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이 시대의 사회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원(荘園)'의 잔재인 '총촌(惣村=そうそん)' 즉 센고쿠[戦国]의 마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 道長]로 대표되는 쿠게 정치[公家政治]가 일본 전국에 '장원'이라는 작은 독립영토를 만들었다. 바로 연공(年貢)인 세(稅)를 면제받는 '사령(私領)'이다. 무사(武士)는 이 '장원=사령'을 경호하는 무장민(武装民)에서부터 출발한다.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들어서자 '슈고 직[守護職]'이 고정화되어 일부 씨족이 그 지역에서 강대해져 갔다. 그러자 '슈고 직'의 권력이 강대해져가는 것을 위험시하여 그것을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 생겨났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守護不入権]'이다.

 슈고 불입권의 주된 내용으로는 슈고에 대한 징세거부권(徵稅拒否權)과 경찰권의 획득이다. 총촌(惣村)은 막부(幕府)에 직접 납세한다는 명목으로 슈고에게 조세(이를 “단젠[段銭]”이라 하였다)를 거부하였고, 도둑과 같은 범죄자를 잡으려고 하더라도 슈고의 가신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마을사람들이 범인 포박하는 것을 기다린 후 인도받았다.

 막부에게서 이 권리를 얻은 마을은 '장원'에서 보다 자립성이 강한 '총촌=센고쿠의 마을'이 되어 갔다. 와카야마 현[和歌山県]의 어느 마을에서 발견된 1491년의 마을 규정에는 센고쿠 시대의 마을 자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 도둑이 생기면 현행범으로 처형할 것. 영주(領主)에게서 문책이 있을 시에는 마을이 책임지고 설명할 것

 현대인이 '센고쿠의 마을'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여기저기 산재한 '외국대사관'을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주일미군기지'도 좋은 예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주일미군기지는 '일본'이 아니다. 일본의 통치시스템인 '도도부현(都道府県)'에서 격리되어 있는 어엿한 '미국'이다. 거기서 근무하는 군인 및 그 가족들을 미국인들이며, 세금을 미국에 납세하고, 죄를 지으면 기본적으로 미국 법률에 따라 심판 받는다. 일본의 행정단위인 도도부현에는 지방세의 '징수권'도 없으며 각 도도부현 경찰에 위한 '사법경찰권'도 없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이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경우 '슈고'는 '도도부현 지사'이며, 막부가 '일본정부', 총촌이 '주일미군기지'가 된다. 즉 당시의 일본에는 '막부'라는 중앙정부하고만 연결된 총촌지배자 즉 호족들의 '주일호족기지'가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그 안에서 농민들은 밭을 갈고 농작물을 자신들의 주인인 호족에게 납세하였다. '센고쿠의 마을'은 '슈고'에게 납세하지 않았다.

 이때 주의해야만 할 것이 '슈고 불입권'으로 인해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이 권리는 '슈고'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막부가 인정한 제도이다. 이 '슈고 불입권'을 원했기에 '센고쿠의 마을'은 막부의 권위를 계속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슈고'에게,

우리들은 막부에게서 슈고 불입권을 받은 곳이다. 그러니 연공을 바칠 수 없다
고 말하고 싶어서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막부에서 파견된 ‘슈고’는 ‘센고쿠의 마을’을 통치하는 호족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미증유의 기후변동 즉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찾아와 대기근이 민중을 습격하였다. 극단적 경제 정체 속에서 의지하던 막부는 경제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먼 존재가 되었으며,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는 믿을 만한 권력이 아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막부를 이용하면서 득이 되는 것은 대의명분일 뿐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모두 자신들이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자 ‘총촌=센고쿠의 마을’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기근으로 흉작이 들었을 경우에는 옆 마을에 약탈하러 갔다. 그 옆 마을이 머릿수가 많고 강하면 즉 '다이묘우[大名]'라면 그 밑으로 들어갔다. 센고쿠의 마을 스스로가 어느 다이묘우에 붙을까를 판단하였다. 힘이 있는 호족은 많은 총촌을 집어삼키며 거대화하였고, 힘이 없으면 흡수되어 갔다. 슈고 직에 있던 가문이 강력하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되었고, 가문빨이 없더라도 마을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던 사람은 ‘힘 있는 자’가 되어 하극상(下克上)을 실현해 갔다. 이렇게 전국의 ‘총촌=주일호족기지’의 재편성이 행해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의 작품 속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가 ‘이마가와 가나 목록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거론한,

현재는 모든 것에 있어 막부의 권위에 의하지 않으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법률을 만들고 치안을 유지해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기에 슈고 불입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고 선언한 것은 막부에게 임명 받은 슈고가 막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이러니함이었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이마가와 요시모토라는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기습을 받아
오케하자마에서 죽은 것으로써 유명하다.
 토쿠토미 소호우[富 蘇峰]는 이 일전을 '귀족적 문약(文弱)과 평민적 무강(武强)의 충돌'이라 하였다. 요컨대 구() 명문가와 신흥 세력의 승부라고 한 것이다.


