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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장의말년과최후'에 해당되는 글 92건

  1. 2007.09.17 하치스카 이에마사 6
  2. 2007.09.15 킷카와 모토하루 6
  3. 2007.08.25 모우리 테루모토 - 은거 후 전심전력을 기울여 모우리[毛利] 안태에 힘쓰다. 6
  4. 2007.08.22 모우리 모토나리 2
  5. 2007.08.18 오오우치 요시타카 12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1636 12 30일 병사(病死) 81.

1559 ~ 1638.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각주: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각주: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이 더해져 25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条][각주: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 2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丸][각주:4]으로 옮겨 와,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각주:5]나 모노가시라[物頭][각주: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각주:7]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각주:8]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참근교대(交代)[각주:9] 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 12 23일.

 토쿠시마 성[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1.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3.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5.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6.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7.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8.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9.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86 11 5일 병사(病死) 57.

1530 ~ 1586.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상속하였다.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나 아마고 가문[尼子家] 평정 등에서 공을 세웠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1]]'이라 일컬어 졌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요청으로 큐우슈우[九州]로 출전하지만 코쿠라[小倉]에서 죽었다.








무패의 명장


 킷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실전적(實戰的)인 명장(名將)이다.

 1530년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둘째 아들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태어나 1541 12살의 나이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와의 코오리야마 농성전(籠城戰)에서 처음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싸움터를 내달리길 80회에 가까웠고 그 중 64번의 싸움에서는 승리했다[각주:2].


 명장(名將)은 명장을 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晴賢]와는 의형제의 맺을 정도의 사이였다.

 아키[安芸] 신쇼우[新荘]에 입성하여 킷카와 가문 중흥(中興)의 시조가 되어서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더불어, () '카와[川]'를 짊어지고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의 일익을 담당하며 모우리 종가(宗家)의 융성(隆盛)을 위해 분주한 일생이었다그런 모토하루이기에 말년이 한가롭고 평온할 턱이 없었다.


은거를 바라는 나날들


 모토하루가 은거를 결심한 것은 그때까지 항상 공세에 서서 전쟁을 벌였던 것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둘러싼 히데요시 군()과의 대결에서는 항상 수세로 돌아서 버린 때부터이다. 공격형인 모토하루로서는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것에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알지 못한 채(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료도 있다), 감쪽같이 히데요시의 술책에 넘어가 싸움을 멈추고 타카마츠 성장(城將)시미즈 무네하루[清 宗治]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의 실책이 모토하루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었다.


 1582 12 20일.

 "늙었기에 가문을 모토나가[元長]에게 물려준다"(江譜拾遺)고 하고선 곧바로 은거해 버렸다. 모토하루 53,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은거 후, 일본의 중앙에선 노부나가[信長] 사후의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 히데요시 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 카츠이에 쌍방에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모토하루는 신중히 양 진영(陣營)을 관찰했다. 결국 히데요시의 확고한 자신감과 실행력이 가득 쓰여진 편지를 보고 이후는 히데요시 편에 서기로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의 영지(領地) 문제에서 코지마 반도[児 半島][각주:3]를 빼앗겼고, 거기에 모토하루가 가장 귀여워하고 있던 셋째 아들 츠네노부[経信]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養子)인 모토사토[元総][각주:4]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치는 등 굴욕적인 타협을 참으며 모우리 종가의 안태(安泰)를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로 츠네노부는 후에 이와쿠니[岩国] 킷카와 가문의 시조(始祖)가 되는 히로이에[広家][각주:5] 그 다음 해에는 귀국을 허락 받았다. 모우리 안태를 위한 인질을 바친 셈으로 모우리 종가의 테루모토[輝元]는 츠네노부에게 오키[隠岐] 일국(一国)를 하사하는 등 공로를 인정하여 모토하루의 마음 고생에 보답하였다.


 히데요시는 키이[紀伊] 공략을 끝내자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長宗我部] 공략에 임하여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뜻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여 은거인 몸이라는 이유로 큰 아들 모토나가를 대신하여 보냈다. 모토하루를 대신한 킷카와 가문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은 시코쿠[四国]를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쵸우소카베[長宗我部]와 싸우던 1585 7월에는 난죠우 모토츠구[南条 元続]에게 시코쿠[四国] 침공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호우키[伯耆] 카와라야마 성[河原山城]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지만 노련한 모토하루는 곧바로 배다른 동생인 스에츠구 모토야스[元康][각주:6]에게 명령하여 이를 탈환케 하였다.


