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611 6 4일 병사(病死) 65

1547 ~ 1611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 성주. 처음엔 타케다 씨[武田氏]를 섬겼지만 타케다 씨 멸망 후 자립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西軍)에 속해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괴롭히지만, 서군의 패배로 인하여 항복 개성(開城)하였다. 코우야 산[高野] 자락의 쿠도야마[九度山]에 유폐되었다.










하산(下山)하고 싶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대한 의리를 갚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농성하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농락하였지만, 서군의 패배 후 아들 노부유키[信之]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 노부시게[信繁]] 부자가 시나노 우에다에서 16인의 동반자들과 함께 유배지인 키이[紀伊] 코우야 산으로 향한 것은 1600년 10월 13이었다. 당시 마사유키는 54, 유키무라는 34세였다.


 코우야산에 도착한 마사유키 일행은 사나다지방의 숙방(宿坊[각주:1])인 렌게죠우 원[華定院]에 일년 넘게 체제하였으며 곧이어 쿠도야마에 완성된 사나다 저택으로 옮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유배 생활은 완전 자유로 등산이나 사냥, 수영,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유배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사유키의 마음 속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꿈만을 키워갔다.


 1603년 3월 15신코우 사[信綱寺]로 보낸 편지에, 3년 후의 여름에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이에야스[家康]에게 잘 말하여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또한 몇 년도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편지의 전후로 생각되어지는 가신 쇼우츠 신고로[称津 神五郞]에게 보낸 정월 3일의 편지에도 '새해도 되어 우리들에게 곧 하산의 명령이 내려질 것 같다' 근거 없는 기쁨을 전하며 하산의 명령을 계속 기다렸다.


고향에 돈을 요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의 명령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 한[각주:2] 무장의 의지도 차츰 꺾여 갔다. 더욱이 동반자나 하인들을 포함한 유배생활은 대가족이었기에 돈이 많이 들었다. 생활비는 노부유키[信之]가 보내주는 돈과 렌게죠우 원[連華定院]에서 바치는 적은 세금, 거기에 감시역인 와카야마 성[和歌山城]의 성주(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에게서 매해 보내지는 50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대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도는 불명이지만 정월 5일의 편지에 셋째 아들 마사치카[昌親]에게서 40냥 중 20냥을 확실히 받았지만, 빚이 많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 힘드니 남은 20냥도 하루속히 보내주길 바라며 빨리 보낼 수만 있다면 5~6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마사유키는 빚에 찌들린 힘든 나날들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계속된 돈 요구나 재촉에 노부유키는 그때마다 보내주었고 또한 정월이 되면 돈과 물품을 보냈으며 편지도 왕성히 오고 갔다. 편지의 왕복이야말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약해져 버린 과거의 지장(智將)


 노부유키쪽에서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마사유키는 차츰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을 내뱉게 되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이라고 여겨지는데 첫째 아들 노부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로 인해 무엇을 해도 끈기가 없어 지쳐만 간다고, 왕년의 지장(智將)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한 듯한 약한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최후의 말년에는 자주 병이 걸려, 1609년 혹은 161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4 28일자 우에다[上田]의 유우안 호우인[夕庵法印]과 가로(家老) 오오쿠마 호우키노카미[大熊 伯耆守]에게 보낸 편지에, 노부유키의 병이 쾌유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병이 재발했다고 하며 다음에는 발이 빠른 말을 한 마리 보내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말은 병중의 위로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약해진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또는 과거 말을 탄 자신의 용맹했던 모습을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11년.

 1611 6 4일.많은 무공(武功)과 무명(武名)을 남겨둔 채,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真田 安房守 昌幸]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 향년 65.

  1.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절의 숙박소. [본문으로]
  2. 여담으로 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기 위해 일으킨 오오사카 공방전에서 마사유키의 아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손을 걸치고 있던 창문이 소리가 날 정도로 떨며 '아비냐 아들이냐?'라고 두번이나 물을 정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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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

1574 6 1 병사(病死)


1507 ~ 1574.