 요시모토의 풍채에 대해서 기록이 있다.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었다고 한다. 머리를 밀지 않고 머리를 뒤로 넘겼으며(総髪), 이빨은 검게 물들인(漿) 상급귀족[公卿]처럼 화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軍家]과 혈연인 명문가이다.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 義兼]를 선조로 하여, 증손자인 쿠니우지[
氏]가 이마가와 씨를 칭하게 되었다. 쿠니우지의 손자 노리쿠니[] 때부터 스루가[駿河]를 영유(領有). 유명한 사서 '난태평기(難太平記)[각주:1]'의 저자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각주:2]은 이 노리쿠니의 아들이다.[각주:3]


 이마가와 씨는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의 슈고[守護][각주:4]로써 토우카이[東海]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다. 쿄우토[京都]와의 관계도 깊어서 귀족[公家]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요시모토의 모친도 다이나곤[大納言] 나카노미카도 노부타네[中御門 宣胤]의 딸이다.

 요시모토는 부친 우지치카[氏親]의 다섯째 아들로, 우지치카의 첫째 아들은 우지테루[氏輝]였다. 또한 우지치카의 누나는 나이다이진[大臣] 산죠우 사네모치[ 望]의 부인이다.
 쿄우토[京都] 문화에 심취한 요시모토는 순푸[駿府]의 구석구석까지 쿄우토로 만들었다. 지명도 쿄우토에 있는 키요미즈[
水], 아타고[愛宕], 키타야마[北山], 니시야마[西山]라 명명하였고, 케마리[蹴鞠]와카[和歌] 모임도 활발히 열었다.


 쿄우토 문화에 심취한 무장답게 요시모토에게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전투에서였다. 부하에게 적 선봉의 상태를 알아보고 오라며 정찰시켰는데, 이 부하가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정작 중요한 정찰을 하지는 못하는 대신 적의 목을 가지고 왔다.
 요시모토는 화를 내며 명령 위반에 따라 엄벌을 내리려 하였다. 센고쿠 무장으로써는 당연한 처치였다. 하지만 이 부하가 꾀를 써서, 옛 시를 이용한 것이었다. 후지와라노 이에타카[藤原 家隆]

솔새에 빠져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슬에 꺾인 줄기
苅萱に身にしむ色はなけれども、見て捨て難き露の下折
라는 시를 읊었다.
 요시모토는 이를 듣자마자 태도가 변하였다.
 괘씸한 녀석이지만 순간적으로 옛 시를 생각해내다니 기특하구나
 라고 말하며 군령 위반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 만약 노부나가였다면 아니 노부나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령 위반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요시모토가 무장으로써 실각이라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후세에 요시모토에게 나쁜 평판만이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 오케하자마의 패배자라는 것에 있다. 후세의 기록이라는 것은 모두 승리자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법이다. 승리를 한 노부나가는 후에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기에, 그와 대비되면 당연히 요시모토가 불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에도 시대가 되면서 신격화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소년기에 이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여 악의를 가지고 요시모토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요시모토가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될 때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1536
. 형인 우지테루가 죽었을 때 요시모토는 걸승(傑僧) 타이겐 셋사이[太源 雪斎]의 제자로 후지 군[富士郡] 젠토쿠 사[寺]의 중이었다. 그리고 가독(家督)을 둘러싸고 역시 출가해 있던 배 다른 형인 에탄[探]과 다투어 승리하여 패한 에탄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각주:5]
 이때 요시모토는 환속하여 이마가와 가문을 잇고 은사(恩師) 타이겐 셋사이를 군사로 맞이하였다. 요시모토의 시대가 되자 종래의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에 더하여
미카와[三河]도 세력하에 두었다. 요시모토는 결코 쿄우토 문화에 정신 팔린 용렬한 무장이라는 일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케하자마의 전투는 1560 5 19일에 일어났다.
 이 때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의 대군을 이끌고 서상(西上)을 개시하였다. 도중에 있는 오와리[尾張]의 그것도 반밖에 영유(領有)하지 못하고 있는 오다 가문[織田家]은 단번에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깃발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각주:6]
 오와리에 침입한 이마가와의 군세는 이미 오다 측의 성 두 개를 점령하고 있어 기세가 올라 있었다. 19. 요시모토의 본진은
덴가쿠하자마[楽狭]에 도착하였다.
 이날의 요시모토의 모습은 끝부분에 금칠을 한
안장을 얹힌 말을 타고서, 황금으로 용이 세워진 투구에 몸통이 흰색으로 된 갑옷을 입고, 이마가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28( 84cm)의 오오타치[大太刀]를 차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위엄서린 무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전(緖戰)의 승리에 취하여 노부나가를 얕보고 있었다.

