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 北条早雲

  소우운은 센고쿠 다이묘우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낭인에서 칸토우[東]를 제패하는 거대 다이묘우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 아사쿠라 토시카게[朝倉 敏景]의 아들]는 소우운을 평하며,

 창고에 바늘을 모으는 듯이 인색하게 모으면서막상 싸울 일이 있으면 귀중한 보석이라도 깨부숴 사용하는 듯 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우운은 '소우운님 이십개조[早雲寺殿二十箇]'라는 가훈(家訓)을 남기며, 여기에서 '밤에는 저녁 8시에 취침하고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몸가짐을 가다듬도록……'이라고 일상의 세세한 점까지 배려하고 있다. 소우운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노력가로 늙어서도 여전히 눈과 귀가 건강하였고, 이빨도 빠지지 않아 장년기(壯年期)와 변함없는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45살까지의 전반생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가
시나노[信濃]의 오가사와라 사다모토[小笠原 定基]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오가사와라의 가신 세키 우마노죠우[ 右馬允]가 자신과 같은 이세[伊勢] 출신으로 동족(同族)이라 말하였다. 처음에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는 이름을 썼던 소우운의 출신에 대해서 이것이 가장 유력한 근거라 평해지고 있다.

 

 또 하나 유력한 것이 쿄우토[京都] 출신이라는 것이 있다.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요직(要職)을 역임하는 쿄우토[京都] 이세 씨[伊勢氏]의 사다후지[貞藤]의 아들이라고 하며, 사다후지는 쇼우군[軍] 요시마사[義政]의 분노를 사서 낭인이 되었으며 '오우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세[伊勢]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빗츄우[備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빗츄우에서 쿄우토[京都]로 갔고 이어서 스루가[駿河]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서에 따르면 빗츄우[備中] 시츠키 군[後月郡] 에바라[江原]타카고에야마[高越山] 성주(城主) 이세 스루가노카미 사다미치[伊勢 駿河守 貞通]의 양자(養子)가 소우운으로, 키비츠 다이묘우진[吉備津 大明神]의 계시를 받아 주변 명가(名家)의 자제들과 함께 큰 꿈을 품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시카가 바쿠후의 기록 중에는 빗츄우 출신의 이세 카몬노스케 모리요리[伊勢 掃部助 盛頼]의 이름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우운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 義忠][각주:1]의 측실이 된 여동생의 신세를 지기 위해서 스루가로 왔다고 한다. 이 때 행동을 함께 한 6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소우운을 포함한 7명의 사무라이는 함께 칸토우[東]로 무사(武者) 수행을 하러 갔는데, 그 출발에 앞서 신수(神水)를 나누어 마신 후, “ 7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겠으며, 이 중 한 명이 다이묘우[大名]라도 된다면 나머지 6명은 그의 부하가 되어 돕자는 약속을 맺었다고 한다.

  6명은 후에 '소우운님 초창기의 가로중[(早雲)寺殿草創御家老衆]'으로, 호우죠우 일족에 준하는 '어유서가(御由)'라 불리며 존중 받았다.

 

 소우운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내분(內紛)이었다.

 1476 2.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쇼우군[軍] 요시히사[尚]의 명령으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시바 씨[斯波氏]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진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시바 씨의 잔당에게 습격 받아 죽음을 당했다. 남아 있는 아들 타츠오우[龍王=후에 우지치카[氏親][각주:2]]가 아직 어려 가신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타츠오우는 난을 피하여 모친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타츠오우는 소우운의 여동생 키타가와도노[北川殿]의 아들로 소우운의 조카였다.

 

 내란 진압을 위해서 호리고에 쿠보우[堀越公方]인 마사토모[政知]에게서 우에스기 마사노리[上杉 政憲], 오오기가야츠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에게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이 파견되었고, 소우운은 이 둘에게 중재안을 제안했다.

 이마가와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싸워서는 가문 멸망뿐 아니라 주변으로 전쟁이 확대될 뿐이다. 우선 오시카 노리미츠[小鹿 範満][각주:3]가 당주가 되고, 후에 타츠오우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가독을 물려받게 해 달라

 도우칸도 마사노리도 이치에 맞는 이 제안에 찬성하여 중재는 성공되었다.[각주:4]

 소우운은 이 공로로 인하여 후지[富士郡] 시모카타[下方] 장원의 13고을을 하사 받아 코우코쿠지 성[城]의 성주가 되었던 것이다.

 

 소우운은 민심을 잡는데 뛰어났다.

 코우코쿠지 성주가 되자 곧바로 영내(領內)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에게 이 영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받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존경 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소우운은 제2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1491년에 일어난 호리고에 쿠보우의 내란이었다.

