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
 338년 만에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의 유체가 햇볕을 쬐었다. 센다이 시[仙台市] 즈이호우 전[瑞鳳殿] 터에 있던 묘의 석실이 발굴된 것이다. 백골화되어 있긴 하여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이장되어 있었다. 골격으로 추정하면 마사무네는 보통 몸집에 보통 키[각주:1]로 코가 높았으며 이외로 상냥한 얼굴을 한 현대적인 생김새였다고 한다. 그것은 저 권모술수의 화신과도 같은 센고쿠의 맹장이 가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외눈이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가면 유골로 복원한 다테 마사무네의 얼굴을 볼 수 있다(가장 하단))

 마사무네라 하면 '독안룡[独眼竜]'이라는 이명[異名]으로 더 유명[각주:2]하다. 5살 즈음 앓은 천연두로 인하여 오른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는 자신의 추한 용모 때문에 극단적인 콤플렉스에 빠져 우물쭈물하고 자기비하가 심한 꼬꼬마였다. 마사무네 다음으로 태어난 '지쿠마루[竺丸]'가 수려한 외모에 똑똑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기에 더 비교당하여 친어미에게조차 미움을 받았다.

 마사무네의 어렸을 적 이름[幼名]은 '본텐마루[梵天丸][각주:3]'였다. 모친은 같은 지역인 오우슈우[奥州]의 호족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여동생으로 '요시히메[義姫]'라 하였다. 이 모친은 추하고 어두운 본텐마루를 싫어하고 동생인 지쿠마루를 편애하였다. 남편 테루무네[輝宗]에게 몇 번이나 본텐마루를 폐하고 지쿠마루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친정 오빠인 모가미 요시아키와 짜고 마사무네를 독살까지 하려고 하였다. 친어미에게까지 미움 받았기에 본텐마루는 한층 더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성격도 삐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각주:4].

 그런 마사무네를 구한 것이 젊고 혈기왕성한 교육담당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였다. 후에 다테 가문[伊達家]를 짊어지고 있다는 평판을 받으며 중신[重臣]이 된 인물이다. 카타쿠라는 마사무네가 천하의 영웅이 될 인물이라며 계속 격려하였다.

 또 한 사람. 본텐마루의 강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부친 테루무네였다. 11살의 본텐마루에게 성인식을 치르게 하였을 때 '마사무네'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 이름은 다테 가문 9대 당주 다이젠노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이었다. 문무에 뛰어나 다테 가문을 융성으로 이끈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부친 테루무네가 얼마나 본텐마루에게 기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각주:5].
 테루무네는 1584년 41살의 나이에 가독[
家督]을 마사무네에게 물려주었다[각주:6]. 과감한 은퇴였다. 무엇보다 부인 요시히메를 중심으로 지쿠마루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테루무네는 은거를 선언함과 동시에 요시히메와 지쿠마루를 데리고 모가미 가문과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코마츠 성[小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다테 가문의 본거지는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에 있었다.