 한편 이날 새벽 키요스[清洲]를 출발한 노부나가 군세는 질풍과 같은 기세로 달려와 덴가쿠하자마의 이마가와 본진까지 다가왔다. 때마침 폭풍우가 불어와 이마가와 본진은 혼란에 빠졌다(이에 대해선 아케치 님의 블로그: [ 說 ]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을 참조해 주시길).


 요시모토는 죽는 순간까지 잘 싸웠다.
 돌격해 온 오다 측의 핫토리 코헤이타[服部 小平太]의 창대를 자르고 무릎을 베어 물리쳤다. 거기에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가 달려들어 마운트 포지션을 허용했지만, 요시모토는 목이 베이는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신스케의 집게손가락을 물어 뜯으며 싸웠던 것이다.


 참고로 오다 측에 있던 요시모토의 목은 나루미 성[鳴海城]에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가 건네 받아, 순푸[駿府]로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19년 태어났다. 우지치카의 다섯째로 처음엔 불문에 들어가 쇼우호우[承芳]라고 불렸지만, 환속하여 형 우지테루의 뒤를 잇고 요시모토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2개 지역을 영유(領有)하여 토우카이[東海] 지방 No.1 다이묘우[大名]가 된다. 미카와[三河]를 손에 넣은 후,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상경을 꾀하였지만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습당하여 전사하였다. 42.


Ps; 역자인 저는 상경설을 부정합니다(물론 요즘 분위기도 비상경설이 대세지만요). 이 이야기는 길어지니 차후에……

  1. 이마가와 씨의 역사, 가계, 공적 등이 쓰여 있다. [본문으로]
  2. 1326~1420(?).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무로마치[室町] 중기의 무장. 료우슌[了俊]은 불문에 들어서 부터이며, 이전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 貞世]라는 이름을 썼다. 1371년 큐우슈우[九州] 지역을 관리하는 막부 직책인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가 되어 큐우슈우의 남조 측을 구축하나, 남북조(南北朝)가 합체하자 1395년 큐우슈우탄다이에서 경질된다. 1399년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内 義広]와 손잡고 반항하지만 실패.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지녔으며, 고려의 정몽주와 회담하여 왜구 억제를 꾀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는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의 후손은 아니다. 료우슌이 큐우슈우탄다이[九州探題]에서 물러난 뒤 스루가 절반의 슈고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마가와 종가(宗家)의 당주이며 료우슌의 조카인 이마가와 야스노리[今川 泰範]가 슈고였다. 요시모토는 야스노리의 후손.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5. 이를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근래엔 상락설(上洛說)보다는 오와리[尾張] 점령을 위한 설이 강한 듯. [본문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60년 5월 19일 전사(戰死) 42세.

1519년 ~ 1560년.
스루가
[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 형 우지테루[氏輝]가 급사(急死)한 뒤 배다른 형인 겐코우 에탄[玄広 恵探]을 물리치고 가독(家督)을 상속하였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와 동맹을 맺고 상락(上洛[각주:1])을 개시하지만,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패하여 살해 당했다.





결전 오케하자마

 1560년 5월 12일.
 지부다이후[冶部大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자신이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2만 5천의 군세를 이끌고 순푸[駿府]를 출발하여 정서(征西)의 길에 올랐고 그날은 후지에다[藤枝]에 머물렀다.

