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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라고 하면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야기꾼들의 무용담(講談)은 물론 교과서에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산 끝에 걸린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을 주소서"
 라고 비는 장면이다. 주군 가문의 부활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2차대전 이전 충군애국을 위한 정신교육에 딱 알맞은 소재였던 것이다.
 그의 인생드라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주군인 아마고 가문[尼子家] 부활을 위해서 싸우는 – 그 집요한 게릴라 활동에 있을 것이다.

 시카노스케의 무용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여 순례자의 모습으로 여러 지역을 유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오우미[近江]의
반바쥬쿠[番場宿]라는 곳에서 어느 노승의 친절로 암자에서 머물게 되었다. 2~3일 지났을 즈음 십여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들어와서는 식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기에 식사만 하고 얌전히 돌아갈 듯한 쌍판이 아니었다. 시카노스케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어서 꺼지지 못할까!"하고 소리치자 무사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 날 밤. 그 무사들이 습격해왔다. 그들은 산적, 도적들이었던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재빨리 노승과 동자승을 숨기고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는 함정에 빠뜨리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는 창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 사람씩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별 어려움 없이 14명의 도적을 잡았지만, 노승의 말을 듣고 생명을 살려주자 두목 같은 남자가,
 "제가 도둑질하기 백여 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길 칠십여 번에 이르지만 이렇게 당한 적은 처음이외다"
 고 말하며 적어도 존명이라도 말해달라 하였다 한다.

 시카노스케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오른 것은 1566년 아마고 씨[尼子氏] 멸망부터였다. 한때 츄우고쿠[中国] 11개 쿠니[国]의 영토를 가지고 패권을 세웠던 아마고 씨도, 신흥 세력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군에게 패하여 멸망해 버린 것이다. 한때는 이 모우리 씨[毛利氏]도 아마고 가문의 휘하였다.
 이 1566년에 아마고의 본거지 이즈모[出雲]
토다 성[富田城]이 함락당하자 당주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와 그 동생 토모히사[倫久], 히데히사[秀久] 세 명은 포로의 몸이 되어 모우리의 근거지 아키[安芸]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나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 등의 활약이 시작된다. 은밀히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토우후쿠 사[東福寺]를 방문하였다. 거기에는 중이 되어 있는 아마고의 혈통이 있었다. 최후의 당주 요시히사의 부친 하루히사[晴久]의 숙부[각주:1]의 아들이었다. 시카노스케들은 그를 환속시켜 '아마고 마고시로우 카츠히사[尼子 孫四勝久]'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카츠히사를 대장으로 옹립한 일당 200여명은 타지마[但馬]로 내려가 해적 나사 니혼노스케[奈佐 日本之助]의 배로 오키[岐]로 건너가 이곳의 사사키 타메키요[佐為清]의 협력으로 대망의 옛 영토 이즈모[出雲]의 흙을 밟게 된 것이다. 옛 주인의 입국에 이즈모는 들끓었다. 각지에 숨어있던 아마고 낭인 3000여명이 곧바로 달려와 그들의 세력은 1개월 안에 이즈모의 반을 석권하였다. 이와미[石見], 호우키[伯耆]에서도 줄을 대는 자가 속출했다. 본거지 토다 성을 되찾으면 옛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할 수가 있었다.
 그 토다 성에도 모우리의 군사는 불과 300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아마고는 60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가 무너졌다. 토다 성의 수비장수 아마노 타카시게[天野 隆重]가 계략을 쓴 것이다.
 "깨끗하게 성을 넘기고 싶다. 그러나 한번도 싸우지 않고 넘기는 것은 무사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그러니 일전을 벌이는 척을 하고 넘기겠으니 군세를 이끌고 오시길"
 아마고 측은 이 사자(使者)의 편지로 기세 등등해졌다. 완전히 안심을 하고 2000의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활과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마고 측은 예상 못했던 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엔 성병 300이 밀고 내려와 아마고 측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1570년 모우리 가문의 이즈모 총공격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집요함을 볼 수 있다. 참수에 처해질 운명이었지만, 모우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여 목숨을 건졌다. 모우리를 위해서 시코쿠[四国] 정벌의 선봉을 자처까지 하였다. 그런 것들은 전부 살아남아 또다시 아마고 부활의 기회를 잡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화장실을 이용하여 모우리 진영에서 탈출하였다. 게릴라 활동가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숨기며 미마사카[美作]를 거쳐 쿄우토로 갔다.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혼간지[本願寺]와 손잡고 있는 모우리 측과 적대하고 있었다. 다시 쿄우토에 모인 시카노스케 일행의 아마고 잔당은 츄우고쿠 담당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휘하로 들어가 하리마[播磨]로 갔다. 타지마[但馬]의 코우즈키 성[上月城]를 함락시키자 히데요시는 아마고 카츠히사의 바램대로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따라 이즈모로 진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 믿는 아마고 일당은 피가 끓었다.

