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가즈토요[ 一豊]

1605 9 20일 병사(病死) 61.

 

1546 ~ 160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の戦い] 등을 경험하였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휘하에서 토오토우미[遠江] 카케가와[掛川] 성주(城主)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토사[土佐] 일국을 하사 받아, 토사 번[土佐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즈토요에게 말을 살 수 있는 돈을 건 낸 부인과의 일화가 유명.

 

 

 




세키가하라[ヶ原]와 카즈토요

 

 [쌈짓돈]으로 남편에게 명마(名馬)를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그 명마 덕분에 전공을 세워 출세한 일화가 유명해져 내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부인 치요[千代 와카미야 토모오키[若宮 友興]의 딸, 후의 켄쇼우인[見性院]].

 그런 현모양처가 이목을 끌기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장이 아니라 여겨지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이지만, 수많은 전공을 세워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가로(家老)에 임명되었으며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평정된 다음에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지(要地)인 카케가와 성[掛川] 5만석이 주어졌다.

 

 그렇게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받은 카즈토요였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이에야스[家康]에게 접근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 비축한 식량뿐만 아니라 아예 카케가와 성을 동군에게 통채로 바쳤다.[각주:1] 이것을 계기로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도 앞다투어 성을 받쳤다고 한다. 더구나 조카인 마사토요[政豊]를 오다와라에 인질로 입성시키고는 출진하였다.

 이런 카즈토요의 행동에는 처 치요의 조언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치요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동향과 여러 다이묘우[大名]부인이나 자녀의 정세 등을 기록한 밀서를 남편에게 보내면서, 밀서를 전하는 전령의 입을 통해서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토사[土佐]의 태수(太守)

 

 세키가하라[ヶ原]에서의 전공으로 토사[土佐] 20만석으로 가증(加增)된 카즈토요는 1601년 우라토[浦戸]에 입성했다.

 카즈토요는 영국(領國) 통치의 상징으로써 같은 해 10월에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 - 후에 코우치 성[高知城]]으로 개명 - 의 축성과 성 밑 마을[城下町]의 경영에 착수했다. 이 배경에는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 체제를 불식(拂拭)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쵸우소카베 유신(遺臣)의 습격을 경계해가면서 축성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각주:2]. 한편 이 축성과 성 밑 마을 경영은 야마우치 가문을 결속시켜 가신단 편성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코우치 성이 굉장히 실전적인 성곽인 것을 보면 카즈토요는 쵸우소카베 유신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카즈토요는 우라토 반란[浦戸 一揆][각주:3]나 타키야마 반란[一揆]의 평정에 고심했다.

 

 1603 3 25일.

 종사위하(四位下) 토사노카미[土佐守]가 되었지만 영내(領內)에는 여전히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11월에는 타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 左馬助] 등이 타키야마 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타키야마 잇키이다. 야마우치 나이키[ 記], 야마우치 카몬[ 掃部]을 파견하여 이를 간신히 처리했다.

 

 카즈토요는 성 밑 마을의 건설과 함께 도로의 정비, 중신(重臣)을 각지에 배치한 지배 체제의 강화, 검지([각주:4]), 인구 조사 등 농촌 지배, 법제의 시행 등 영국 지배의 확립에 정력을 쏟았다.

 1601년에는 가신의 적극적인 등용, 지배의 조직화를 꾀함과 동시에 영내(領內)순시하며 지형(地形), 풍토, 사람, 산업 등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힘썼다.

 

카즈토요의 후계자

 

 카즈토요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로 동생 야스토요[康豊]의 아들 즉 카즈토요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니마츠[松]를 양자로 삼았다. 쿠니마츠는 1605 5월에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를 알현했을 때 '타다[]'라는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타다요시[忠義]라 개명했다.[각주:5]

 

 그 이전인 4 17일.