호우죠우(北条)씨의 원조를 얻어 숙부 요시토요(義豊)를 무너뜨리고 아와(安房)를 장악하였다. 후에 카즈사(上総)에 진출하여 쿠루리(久留里)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 카마쿠라(鎌倉)미우라(三浦)를 침공하는 등 호우죠우(北条)씨와 대립. 미후네야마(三船山)합전(合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카즈사(上総)를 확보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호우죠우(北条)씨에 철저항전


 센고쿠(戦国) 초기의 칸토우(関東)의 무장들 사이에는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있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원군을 요청 받아 에치고(越後)에서 곧잘 코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등 칸토우(関東)로 진공(進攻)해 오면 호우죠우(北条)씨를 따르고 있던 무장들도(領內)를 통과하는 동안만은 켄신(謙信)에게 신종(臣從)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 했다.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나 우지마사(氏政)도 켄신(謙信)과 직접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여 퇴각하는 일도 많아 결국 켄신은 커다란 수확을 올리는 일 없이 에치고(越後)로 돌아갔다. 그 후 칸토우(関東)는 다시 원래대로 호우죠우(北条)씨의 세력하(勢力下)에 두어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졌다. 그러한 주변 정세 속에서 어디까지나 호우죠우(北条)씨에게 끝까지 항전을 계속 한 것이 보우소우(房総 아와(安房)과 카즈사(上総)의 양지방을 이름)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였다.


 그런 요시타카(義堯) 1534년 부친 사네타카(実堯)의 원수인 숙부 사토미 요시토요(里見 義豊)를 물리치고 사토미가()의 당주(当主)가 되어 아와(安房) 일국(一国)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우지야스의 부친)의 원군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3년 후.

 호우죠우(北条)씨가 보우소우(房総)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로는 약 40여년에 걸쳐 일관돼게 호우죠우씨를 적대하며 싸웠다.

 호우죠우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진공(進攻)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언제나 사토미 요시타카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토미 요시타카가 적자(嫡子) 요시히로(義弘)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준 것은 1561년으로 요시타카 55, 요시히로는 32살 때였다. 이 해의 3 우에스기 켄신은 호우죠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小田原)성을 2개월간에 걸쳐 포위하였는데 사가미(相模)를 제외한 칸토우(関東) 7개국의 무가(武家) 250여 가문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참가한 요시히로도 있었다. 보우소우(房総) 사토미(里見)씨의 통솔자로서 대외적인 요시히로의 데뷔 무대였지만 사토미씨의 실권은 이후로도 카즈사(上総) 쿠루리(久留理)성에 있던 요시타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은거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투를 벌이는 사토미(里見), 호우죠우(北条)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와 몇 번이고 싸웠다.

 그중에서도 중대한 전투가 세번있었다. 1538년과 1564년 두번에 걸친 시모우사(下総) 코우노다이(国府台)의 싸움에서는 두번이나 대패하여 아와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번째 때에는 우지야스()이 카즈사(上総)까지 공격해 들어와 한때는 요시타카의 거성(居城) 쿠루리성도, 요시히로의 사누키(佐貫)성도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세력을 되찾는다.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사토미씨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카즈사로 침공하여 1566년 미후네야마(三船山)에 요세를 쌓았다. 요시히로의 사누키성에서 북쪽으로 불과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해 우지야스는 우지마사(氏政), 우지테루(氏照)에게 3만의 병사를 주어 사누키성, 쿠루리성의 공격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쿠루리성에서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기동전(機動戰)을 명했다. 8천의 병력으로 선수를 쳐서 미후네야마(三船山)의 호우죠우군()을 남과 북에서 협격했다. 호우죠우군 3만은 산 위에 있었기에 잘 움직이질 못하고 밀려 무너지는 형태로 서쪽의 쇼우지(障子)계곡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은 땅이 물렁물렁해 발이 빠져 전투태세를 취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사토미군의 맹공을 받았다. 호우죠우군은 2500여의 사상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사토미 요시히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선(兵船)을 보내어 미우라(三浦) 반도의 키쿠나우라(菊名浦)까지 계속 항해하여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수군(水軍)을 물리쳤다. 호우죠우씨의 사토미 공략은 대패로 끝나 번 다시 보우소우(房総)로 침공하지 않았다.


무너진 호우죠우 협격책(挾擊策)


 미후네야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요시타카는 이미 61.