 바로 그때 모우리 측이 대군을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군세[각주:2]를 선봉으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군세가 몰려와 아마고 섬멸을 노린 것이다. 모우리 군세는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의지할 것은 히데요시의 원군이었다. 성안의 식량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탈주병도 계속 생겼다. 쿠마미가와 강[熊見川]을 사이에 두고 타카쿠라야마 산[高倉山]에 진을 친 히데요시 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우리 군세 2만이 유리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는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작전변경이 하달되었다. 코우즈키 성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아마고 일당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코우즈키 성은 모우리에게 항복하였다. 당주 카츠히사는 자결, 시카노스케 등 60여 명은 빗츄우[備中]로 보내졌다. 시카노스케는 도중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결국 빗츄우로 들어서는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시카노스케를 부하로 삼으려 했던 것 같지만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
輝元)의 뜻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
1545년생.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를 섬기며 미마사카[美作] 2만석에 봉해져 가로(家老)의 지위에 있었다. 아마고 멸망 후는 카츠히사[勝久]를 옹립하여 싸움을 거듭하였지만 1578년 7월 17일 살해당했다. 34세.

  1. 아마고 가문[尼子家] 최강의 전투집단이었던 신구우 당[新宮党]의 당수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 [본문으로]
  2. 나오이에는 병을 칭하여 동생 타다이에[忠家]를 대신 출진시켰다 [본문으로]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

1578 7 17모살(謀殺) 34


1545 ~ 1578.

보통 시카노스케[鹿之助]로 알려져 있다. 아마고 카츠히사[尼子 勝久[각주:1]]를 옹립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멸망 당한 주가(主家)의 부흥을 위해서 분투(奮鬪).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츄우고쿠[中国] 평정군(平定軍)을 따르며 하리마[播磨] 코우즈키 성[上月城]을 수비하지만,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공격을 받아 항복. 빗츄우[備中]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아마고 잔당(殘黨)의 성 


 157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모우리 씨()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하리마[播磨]로 출진하였다.

 하리마[播磨]의 코우즈키성()은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의 국경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히데요시는 이 성을 점령하여 이곳에 아마고 씨()의 잔당인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입성시켰다. 그 잔당의 맹주로 옹립되어 있던 사람은 쿄우토[京都]의 토우후쿠 사[東福寺]출가(出家)해 있던 아마고 카츠히사였다.


 코우즈키 성() 천연의 요해(要害)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듯한 성이 아니다. 지금 성터를 돌아 보아도 아무런 특징도 없이 산등성이가 이어진 낮은 산이다. 지키기에 어려운 성이다.

 모우리의 숙적이었던 아마고 군()을 모우리 진영에 대비하여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식적인 작전이었지만 얄궂기도 했다. 아마고 쪽의 장수 중의 하나인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는 이 성에 입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여기서 싸우는 것에 의욕을 보였다.


 다음 해 1578 4.

 모우리는 3만의 군세(軍勢)를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했다.

 유키모리 등이 의지하고 있던 히데요시 군() 이 때 오다 측을 배신한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를 공격하러 가 있있다.

