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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9 아케치 미츠히데 19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