 1584년 당시 중앙 정세는 센고쿠[戦国] 군웅할거의 시대가 끝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뒤를 이어받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의해 천하통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우호쿠[東北] 지방은 여전히 모가미, 다테, 오오사키[大崎], 소우마[相馬], 아시나[芦名],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등 여러 호족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 정세 속에 오오우치 비젠[
大内 備前[각주:7]]이라는 소호족이 다테 가문을 방문하였다. 예전엔 다테 가문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아이즈[会津]의 아시나 가문이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가문[佐竹家]과 친분을 나누고 있는 인물로, 마사무네의 가독상속을 축하하러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다. 요네자와에 저택까지 세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시나의 첩자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분노한 마사무네는 흑막 아시나 토벌을 결심하였다. 또한 가문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시키고 싶었다. 1585년 8월, 다테의 군세는 오오우치 비젠이 지키는 오데모리 성[小手森城]을 습격하였다. 아시나나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畠山 義継][각주:8]가 오오우치 편을 들고 있어 고전하였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오오우치의 군세가 기세를 타고 성 밖으로 나온 그 순간을 민감히 캐치했다. 단번에 수 많은 총격을 쏟아 부었고, 다시 성안으로 도망가려는 오오우치의 군세에게 모든 총포를 집중시켰다. 성 측은 무너졌다. 대장 오오우치 비젠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마사무네가 오데모리 성을 공략한 뒤 행한 처치가 참혹했다. 항복한 노약남녀 800여명을 남김없이 학살한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의 공포를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후 오오우치와 손잡았던 니혼마츠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가 다테 가문에 엄청난 재앙, 마사무네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항복하여 용서받은 요시츠구가 그 감사에 대한 인사를 드린다는 핑계[각주:9]로 미야모리 성[
宮森城]의 테루무네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이다. 이날 1585년 10월 8일, 마사무네는 매사냥을 하러 나가있었다. 마사무네가 없는 틈에 생긴 사건이었다.
 테루무네와 회견이 끝나자 요시츠구는 돌아가기 위해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까지 가는 길은 대나무 울타리가 양쪽에 늘어선 좁은 길이었다. 그 좁은 길을 요시츠구의 가로[
家老] 3명이 앞장서고 그 뒤를 요시츠구, 테루무네, 테루무네의 부하들이 뒤를 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 때 요시츠구와 가로 3명이 테루무네를 향해서 땅에 손을 대고 절을 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요시츠구가 벌떡 일어나 갑자기 테루무네를 붙잡고 칼을 빼 들어 테루무네의 목에 갖다 대었다. 다테 가문의 가신들은 놀라 노성을 지르긴 하였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테루무네를 인질로 잡은 요시츠구 일행은 유유히 걸어가 말을 타고 자신의 영지 니혼마츠를 향해서 도망쳤다.

 사태를 듣고 달려온 마사무네의 눈에 요시츠구에게 잡힌 부친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여기서 부친을 적에게 빼앗기면 다테 가문의 패배였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각주:10] [각주:11].
 마사무네의 명령에 철포가 불을 뿜었다. 요시츠구는 이때 테루무네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각주:12]. 마사무네는 하타케야마 일행 50여명을 남김없이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요시츠구의 시체를 난자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길가에 세워 모욕 주었다.

 이렇게 19살의 마사무네는 이후 가문에서 완전한 독재권력을 쌓아 23살인 1589년에는 아이즈 4개 군[], 센도우[仙道] 7개 군[]을 정복하여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1590년, 다테 가문에 있어서 두 번째인 더구나 중대한 위기가 닥친다.
 당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条家]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마사무네에게도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우죠우와 히데요시를 저울로 재고 있던 마사무네는 즉답을 피했다. 거기에 운 나쁘게도 히데요시에게 속한 아시나 가문을 공격하여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분노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오다와라에 가면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이제 취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 사[
] 속에서 생[]을 찾는다.
 이것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마사무네의 오다와라 참전은 결정되었지만, 출발 바로 전날 친모인 요시히메가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해독제를 복용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건은 동생 코지로우(
小次=지쿠마루)를 편애하여 옹립을 꾀한 모친의 음모였다. 마사무네는 후환을 끊기 위해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칼로 찔러 죽였다. 그날 밤, 모친은 친정인 모가미 가문으로 도망쳤다[각주:13].

 어쨌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알현함에 앞서 장례식 때 쓰는 끈으로 머리를 묶고 갑주 위에 흰 마[]로 된 겉옷[陣羽織]이라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참진하였다. 마사무네의 목숨을 건 연출이었다. 거기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나 히데요시의 비서실장 격인 야쿠인 젠소우[薬院 全宗]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게 부탁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 용서받아 새로 점령한 아시나의 영지는 몰수당했지만 70여만석은 안도[安堵]되었다.

 그 후 마사무네는 또다시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게 된다. 근린에서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을 뒤에서 선동했다는 죄상이다[각주:14]. 이때도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을 몸에 걸치고 거기에 더해 금박 입힌 십자가를 행렬의 맨 앞에 세우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반란을 선동했다는 증거서류의 사인[花押]이 거짓이라고 주장[각주:15]하여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군에 속하였고 이해(1600년) 12월부터 센다이[仙台]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다음 해 4월에 그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마사무네는 기독교에 흥미를 느껴 1613년에는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 常長]를 저 먼 이국 로마에 파견하여 교황에게 오우슈우 왕[奥州王] 마사무네의 국서를 헌상하고, 선교사 파견과 에스파냐와의 통상[通商] 알선을 의뢰하였다[각주:16].