모토하루 최후



 그 후도 모토하루가 바라는 편온한 은거 생활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일 없이 결국 모토하루의 마지막 출진의 날이 다가온다.


 1586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는 큐우슈우[九州] 통일을 목표로 붕고[豊後]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공격하였다. 히데요시는 시마즈를 토벌하기 위해 모우리 테루모토를 대장으로 삼아 백전연마의 노장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지시하였다. 동생인 타카카게에게 이요[伊予]를 하사한 것처럼, 출진만 한다면 모토하루에게 치쿠젠[筑前] 일국(一国)을 주겠다고 하였다.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모우리 종가를 위해서는 출진할 수밖에 없었다.


 1586 8 19일.

 모토하루는 모토나가, 츠네노부를 거느리고 아키[安芸] 신쇼우를 출발하여 사에키 군[佐伯郡]의 오가타[小方]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코쿠라 성[小倉城]을 공략했다. 모우리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마즈는 어쩔 수 없이 공격 중이던 치쿠젠[筑前] 타치바나야마 성[立花山城] 포위를 풀고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농성하고 있던 타치바나 성주(城主)인 타치바나 무네토라[立花 統虎 = 후의 무네시게[宗茂]]는 성을 나와 시마즈 군()을 추격하여 치쿠젠의 타카토리이 성[高鳥居城]을 공략하고, 이와야 성[岩屋城]과 호우만 성[宝満城]을 탈회하였다.


 이때 모토하루는 부스럼(통증이 심했다고 하며 경과를 봐서는 피부암이라 추정된다)이 나서 코쿠라 성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아들인 모토나가는 쾌유를 바라며 사찰에 명해 기도를 올리게 하였고, 테루모토도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를 하게 했지만 낫는 일 없이 11 5일 코쿠라 성()에서 죽었다. 향년 57.

  1.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毛利家]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 따르면 76전 64승 12무승부 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당시는 간척 사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코지마 섬이었다. [본문으로]
  4. 모우리 모토나라의 9번째 아들. 후에 모우리 히데카네[毛利 秀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에서 모우리 군단의 움직임을 막아 동군을 유리하게 한 인물. [본문으로]
  6. 모우리 모토나리의 8번째 아들 [본문으로]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625 4 27일 병사(病死) 73.

 

1553 ~ 1625.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각주:1] 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 1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国] 지방 9개국()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각주: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각주:3]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正][각주: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山]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 3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

 2대 쇼우군[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상락(上洛)[각주:5]이 있었다.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각주:6]인 마나세 마사츠구[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 4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3.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5.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궁중 의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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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유키모리  (10) 2007.08.14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571 6 14일 병사(病死) 75


1497 ~ 1571.

아키[安芸]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원래는 지방 호족(国人)으로, 오오우치 씨[氏]신종(臣從)하였지만,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 스오우[周防],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이와미[石見]를 평정(平定).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씨[尼子氏]를 멸망시켜 츄우고쿠[国] 지방 10개 국을 지배. 큐우슈우[九州]에서 오오토모 씨[大友氏]와도 싸웠다.






진두(陣頭)에 선 노장(老將)


 모우리 모토나리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가독을 큰 아들인 타카모토[隆元]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오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1557년으로 그의 나이 60세일 때였다. 그 이후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문서에는 타카모토의 후견인이라는 입장으로 서명(署名)을 함께 쓰게 되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영지를 넓혀가 아키[安芸], 빈고[備後],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의 맹주(盟主[각주:1])가 된 모우리 일족이다. 그로 인해 타카모토에게는 자신이 그것을 지키기엔 부담이 크다며 아비 모토나리의 편안한 은퇴 생활을 허용할 턱이 없었다. 정신차려 보니 은거는 커녕 타카모토의 책략에 말려들어 그 후에도 여전히 진두에 서서 전장(戰場)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의 은거 선언


 이 상태로는 모우리 가문융성(隆盛)은 전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위업이라고 인식되어, 세간에는 가독을 이은 타카모토의 위엄이 서질 않게 된다. 상대 성을 탈취하는 데는 쿠니[国]와 구니[国]간에 정신적인 우열이 크게 좌우한다.