 당주 마사토모가 죽어 챠챠마루[丸]가 뒤를 이었지만, 배다른 동생인 쥰도우지[潤童子][각주:5]와 그 모친을 한꺼번에 죽인 것이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즈[伊豆] 혼란에 빠졌다.

 

 호시탐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우운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스루가[駿河]의 무사들을 이끌고 질풍과 같이 이즈를 침공하여 챠챠마루를 죽이고 순식간에 이즈를 점령해 버렸다.

 침공에 앞서 소우운다운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병(病)을 가장하여 이즈[伊豆] 쥬센 사[修善寺] 온천에 머물면서 나무꾼들을 불러 소문을 청취하고, 이즈[伊豆]의 지리나 무사들의 재정 상태 등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즈 공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점령 후의 행정에도 소우운의 탁월한 수완이 발휘되었다.

 난을 피해 산 속으로 도망친 무사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고 하는 한편 만약 이렇게 해주는데도 나오지 않으면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집도 불태운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소우운은 과감한 선정을 펼쳤다. 연공(年貢)을 사공육민(四公六民)으로 해서,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받고 나머지 60%는 백성이 가지게 한 것이다. 당시의 세율로는 오공오민(五公五民)이라도 대단히 기뻐들 하였기에 얼마나 이즈[伊豆]의 백성들이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우리 지역도 신쿠로우 님의 지역이 되었으면……”하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즈를 수중에 넣은 소우운의 다음 표적은 칸토우[東]였다.

 소우운의 칸토우 제패의 야망을 알려주는 일화로써 미시마 묘우진[三島 明神]에게 참배를 가 꾼 영몽(靈夢)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2일의 새해 첫 꿈이었다.

 넓은 들판에 두 그루의 큰 삼(杉)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어디선가 쥐새끼 한 마리가 조르르 달려 나와 큰 삼나무의 뿌리를 갉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쥐새끼가 점점 커져 커다란 호랑이로 변했다. 그때 꿈에서 깼다

 소우운은 이 꿈을,
 “
두 그루의 큰 삼()나무는 칸토우[
東]를 지배하는 두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6]을 뜻할 것이다. 나는 쥐띠니까 두 그루의 삼나무를 갉은 쥐는 나 자신이다. 이것은 소우운의 자손이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멸하고 칸토우[東]의 지배자가 된다는 굉장히 경사스러운 꿈이다
 
하고 점쳤던 것이다. 이것은 소우운이 꿈을 빌어 가신들에게 말한 장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칸토우 진출의 시작은 오다와라[小田原] 공략이었다.

 이 작전에 앞서 소우운은 교묘한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 오다와라 성의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
 “
우리 영지(領地)에 있는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였더니, 사슴들이 모두
하코네[箱根] 을 넘어 도망간 듯 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을 오오모리 님의 영내(領內)로 들여보내어 이즈[伊豆] 쪽으로 사슴을 몰고 싶습니다만……”

 하고 몰이꾼을 오다와라 영내(領內)로 들여보내는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사실 이 몰이꾼들은 젊고 건장한 젊은 무사들이었다. 소우운은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변장시키고, 거기에 또 수백 명을 개 몰이꾼으로 보이게 하여 은밀히 죽창 등의 무기를 가져가게 하였다.

 

 1495 2.

 심야가 되어 어둠이 짙어지자 오다와라 성 밑이 내려다 보이는 이시가키야마 산[石垣山][각주:7] 하코네야마 산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불이었다. 그 불이 순식간에 오다와라 성 밑까지 다가왔다. 마치 불의 파도가 덮치는 듯 했다. 이는 소우운 측이 횃불을 달아 풀어놓은 소()들이었다. 그 뒤 몰이꾼으로 변장한 무사들이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이 기습 전법으로 오다와라는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되었다.

 

 소우운은 오다와라를 손에 넣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사가미[相模]를 시작으로 칸토우[東] 각지를 차츰 제압해 갔던 것이다.[각주:8]

 

[호우죠우 소우운( 早雲)]

1432년에 태어났다. 처음엔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 칭하였고, 후에 불문에 들어가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라는 호를 칭하게 된다. 1519년 이즈[伊豆] 니라야마[韮山]에서 죽었다. 88.