 정치적인 모략으로 가득 찬 효웅이었지만 시인적인 재능도 발군이어서 한시[漢詩] 30수, 와카[和歌] 275수를 남겼다. 소년시대의 암울했던 일상이 그의 문학적 교양을 키웠을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년생. 1584년 데와[
出羽] 요네자와[沢] 성주. 1591년 이와테사와 성[岩手城] 51만석.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우에스기 군[上杉軍]과 싸웠다. 1636년 5월 24일 죽었다. 70세.

  1. 당시 기준. 159.4cm. [본문으로]
  2. 에도 시대[江戸時代] 유학자 '라이 산요우[頼 山陽]'가 붙인 이름이다. 여담으로 라이 산요우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말로 유명한 '적은 혼노우 사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는 말을 만든 사람으로도 유명. [본문으로]
  3. 모친 요시히메[義姫]가 '문무에 뛰어나고 충효의 마음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다'며 유명한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자에게 기도를 부탁. 그 수행자는 유도노 산[湯殿山]에 올라가 기도를 올린 후 증거로 유도노 산의 온천물을 먹인 고헤이[御幣]를 가지고 와서 모친의 침실에 놓았다. 그 효험인지 요시히메는 태몽으로, 어느 신선이 자신이 머물 곳으로 요시히메의 뱃속을 빌리며 그 댓가로 고헤이[御幣]를 요시히메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마사무네는 어렸을 적에 저 '본텐마루'말고도 '고헤이사마[御幣様]'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슈겐도우에서는 '고헤이'를 '본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일화로는 저 삐뚫어진 마사무네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마사무네가 찌질이 짓을 벌임 -> 당한 사람들이 에도 막부에 제소 -> 막부 관료들은 '마사무네니까 어쩔 수 없음'하고 용서 -> 그런 전말을 보던 이 또한 찌질함이 둘째라면 서럽다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어처구니 없다며 혀를 참.... 식의 이야기가 몇몇 있는데 대부분 정형화된 패턴인지라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궁금. [본문으로]
  5. 다테 가문은 11대 당주부터 성인식을 치를 때 당시의 쇼우군에게 청하여 이름 한자를 물려받았다[一字拝領]. 16대 당주 '테루'무네['輝'宗]의 경우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이며, 마사무네의 할아버지이며 15대 당주 하루무네[晴宗]는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글자를 물려받은 것. 마사무네가 성인식을 치를 즈음엔 쇼우군 요시아키[義昭]가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하고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요시아키 건재했다면 마사무네가 아닌 '아키무네[昭宗]'였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6. 이로써 마사무네는 다테 가문 17대 당주가 되었다. [본문으로]
  7. 오오우치 사다츠나[大内 定綱]. [본문으로]
  8. 영지가 니혼마츠[二本松]에 있어 니혼마츠 요시츠구[二本松 義継]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9. 용서는 받았지만 요시츠구의 영지 대부분을 마사무네에게 몰수당하여 그로인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0. 다테 가문의 기록이 아닌 다른 가문의 기록, 즉 아이즈 번[会津藩]의 기록으로 1672년 간행 된 会津旧事雑考에는 따르면, 마사무네가 지 아비가 있는데도 공격하려는 낌세를 캐치한 요시츠구가 먼저 테루무네를 찔렀고, 그것을 본 마사무네가 공격하여 요시츠구와 그의 무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또한 아키타 번[秋田藩]의 기록으로 1698년 간행 된 奥羽永慶軍記에는 마사무네 측의 총격으로 테루무네까지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잡힌 테루무네가 시게자네[伊達成実]에게 '주저말고 쏘아라. 나를 걱정하여 가문의 창피를 남기지 마라'고 하여 그 낌세를 눈치 챈 하타케야마 측이 테루무네를 먼저 찔러 죽였고, 그 모습을 눈 앞에서 본 다테 측의 공격에 하타케야마 측이 몰살되었다는 것은 다테 가문의 정사 [治家記録]와 [成実記]에 나오는 말. 이 기록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사냥터에서 납치 사태를 듣고 이쪽으로 막 오고 있던 중으로 마사무네는 이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다테 가문의 정사 治家記録에 실린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 요시히메는 그로부터 4년 뒤인 1594년에 요시아키에게로 갔다. 모가미 가문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이트( http://mogamiyoshiaki.jp/ )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자신을 반대하는 파벌이 코지로우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 연극을 하였고 그 결과 동생까지 죽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밀리에 행해진 것이기에 그 동안 모친은 몰랐고 모친은 4년 뒤에나 이 사실을 알고 친정으로 떠난 것이 아닌가 - 고 하고 있다. 실제로 그 4년사이에 마사무네가 자기 엄마에게 선물이나 편지를 보낸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한다. [본문으로]
  14. 소네 시로우스케[曾根 四郎助]라는 자가 마사무네의 반란선동 편지를 바쳤다고 한다. 소네의 부친은 테루무네의 죽음에 순사[殉死]하였지만 그 댓가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기에 마사무네를 원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자신의 사인에는 바늘로 구멍을 뚫지만 증거서류에는 구멍이 없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위조된 것이라 주장. [본문으로]
  16. 결과는 실패. 이미 유럽에선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기독교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던 상태라 백안시 당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아시나 모리우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6. 09:33 Posted by 발해지랑

