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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우조우지가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7.0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 주군을 대신한 사가(佐賀)의 명신 6
  2. 2007.10.17 류우조우지 타카노부 5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일찍부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훌륭한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이 뛰어난 인물에게 국정을 맡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나오시게가 있었기에 류우조우지 가문의 융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1584년 3월.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에게 패하여 대장 타카노부가 전사하자 류우조우지 가문의 운명은 나오시게의 양 어깨에 달리게 되었다. 타카노부의 뒤를 이은 마사이에(政家)는 대장으로서의 기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히데요시의 천하였던 1587년, 이 마사이에의 범용함으로 인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모반혐의를 받게 된다.

 이해, 히고(肥後)에 있던 삿사 나리마사의 영내(領內)에서 토착 영주(国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근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부 출진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며 출진하지 않은 것이다.(관련링크[각주:1])
 당시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나오시게는 서둘러 귀국하여 어쨌든 자신만이라도 출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히고(肥後)에 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등의 감찰관(軍奉行)들과 만났다. 감찰관들은,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나오시게는 열심히 그 사실을 부정했다. 곧바로 마사이에를 데리고 참전하겠습니다 – 하고 변명에 힘쓴 후 사가(
佐賀)로 돌아와 마사이에를 나무란 후 참전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마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와카미 다이묘우진(
河上大明神[각주:2]) 의 신탁이 이르길 참전은 쓸모 없는 일이라고 나왔으며, 요가 신사(与賀神社)에 있던 녹나무의 잎이 전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이모리 촌(飯森村)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타카노부)의 혼령이 씌어 출전하면 전사한다고 외쳤다더군. 성안에서도 여자의 우는 소리가 나는 등 이변이 끊이질 않네"
 나오시게는 너무도 어리석은 답변에 격노하며, 녹나무가 늙어서 잎이 떨어지는 것에 뭔 이상한 점이 있소 – 라며 불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자를 즉각 처형하고,
 "주군은 여우에게조차 좆병진 취급[각주:3]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 질타하곤 히고(肥後)의 전쟁터로 끌고 나간 것이다.

 이리하여 마사이에는 모반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이런 마사이에였기에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고 반대로 나오시게의 존재감이 커져만 갔다.
 1590년 결국 마사이에는 아직 3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병약함을 이유로 은거의 몸이 되었다.
 이때 일문과 숙노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마사이에의 친할머니인 케이긴니(
慶誾尼[각주:4])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오시게님 말고는 류우조우지 가문의 안태를 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마사이에 다음의 가독은 나오시게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라는 의견을 내놓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오시게가 가독을 이은 배후에는 히데요시의 뜻도 작용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오시게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조선의 왕자 둘[각주:5]을 포로로 잡는 대공을 세웠다. 후에 키요마사가 나오시게를 평하길,
 "내 생애에서 조선에서 싸운 것만큼 편한 적은 없었다. 모두 나베시마 나오시게 덕분이다. 공을 다투는 일 없이 군율을 엄격히 지키며 나에게 협력해 주었다"
 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오시게는 일찍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역량을 파악하여 세키가하라() 후엔 토쿠가와의 천하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혜안덕분에 막말(幕末)까지 35만석의 나베시마 가문은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비참했다. 마사이에의 아들 타카후사(高房)는 영지(領地)를 나오시게에게 빼앗긴 것을 원망하여 1607년 19살의 자기 부인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꾀하여 실패. 결국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후년 이야기꾼(講談)들에 의해 유명해진 [나베시마 냥이 소동(鍋島猫騒動)[각주:6]]은 이 류우조우지 가문의 원한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라 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583년생. 첫 이름은 노부나리(
信生). 류우조우지 가문(竜造寺家)의 가신이었지만 타카노부(隆信)의 죽음 후 실권을 장악하였고, 1590년 류우조우지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히젠(肥前) 사가 성(佐賀城)의 성주가 된다. 1618년 6월 죽었다. 81세[각주:7].

  1. 전국무장 말년과 최후. '삿사 나리마사'항목의 중간쯤 관련 사항이 나와 있습죠. [본문으로]
  2. '요도히메카미(與止日女神)'의 별칭. 바다의 신인 '와타츠미카미(大綿津見神)'의 딸 혹은 일본 판타지 주인공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여동생이라고도 한다. 히젠(肥前)에서는 가장 급수가 높은 신사(肥前一宮)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말로 "여우에 홀리다(狐憑き)"는 말이 있다. [본문으로]
  4. 류우조우지 가문을 위한다며 50가까운 나이에 나오시게의 부친을 강제로 취한 타카노부(隆信)의 모친. 즉 나오시게의 양엄마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함경도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 그들이 잡았다기 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함경도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넘겨졌다. [본문으로]
  6. 여러 버전이 있는데...대충 종합하면...나오시게의 아들 카츠시게(勝茂)가 사사로운 일로 가신을 죽였다. 그 가신에게는 늙은 모친이 있어 아들이 죽자 카츠시게를 저주하는 말을 기르던 고양이에게 하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고양이는 모친의 피를 핥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카츠시게는 병이 들거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또한 성안에 이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수상히 여긴 가신들이 불침번을 서다가 새로 성에 들어온 카츠시게의 측실 '토요노카타(豊の方)'가 고양이괴물로 변해 일을 꾸미는 것을 퇴치한 이후로 카츠시게의 병도 낫고 이변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타카후사가 기르던 고양이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죽을 때 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죽었기에 이것이 류우조우지 타카후사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나베시마 냥이 소동'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 隆信)

1584 3 24일 전사(戰死) 56.

