츠는 우선 코우후(甲府)에 인질로 가 있던 처와 자식을 시노비노모노(忍の者 = 닌쟈)를 이용하여 탈출시킨 후 이에야스에게 에지리 성을 넘겼다. 이 부분을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아나야마 겐바(穴山 玄蕃) 카이(甲斐)()부츄우(府中)에 인질로 두고 있던 처자식을 2 25일 비오는 밤을 틈타 빼내어]로 기록하고 있다.

 카츠요리는 [바이세츠 배반]을 알게 되자 오다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나노(信濃)에서 신푸(新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지만 믿고 있던 중신(重臣)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도 배반당하여 텐모쿠(天目)산에서 자살한다.


 한편 토쿠가와군()을 길안내하며 후지가와 천을 거슬러 올라 코우후(甲府)로 침공한 바이세츠는 노부나가(信長)에게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를 타케다 가의 후계자로 허락 받는 등,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함께 아즈치(安土)성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에게 환대 받고 돌아가던 중에 구경하러 들린 사카이()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혼노우지(本能寺)의 변(]이 일어난다.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국 우치다하라(宇治田原)부근에서 야도(野盜)에게 습격 받아 죽임을 당했다. 향년 42.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배반자의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1. 일족 친척들을 지칭함.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공포로 몰아넣어 똥을 지리게 했다는 전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