 이때 선발 부대는 카케가와[掛川]에 도착해 있었다. 30Km에 이르는 길가엔 군마(軍馬)의 울음소리, 갑옷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나 장병(將兵)들의 노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씨[足利氏][각주:2]의 한 갈래로, 코우안의 역(弘安の役 – 2차 몽골 내습) 즈음, 키라 나가우지[吉良 長氏]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미카와[三河] 이마가와[今川]라는 땅(현 아이치 현[愛知県] 니시오 시[西尾市] 이마가와 쵸우[町])를 영유(領有)하며 이마가와 씨[今川氏]를 칭하게 된 때부터 시작된다.

 3대 노리쿠니[範国] 때, 처음으로 스루가 슈고[駿河守護][각주:3]에 보임(補任)되어, 이후 순푸를 중심으로 영지(領地) 지배를 강화해 갔다.

 요시모토의 부친 우지치카[氏親] 시대에 토오토우미[遠江]를 손에 넣었고 미카와[三河]에 침공하였다. 미카와는 이마가와 씨 발상(發祥)의 지(地)이며, 요시모토는 출진 직전에 미카와노카미[三河守[각주:4]]에 임명되었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 3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영내(領內) 안정은 그를 쿄우[京] 문화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그를 추앙한 쿄우토[京都]의 상급귀족[公家]들이나 승려, 렌가 사[連歌師]들이 빈번히 왕래하여 순푸는 번화하였다. 이 즈음 '카이도우[海道] 제일의 무가(武家)=海道一の弓取り' 이마가와 씨는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요시모토의 출진은 상락이 목적이 아니라 미카와와 오와리(尾張) 국경의 평정에 있었다. 일만 잘 진행된다면 오와리 깊숙이 진출하여 오다 가문[織田家]의 젊은 당주 노부나가에게 철퇴를 가하고자 함에 있었다.

 요시모토의 본진은 다음 날인 13일에는 오오이가와[大井川] 강을 건너 카케가와에 입성하였고 이후 히쿠마[引馬], 미카와의 요시다[吉田], 오카자키[岡崎], 치리후[池鯉鮒]에서 숙영(宿營)을 하며 18일에는 오와리 쿠츠카케 성[沓掛城]에 입성하였다.

 다음 날에는 이른 새벽부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 –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등을 선봉으로 삼아 오다 측의 와시즈[鷲津], 마루네[丸根] 요새에 공격을 개시, 정오 전에는 함락시켰다. 요시모토의 본대도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큰길을 벗어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따라 오오타카 성[大高城]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시점에서 오와리[尾張]에 있는 이마가와 측  최전선 기지인 나루미 성[鳴海城]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고 확신한 요시모토는, 시작부터 전해져 오는 승리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 '오케하자마[おけはざま]'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타이[謡]를 세 곡 음송(吟誦)했다고 한다. 요시모토를 따르는 군사들은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져 또한 이세 만[伊勢灣]의 해안을 따라 넓게 퍼져있던 상태라 본진에는 500명 정도의 친위대만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키요스 성[清洲城]을 출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아츠타 궁[熱田宮]에 들러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동쪽에서 피어오르는 두 줄기 검은 연기를 보았다. 와시즈, 마루네가 낙성(落城)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만조(滿潮)가 된 해안가의 길을 피해, 나루미 성(城)을 우회하여 테코시가와[테고에(手越川)] 천이라 불리는 작은 하천을 따라 나아갔다.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본진을 급습하여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밀히 '오케하자마'의 산기슭까지 다가갔을 때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돌풍은 노부나가 군(軍)의 후방에서 요시모토 본진 쪽으로 불어 노보리[幟], 사시모노[指物]를 날려버렸다.

 날씨가 맑아지자마자 노부나가는 큰 목소리로 총공격을 명했다. 거듭 돌격해 오는 노부나가 군(軍)에 요시모토가 타고 있던 가마를 지키는 친위대 300여기(騎)는 차츰 밀려 무너지며 언덕을 내려가 쿠츠카게 방면으로 밀려났다. 최초로 달려든 핫토리 고헤이타[服部 小平太]를 요시모토 스스로 칼을 뽑아 대항하여 핫토리 고헤이타의 무릎을 베어 물리쳤지만, 그에 이은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에게 목이 베어졌다. 요시모토 42세로 한창 일할 나이였다.

 노부나가는 그날 중에 요시모토의 목을 가지고 키요스로 개선하였다. 다음 날 수급 확인을 한 후, 키요스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남쪽의 스가구치[須賀口]라는 곳에 목 무덤을 만들어, 천부경(千部経[각주:5])을 실행케 하고, 불탑을 세워 요시모토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요시모토의 수급은 나루미 성(城)을 계속 지키며 물러나지 않고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에게 건내져 스루가[駿河]로 보내졌다.