아시나 모리우지(盧名 盛氏)

1580 6 17 병사(病死) 60.

(그림은 KOEI의 천하창세)


1521 ~ 1580년.

므츠(陸奧)() 아이즈(会津) 쿠로카와(黒川)성주. 아시나(盧名) 16대 당주(当主).

다테(伊達), 유우키(結城)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주변의 호족과 무장을 복속시켜 아시나씨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 번 은퇴하였지만 후계자인 적자 모리오키(盛興)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복귀. 18대의 모리타카(盛隆)를 후견했다.


카마쿠라(鎌倉)시대 부터의 명가



 아시나(盧名)씨는 카마쿠라 막부에게 아이즈(会津) 슈고(守護)에 임명 받은 칸토우(関東) 미우라 씨(三浦氏)의 후손이다. 그 사이에 남북조 동란 이후 하극상(下剋上)의 시대를 거쳐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일찍부터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이기도 하다. 특히 칸토우(関東), 토우호쿠(東北)는 카마쿠라 막부 붕괴의 영향을 받아 센고쿠(戦囯)의 모습을 띠는 것이 빨랐다. 그러한 곳에서 200여 년을 살아 남은 것이다.


 선조 이래 쿠로카와(黒川)를 거점으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모리타카(盛高), 모리시게(盛滋)의 부자간의 싸움이 일어나 한 때 내란상태에 빠졌으나 모리시게의 동새 모리키요(盛舜) 1521년 가독을 이은 후부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짧은 시간의 평화가 모리키요의 아들 모리우지(盛氏)의 커다란 비약을 가능하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모리우지 역사의 무대에 등장


 모리우지 자신이 영토 확장의 욕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이즈(会津)슈고(守護)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이상 주변 영토 다툼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슈고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권익이라는 것이 있다. 1543(천문 11) 원래는 가신의 위치에 있던 야마노우치 키요미치(山內 舜通)에치고(越後)의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와 손잡고 아시나의 군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 당시 충분히 힘을 기르고 있던 모리우지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에치고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 아이즈의 아시나씨에 있어서는 바다로 통하는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모리우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의 행동을 취해 역대 아시나씨의 지배 영역을 훨씬 넘어서 영토를 넓히고, 외척인 시라카와(白川) 유우키(結城), 스카가와(須賀川)의 니카이도우(二階堂),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畠山), 타무라군(田村郡)의 타무라(田村)씨까지도 신종 시켰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배영역은 아시나씨의 긴 역사 속에서도 최대의 규모에 달했다고 한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죽은 후, 에치고의 [오타테(御館)의 난[각주:1]]의 틈을 타서, 오가와(小川)의 오다기리(小田切)씨 영토 주변을 탈취,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지배영역의 확대에 성공한 모리우지는 북쪽으로는 다테(伊達)씨와, 남쪽으로는 사타케(佐竹)씨와의 접촉이 늘어만 갔다. 특히 사타케씨와의 관계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간다.