 타카모토도 이제는 35. 지금 모우리 가문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보는 타카모토의 두령(頭領)으로서의 위엄이다. 모토나리는 굴지의 지장(智將)으로 물러날 때를 판단할 수 있는 위대한 현자(賢者)이다. 물러날 때는 지금밖에 없다. 더군다나 조금씩 피로도 느끼기 시작했다. 아키[安芸] 사토우[佐東]에라도 은거시켜 달라는 말을 꺼내 보자[毛利家文書]


 이제는 완전히 쉬고 싶다는 이야기는 카츠라 모토타다[桂 元忠]에서 타카모토에게 전해졌다.

 타카모토는 깜짝 놀라, 그거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침을 튀기며 되받아 쳤다. 우선 문서로 동생들이며 모우리 양천[毛利 [각주:2]]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에게 모토나리 은거 반대 의사를 전하고 이어서 모토나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타카모토)에게 모우리 가문을 짊어질 만한 역량 따위 있을 턱이 없으며 아버지가 은거하신다면 저 또한 함께 은거하겠습니다. 아키[安芸]와 빈고[備後]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데 거기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라면 더 이상 무리입니다. 부친이란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의 뒤를 돌봐주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두령(頭領)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저도 은거해서는 코우츠루마루[幸鶴丸=테루모토(輝元), 5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습니다[毛利家文書]"


 그러나 모토나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타카모토의 애절한 바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카모토는 최후의 결의문을 보냈다.


 아버님이 그렇게까지 은거를 하시고자 한다면 저 타카모토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겠습니다. 즉 제가 죽으면 아버님도 은거하여 편안히 살고 싶다는 말씀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은거하시지 않고 가문을 다시리실 테니 모우리 가도 무너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모토나리라도 은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모토가 단순히 제멋대로인 아들이었는지, 부친을 뛰어 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모토나리는 '마음은 은거, 몸은 현역'이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거 소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채 스에 씨[氏] 잔당(殘黨)을 진압. 그 후에도 쉴 틈 없이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 빗츄우[備中], 분고[豊後],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등에서 모우리 일족(一族)분전(奮戰)이 계속 되었다.


 1563 8 3.

 타카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받아 이즈모[出雲]로 향했다. 도중에 빈고[備後]의 와치 사네하루[和智 誠春]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타카모토는 그 날 밤부터 격심한 복통(腹痛)이 찾아와 다음 날 아침 죽었다(향년 41).


 모토나리는 와치 씨가 타카모토를 암살한 것이라 의심하여 6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와치 씨와 관계가 있던 아카가와 모토야스[赤川 元保] 일족의 뿌리를 뽑고 결국에는 와치 사네하루를 죽였버렸다. 그러나 후에 아카가와의 무죄가 판명되어 모토나리는 크게 후회했다.


 이제는 어린 손자인 테루모토[輝元]의 뒤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어 은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모우리의 안태(安泰)를 기원하며


 이 즈음 사방에서 영토 침입의 위협이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북으로는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각주:3]].

 동으로는 비젠[備前]의 우라카미 무네카게[浦上 宗景].

 서로는 분고[豊後]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각주:4]].

 남으로는 이요[伊予] 노시마 수군[能島水軍]무라카미 타케요시[村上 武吉] 등이었다.


 모토나리는 건강에 대해서는 남보다 배는 더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1566년 결국 간헐적으로 발병하는 학질에 걸려, 재발이 계속 이어지던 1571 6 14일.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죽었다.

 향년 75.

 

묘소(墓所)는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토우슌 사[洞春寺]터에 있는데, 진기하게도 야마구치 현[山口県] 슈우난 시[周南市] 미츠오[三丘] '모토나리 이빨 사당[元就歯廟]'이 있다.

 이것은 미츠오 성주(城主)였던 모토나리의 7번째 아들인 아마노 모토마사[天野 元政] 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토나리의 이빨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1. 모우리 씨(氏)는 지방 호족 연맹의 맹주 격이었다. 즉 지방 호족들은 신하라기 보다는 대등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문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증손자. 아마고 씨(氏)는 요시히사 대(代)에 망했다. [본문으로]
  4.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말한다 [본문으로]

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1551 9 1일 자살 45

1507 ~ 1551.

요시오키(義興)의 아들. 츄우고쿠()-큐우슈우(九州) 7개국의 슈고(守護[각주:1]). 히젠(肥前)으로 출병(出兵)하여 쇼우니()()를 멸하고 대륙 무역을 장악했다. 갓산토다(月山富田)() 공략 실패 후 귀족문화에 빠져 중신(重臣)들의 반감을 사, 스에 타카후사(隆房)가 모반을 일으키자 도망 끝에 자살.