 쿠니마츠(후의 타다요시)가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에야스의 양녀 쿠마히메[이에야스의 이부제(異父弟)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 定勝]의 둘째 딸)와의 혼약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안타깝게도 카즈토요가 죽은 뒤인 1606 4 17일에 행해졌지만 타다요시는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서임되어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관된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인척 관계를 맺는 것에 성공한 카즈토요는 야마우치 가문[山内家]의 장래를 걱정했던 만큼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안심하여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5개월 뒤인 1605 4 20(21일이라는 설도 있다) 죽었다. 향년 61(60세라는 설도 있음).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지주막하출혈의 가능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즈토요의 처가 쌈짓돈을 주어서 명마를 사게 했다는 내조의 공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야마우치 가문 사료 카즈토요공 기록(山内家史料一豊公記)]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당시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인지 어떤지 판단할 순 없지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6]]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7]], 무로 큐우소우[室 鳩巣[각주:8]]가 쓴 [큐우소우 소설(鳩巣小說)], 유아사 죠우잔[ 常山] [죠우산 기담(常山紀談)] 등에는 기록되어 있기에 에도 시대 중기 즈음에는 이 이야기가 유명했을 것이다.

  1.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항상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카게무샤[影武者]와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즈토요가 토사[土佐]로 입국하기 전에 토사[土佐]의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들이 우라토 성의 개성을 거부. 개성 조건으로 그때까지의 주군인 모리치카[盛親]에게 토사[土佐] 반국(半国)의 할양을 요구하다 몰살된 사건. [본문으로]
  4.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5. 상기에 세키가하라 때 인질로 받쳐진 마사토요(政豊)의 형이다. [본문으로]
  6.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7.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 번주[甲府藩主]로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 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8.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 8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브레인. [본문으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614년 1월 19일 병사(病死) 69세.

1546년 ~ 1614년.
데와[出羽] 야마가타[山形]성주. 쇼우나이[庄內] 지방에 진출해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들과 싸웠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호우죠우 씨[北条氏]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공격하자 참진(參陣)한 덕분에 본령(本領)을 안도받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싸웠다.




효장(驍将)의 전환기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가독(家督)을 놓고 싸운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죽였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일족이라고 해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후환을 남기는 것 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항복한 무장에게는 잘 대해주었기 때문인지 근린의 무장들은 요시아키를 효장이라며 두려워 했다.

 이런 요시아키에게 전환기가 찾아 온 것은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였다. 참진을 명령 받은 여러 무장들은 앞다투어 참진하여 소령 안도장을 받아 내었으나 요시아키는 부친인 요시모리[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어 6월달이 되어서야 겨우 착진할 수 있었다. 그 전에 히데요시가 발령한 사투금지령을 위반하고 쇼우나이[庄內]에서 영토 쟁탈전을 계속해서 벌여 온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눈밖에 나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예전부터 연락을 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부탁해 그의 중재 덕분에 겨우 소령(所領)을 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시아키처럼 늦은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소령에서 아이즈[会津]를 빼앗겼고 참진하지 않았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과 무장들은 소령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일은 요시아키를 놀라게 했다. 때는 요시아키 45세. 1571년 가독을 이은지 20년만에 처음으로 모가미 가문(最上家] 위급존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환심(歡心)가로 변신

 천하인의 강대한 무력과 중앙 집권 정치의 진정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요시아키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남의 영토를 빼앗는 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하였으며 주변의 영주들과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결과 중앙 정권과 끈을 이어 놓는 것에 게을리 한 것을 후회했다[각주:1]. 요시아키는 센고쿠[戦囯]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요시아키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요시아키는 천하인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마음먹고 무슨 짓을 해서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실시한 것이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2])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정에 맞지 않는 오우우[奥羽]를 주요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회의 발달이 늦어져 다른 지역보다 향촌제(鄕村制)가 미발달한 오우우에서 이것을 강행할 경우 각지에서 호족의 내란과 농민들의 발발이 예상되었기에 히데요시도 상당한 각오로 임한 것이었다. 검지가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복속해 있던 무장과 호족들의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커다란 위험이 예상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솔선해서 처자를 동반하여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아이즈의 코우토쿠지[興德寺]에 가서 알현했다. 이 때의 일이 [다테 가문 문서(伊達家文書)]에 남겨져 있다. 참고로 요시아키는 다테 가문[伊達家]와 싸우기도 했지만 당주인 마사무네[政宗]는 요시아키의 여동생 요시히메[義姬]와 선대 테루무네[輝宗] 사이의 적자이니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외삼촌이 된다.

