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일본판을 번역한 것. 발번역이다.

모토나리가 1557년 세 아들(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선 '三子教訓状'이라고 한다.

제1조.

몇 번이고 말했겠지만, 모우리[毛利]의 성(姓)이 절대 끊기지 않도록 유념해라

제2조.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다른 가문(킷카와, 코바야카와)을 잇고 있지만, 모우리[毛利]라는 두 글자를 소홀히, 등한시 해서는 안 된다. 모우리를 잊는다는 것은 절대로 옳지 못한 일이다. 이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제3조.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세 명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세 명 다 한꺼번에 멸망이라고 생각하라. 다른 가문을 멸망시켜 온 모우리의 자손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원한을 받고 있단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고 하여도, 가명(家名)을 잃었다면 자손 1~2명 생존해 있다고 하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행여라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이다.

제4조.

타카모토는 모토하루, 타카카게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지시해라. 또한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모우리가 강력하기에 각각의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기가 뛰어나기에 각각의 집안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모우리 종가가 약해지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부하들의 마음도 바뀌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 속에 새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제5조.

요전에도 말했듯이 타카모토는 모토하루, 타카카게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장남이니까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어떤 것이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형 타카모토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타카모토는 장남이니까 너희들이 따르는 것이 순리다. 모토하루, 타카카게가 그냥 모우리 본가에 있었다면, 가신인 후쿠하라[福原]나 카츠라[桂]와 같이 부하가 되어 어떤 것이건 타카모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지금은 둘 다 다른 가문을 잇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들은 모우리의 가신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좋다고 생각한다.

제6조.

이 가르침은 손자의 세대가 되어도 마음에 새기고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모우리, 킷카와, 코바야카와 세 가문은 언제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고는 있지만 먼 미래까지는 어찌 할 수도 없다. 적어도 너희들 세 명만은 반드시 이런 다짐을 지키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가명도 이익도 함께 잃게 될 것이다.

제7조.

죽은 니들 어머니 묘우큐우[妙玖]에 대한 공양과 명복을 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제8조.

고류우[五龍] 성주(城主)인 시시도 타카이에[宍戸 隆家]에게 시집간 딸을 나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니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니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잘 대해주길 바란다. 그래주지 않는다면 나는 니들을 원망할 것이다.

제9조.

지금 사리분별을 못하는 아주 어린 애들이 있다. 그건 7살의 모토키요[穂井田 元清], 6살의 모토아키[毛利 元秋], 3살인 모토토모[出羽 元倶]이다[각주:1]. 장래 머리와 마음이 남들만큼만 되어 성인이 된 애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겨 어디 먼 곳에라도 땅을 나누어 주길 바란다. 만약 우둔하고 좆병진이라면 어떻게 하든 상관 없다. 아무런 도움을 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니들 셋과 고류우[五龍]와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나는 정말 불행할 것 같다.

제10조.

나는 전쟁에서 많은 생명을 죽게 만들었다. 이 인과응보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기에 마음 한 편에선 항상 슬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너희들 각자도 이것을 마음에 새겨,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이 모토나리가 이 인과응보로 인해 갑자기 죽더라도 새삼 마음의 준비가 된 니들 셋에게는 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11조.

나 모토나리는 20살 때에 형 오키모토[興元]와 사별하고 그 이후 오늘 날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크고 작은 파도에 휩싸였던 모우리 가문도 다른 가문들, 많은 적과 싸워 오며 여러 가지 변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는 변화 속에 나 한 사람만이 거친 풍랑을 헤치고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것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 되돌아보면 내 몸을 위해서 특별히 조심하고 있는 것도 없고, 또한 골격이 크고 건강한 것도 아니며, 지혜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착한 마음을 가졌다며 신불이 특별히 돌보아 줄 정도도 아니다. 어쨌든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난국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내 나름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하다. 그렇기에 지금 하루라도 빨리 은퇴하여 평온한 여생을 보내며, 맘 편히 다음 생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의 세태를 보면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다.

제12조.

11살 때, 사루가케 성[猿掛城]에 살고 있을 때,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의 집에 여행을 하던 한 스님 와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의하였다. 어머님도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나도 역시 11살에 전수를 받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매일 아침 기도를 빼놓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염불을 10편씩 외우는 것이다. 그러면 앞날은 물론 현세의 행복도 바랄 수 있다. 또한 우리들은 옛날부터 현세의 소원을 태양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 한 몸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니 특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니들 셋도 매일 아침 이것을 게을리 하는 일 없이 실행해 주길 바란다. 물론 태양이건, 달 어느 쪽에 하건 같다고 생각한다.

제13조.