말년의 도전

 요시모토의 죽음은 에도 시대 이후에 창작된 책들에 의해 쿠게[公家] 문화에 빠진 교만과 방심의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오하구로[鉄漿]를 해서 상급귀족[公家]처럼 몸을 꾸몄으며 숏다리에 허리가 길어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우유부단하여 도무지 센고쿠[戦国]의 무장답지 않은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 것들은 창작된 요시모토 상(像)이다.

 그렇기는커녕 부친 우지치카가 제정한 영지(領地) 지배법인 '카나 목록[仮名目録]'을 보완한 '카나 목록 추가[仮名目録追加]'라고 하며 추가 21개조를 정하여, 토지조사[検地]의 실시나 상공업 발전 촉진, 부역(賦役)이나 전마(傳馬) 제도의 정비 등 센고쿠 다이묘우[大名]로서 최상급의 영지(領地) 경영, 시책을 착착 실시하여 영내(領內) 장악에 자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시모토는 1558년 즈음부터 후계자인 우지자네[氏真)에게 가독을 일부 위임했다. 적어도 안정된 스루가[駿河]를 맡기고 자신은 미카와[三河], 오와리[尾張]라는 신천지의 영토화를 목표로, 상락을 향한 포석을 깔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했던 요시모토의 의욕은 노부나가에게 산산이 부서져 한 여름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1.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본문으로]
  3. 슈고[守護]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4. 이는 막부와는 별개로 쿄우토[京都]의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 [본문으로]
  5. 명복을 위해서 천 명의 중이 똑 같은 경문을 한 번씩 읽는 것, 반대로 한 명의 승이 천번을 읽을 때도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천 명의 중을 모으기 쉽지 않으니 여기선 후자인 것 같음. [본문으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

1614 12 28 병사 77

1538~1614.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아들.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자 가독을 상속. 스루가(駿河), 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를 영유했지만 타케다(武田)()에게 스루가를, 토쿠가와(德川)씨에게는 미카와와 토오토우미를 빼앗겼다. 처가인 호우죠우(北条)()를 의지하였으나 후에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에게도 쫓겨나 토오토우미의 하마마츠(浜松)로 거처를 옮겼다. 후에 쿄우토(京都)에서 출가하여 소우긴(宗誾)이란 호를 칭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





유랑의 귀공자


 1560 5월.

 부친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었을 당시 우지자네는 22세였다.

 다음 달인 6월에 죽은 부친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기는 했지만 영내의 동요를 억제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느라 부친의 원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싸움을 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소극적인 자세가 일문(一門[각주:1]), 후다이(譜代[각주:2])들의 이탈을 초래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손 잡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스루가에 침공해 온 것은 1568년으로, 많은 가신들에게 버림받은 우지자네는 순푸(駿府)의 이마가와 관()을 지키지 못하고, 아사히나 야스토모(朝比奈 泰朝)카케카와(掛川)으로 피신하였다. 한 해가 다해가는 굉장히 추운 겨울에 우지자네의 부인은 가마 같은 탈 것도 없이 걸어서 도망쳤다. 우지자네 부인의 부친 즉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이 치욕을 갚지 않고선 견딜 수 없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다음해 정월.
 
이번엔 서쪽에서 토오토우미에 침공해 온 이에야스가 카케카와성을 포위하였다. 몇 번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농성군측은 잘 버텼지만 5월이 되자 결국 성을 이에야스에게 넘기고 우지자네는 호우죠우 가문이 파견한 병사들에게 호위받으며 처가댁인 오다와라(小田原)로 갔다.
 
우지자네는 [駿河国守]의 역직[각주:3]을 호우죠우 우지마사의 아들에게 물려주니, 이것으로 노리쿠니(範国) 이래 25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스루가 슈고쇼쿠(駿河 守護職)에, 아시카가 가문과 친족관계인 명문 이마가와 씨()는 실직적으로 멸망한다. 그 우지자네는 이즈(伊豆) 토쿠라(戸倉)성이나 오다와라 근처의 하야카와(早川)로 거처가 옮겨졌다고 한다.