1529 ~ 1584.

류우조우지씨() 19당주(). 쇼우니()()를 물리치고 강대해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과 자주 다투었다. 히젠(肥前)을 평정한 후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에도 침공했다. 오오토모 씨()의 쇠퇴 후,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오키타(沖田) 외길()의 전투(沖田)]에서 패하여 죽었다.








출가(出家)환속(還俗)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는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와 같은 인생을 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말년에 접어들어 가독(家督)을 물려주고 승복(僧服)을 입고서는 하루 종일 염불을 외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여 조용히 일생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羨望)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명(兒名)이 쵸우호우시마루(長法師丸)였던 타카노부는 7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현재의 초등생부터 고등학생 시대를 [엔게츠(円月)]라는 이름으로 절에서 보냈고 18살 때 환속했다. 인생에서 가장 학식이 몸에 붙는 나이다.
거기서 고승(高僧)이 되기 위해 불문(佛門)의 길을 일생 걸었다면 특필할 만한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50세를 넘어서부터 교만(驕慢), 잔인(), 비도(非道), 주색(酒色)에 빠짐 이라는 비난의 문구(文句)가 그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여생의 유무(有無)


 류우조우지 가 중흥(中興)의 시조로 숭상받는 타카노부의 증조부 이에카네(家兼)는 막 태어난 타카노부를 보자마자 [영리]하다고 느꼈다. [구족(九族)극락왕생할 수 있을 정도의 공덕을 쌓을 것]을 바라며 그를 출가 시켰다고 한다.


 그랬던 증조부가 이번엔 죽음을 앞두고,
 
그 애는 대기(器)이니 반드시 류우조우지 가문을 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환속시키거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본인의 의사는 상관 없었다.


 거기에 19살의 나이로 무라나카(村中) 류우조우지 가의 미망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宗)의 당주가 되었다. 즉 부설되어 있는 레일 위를 달렸을 뿐이다. 타카노부가 가독을 적남(嫡男)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주고 은거를 시작한 것은 1580년으로 52세의 나이였다.

 사가(佐賀)()에서 남쪽 약 2Km정도 떨어진 수코 성(須古)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신의 힘으로 6년 전에 히라이 씨(平井)에게서 빼앗은 성이었다.

 다섯 주() – 히젠(肥前), 치쿠고(筑後), 히고(肥後)의 반치쿠젠(筑前) 아홉 군(), 부젠(豊前) 세 군() – 의 태수로 경외(敬畏)받으며 여생을 수코성()이 있는 시라이시(白石) 평야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향년은 56.
 
표면상의 은거 생활은 5년이다. 보통 사람의 노후로 본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지만 타카노부의 최후는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1584 3월이었다.


 공격 당하는 성을 관으로 삼아 죽은 것은 아니다.
 
출진 하지 말아달라는 충신들을 뿌리치고 성을 출발. 시마바라(島原) 반도(半島) 군세를 진출시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더구나 주군을 안전 지대로 이동시키려 하는 가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던 결과로써 패하여 죽은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 - 비대해진 몸으로 여섯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지휘를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위풍당당한 총대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낮은 언덕에 본진을 설치하고 의자에 앉아서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센고쿠 시대에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즈, 오오토모(大友)씨와 3강을 이룰 정도의 강심장이었다.


 그러나 후방의 소란을 아군 병졸들의 싸움이라고 착각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운은 여기서 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타카노부의 최후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적장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밖에 없게 된 타카노부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어렸을 때의 쌓은 학식이 되살아났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적장에게 대장의 목을 베는 작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말에 적장이 대답을 주저하자 타카노부가 말했다고 한다.


 “홍로(紅爐[각주:1]) 위에 내린 눈 한 송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에 떨어진 눈 한 송이가 눈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의 염라대왕은 엄격했다.

 자아 도취를 용서치 않았다. 폭주 끝에 죽음은 비참했다.

 타카노부의 목이 사츠마(薩摩) ()에서 치쿠고(筑後)의 에노키()의 나루터까지 보내져 왔다. 돌려줄 테니 여기까지 받으러 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타카노부의 한 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는 그 목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타카노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였다.

 그의 목은 히고(肥後) 타카세()의 간교우(願行)()로 보내졌다.


=======================이하 역자 가필======================================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패배한 장수의 목은 재수가 없으니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1)당시 타카노부의 분노를 사서 삐져있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기에 그런 말을 했다는것.

(2)목을 건네고 받을 때 시마즈의 사자에게 자신들의 약점을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타카노부의 목은 위의 이야기 외에, 타카노부에게 원한이 깊었던 어느 호족의 미망인[각주:2]에게 전해져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결국 역시 재수없다고 여긴 시마즈 쪽이 그냥 강물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1.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붉게 달거진 화로. [본문으로]
  2. 아카호시 가문(赤星家)의 미망인. 타카노부는 인질로 와 있던 그녀의 14살난 손자와 8살난 손녀를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