이즈모(出雲) 원정의 실패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빙고(備後), 치쿠젠(筑前), 부젠(豊前) 등의 7개국의 슈고로써 영화를 누리며 영지(領地) 곳곳을 쿄우(京)의 우아함으로 치장한 오오우치 요시타카.
 그의 '말년'은 센고쿠(戦国) 무장의 자리를 버리는 요인이 된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토벌이 실패로 끝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쿄우라기산(京羅木山) 산의 본진에서 갓산토다(月山富田)성(城)을 내려다 보며, 세자(世子)인 하루모치(晴持[각주:2])에게 말했다.
 “강적 아마고님은 철벽의 요새(要塞)나 지성(支城
)을 가지고 계셨다. 그 아마고 십기(尼子 十旗[각주:3]), 아마고 십새(十塞[각주:4])도 예전만 못하다. 내일은 함께 갓산토다(月山富田)를 취하자꾸나”
 그러나 공격할 때마다 실패하여 미토야 히사스케(三刀屋 久扶), 미사와 타케키요(三沢 為清), 야마노우치 타카미치(山内 隆通), 혼죠우 츠네미츠(本城 常光),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 등의 이즈모(出雲) 호족들이 배반하였다.

 1543년 5월 7일. 요시타카와 하루모치는 각각 따로 배를 타고 도주(逃走)하다가 하루모치가 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세자를 잃게 되었다.

무사(武士)와 귀족(公家) 사이에서

 야마구치(山口)로 돌아와서는 소우기(宗祇[각주:5])가 저택을 보고 영감을 얻어,

 연못은 바다요 나뭇가지 끝이 여름엔 산이구나
 池はうみ こずえは夏のみ山かな
라 시를 쓴 츠키야마(築山)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츠키야마 저택은 거대한 연못과 연못을 파면서 생긴 흙으로 쌓은 큰 산이 있었으며, 한 편이 80간(間[각주:6])에 이르는 토담과 폭 3간[각주:7]해자(垓子)를 둘러쳐 현실에서 격리된 풍아(風雅)의 공간이었다. 

 츠키야마의 저택에는 귀족(公家)이나 문인(文人), 묵객(墨客)이 전란(戰亂)의 쿄우토(京都)를 피해 방문하였고 요시타카는 미남미녀에 둘러 쌓여 와카(和歌), 한시(漢詩), 렌가(連歌), 학문(學問), 신도(神道), 불교(佛敎), 유교(儒敎) 등에 몰두하는 문(文)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또한 전쟁도 벌였다.
 
이요(伊予)를 공격하였고 빙고(備後)도 손에 넣었다.
 스오우(周防)의 스에 타카후사(陶隆房 = 晴賢), 나가토(長門)의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아키(安芸)의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 隆包), 이와미(石見)의 토이다 타카모리(問田 隆盛), 치쿠젠(筑前)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부젠(豊前)의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 등의 슈고다이(守護代[각주:8]
)가 요시타카를 대신해서 오오우치씨(氏)를 지탱했다.

 요시타카도 1548년에는 종이위(従二位).
 쇼우군(将軍)직보다 관위가 더 높아[각주:9]
, 헤이안(平安[각주:10])시대라면 우다이진(右大臣)에 해당하는 관위였다.

 그러나 무장에게도 영지(領地)가 아닌 관위로 상을 내렸기에 무장들은 불만이 많았다[각주:11].
 사치는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으로 이어졌다. [오오우치 요시타카 기(大內義隆記)]에는 “전쟁에 대한 준비도 없고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조차 잊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미래를 걱정한 명장(名將) 스에 타카후사는 끊임없이 요시타카에게 간언(諫言)하며 사태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원흉인 사가라 타케토우(相良武任)를 몇 번이고 추방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변함이 없어 타카후사는 오오우치 가(家)나 백성을 위해서 요시타카의 추방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후사 모반]의 소문은 차츰 퍼져나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1551년 8월 26일 츠키야마의 저택에서는 코우와카(幸若[각주:12]
)가 행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인 27일.
 
남색(男色)을 즐기던 요시타카는 과거 스에 타카후사와 즐겼던 생각에 잠기며 미남(美男)인 야스토미 겐나이(安富 源内)와 함께 마당에 있었다.

 오후 8시.
 [스에 타카후사의 대군! 야마구치를 향해서 와카야마(若山)성(城)을 출발]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오우치의 군세(軍勢)는 6천.