 유키모리에게서 급보를 받자마자 히데요시는 미키 성() 공격을 중지하고,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와 함께 코우즈키 성() 동쪽 2킬로 지점인 타카쿠라 산[高倉山]()을 세웠다. 그러나 모우리 군()의 포위망은 두터워,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모우리쪽은 보급로를 끊어 성을 아사(餓死)시키는 작전을 세워서는 확실히 포위망을 좁혔기에 코우즈키성()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히데요시는 아마고의 구신(舊臣)인 카메이 코레노리[亀井 惟矩]를 성 안으로 잠입시켜,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돌파하여 빠져 나올 수는 없는가?”

 하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성 안의 쌀은 다 떨어지고 굶주림에 괴로워하고 있던 성병(城兵)의 전의(戰意)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는 서둘러 노부나가를 만나 전황(戰況)을 보고하며 코우즈키 성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코우즈키 성()을 포기하고, 미키 성() 공략에 집중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코우즈키 성()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로 돌아와서는 6 26, 타카쿠라 산()의 진을 치우고 철수했다.


아이(阿井) 나룻터의 참극(慘劇)


 유키모리 등의 아마고 잔당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모우리와 아마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코우자이 모토미치[香西 元通]도 함께 농성(籠城)하고 있었다. 유키모리는 모우리의 진영(陣營)에 사자를 보내어,

 이번 사건의 원흉은 코우자이 모토미치이니까, 모토미치의 배를 가르게 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

 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모우리 측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우선 맹주인 아마고 카츠히사의 할복(割腹)을 요구했다.


 유키모리는 8살 연하의 카츠히사에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 자살을 권했다.

 “무운이 다하여 이제는 여기까지 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함께 배를 갈라야만 합니다만 다년(多年)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조금 더 이 생명을 빌리고 싶습니다.”

 카츠히사는 이 대답을 듣고 답했다.

 “법의(法衣)를 두르고 이름도 없이 일생을 끝냈을 터인 몸이면서, 자네들의 충성으로 한 성()의 주인으로써 아마고의 깃발을 세워 싸울 수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후회나 원망은 없다. 아니, 후회라고 한다면 아마고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7 3.

 카츠히사는 시 한 수 남기고 죽음의 자리에 앉았다. 26세였다.

 카츠히사의 형 우지히사[氏久], 코우자이 모토미치도 성 안에서 배를 갈랐다.


 1578 7 5.

 코우즈키 성()은 항복하였고, 유키모리는 포로가 되어 빗츄우[備中] 마츠야마[松山]에 있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본진으로 호송되게 되었다. 그러나 킷카와 모토하루는 도중에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중신(重臣) 아마노 모토아키[天野 元明]의 가신(家臣)인 쿠리야 히코에몬[栗屋 彦右衛門], 야마카타 사부로베에[山県 三郎兵衛]의 감시를 받으며, 빗츄우[備中] 타카하시[高梁]에 흐르는 타카하시가와 강에 있는 아이(阿井)의 나룻터까지 왔다. 유키모리는 배를 기다리며 나룻터 한 구석에 있는 돌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키모리가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암살자는 베어왔다.

 순간 유키모리는 눈 앞의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암살자의 칼은 유키모리의 어깨에서 등까지 굉장히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암살자로 선택된 사람은 카와무라 신자에몬[河村 新左衛門]으로 카와무라도 따라 뛰어들어 물 속에서 유키모리와 뒤엉켰다. 후쿠마 히코에몬[福間 彦右衛門], 미카미 아와지노카미[三上 淡路守]도 카와무라를 돕기 위해 달려 들어 유키모리를 뒤에서 잡고 눌러서 죽였다.

 7 17.

 초추(初秋)는 이름뿐인 무더운 날이었다고 한다.

 34세의 생애(生涯)였다.

  1. 모살 된 신구우 당[新宮黨]의 두령(頭領)인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의 손자이며, 그의 아들 사네히사[誠久]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