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가장 비밀스런 모의를 할 때 상담을 나누던 모신(謀臣)이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아예 친구와 같이 대했다 한다.

 “백성의 재산을 남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로 유명한 [본좌록[本佐[각주:1]]은 마사노부가 썼다고 한다.[각주:2]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각주:3]]가 부친 요시히로[義弘]에게 보낸 편지에,
“이에야스 님은 정치에 관해 사슈우[佐州=마사노부]하고만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이 보입니다”
라고 쓴 것을 보아도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정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에야스가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카리 님, 사도 님, 오로쿠 님[雁殿、佐渡殿、お六殿]”라는 말로, 카리 님은 매사냥을 말하며[각주:4], 오로쿠 님은 측실 중 한 명[각주:5] 그리고 사도 님은 마사노부를 이른다.
 이렇게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노부는 불과 2만2천석의 영지를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미움 받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어 많은 영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사서에 따르면 마사노부의 용모는 매독으로 인하여 피부가 떨어져 나가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마사노부는 하급무사로 매조련사[ 출신이라고 한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봉기한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6]는 이에야스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시련이었는데, 마사노부는 이 잇코우잇키 군의 참모가 되어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였다.
 반란군 측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의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자 마사노부는 쿄우토[京都]로 탈출, 일시적으로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弾正 久秀] 밑에서 지냈다.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살해한 이 효웅도 마사노부를 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며 기량을 인정했다 한다. 그 후 마사노부는 카가[加賀], 에치고[越後]를 유랑한 후 유명한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 彦左衛門[각주:7]]의 형이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의 추천으로 다시 토쿠가와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8]

 전쟁터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마사노부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사노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하면서 부터로, 당시는 외교관적인 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기 전날 밤부터 오오사카 농성전[大坂の陣]에 걸쳐 마사노부의 모략적인 재능은 풀가동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그때까지 히데요시의 측근 행정관으로서 권세를 떨쳐왔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미워하고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등 무공파의 면면들이 결국 미츠나리를 없애기 위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구했다. 이것도 마사노부의 헌책이었다.
 “미츠나리를 살려두면 타이코우[太閤[각주:9]]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다이묘우[大名]도 미츠나리를 너무 원망하는 나머지 언젠가 토쿠가와 편을 들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였다.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으로 이끄는 스토리는 거의 마사노부 혼자서 쓴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에 일어난 농성전[大坂冬の陣] 강화 조건으로써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외측 해자를 메우게 되었는데, 토쿠가와 측은 세 번째 성곽[三の丸]뿐만 아니라 내측인 두 번째 성곽[二の丸]까지 마구 메워버린 것이다. 토요토미 측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공사 책임자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의 답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참다 못한 요도도노[淀殿]가 쿄우토의 마사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마사노부는 오오고쇼[大御所[각주:10]]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더구나 그 후에는 자신이 감기 걸렸다며 역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오사카 성의 내측 해자도 전부 메워 버렸다. 마사노부는 적당한 때를 살펴 오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이때 마사노부의 말이 기발했다. 메워진 내측 해자를 보고,
 “이런 기괴한 일이 다 있나”
 고 말하며 공사 책임자인 자기 아들 마사즈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화를 낸 것이다. 철저한 오리발 작전으로 오오사카 측을 가지고 논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1538년생. 1590년 사가미[相模] 타마나와[玉縄] 2만2천석.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노중(老中)이 된다.[각주:11] 1616년 6월 죽다. 59세.

  1. 마사노부의 성 혼다[本多]의 앞 글자 本과 관도명 사도노카미[佐渡守]의 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앞 글자씩을 따와 두글자로 상대를 부르는 것을 카타묘우지[片名字 혹은 片苗字]라 부르며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쓴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7개조로 쓴 책이라 한다. 혼다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유명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명성리(仮名性理)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손을 댄 후 마사노부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온 책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사츠마 번[薩摩藩] 초대 번주이자 요시히로[義弘]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를 말한다. 처음엔 타다츠네 였으나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본문으로]
  4. 사냥을 뜻 하는 狩り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雁는 둘 다 발음이 '카리'이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의 장점으로 하루 종일 사냥하느라 뛰어다니면 배가 고파져 식사도 더 맛있어 지고 밤에는 피곤하기에 일찍 잘 수 있어 자연스레 빠구리도 안 할 수 있기에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5. 이에야스 측실 중 가장 똑똑했다는 에이쇼우인[英勝院 - 여담으로 만화 '영무자 이에야스'의 여주인공 같은 역으로 나왔다]의 하녀 같은 존재였으나,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에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한 갈래인 오유미 쿠보우[小弓 公方]의 피를 잇는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 義親]에게 시집간다. 29살에 닛코우에 있는 이에야스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하여 분향하였을 때 향로가 터져 파편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에도 쇼우군 가문의 여성들을 다룬 '막부조윤전[幕府祚胤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당연시 되던 남편 죽은 뒤 머리 밀고 비구니가 되는 일 없이 미모를 너무 뽐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쓰여 있다. [본문으로]
  6.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종교 반란. [본문으로]
  7.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 忠教].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손에 넣는데 큰 공적을 세운 무공파들보다 신참이며 주판알 잘 굴리는 문치파들을 중용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토쿠가와 가문이 걸어온 길과 자기 오오쿠보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파한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를 써서, 당시 문치파에 밀려 불만 많던 무공파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문으로]
  8.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7년 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9년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타이코우란 칸파쿠[関白]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에 대한 경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10. 에도 시대에는 살아서 쇼우군[将軍] 자리에서 은퇴한 전 쇼우군을 지칭. 즉 여기서는 이에야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아들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이에야스의 곁에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의향을 히데타다에게 전하는(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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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95 2 7일 병사 40

