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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나카한베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5.11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 – 히데요시를 도운 군사(軍師) 7
  2. 2006.08.18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2
  3. 2006.04.25 타케나카 시게하루 1

 사서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략 있는 인물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여성을 보는 듯 했다]
 흰 피부에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던 듯하다.
 전투에 임해서도 위압감을 풍기는 듯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목면으로 된 겉옷(
羽織)를 걸쳤으며 투구의 장식이 이치노타니()[각주:1]라는 평범한 것이었다.

 한베에에게는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자주 움직였으며 추울 때는 손을 파리처럼 비벼댔다. 자신의 주군인 히데요시(
秀吉)[각주:2]의 앞이라 하더라도 다리를 정신 사납게 떨거나 바꾸었다. 매우 의아히 여긴 어느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한베에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것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야. 갑작스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막상 다리가 저리거나 손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면 어처구니가 없잖아? 조금 버릇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급작스런 때를 의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지"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베에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천재군략가로서 유명하다. 그 병법의 묘를 완벽한 작품으로써 살려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이 미노(美濃) 이나바야바 성(稲葉山城) 쿠데타이다.
 1564년 한베에는 21살. 도우산(
道三)의 시대부터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이 당시의 사이토우 가문 당주는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竜興)였다. 암우하며 주색에 허우적대는 인망이 없는 당주였다.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
安藤 伊賀守)[각주:3]가 행실을 올바로 하라고 충언을 하자 타츠오키는 도리어 화를 내며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타츠오키의 측근들은 안도우 이가노카미의 사위인 한베에도 무시하기 시작하여 어느 날 술 마시고 있던 요시오키의 총신()은 망루에서 등성하고 있던 한베에에게 오줌을 쌌다. 이때 한베에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주군 타츠오키를 시작으로 한 이나바야마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콧대를 꺾어 놓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베에는 타츠오키의 시동인 동생 큐우사쿠(久作)[각주:4]에게 꾀병을 부리라고 하여 그 간병을 핑계로 의약품을 실은 수레를 성 안에 들여보냈다. 그 안에는 무구를 숨겨 놓았다. 이렇게 한베에와 그 부하 17명은 성 안 깊숙한 곳에 있는 큐우사쿠의 방에 들어가 거기서 날이 저무는 것을 기다렸다. 곧이어 밤이 되자 한베에 일당은 재빨리 전투준비를 마치고 그 중 한 명이 성 안에 위급을 알리는 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북을 쳤다. 갑작스런 북소리에 성 안 모두가 당황했다. 그 순간 숨어있던 한베에의 부하들이 숙직하는 무사들을 습격했다.
 처음 약속한대로 다시 북을 치자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가 수하 천여 명이 이끌고 단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타츠오키는 여성들과 함께 서둘러 도망쳤다.

 한베에는 뛰어난 지략으로 순식간에 이나바야마 성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빼앗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 뒤 순순히 성을 타츠오키에게 건넸다.[각주:5] 그리고 자신은 모반을 일으킨 사람이라며 거성인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를 동생 큐우사쿠에게 물려주고는 오우미(近江) 이부키야마(伊吹山) 산기슭에 은거해버렸다. 거기서 세상과 연을 끊고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한베에가 다시 전란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였다. 156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공격받은 사이토우 타츠오키가 이세(伊勢)로 도망쳐 미노(美濃)는 노부나가의 것이 되었다. 한베에도 장인 이가노카미의 주선으로 오다 가문을 섬겼고 다음 해인 1568년에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각주:6]에게 파견되어 이후 히데요시의 참모로서 그 지능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浅井)-아사쿠라(朝倉) 연합군을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물리쳤고 그와 동시에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의 지성(枝城)인 요코야마 성(横山城)를 점거하여 히데요시에게 수비를 명했다.
 다음 해인 1571년.
 아자이 나가마사는 이 요코야마 성을 탈취하기 위해서 히데요시가 없는 틈을 타 7000의 군사를 이끌고 맹공을 가했다. 한베에가 수성의 지휘를 맡았다. 한베에는 일부러 성안 병사가 적게 보이도록 만든 뒤 적이 깔보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기다려 일제히 사격했다. 아자이 군의 기세가 죽어 물러나면 쫓는 일 없이 제자리를 지켰고 또 공격해 오면 총과 활을 쏘는 전법을 거듭했다.
 곧이어 해가 저물자 아자이 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베에가 기다리던 바였다. 미리 성 밖에 수백 명의 저격병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에서도 추격대를 내보냈다. 협공에 아자이 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오다니 성으로 도망쳤다. 한베에는 깊이 쫓는 일 없이 성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히데요시가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즈음의 한베에에 대해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군대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한베에는 아들인 사쿄우(
左京)[각주:7]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사쿄우가 잠깐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 갔다 온 것이다. 한베에는 그런 자세를 못마땅해 하며 화를 냈다.
 "소변이 마려우면 앉아서 싸라. 무도(
武道)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바지에 오줌을 쌌다고 하면 칭찬을 들을지언정 누가 비웃겠느냐!?"