  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할아버지 [본문으로]
  2. 요시모토의 아비. [본문으로]
  3. 요시타다와는 사촌지간. [본문으로]
  4. 결국 타츠오우가 15살이 되어 우지치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인식을 치렀음에도, 가독을 물려받지 못했기에 소우운은 병사를 모아 노리미츠를 죽이고 우지치카를 이마가와 당주로 세웠다 [본문으로]
  5. 이 쥰도우지가 2대 호리고에 쿠보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야마노우치[山内]와 오오기가야츠[扇谷]의 우에스기 가문. [본문으로]
  7. 당시는 카사카케야마(笠懸山)라 하였다.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 이 산에 하루밤만에 이 산에 성을 쌓을 때 이시가키[石垣]를 가진 성을 쌓았다고 해서 이시가키야마[石垣山]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8. 거성은 니라야마 성[韮山城]이었다. 오다와라로 본거지가 옮겨진 것은 아들 우지츠나(氏綱) 때. [본문으로]

 오오타 도우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원래 에도성은 주가(主家)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거성인 카와고에 성[川越城]의 지성(支城)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후년의 에도성(지금의 황거(皇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규모 성이었지만 자성(子城), 가운데 성(中城), 외성(外城)이라는 삼중으로 되어있고 주위에는 깊은 해자(垓子)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도우칸은 이곳을 30년간 거성으로 했지만 한 번도 공격 당한 적은 없었다. 성내의 저택을 죠우쇼우켄[勝軒]이라 이름 지어 여기서 자주 와카(和歌)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도우칸은 문무겸비의 명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젊었을 적에는 무()에만 열중했었다고 한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유명한 [황매화 마을(山吹)]의 고사이다.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도우칸이 한 민가(民家)에 가서 도롱이[각주:1]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소녀가 황매화 한 송이를 내민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우칸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꽃을 받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노신 중에 한 명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황매화는 열매[각주:2]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있는 카네아키라 친왕[兼明 親王],

일곱 겹 여덟 겹 꽃이 피지만 황매화는, 열매가 하나도 없으니 슬프구나

七重八重花けども山吹みのつだになきぞしき

라는 옛 시를 이용하여 소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 것이었다. 도우칸은 이 때 소녀의 풍부한 문학적 소양에 놀라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각주:3]. [각주:4] [각주:5]

 이로부터 도우칸은 문학의 길에도 힘을 써 ()도 발전했던 것이다. 역사서, 와카선집(和歌選集), 기록, 의서(醫書), 병서(兵書) 등 수천 권을 에도성 죠우쇼우켄에 모았다.

 

 전투에서도 와카로 인해 크게 덕을 보았다.

 1483 10.

 바야흐로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의 군세가 한밤 중에 해안에 이르러 절벽아랫길을 지날 때였다. 그러나 밀물인지 썰물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적의 복병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알아보려 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도우칸이 가보지 않고 맞춘 것이다.

 옛 시에,

멀리서건 가까이서건 우는 바다의 물떼새의 노래 소리에 물이 차고 빠진 것을 안다

遠くなり近くなるみの浜千鳥、潮の干をにてぞ知る

 가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물떼새(浜千鳥)의 울음이 멀리서 들렸기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당시 칸토우[]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칸토우 쿠보우[東公方 칸토우()를 지배하는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지칭][각주:6]코가[古河][각주:7]호리고에[堀越][각주:8] [각주:9]로 나뉘어져 대립하였고, 코가 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와 칸레이[管領 쿠보우의 보좌][각주:10] 가문인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11]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内上杉][각주:12]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각주:13]의 두 가문]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칸레이 가문의 실권은 가재(家宰[각주:14])의 손에 있어 야마노우치는 나가오 카게노부[長尾 景信], 카게하루[景春] 부자(父子), 오오기가야츠는 오오타 스케키요[太田 資清], 스케나가[資長]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스케나가가 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칸[道灌]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 것이다.

 

 1476.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 나가오 카게하루가 주가(主家)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이를 공격한 우에스기가 패배를 당한 것이다. 여기서 도우칸은 두 우에스기 가문[각주:15]을 도와 나가오 가문[長尾家]와 싸우게 되었다. 도우칸은 많은 전투를 경험하지만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도우칸의 가신들은,

 우리 주군은 제갈 공명의 환생이다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무패의 전력을 자랑하는 도우칸에게도 검은 음모의 그림자가 다가오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야마노우치-오오기가야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이 깊어지던 중, 도우칸의 주군인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가 도우칸의 명성을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 上杉]의 당주 아키사다[]에게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아키사다는 사다마사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도우칸을 없애면 손을 잡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도우칸이 주군 사다마사에게 암살당한 곳은 사가미[相模]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에서였다. 초대되어 목욕을 하던 중에 자객에게 습격 당한 것이다. 칼질을 당했을 때 도우칸은,

 당가(當家 - 오오기가야츠 가()) 멸망!”