1556~1595.

오우미[近江] 히노[日野] 성주 가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의 아들. 크리스트교를 믿어 세례명은 레오(는 레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공적으로 인하여 아이즈[津] 와카마츠[若松] 성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출진하지만 갑자기 병을 나서 급사.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명장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오우우[羽] 지방의 통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아이즈를 맡긴다고 하자 타다오키는 이런 큰 일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사퇴하였다.

 오우우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등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호족들이 많았다. 아이즈 쿠로카와[川] 42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것은 이런 호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검은 손길이 오우우에 미치지 않게 한다는 숨겨진 임무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정된 것이 가모우 우지사토였다.

 이세[伊勢] 마츠자카[松板]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경심(畏敬心)을 품게 하였다.


 또한 우지사토만큼이나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주인도 흔치 않았다. 주된 가신들을 모아서는 술자리를 열 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직접 뗄감을 집어 넣으며 물을 끓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스런 신하가 많았다.


오우우 평정에 조력


 히데요시는 이런 우지사토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처음엔 타다오키처럼 사퇴하였지만 히데요시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아이즈 쿠로카와 42만석을 받아 들인 거실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본 야마사키 우콘[山崎 右近]이 많은 영토를 가진 높은 신분으로 출세하여 기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요? 하고 묻자 우지사토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낮은 신분이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더라도 쿄우[] 근처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천하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을.... 아무리 높은 신분에 많은 영토라고 하여도 쿄우[]에서 먼 곳에 있다면 그런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도 모르게 분한 눈물을 흘렸다"

 고 대답했다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로 향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여 입었다. 오우우 부임은 히데요시를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두려웠기에 오우슈우[奧州]로 쫓아 보냈다고 근신(近臣)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라도 우지사토는 천하인(天下人)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재능을 오우슈우[奧州] 통치에 이용하려고 한 히데요시의 날카로운 안목을 칭찬해야만 할 것이다.


 우지사토의 말년은 오우우 통치에 전력을 쏟는 시기였다. 카사이-오오자키의 난[葛西大崎一揆]을 진압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처리하였다. [우지사토 기[氏鄕記]]에 따르면, 이때 우지사토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군법에 따라 군율을 엄격히 했다고 한다.


최후와 죽을 때 읊은 시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태어났다.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히데요시에게,
 [
우지사토의 진영을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이코우[太閤] 전하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면 이 이상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 죽여야만 합니다]
 
고 진언하여 독을 먹였다고 한다.
이야기로써는 흥미 깊지만 우지사토 독살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지사토가 발병한 것은 1593년의 히젠 나고야 출진 중이었다. 몇 월 몇 일인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하혈(下血)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의 일화에 나오는 듯이 히데요시나 미츠나리가 짐독(鴆毒)을 먹게 하였다면 그해 안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 중국산의 독조(毒鳥[각주:1]) 날개를 술에 담근 후 마시게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죽은 것은 1595 2 7일로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필시 하혈은 암()의 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카이[]의 의사 소우슈쿠[宗叔]의 진찰과 투약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달증상을 띠며 말라갔기에 히데요시도 걱정하여 당대의 명의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 玄朔][각주:2]에게 진찰시켰더니 [배에 물이 차거나 손발에 종기가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1594년. 히데요시는 또 다시 9명의 명의에게 우지사토를 진찰시켰다. 안타깝게도 명의들 대부분이 포기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어 4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의 의학에선 어떻게 판단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암(直腸癌)의 병상(病狀)과 비슷하다.


 그의 사세구()가 물의를 빚었다.

 りあればかねどるものをみじかき山嵐
 끝이 있으니 (바람)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지는 것을 마음도 급하구나 꽃샘바람

누군가에게 독살되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설이 태어났지만 명백한 오해이다. 현대의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암의 질환이다. 우지사토는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것이라 생각한다.

코우토쿠 사(興徳寺)에 있는 우지사토의 묘

  1. 가상의 새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의 양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