 [다테 가문 문서]에는 요시아키의 충성스런 모습에 어처구니 없어하며 혀를 차는 다테 가문과 굉장히 기뻐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노 가문 문서(浅野家文書)]에도 다테와 모가미 가문은 자신들 영내의 호족들의 처자들을 스스로 쿄우토(京都)로 보내 살게 했다고 한다. 남들보다 먼저 처자를 인질로 바친 요시아키와 마사무네는 오우우의 여러 무장들의 모범으로 평가 받았고 다른 무장들도 이것에 따르라는 요청받게 된다. 한 때 히데요시에게 냉우받았던 요시아키는 면목을 세우게 된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말년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영국(領国)의 안태를 지켜 토쿠가와 정권에서는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요시아키이지만 비극은 이 수법으로 인해 생긴다.

 요시아키는 사랑스런 딸인 코마히메[駒姬]를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에게 측실로 받쳤고, 차남 이에치카[家親]를 이에야스의 부하로 사용해 주길 바란다고 보내어 이에야스를 기쁘게 했으며, 셋째 아들 요시치카[義親]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秀頼]를 섬기게 했다.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포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마히메는 [살생관백(殺生関白)]이라는 악평을 남기고 자결한 히데츠구에 휘말려 다른 처첩들과 함께 니죠우 강변[二条 河原]에서 사형 당했다.

 요시아키는 자신도 부친에게 미움 받았으면서도 자신 역시 같은 일을 벌이게 된다. 30세가 되어도 가독을 잇지 못한 장남 요시야스[義康]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이에야스가 언질을 주자 분노한 나머지 모살해버린다. 요시야스가 죽은 후 유품에서 부자간의 사이가 화목하도록 절실히 기도한 기원문이 발견되었다. 후회막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이에야스 쪽에 붙어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싸운 후 부터 요시아키는 병에 자주 걸리게 되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순푸[駿府]의 이에야스를 방문해 모가미가의 안태를 부탁한 후 야마가타로 돌아와 죽었다. 1614년 1월 19일 향년은 69세. 노환에 따른 병이라고 한다.

  1. 1580년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살아 있을 시에 노부나가에게 매와 말을 한 마리 씩 보내 줄을 놓고 있었다. [본문으로]
  2.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구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
1591년 9월 20일 처형 56세.

이곳에 가면 쿠노헤 마사자네가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링크)

1536~1591.
무츠
[陸奧] 쿠노헤[九戶]성주. 쿠노헤씨는 난부[南部]씨의 분가. 종가(宗家)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에 대항하여 거병, 농성하지만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아사노 나가마사[淺野 長政] 등이 이끄는 토요토미 씨[豊臣氏]의 오우슈우 평정군[奧州仕置軍]에 진압되어 일족 전원이 처형 당했다.

봉기결단의 배경

 1591년. 쿠노헤 성주 마사자네는 종가(宗家)의 난부 씨 26대 당주인 노부나오에게 모반을 일으킨다. 당시 마사자네는 56세의 노장이었다. 따라서 봉기는 최후의 도전이었으며,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난부의 정통후계자이다'라고 공언하며, '노부나오는 듣보잡'[각주:1]이라 말하며 마사자네는 오랫 동안 쌓아 온 주변의 여러 호족들과의 우호, 동맹관계에 더하여 일족의 두령으로서의 신망을 바탕으로 그 동안 종가에게 쌓인 반목과 불화를 총결산하는 결단이었다.

 암군(暗君)이라고 평가받던 난부 가문 24대 하루마사[晴政]가 1582년 1월에 죽자, 하루마사 첩의 아들인 하루츠구[晴継]가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츠구는 당주의 자리를 이은 지 20여일만에 급사한다. 부친의 장례 종료 후 눈바람이 심한 밤에 산노헤[三戶]성으로 귀성 중에 자객에게 습격받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독살의 소문도 돌았다.