 1575년 한베에는 나가시노 전투(長篠い)에 참전하였고 그 후 히데요시가 츄우고쿠() 정벌의 사령관에 임명되자 그의 참모로 종군하였다. 특히 히데요시가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의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을 [말려 죽이기(干殺し) 전법]으로 나가게 만든 것은 한베에의 헌책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한베에는 죽었다.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병간호를 위해 쿄우토(京都)에 갔었지만 전황이 걱정된다며[각주:8] 다시 하리마(播磨)로 돌아와 거기서 결국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다.

[다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
1544년 미노(
美濃) 이케다 군(池田郡)[각주:9]에서 태어났다. 부친 시게모토(重元)가 죽어 10살의 나이[각주:10]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 성주가 된다.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 요시타츠(義竜), 타츠오키(竜興)의 삼대를 섬겼지만 미노(美濃)가 노부나가(信長)에게 넘어가자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기다 1579년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 포위 중 병으로 죽었다. 36세.

  1. 겐페이(源平)가 싸우던 시대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깍아 세운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와 이치노타니(一ノ谷)에 있는 헤이케 군을 물리친 것에서 본받고자 만든 투구의 장식.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것으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링크를 누르면 볼 수 있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투구가 유명한데 이것이 원래 타케나카 한베에의 투구였다고 한다. 죽을 때 유품분배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함께 있던 쿠로다 나가마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주군이 아니다. 한베에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信長)로, 히데요시에게는 파견을 나가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노 삼인중(美濃三人衆)의 하나인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 [본문으로]
  4. 타케나카 시게노리(竹中 重矩).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노부나가 군 행세를 하며 본진으로 들어와 노부나가의 목숨을 노리던 엔도우 나오츠네(遠藤 直経)를 죽인 인물. [본문으로]
  5. 실제로는 약 1년 가까이 계속 점령하며 이제 미노는 내꺼임~ 이라는 푯말과 세금고지서를 날리는 식으로 노력했지만 다른 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성을 내놓고 본거지로 퇴거. [본문으로]
  6. 초창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이름 [본문으로]
  7. 타케나카 시게카도(竹中 重門). 후에 '토요카가미[豊鏡]'라는 히데요시 일대기를 저술. [본문으로]
  8. 무사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며 돌아왔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9. 현재는 이비군(揖斐郡)에 통합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16세~20세까지 여러 설이 있다. [본문으로]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 具敎)

1576 11 25 암살 49

1528~1576.

이세(伊勢) 고쿠시(国司[각주:1]) 키타바타케 씨() 8대 당주. 남부 이세 5()이가(伊賀), 야마토(大和)의 일부를 지배. 검호(劍豪)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에게서 [히토츠노 타치(一の太刀)]를 전수 받았으며 와카(和歌)에도 뛰어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양자로 받아들여 은거하지만 옛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림은 http://homepage1.nifty.com/kitabatake/kitabatake21.html에서 불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다.


 무라카미(村上) 겐지(源氏)의 명류이며, [神皇正統記[각주:2]]를 쓴 것으로 유명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親房)와 그의 셋째 아들인 초대 이세 고쿠시 키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 顕能)가 남북조시대에 이세, 이가, 야마토 3국의 요충지인 타게고쇼(多芸御所)와 키리야마(霧山)에 성을 세운 다음부터 키타바타케 가(家)는 8대 토모노리까지 남부 이세 5()을 다스렸다.