 계속해서 호우조우씨 토멸(討滅)에 의욕을 보이며 시모우사(下総)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569 지금까지 함께 호우죠우씨를 협격하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 호우죠우와 동맹을 맺어버렸다. 타케다 신겐의 스루가(駿河) 침공과 서진(西進)에 따른 결과였다.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를 칠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켄신의 배반에 격노하며 반대로 신겐과 동맹을 맺어 호우죠우씨 협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2년 후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켄신과 절교하며 타케다 신겐과 재동맹을 맺었기에 요시타카, 효시히로 부자는 다시 우에스기 켄신과 반()호우죠우의 공투(共闘)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상경(上京)으로 인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의 행동이 크게 변화할수 밖에 없던 것이 보우소우(房総)의 사토미 요시타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1574년 6월 1일.

 요시타카는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산과 들이 내려다 보이는 쿠루리성에서 반()호우죠우의 불길을 계속 지펴온 68년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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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야스(北条 氏康)

1571 10 3 병사(病死) 57

1515 ~ 1571.

후 호우죠우(後北条) 3대 당주(当主).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상속 받은 후 오다와라(小田原)성을 본거지로 삼아 사토미 씨(里見氏)나 이마가와 씨(今川氏)와 다투며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카와고에(河越)전투에서 쓰러뜨렸다. 또한 타케다 씨(武田氏),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고, 네가와(利根川) 강 이남의 칸토우(関東)를 영국화(領国化)했다.











소우에츠(相越[각주:1])동맹에 숨겨진 계산


 1568 11월 말.

 카이(甲斐)국의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갑자기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영국(領国)스루가(駿河)로 침공을 개시했다. 은밀히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동맹을 맺었던 신겐의 움직임이었다. 코우소우순(甲相駿[각주:2]) 삼국동맹을 맺고 있던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우지마사(氏政) 부자는 이런 갑작스런 동맹파기에 놀랐고 신겐의 배신에 분노하여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지원할 것을 표명하곤 곧바로 스루가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신겐의 행동에는 우지마사의 부인 오우바이인(黃梅院) 1566 6월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우바이인은 신겐의 딸로 코우소우순(甲相駿) 삼국동맹 체결의 결과로 오다와라(小田原)성으로 시집왔었다.

코우소우순 삼국동맹이 붕괴되자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동맹을 맺고 신겐의 스루가 침공을 저지하는 방침을 세웠다. 소우운(早雲) 이래 칸토우(関東) 평정을 진행시켜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와 이에 대항하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씨(上杉氏)의 종가 격인 켄신(謙信)과는 그야말로 앙숙이었다. 이런 앙숙과의 동맹에 대해서 우지야스는 어떠한 정치적 계산을 가지고 임했을까?


 우에스기 켄신은 이미 1561 4월 오다와라성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카마쿠라(鎌倉)의 츠루오카 하치만 궁(鶴岡 八幡宮)의 신사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직책을 물려 받았으며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도 이를 공인 하고 있었다.

 한 쪽인 호우죠우 우지야스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3])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와 인척관계로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 義氏)는 완전히 우지야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켄신도 장년에 걸친 신겐과의 항쟁에 결착을 지을 기회가 왔다며 이 소우에츠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부(祖父)때 부터의 숙적인 호우죠우씨와의 정치적 관계를 어떻게 유리하게 전개시켜 갈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호우죠우 씨에게 공격받고 있던 북 칸토우(北関東)의 호족들은 1561년 가을에 칸토우(関東)에서 에치고로 귀국해 버린 켄신에게 실망하여 대부분의 호족들은 켄신의 칸토우 통치가 좌절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우지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력 호족들을 지배하에 거두어 칸토우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하극상(下剋上)이 활발한 칸토우 지방이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나 코가쿠보우(古河公方)의 권위는 인정받고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지야스는 생각했다. 켄신은 독신이기에 친아들이 없다. 그 켄신에게 양자를 보내면 언젠가 켄신이 죽은 뒤에 그 양자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를 이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아들인 우지마사(氏政)의 대()가 되었을 때는 코가쿠보우(古河公方)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두개의 커다란 전통적 권위가 호우죠우씨의 수중에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지야스의 최후


 예상대로 소우에츠(相越)동맹을 쌍방의 계산이 얽혀 체결이 늦춰지고 있었다.