 이 사건을 꾸민 것은 평소의 거동으로 보았을 때 쿠노헤 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가문은 둘로 나뉘어지기에 이르렀다. 후계자로서 마사자네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마사자네는 동생인 쿠노헤 사네치카[実親]를 추천한다. 사네치카가 하루마사의 둘째 딸과 결혼한 것과 쿠노헤 일족이 난부가 19지족(支族)중에 필두임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등은 23대 야스노부[安信]의 동생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 - 츠가루 지방 당담관(津軽 郡代)]의 아들인 노부나오[信直]를 추천하였다. 노부나오의 부인은 하루마사의 첫째 딸이었다. 한 때 하루마사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 자리에 있었지만, 첩에게서 하루츠구가 태어났기 때문에 차츰 하루마사와 사이가 벌어졌고, 거기에 처도 죽는 바람에 후계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있었다.

 초대 미츠유키[光行]부터 시작되는 난부 분가 중 명문가의 리더[각주:2]이고 또한 쿠노헤, 니노헤[二戶]의 양 군(郡)을 소유하면서 주변 여러 호족을 휘하로 두고 있던 마사자네조차 "노부나오는 예전 하루마사 공에게 미움 받기는 했지만 일시나마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장녀는 죽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말하며 물러났지만 맘속으로는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봉기군 각지에서 우세.

 모반을 일으킨 마사자네가 처음부터 농성전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노부나오가 자신의 적자 토시나오[利直]를 히데요시[秀吉]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히데요시는 마사자네가 사투금지령(私闘禁止令)을 위반했다고 판단. 휘하 장병과 오우우(奥羽) 다이묘우의 세력을 규합하여 10만의 오우 평정군([奥羽仕置軍]을 파견했기 때문에 농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후세에 [쿠노헤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이 반란은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기 전 1월에서 8월말까지 난부령 각지에서 종가 군과 쿠노헤 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전체적으로 봐서 종가군은 패색이 짙었고, 형세에 따라서는 - 하면서 방관하고 있던 여러 호족들도 전부 쿠노헤군에 가담하여 총세 약 5천으로 증가했다. 그에 비해 종가군은 3천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전에 멸망시킨 시와[志波]의 시바 씨[斯波氏]의 잔당들까지도 봉기를 해서 노부나오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9월 1일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였다.

모략에 당하다.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쿠노헤 일족이라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이끄는 대군과 야전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천연의 요해인 쿠노헤성에서 농성하며 무문(武門)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평정군 진영에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為信]의 군 3천이 있었다. 타메노부는 마사자네의 지원을 받으며 츠가루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마사자네는 자신도 권모술수을 잘 부려왔던 사람이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평정군 진영에 있던 노부나오는 어처구니 없었다. 노부나오의 부친 타카노부는 바로 타메노부의 기습을 받아 자결했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마사자네를 물리쳐야 했다.

 쿠노헤 일족은 용감히 싸웠고, 시골의 작은 성이라며 무시한 평정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성군은 하나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모략은 전투에 항상 있는 것이다. 쿠노헤 가문의 묘소가 있는 쵸우코우 사[長興寺]의 사츠텐[薩天] 화상이 모략인 줄도 모르고 권항사(勸降使)가 되었다.

 무장들 중에는 사네치카[각주:3] 한 명만이 끝까지 투항에 반대했다. 후세에 [쿠노헤의 학살(=九戸のなで斬り)]이라 칭해지는 살육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네치카는 성밖으로 달려 나가 싸우다 죽었다. 그리하여 평정군의 공성전은 9월 1일에 시작해서 4일에 끝났다.

 속임수에 빠진 항장(降將) 마사자네 등 8명은 9월 20일 다테[伊達] 영내에 있는 히데츠구의 본영 이와가사키[岩ヶ崎]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다테의 영지에서 처형한 것은 마사자네와 사이가 좋으며 야심가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에 대한 본보기 이기도 했다.

 동장군(冬將軍)이 가까이 왔는데도 화해를 선택한 마사자네의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힐난하는 역사가도 있다. 마사자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오천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서 천하인의 도량을 재어 본 것이다. 무참한 결과만을 보고 정치적인 동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마사자네가 전국의 무대로 올라가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1. 노부나오는 난부 가문의 분가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서장자이다. [본문으로]
  2. 쿠노헤 씨는 미츠유키의 여섯째 아들 유키츠라[行連]부터 시작된다. [본문으로]
  3. 난부가의 후계로 추대되었던 마사자네의 동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