 토모노리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도 친밀했으며 , 검법, 와카에도 뛰어난 문무양도의 달인으로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나 야마토의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 石舟斎)등 문인(文人), 검호가 토모노리의 저택에 자주 방문하여 함께 풍류를 즐겼다. 특히 잠시 동안 머물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는 신토우(新当)류의 비전인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아, 동문인 무로마치 바쿠후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지칭하는 [검호 장군(劍豪将軍)]을 빗대 [검호 국사(劍豪 国司)]라 칭송되었다. 후에 이 두 명 다 암살대와 칼을 맞댄 끝에 참사를 당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풍류를 좋아하여 와카나 렌가(連歌) 모임을 개최했으며, 검의 타류시합(他流試合)도 하였다. 영내(領內) 20여개의 성이나 요새를 쌓아 정병(精兵)을 키우고 있었지만 천하를 향한 야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1568 41살 때.

 천하 평정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이세로 침공하여 유서있는 칸베(神戶)(), 코츠쿠리(木造)()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고 키타바타케 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토모노리는 격노하여 산 속에 있는 타게고쇼(多芸御所)를 나와 이세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오가와치(大河內)성에 본진을 두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노부나가군 3만에 대하여 키타바타케군은 5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오다의 병사들에 비하여 2백여 년간의 평화로 인해 전의도 낮았다. 그럼에도 50여 일간 버텼지만 그러는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며 화살과 식량도 떨어졌고 노부나가의 조략으로 배신자가 나와 물길도 끊어졌다. 노부나가 군에도 피해가 생겼기에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와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진언에 따라 싸움을 멈추기로 하였다.


 노부나가쪽의 내건 조건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챠센마루(茶筅丸 = 후의 오다 노부카츠) 토모노리의 딸인 유키히메(雪姬)의 남편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양자가 되어 키타바타케가()를 상속하게 한다. 그 외의 처벌은 없다는 관대한 제안이었다.

 이걸로 개성(開城). 얼마 지나지 않아 양 가문의 혼례가 치러졌고 키타바타케가()의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된 노부카츠는 마츠가시마(松ヶ島)성에 입성했다.

 [이젠 전쟁으로 이세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 키타바타케의 가명만 남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라는 토모노리는 오다 가문을 증오하는 키타바타케의 가신들을 다독거리며 자신도 오가와치성에서 남서로 약 20킬로 떨어진 미세()의 저택에 은거했다. 그 곳은 해자로 둘러 쌓인 1만여 평의 작은 성이었지만 몇 몇의 종자들과 함께 자연을 노래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토모노리 암살 지령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노부카츠에게 토모노리의 암살을 명하였고 노부카츠는 이미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있던 키타바타케 일족인 타키가와 사부로베에 카츠토시(川 三郞兵衛 雄利 토모노리의 동생인 코츠쿠리 토모마사(木造 具政)의 서자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의 양자)에게 실행을 명했다.


 이리하여 1576년 11월 25 이른 아침.

 타키가와와 옛 신하였던 카루 사쿄우(加留 左京), 나가노 사쿄우노신(長野 左京進)등 몇 명이 미세의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청했다.

 측근인 사사키 시로사에몬( 四郞左衛門)이 타키가와 등이 왔다는 소식을 토모노리에게 전하자 토모노리는 굉장히 반가워하며 그 들을 자신의 방으로 직접 오게 한 후 세 살인 토쿠마츠기미(德松君)를 무릎에 앉힌 채로,

 [잘 오셨네. 편히 쉬다 가게나. 내 딸이나 사위께선 건강하시겠지?]

 라고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이때 토모노리가 윗몸을 내밀어 차 그릇을 권하는 순간. 카루가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테야리(手槍[각주:3])를 꺼내어 토모노리의 가슴팍을 향해서 찔렀다. 깜짝 놀란 토모노리는 검호 국사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뒤 편에 있던 칼걸이에서 칼을 뽑아 맞섰지만, 타키가와 등의 암살대는 계획대로 토모노리를 제압하여 세 살짜리 토쿠마츠기미까지 죽였다.

 한 사람이 목을 들고서 도망쳤지만 토모노리의 무사들이 뒤쫓아 난투를 벌였고,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왔지만 카루와 나가노는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모노리에게는 1572년 상경을 목표로 하는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과 연락을 취하며 노부나가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져 의심 많은 노부나가가 암살을 시도한 것 같다. 방심하고 있던 토모노리만 불쌍할 따름이다.