 
오다와라 호우죠우씨에게 보호 받던 우지자네의 평온도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다다음 해인 1571년. 우지야스가 죽자 우지마사(氏政 - 우지자네 처의 오빠 즉 매형)는 그 때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타케다 신겐과 손잡는다. 우지자네는 사가미(相模[각주:4])에서 쫓겨나,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떠난다. 이 때 마지막 가신인 미우라 모토마사(三浦 元政)등에게 여태까지 잘 보필해 주었다는 뜻을 쓴 문서를 써주어서는 떠나 보냈다[각주:5].

 1575년에는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오다 노부나가를 알현하고 케마리(蹴鞠[각주:6])를 보여주었던 것은 유명하다. 이 당시 우지자네는 스루가 국주(駿河 国主)의 자리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여도 영지를 얻는 것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쿄우토와 하마마츠(浜松)사이를 왕래했을 것이다. 이에야스의 휘하로 타케다 공격에 참가하였고 후방 지원이나 미카와 스와바라(諏訪原)성 수비에 종사하였지만, 타케다씨() 멸망 후 스루가는 이에야스에게 주어진다.


말년의 안식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후, 히데요시의 시대가 되자 격세지감을 느꼈는지 출가하여 소우긴(宗誾)이란 호를 칭했다. 무가동량(武家棟梁)이라는 명문가의 이름에서 해방되어 50세가 넘어서 이제서야 자신의 체질에 맞은 삶을 손에 넣은 것이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에 따르지 않고 마지막 거처를 쿄우토로 정했다. 이에야스에게서 오우미(近江) 5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도 한다.


 우지자네는 쿄우토 시죠우(四条)에 거처를 정하였고, 이마가와씨()가 잘 나갈 때 순푸에 내려와 있던 레이제이 타케카즈(冷泉 為和)의 손자 타케미츠(為満),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의 아들 토키츠네(言経)등과 교류를 즐기며 귀족(公家)들이 개최하는 가회(歌會)에 빈번히 참석했다.
 
야마시나 토키츠네에게서 [슈우가이쇼우(拾芥抄)]를 빌려 고전 문학을 배워서는 고전 주석서를 옮겨 적는 것에 몰두하였다. 희귀한 책이나 차 도구 등의 매각을 알선하거나 특기인 환약이나 붙이는 약 등을 만드는 데 힘썼다. 몰락한 쿠게의 전형적인 생활이었다.

 1612
74세의 우지자네에게 마지막으로 전환의 시기가 찾아온다.
 
익숙한 쿄우토의 생활을 정리하고 에도(江戶)로 향했다. 우지자네의 첫째 아들인 노리모치(範以)는 이미 죽었지만, 손자인 나오후사(直房)가 전년인 1611년에 2대 쇼우군(将軍)인 히데타다(秀忠)를 섬겼기 때문에 그를 돌보기 위하여 에도로 갔을 것이다. 또는 차남 타카히사(高久)도 이미 1598년에 히데타다를 섬겨 코우즈케(上野)에 천 석을 받으며 시나가와(品川)()를 칭하며 에도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늙은 양친을 에도로 맞이했다고도 할 수 있다. 우지자네는 에도로 가는 도중 순푸에서 고희를 맞이한 이에야스를 방문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해, 오랫동안 역경을 함께 보내 왔던 부인을 잃는다. 이 때문에 기운이 쇠했는지 뒤를 쫓는 듯 다음 해인 1614년 에도에서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막을 내렸다.

 
손자인 나오후사는 그 후 코우케(高家[각주:7])의 반열에 오르고, 영지도 더해졌으며 조정 관위도 종사위하(從四位下)로 올라갔다. 우지자네 부인의 5주기에 해당하는 1618년에 우지자네 부부가 대좌하는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짜리 몽탕한 체형, 커다란 코는 요시모토와 닮았다. 한 켠에는 책상이 그려져 겐지(源氏) 동량(梁)의 명문가이면서도 풍류의 세계에 살았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역사가 어떤 평가를 내리건 말년의 우지자네는 자신이 살고 싶은 생을 살았으며 일족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1. 친족들을 이름. [본문으로]
  2. 대대로 섬겨온 부하 가문.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4. 오다와라가 있던 지방의 이름. [본문으로]
  5. 이런 문서는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상급 귀족(公卿)들이 발로 하던 공놀이. 현재 축구의 리프팅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7. 막부의 제례를 감독하던 직책. 또한 쿄우토 조정에서 오는 사자(使者)의 접대나, 쇼우군을 대신하여 쿄우토의 조정으로의 사자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