생각처럼 되어가지 않는 말년.


 1568년 즈음 모리우지는 [止止斎=시시사이]라는 호를 칭한다. 쿠로카와성을 세자인 모리오키(盛興)에게 물려주고 새로이 은거할 성으로 만든 오오누마 군(大沼)에 있는 이와사키(岩﨑)성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리오키는 병에 자주 걸리는 몸인 듯, 그 후에도 모리우지는 이와사키성에 있으면서 모리오키의 정무(政務)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1574년. 결국 모리오키는 부친보다 먼저 병에 쓰러진다. 향년 26세라 추정된다.


 모리우지는 서둘러 모리오키의 부인(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의 딸)을 양녀로 삼아, 니카이도우(二階堂)씨의 모리타카(盛隆)를 사위로써 받아 들이기로 한다. 모리타카는 니카이도우씨의 인질로써 모리우지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 온 인물로써 우선 안심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리우지는 이와사키 성을 나와 쿠로카와 성으로 돌아와 어린 모리타카의 정무(政務)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정무의 방침도 그 때까지와는 약간 바뀌었다. 그 때까지는 니카이도우씨와 시라카와(白川)의 유우키(結城)씨와 협력해서 북상하는 사타케씨와 대결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지만 1577년 즈음부터는 양 씨를 설득해서 사타케씨와의 협조노선을 펴게 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사후에 최대의 적이 없어진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関東) 통일을 목표로 활발한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또 하나는 같은 해 겐푸쿠(元服[각주:2])를 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차츰 오슈우(奧州) 남반부 제패의 야망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테-타무라(田村) 연합군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나, 사타케를 중심으로 한 니카이도우, 유우키, 이시카와(石川), 이와키(岩城)의 결속을 급속히 모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배치를 끝낸 1580년 6월 17일. 아시나 모리우지는 쿠로카와 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은 60세라 전해진다.


 물론 모리우지의 뒤를 이은 모리타카는 모리우지의 정책을 계승했다고 한다. 모리우지의 치세기(治世期)에 아시나씨의 지배영역이 최대가 되었고 지배체제도 또한 굳건해 진 것은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止止斎]라는 인감을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우에스기 켄신 후계자 싸움. 두 양자인 친족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호우죠우(北条)씨에서 온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 사이의 내란. [본문으로]
  2. 무장이 성인식을 치루는 것. [본문으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

다테 하루무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1. 08:46 Posted by 발해지랑

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

1577 12 5 병사(病死) 59.


1519~1577.

다테(伊達)씨 제 15대 당주(当主). 동생 사네모토(実元)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에 양자로 들어가는 문제로 부친인 타네무네(稙宗)를 유폐하여 [텐분(天文)의 난]을 일으킨다. 가중에서는 권력의 강화에 힘썼고, 외교에서는 11명의 자식들로 동북 여러 가문들과 연을 맺어 다테 씨의 지위를 높였다.






부친은 토우호쿠(東北) 호족들의 영웅.

 

 1522년.

 그 전년에 쇼우군(将軍)이 된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는 대대로 쿄우()에 올라와 인사를 해 온 다테 타네무네에게 므츠(陸奧)국 슈고쇼쿠(守護職)의 임명서를 주었다. 타네무네는 일약 바쿠후(幕府)의 관직을 얻어 일개의 호족에서 다이묘우(大名)로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장군의 이름 한자를 얻어 하루무네(晴宗)로 이름 짓는 것도 허락 받았다.


 원래 토우호쿠(東北)지방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말을 키워 헌상하는 것 외에는 산물을 받칠 수가 없었다. 헤이안(平安) 즈음부터 금()을 산출할 수 있게 된 후 후지와라(藤原) 4대의 화려한 시대가 지난 후부터 차츰 촌락이 발달해 조정의 관직도 임명 받게 되고 바쿠후(幕府)에서도 오우슈우탄다이(奧州 探題)가 설치 되었다. 탄다이의 핏줄을 잇는 오오사키(大崎), 모가미(最上)의 양 가문이 다른 슈고쇼쿠(守護職)의 후예와 함께 차츰 센코쿠 다이묘우(戦囯 大名)가 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다이묘우(大名)다른 지방에서 임명, 파견된 자들의 후손들이었기에 오우슈우(奧州) 지방의 토박이인 다테씨가 슈고쇼쿠를 받은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던 것이다.