 이라 외치고 쓰러졌다고 한다.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1432년 태생. 첫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후에 모치스케[持資]로 바꾸었다. 24살에 정오위하(正五位下) 빗츄우노카미[備中守]에 서임.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로 에도성의 축성자. 암살당한 것은 1486 7 26. 55.

  1. 일본 발음으로 ‘미노[みの(蓑)]’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일본어 발음으로 ‘미[み(実)]’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열매[実]와 미노[みの]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했다는 말. [본문으로]
  4. 이 이야기는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우칸은 어렸을 때부터 ‘카마쿠라 오산[鎌倉五山 – 유명한 절 다섯 개]’에서 수행을 한 천재로, 특히 도우칸의 아버지 또한 굉장히 시에 관심을 갖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기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도우칸에게 문학적 소양이 없을 리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노사어록(老士語録)]이라는 책에 와카가 뛰어난 늙은 여자와 도우칸 과의 이야기가 있어, 이것을 후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자신의 저서 [상산기담(常山紀談)]에서 재미있게 각색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将軍)은 종가(宗家), 카마쿠라 쿠보우는 분가(分家)가 되겠다.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의 셋째 모토우지[基氏]의 자손이 대대로 카마쿠라 쿠보우를 이어받았다. 독립지향이 강하여 자주 종가인 쇼우군 가문에게 개겼고, 이것이 후에 칸토우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리지날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즉 칸토우쿠보우[関東公方]. 대대로 카마쿠라에 거점을 두었다. 카마쿠라 쿠보우의 보좌역인 칸토우 칸레이(関東 管領)가 쇼우군 가문 편을 들었기에 카마쿠라 쿠보우와는 자주 다투었다. 이러다가 5대 쿠보우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당시의 칸토우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 憲忠, 야마노우치 가문 출신]를 죽인 것을 발단으로 쿄우토쿠의 난[享徳の乱]이 일어나고,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측은 시게우지의 부당함을 막부에 일러, 이에 바쿠후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칸토우 평정을 명하자 노리타다는 카마쿠라로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다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카마쿠라를 비워 두었던 시게우지는 카마쿠라를 탈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모우사[下総]의 코가[古河]를 본거지로 삼아 이때부터 [코가 쿠보우]를 칭하게 된다. [본문으로]
  8. 카마쿠라에서 카마쿠라 쿠보우(즉 칸토우 쿠보우)를 쫓아낸 바쿠후 쇼우군(당시 아시가 요시마사[足利 義政]는, 그 자리에 개김성이 강해진 먼 친척보다 자신의 동생을 임명하고자, 승려였던 마사토모[政知]를 환속시켜 정식으로 칸토우 쿠보우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강성한 시게우지 세력과 그 시게우지와 싸웠던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조차 마사토모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異論) 등으로 인해서 카마쿠라까지 가지 못하고, 이즈[伊豆]의 호리고에[堀越]에 머물렀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이 당시는 칸토우 쿠보우가 둘이 생기는 결과가 되었다. 빽으로 바쿠후가 있는 호리고에 쿠보우, 여전히 칸토우에서 끗발이 날리는 코가 쿠보우. 둘 다 칸토우 쿠보우를 자칭했기에 구별을 위해서 ‘코가 쿠보우’, ‘호리고에 쿠보우’라 지칭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10. 카마쿠라 쿠보우를 보좌하기 위해서 바쿠후에 칸레이[管領]가 있듯이, 칸토우[関東]에도 칸레이[管領]가 두어져, 이를 칸토우 칸레이[関東管領]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우에스기 씨는 무로마치 바쿠후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의 외가. 초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인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 憲顕]는 타카우지와 외사촌지간. [본문으로]
  12. 거처가 카마쿠라의 야마노우치[山内]라는 곳에 있었기에 야마노우치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초기를 제외하곤 대대로 칸토우 칸레이 직을 세습하였다. [본문으로]
  13.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먼 친척. 그래서 부하. 거처가 카마쿠라의 오오기가야츠[扇谷]라는 곳에 있었기에 오오기가야츠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우에스기 젠슈우의 난[上杉禅秀の乱]’ 때를 제외하곤 야마노우치 가문의 부하였으나, 오오타 도우칸의 활약으로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본문으로]
  14. 그 가문의 필두 중신. [본문으로]
  15.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 [본문으로]


 아사쿠라 토시카게가 죽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느 귀족은,

아사쿠라 단죠우자에몬[朝倉 正左衛門]에치젠[越前]에서 죽었다고 한다. 굉장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하의 악사(惡事)를 시작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 외에도 다이죠우 원[院]의 진손[尋尊]이나 이치죠우 카네요시[ 兼良]가 토시카게의 행동에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을 정도로 당시의 귀족이나 중들에게 있어서 토시카게는 장원( - 귀족이나 사원의 영유지)을 빼앗아 갔기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토시카게는 구질서 아래서 온존되어 왔던 귀족의 특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렸던 것이다.