 켄신에게 보낼 양자의 인선에서도 우지야스와 아들인 우지마사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우지야스의 숙부 호우죠우 소우테츠(宗哲 = 겐안(幻庵))의 셋째아들인 사부로우(三郞) 후에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가 되었다.


 소우에츠 동맹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후 우지야스가 병중(病中)에 있던 1569년 가을 체결되었다. 우지야스는 이 때 이미 많이 병들어 있어 다음해인 1570년 여름에는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 해의 8월에 켄신의 사자로서 오다와라성에 와 있던 오오이시 요시츠나(大石 芳綱)는 본국의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 盛吉)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지야스는 자식들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어 타케다 신겐이 오다와라로 공격해 오는 것도 모를 정도이다](上杉文書)고 전하고 있다.

 확실히 우지야스의 싸인이 들어간 편지는 같은 해인 1570년 6월 29 호우죠우 우지쿠니(北条 氏邦)에게 보낸 것 이후에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병 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중병(重病)으로 자신의 싸인을 쓸 힘도 없었을 것이다.


 1571년 4월 15 켄신에게 보낸 우지야스의 편지(上杉文書)에는 싸인 대신 그 위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도장이 찍혀 있어 병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된다.


 1571년 10월 3.

 우지야스는 오다와라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57세였다.

[大聖寺殿東陽宗岱公大居士]라고 법명을 받고 하코네(箱根) 소우운(早雲)()에 안장되었다다고 하지만 이바라키(茨城)() 코가(古河)시의 절이라는 설도 있어 묘소(墓所)는 확실하지 않다. 바로 그날로 난죠우 시로우사에몬(南条 四郞左衛門)이 코우야(高野)산의 코우시츠인(高室院)에게 우지야스 죽음의 보고가 전해져 극락왕생을 비는 법회를 빌어 달라는 의뢰가 왔다. 유언장은 발견 되지 않았으나 소우에츠(相越)동맹을 관두고 역시 신겐과의 소우코우(相甲)동맹을 부활시키도록 우지마사에게 유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 사가미(相模)와 에치고(越後)의 머릿 글자를 따서. [본문으로]
  2. 카이(甲斐), 사가미(相模), 스루가(駿河)의 머릿글자를 따서. 각각 타케다 가문, 호우죠우 가문, 이마가와 가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칸토우 쿠보우(코가 쿠보우)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칸토우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곳의 책임자를 높이는 말. 코가(古河)는 당시 쿠보우가 있던 지역(처음엔 카마쿠라에 있었으나 혼란을 거듭하는 시기에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칸토우칸레이는 이 쿠보우를 보좌하는수상 격. [본문으로]

호우죠우 소우운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26. 04:14 Posted by 발해지랑

호조 소운[北条 早雲]

1519 8 15 병사(病死) 64.

1456 ~ 1519.

처음은 이세 신쿠로우[伊勢 新九郞]라는 이름을 칭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외척(外戚)이 되어, 스루가[駿河] 코우코쿠지 성[興国寺城]의 성주가 되었다. 이즈[伊豆]를 장악한 후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서 사가미[相模]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탈취하여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발전의 기초를 쌓았다.








[祿寿応穏]의 도장


 1518년 10월 8자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서 이즈 국[伊豆国] 키쇼우[木負]에 있는 오오카와 가문[大川家]에 한 통의 문서를 가진 사자(使者)가 도착했다. 편지를 본 오오카와 가문의 당주(当主)는 처음 보는 모양을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편지의 날짜가 써 있는 행에는 가로, 세로 7센티 정도의 크기의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인주로 찍혀 있는 글자는 [祿寿応穏 녹수응은]이라 쓰여 있었는데, '인민이여, 모두 함께 평온히 살자'라는 뜻이라 여겨진다. 이 글자의 상부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 조각되어 있어 '호랑이 주인장(朱印狀)'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 '호랑이 주인장'은 약 천 통 이상 발견되어 역사연구자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호랑이 주인장]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 오오카와 씨에게 보낸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 즉 이세 모리토키[伊勢 盛氏] 후에 입도(入道[각주:1])하여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 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인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주면서 함께 물려 준 것이 '호랑이 주인(朱印)'이었다. 이후 호우죠우 씨[北条氏] 4대에 걸친 가인(家印 가문의 도장)으로 1590 7월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은 빗츄우[備中] 타카코시 성[高越城]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 쿄우[京]에 가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일하였고,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 義澄]의 명령으로 이즈[伊豆]를 침공하였다. 이즈 평정에는 5년간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5년째인 1498년 8월 25 토우카이오키[東海沖]를 진원지로 하는 토우카이오키 대지진이 발생하여 이 때의 대해일로 인해 이즈 반도 서해안의 어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전란과 거대 지진, 대해일의 습격으로 이즈의 사람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즈의 주민들은 지배자의 통치력이 부족하기에 이러한 재해를 불러왔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지배자를 강력히 원했을 것이다.