나는 옛날부터 이상할 정도로 이츠쿠시마 신사[厳島神社]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오시키바타 전투[折敷畑の合戦[각주:2]] 때에도, 막 싸우려는 참에 이츠쿠시마에서 사자(使者)로 이시다 로쿠로우사에몬죠우[石田 六郎左衛門尉]가 공양미와 승리를 기원하는 두루마기를 가지고 왔기에, 이것은 (승리를 내려주시려는) 신의 뜻이라 생각하여 분투한 결과 이길 수가 있었다. 그 후, 이츠쿠시마에 성을 쌓으려고[각주:3] 배를 타고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적의 군선 세척이 공격해 왔었는데 교전의 결과 다수의 적을 죽이고, 그 목을 성 앞에 나란히 내 걸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어쩌면 이것은 이츠쿠시마에서 대승리를 거둘 전조일 것이라는 것으로, 내가 건너고자 할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신의 계시라 생각하였고, 이츠쿠시마 다이묘우진[厳島大明神]의 고마우신 가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으로 크게 안도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이츠쿠시마 신사를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며 나 역시도 그것을 정말 바라고 있다.

제14조.

지금까지 자주 말해 두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을 이 기회를 빌려 하나하나씩 말하였다. 이제는 이 이상 더 할 이야기는 없다. 내친 김에라고는 하여도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하니 더 이상 바랄 나위 없을 정도로 나는 큰 복을 받았구나. 좋구나 좋아.

  1. 이들 3명은 모토나리의 아들들로 이 편지의 3형제와는 배다른 동생들이다. [본문으로]
  2. 스에군과 싸운 이츠쿠시마 전투의 전초전. 스에 측 7000을 역시 산으로 유인하여 기습으로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 승리함으로써 모우리는 잠시 동안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본문으로]
  3. 미야오 성[宮尾城]을 말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모토하루[元春]가 양자로 들어간 킷카와 가문[吉川家]은 아키[安芸]에서 보면 산인[山陰]측으로 붙어 있는 츄우고쿠[中国] 지방의 명문가로, 원래 아마고[尼子] 측의 무투파로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위협하던 존재였다. 모토나리[元就]는 이 킷카와 가문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킷카와 가문은 모토나리의 부인 묘우큐우[妙玖]의 친정이었다. 그리고 모토나리 여동생이 킷카와 모토츠네[吉川 基経]의 부인이 되어 있는 이중으로 엮인 인척이었다. 모토나리는 부인 묘우큐우가 병으로 죽자 킷카와 탈취 공작을 개시. 킷카와 가문의 노신들을 꼬셔 가중을 분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30살을 넘었을 뿐인 당주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를 억지로 당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는, 그의 아들 센호우시[千法師]를 제쳐 두고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모토하루를 후계자에 앉혔다. 거기에 이 가문 강탈을 완벽한 것으로 하기 위해 오키츠네 부자를 살해한 것이다.

 모토하루는 색다른 에피소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엄청난 추녀를 부인으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토하루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기에 부친 모토나리는 모토하루에게 중신을 보내어, 결혼에 적당한 여성이 있는가 하고 협의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토하루는, '제 휘하에 있는 쿠마가이 노부나오[熊谷 信直]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답한 것이다.
 사자인 중신은 물론 그 보고를 받은 모토나리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쿠마가이의 딸은 추녀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모토나리는 설마 미녀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확인해 보자 추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예부터 여색에 빠져 애써 얻은 명장의 칭호를 더럽힌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모두 미녀의 색향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토하루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데려 가려 하지 않는 딸을 제 부인으로 하면 노부나오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사력을 다해 활약해 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모토하루의 말대로 노부나오의 딸과 결혼하자 노부나오는 전쟁터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맹장(猛將)의 이미지를 가진 모토하루 다운 이야기이다.

 처음 전쟁터에 나선 것은 11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모우리 가문은 아마고의 대군에 포위당하여 불과 3000여의 병사로 필사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때 불과 11살인 모토하루가 출진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노신인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가 넬슨 홀드까지 해가며 막았지만 모토하루는 결국 칼까지 뽑아들며 자기 뜻을 관철하여 끝내는 모토나리의 허락을 얻었던 것이다.

 모토하루는 주로 산인 지방 공략을 담당하였다.
 특히 아마고 씨와의 사투는 유명하여 아마고의 용장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가,
 “불구대천의 원수 킷카와 모토하루에게 한번만이라도 칼질 한번 먹이고 싶다”
 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의 병사들을 굶어 죽이는 장기 포위 공격으로 톳토리 성[鳥取城]을 공략한 히데요시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우키[伯耆] 국경으로 다가왔을 때, 그에 맞서는 모토하루의 병력은 6천에 불과하였다. 부하 장수 셋이 철병하지 않으면 참패를 당한다며 비장한 얼굴을 하고 모토하루에게 진언하러 왔다. 그때 모토하루는 곰 가죽 위에서 하품을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명을 보자 ‘우선 마시게’라는 말을 하였다. 곧이어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는 그 상태로 코를 골며 잠에 푹 빠졌다. 세 부하 장수는 이런 호담함에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물러났다. 모토하루는 이때 배후에 있던 다리를 무너뜨려 퇴로를 끊고서는 히데요시 군을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손을 떼고 물러났다고 한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는 달리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세상이 되어 억지로 끌려 나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출진했지만, 종군 중 등에 악성 종양이 생겨 부젠[豊前] 코쿠라 성[小倉城]에서 죽었다.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30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산인[山陰] 공략에 공을 세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세상이 되자 그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1584년에 은거하였다. 1586년 죽었다. 5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