 타네무네는 다테군() 외에 10개의 군()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진카이슈우(塵芥集)]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이것은 전시대인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과 똑같다고 하기에 문화적인 후진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내용은 당시 토우호쿠지방 독특한 농촌사정도 반영되어 171개조에 걸쳐 세분화되어 있다. 이렇게 군사, 정치, 경제, 재판권에 걸쳐 영지 지배의 기반을 세워 올렸다.


하루무네와 텐분의 난.


 타네무네의 명예욕은 더욱 커져 모친 쪽의 가문인 에치고(越後)의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実)에게 친아들이 없자 자신의 차남 토키무네마루(時宗丸)를 양자로 보내는 공작을 하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즈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부친)에게 불순한 움직임이 있어 분쟁이 진정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1542(천문 11) 6월.

 정예병을 이끌고 에치고에 가려고 했던 타네무네를 장남 하루무네가 반대하여 갑자기 부친을 유폐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단순한 부자간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내란이 점차 근린으로 확대되어 타무라(田村), 니혼마츠(二本松), 소우마(相馬), 모가미(最上),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 쿠로카와(黒川), 이와키(岩城) 등의 다이묘우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까지 끌어 들여서는 7년에 걸쳐 싸우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러한 사태가 되었느냐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척관계에 의한 동맹은 일대(一代)로 끝나는 것으로 다음 세대가 되면 그대로 동맹이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다테씨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곳도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결국은 세대간의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복잡해 지면 대개혁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무네(다테씨 15대 당주)는 우선 본거지를 대대에 걸쳐 지켜왔던 다테군()에서 데와(出羽) 오이타마(置賜)군의 중심지 요네자와(米沢)성으로 옮겨 다테씨가 명실공히 일신되었다는 것을 내외에 알렸다. 거기에 1553(천문 22) 1월 내란의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영지 재편을 단행하였다. 반항했던 신하의 영지는 몰수하는 식으로 가신들의 영지를 대담하게 맞바꾸었다. 이것은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행한 전국적인 영지 바꾸기의 소규모이지만 선행판(先行版)이라 할 수 있는 효과를 올려 일족(一族), 일가(一家), 토자마(外様)라는 가신단의 서열을 확립했다.


말년은 오우우(奥羽)지배의 포석


 영내의 정비에 성공한 하루무네는 말년까지도 오우우 일대에 다테가문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갔다.

 하루무네 자신의 정실은 아시나(盧名)씨의 출신이며, 아시나씨에게는 여동생이 시집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즈(会津)의 유력 다이묘우와는 2중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위에 자매의 연으로 소우마(相馬),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카케다(掛田)씨와는 인척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갖추어지자 하루무네는 세자인 테루무네(輝宗)를 모가미 씨의 딸과 결혼[각주:1]시켰고, 이와키성에는 차남 치카타카(親隆), 루수(留守)씨에게는 삼남 마사카게(政景), 이시카와씨에게는 아키미츠(昭光), 코쿠부(囯分)씨에게는 모리시게(盛重) 등등 정치력을 배경으로 한 강제적으로 양자를 들여보냈고, 딸들을 사다케(佐竹)씨와 니카이도우(二階堂)씨에게 시집보냈다.


 타네무네, 하루무네 2대에 걸쳐 다테씨는 오우슈우(奧州)의 패권을 쥐기 위한 싹을 틔우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1565년 가독을 상속받은 아들 테루무네(輝宗) 조부나 부친의 미지근한 센고쿠(戦囯) 다이묘우(大名)제를 거부해서 부친 하루무네와 대립한다. 테루무네는 인척관계에 의존하는 동맹을 맺지 않고 아들인 본텐마루(梵天丸 후에 마사무네(政宗))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하루무네는 은거한 시나오(信夫)군 스기노메(杉目)성에서 계속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7년 12월 5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테루무네는 불행하게도 뜻을 펼치는 도중에 죽게 되나 그 뒤를 마사무네가 이어받아 무력에 위한 오우슈우 제패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1. 이들과의 사이에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태어났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