 아사쿠라 씨[朝倉氏]는 대대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각주:1]] 시바 씨[斯波氏]의 가신이었다. 토시카게 때 삼가로(三家老[각주:2])의 하나로 승진하였다. 토시카게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시바 가문의 가독 상속 싸움으로 인해서였다.


 1452.

 시바 요시타케[斯波 義健]가 죽자, 그의 양자(養子) 요시토시[義敏]가 필두가로인 카이 씨[甲斐氏]와 싸워 카이, 아사쿠라, 오다의 삼가로에게 추방당하였고 새로이 요시카도[義廉]가 양자로 들어왔다. 시바 가문의 이 두 양자간의 상속 싸움이 '오우닌의 대란[仁の乱]'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처음 토시카게는 요시카도의 밑에서 막부[幕府]의 실력자인 야마나 소우젠[山名 宗全]의 서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 토시카게에게 은밀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야마나에 대항하는 실력자인 동군의 총대장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 勝元]에게서였다. 서군을 배신한다면 에치젠 슈고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슈고 다이묘우[守護 大名]가 되는 것은 예전부터 토시카게의 꿈이었다. 토시카게는 이를 호기라며 주저 없이 동군으로 달려가 어제까지 주군이었던 요시카도와 카이 씨를 적으로 돌렸던 것이다.

 1472.
 토시카게는 에치젠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실직적인 슈고 다이묘우가 되었다. 이 때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城]에서 이치죠우다니[谷] 계곡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치죠우다니 계곡은 에치젠 지배의 요충지이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후츄우[府中], 키타노쇼우[北ノ庄], 오오노[大野]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후에 이치죠우다니는 '북국의 작은 쿄우토[小京都]'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로 발전하였다.

 토시카게는 그야말로 센고쿠 다이묘우
[
戦国 大名]의 선구자였다.
 이치죠우다니에 가신들을 집결시켜 살게 하는 등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중앙집권제를 행한 것도 토시카게가 제일 먼저였
.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등도 이를 모방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합리 정신은 토시카게가 정한
'가훈17개조'에서도 볼 수 있다.

 우선 문벌 타파와 인재의 등용이다
.

 가훈 제
1조는,
세습으로 이어지는 숙로(宿老)를 정하지 말 것. 기량과 충성심을 보고 임명할 것.
이었다.

 제
2조에서는 군비(軍備)에 대해서,
아무리 만금(萬金)에 필적하는 명도(名刀)라고 하여도 백전(白錢)의 창 100개에는 이길 수 없다
고 하였다.

 미신 타파에도 힘써
전투의 길일(吉日)과 방향을 고르거나 해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라고 당시의 풍습을 대담하게 무시하고 있다. 남도(南都 나라(奈良))의 사원령(寺院領[각주:3])을 태연히 빼앗은 것도 이 합리주의의 결과였다.

 사람을 쓰는 것에 있어서 규정한 조항을 보면
,
예를 들어 능력이 없는 자라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특별히 눈 여겨 볼 것. 게으른 사람이라도 풍채가 좋다면 그에 걸맞은 사자(使者)로 쓸 만하다
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불과
17개조 이면서도 토시카게의 가훈은 하극상(上)으로 일어난 센고쿠 다이묘우의 통치 방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굉장히 흥미 깊은 자료이다.

 아사쿠라 가문은 이런 토시카게 덕분
에 5 100년간 이치죠우다니[
]의 땅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아사쿠라 도시카게(朝倉 敏景)]

1428년 에치젠[越前]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에서 태어났다. 타카카게[孝景]라고도 한다. 1471년 주군인 시바 씨[斯波氏]를 대신해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가 되었다. 미신 타파에 힘쓰는 한편 당시 종교계의 신흥 세력인 렌뇨[蓮如[각주:4]]와 친교를 맺어 에치젠 요시자키[吉崎] 절을 만들어 주었다. 1481 54살에 죽었다.

  1. 무로마치 막부(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2. 에치젠 슈고다이[守護代 – 주로 쿄우토(京都)에 있는 ‘슈고’를 대신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카이 씨[甲斐氏],오와리[尾張] 슈고다이 오다 씨[織田氏]와 더불어. [본문으로]
  3. 절이 소유하는 땅. [본문으로]
  4. 혼간지[本願寺] 8대 교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