연공(年貢)을 내린 영주(新領主)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소우운은 1498 9월에 아시카가 챠챠마루[足利 茶丸]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이즈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소우운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우선 해일로 인한 어촌의 병자들의 치료를 지원하고, 옛 지배자가 부과했던 연공을 낮추어 사공육민(四公六民[각주:2])으로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신영주에게 감사하고 기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앞에서 언급한 1518 10 8일자의 [호랑이 주인장]에는 향촌에 부과했던 대나무나 목재, 어패류의 납입에는 반드시 이 [호랑이 주인]을 찍은 문서로 명령하며, 호우죠우 씨 이외에는 멋대로 물품을 부과시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 이 규칙을 어겨 불법을 행하는 무장이 있으면, 주민의 대표자가 그 무장의 이름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오다와라 성[小田原]의 관청에 직소(直訴)해도 좋다고 하였다. 소우운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서 직소를 인정한 것이다.


 소우운은 쿄우토[京都]에 있을 때 다이토쿠 사[大德寺]에 들어가 수행할 정도로 불교를 신앙했으며 신불(神仏)을 숭배하였다. 거성(居城)인 니라야마 성[韮山城]에노시마벤텐[江ノ島弁財天][각주:3]을 모시고 신앙하였다. 소우운이 자손에게 남긴 문서의 첫번째가 신불을 경애하라고 할 정도로 소우운의 깊은 신앙심은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소우운의 사망연령


 소우운은 64세가 되자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 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1519년 4월 28에는
사남인 키쿠슈우마루[菊寿丸][각주:4]에게 자기의 소령분(所領分) 4465관이라는 광대한 향촌(鄕村)을 물려주고 하코네곤겐 사[箱根權現社]의 사령(社領)도 확정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미우라[三浦] 반도의 끄트머리인 미사키[三崎]를 유람하던 중 소우운은 감기에 걸려(塔寺八幡宮長帳), 8 15일 니라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88세라고 유포되고 있다.


 유포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만들어진 군기물(軍記物)에 쓰여져 있는 것으로 그것이 통설이 되어 유포되었다는 의미이다.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이 88세 사망설은 소우운의 부친이라 전해지고 있던 이세 사다후지[伊勢 貞藤] 실은 소우운의 외할아버지인 이세 사다쿠니[伊勢 貞囯]의 차남. 즉 외삼촌- 가 태어난 1432년을 소우운이 태어난 년도와 헷갈린 것으로 실제로 소우운이 태어난 해는 1456년으로 64세에 죽은 것으로 수정되고 있다.(小田原市史)


 소우운의 유체는 슈우센 사[修禅寺]에서 화장되어 하코네[箱根]의 소우운 사[早雲寺]에 안장되었다.
 
법명(法名) [早雲寺殿天岳宗瑞]가 되었다.


 1519 9 15일.

 소우운이 죽은 후 1개월째에 이세(후에 호우죠우[北条]) 우지츠나[氏綱] 자택에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 출석한 호우린칸도우[芳琳乾幢]는 제문을 통해서,
 '
소우운은 천하의 영웅으로 좋은 부인을 만나 자손도 많으며 조부의 유업(遺業)을 이었고 덕은 만고(萬古)에 빛나평화속에 칸토우를 정복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 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전체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60%를 농민이 소유함. 당시 대부분 육공사민이었으며, 좋아야 오공오민이었다고 함. [본문으로]
  3. 칠복신 중 하나, 음악과 지혜, 변설, 복덕의 신. [본문으로]
  4. 후에 호우죠우 겐안(北条 幻庵)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