 그러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이외의 슈고다이는 모두 스에 쪽으로 돌아섰다.
 요시타카는 방어하기 쉽게 츠키야마의 저택에서 호우센(法泉)사(寺)로 옮겼지만, 다음 28일 아침이 되자 남아있는 병사는 500으로 줄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살할까도 생각했지만 사랑하는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嫡子) 요시타카(義尊)와 함께 나가토(長門) 센자키(仙崎)로 도망쳤다. 거기에서 큐우슈우(九州)로 도망치려 작은 배에 올랐지만 바다가 거칠어졌기에 나가토(長門)의 타이네이(大寧)사(寺)로 돌아왔다.

 자신을 따라 온 것은 레이제이 타카토요(冷泉 隆豊)를 포함한 불과 60여명.
 스오우(周防)국(国)은 토우다이(東大)사(寺)의 장원(莊園)가 있었던 곳으로, 이 즈음 토우다이사(寺)에서는 [스에 오와리노카미 타카후사(陶 尾張守 隆房)가 마음을 고치길]과 요시타카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엄숙한 기도회가 열렸다고 한다.(東大寺古文書[각주:13]
)

말세(末世)의 수행자(修行者)

 요시타카는 둔세(遁世)에 대하여 일찍부터 동경하여 젊어서부터 선(禪)에 심취해 있었다.
 아키(安芸)의 카나야마(銀山)성(城)을 한창 공격하던 중에 - 가까운 곳에 고명한 선승(禪僧)인 지큐우(次休) 소우스(蔵主[각주:14]
)의 옛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산 속 깊이 들어가 결국 발견하고서는 거기에 대가람(大伽藍)을 재건(再建)하려고 결심할 정도였다.

 또한 이즈모(出雲) 원정이 한창일 때조차 쿄우토(京都)에서 요시다 카네이에(吉田 兼家)를 초청하여 요시다(吉田) 신도(神道)를 전수받았다.

 요시타카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허무하며 마음은 신불(神仏), 와카(和歌), 한시(漢詩), 유우소쿠(有職[각주:15]), 귀족(公家)의 놀이에 몰두했다. 이를 [大內義隆記]에서는 ‘말세의 수행자’라 평했으며 이는 센고쿠(戦国) 무장에게 필요한 시의심(猜疑心)과 공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시타카는 타이네이사(寺) 13대 이세츠 케이쥬(異雪 慶姝)가
 “죽음을 앞두고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가르침을 듣자 요시타카는,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 속 하늘에 달이 보입니다”
 고 답하여 이세츠(異雪)의 가르침을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남긴 시는,

 죽이려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모두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같구나.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討たるる人も諸共に如露如電、応作如是観
향년 45세.



  1.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2.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養子)이다. 모친이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누나이며 쿠게(公家)의 명문 이치죠우 가문(一条家) 출신이었던 점이 당시 친아들이 없었던 요시타카의 세자가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본문으로]
  3. 본성 갓산토다(月山富田)와 이어진 주요한 열 개의 지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4. 갓산토다(月山富田)와 아마고 십기 사이에 있던 열 개의 요새. [본문으로]
  5. 1421~1502. 살아 있을 당시는 렌가(連歌)계의 일인자. [본문으로]
  6. 1간은 약 1.82미터니까, 80간은 약 146미터 [본문으로]
  7. 약 5.5미터. [본문으로]
  8.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일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9. 이 즈음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 将軍家)은 대체로 종삼위(従三位)였다. [본문으로]
  10. 94~1185 즈음. 귀족(公家)의 전성시대였다. [본문으로]
  11. 자칭이 많았던 다른 가문, 무장이 많았던 것에 비해 오오우치가(家)의 유력 무장들은 실제로 조정에서 하사 받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12. 간단한 춤을 동반한 시를 읊는 것.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즐겨 부른 아츠모리(敦盛)도 이것 중의 하나다. [본문으로]
  13. 이는 스오우(周防)를 지배하고 있던 스에 가문이 횡령한 토우다이사(寺)의 장원을 요시타카가 타카후사에게 토우다이사(寺)로 반환하라고 했기에 토우다이사(寺)는 요시타카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다. [본문으로]
  14. 절에서 불교 경전 등을 관리하는 직책 또는 사람. [본문으로]
  15. 옛 선례(先例)를 바탕으로 관직(官職), 의식(儀式), 복장 등을 연구하는 학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