 토모노리 암살을 알게 된 충성심 깊은 키타바타케 무사 약 400명은 각지에서 키리야마(霧山)성으로 모여들어 노부나가의 대군과 싸우다 12 5일 패했다. 이리하여 키타바타케씨가 이세에 들어온 이래 8 2 4십 여년 이어진 영광스런 역사도 막을 내렸다.

  1. 무로마치 바쿠후(幕府)와는 별도로 예전부터 쿄우(京)의 조정에서 임명. [본문으로]
  2.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가 속한 남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역사서. [본문으로]
  3. 손잡이가 짧은 단창. [본문으로]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1579 6 13 병사 36

1544 ~ 1579.

통칭 한베에(半兵衛).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龍興[각주:1])의 신하였으나, 오다 가문(織田)으로 배를 바꾸어 탄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요리키(与力[각주:2])가 된다. 아자이(浅井)씨 공략이나 나가시노(長條) 합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나가(信長)츄우고쿠(中国) 지방 공략의 선봉으로 출진하지만 하리마(播磨) 미키(三木)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진영에서 죽었다.










이나바야마(稲葉山)성 탈취극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통칭인 '한베에(半兵衛)'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외견은 아름다운 부인(婦人)과 같아 전장에서도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말 가죽으로 둘러싼 투구와 목면의 하오리(羽織[각주:3]), 이치노타니(一ノ谷)의 갑옷을 입고 조용했다는 것이 [상산기담(常山紀談)]이 전해주는 이미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삼고지례로 맞이한 천재 군사라는 이야기는 [絵本太閤記]의 기술로 시게하루가 섬긴 것은 어디까지나 오다 노부나가이며 노부나가에게서 요리키라는 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한 것이다.


 시게하루가 군략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그 군략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1564 2로 20살 때의 일이었다.

 시게하루는 인질로 이나바야마성에 있던 동생 시게노리(重矩)의 병문안을 핑계로 불과 16명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사이토우 타츠오키의 측근 사이토우 히타노카미(斎藤 飛騨守)[각주:4] 이하 6명을 죽였다. 거기에 호응하여 한베에를 사위로 둔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가 카가미시마(鏡島)성에서 병사를 보내어 타츠오키를 쫓아 내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이토우씨에게 비판적인 카이센 쇼우키(快川 紹喜)조차도 쪽팔림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놈들이 타케나카, 안도우 패거리들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는 성을 건네라고 자주 사자(使者)를 시게하루에게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즈음에는 요시타츠에게 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시게하루는 잠깐 오우미(近江)의 아자이(浅井)()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는 미노(美濃)로 돌아왔다고 한다. 1566년 쿠리하라(栗原) 산에 칩거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세번 방문하여 꼬셨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絵本太閤記]의 기술인데 실제로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안도우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했던 다음해 8월 이후일 것이다.


미키(三木)성 포위중에 죽음


 아네가와(姉川) 전투 후 히데요시가 요코야마(橫山) 성주가 되자, 시게하루가 히데요시 부재시에 성을 맡는 일이 많아져 아자이 세력(勢力)의 빈번한 습격에서도 성을 지켜냈다. 1577 히데요시의 츄우고쿠 지방 공략이 시게하루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1578년.

 아리오카(有岡)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히메지(嬉路)성주 쿠로다 요시타카(黑田 孝高)는 무라시게 설득을 명령 받았지만 반대로 무라시게에게 잡혀 유폐되어 버렸다. 요시타카도 배반했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나가하마(長浜) 성에 맡겨 두었던 인질 처형을 명했다. 처치가 곤란해 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는 하나의 계책을 알려 인질을 자신의 본거지인 이와테(岩手)[각주:5]에 감추었다.


 1579 10월.

 아리오카 성이 낙성되어 요시타카도 구출되었고 인질도 요시타카에게 돌려주었다. 이 인질이 후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 나가마사는 죽을 때까지 시게하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78 3월.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미키 성을 히데요시가 공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을 성급히 정면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많은 수의 진지로(陳城[각주:6])를 세워 장기 포위전을 하기로 하였다. 긴 전쟁터 생활로 건강을 헤친 시게하루가 병으로 쓰러진 것은 포위 중이던 다음해 4월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게하루는 쿄우토(京都)에서 잠시 휴양했지만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무가의 바램이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한 시게하루는 부하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하리마(播磨)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왔다. 6 13 시게하루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죽음이 이 글 초반에 언급한 [常山紀談]과 같이 천재지만 여성적이며 선이 가는 이미지를 시게하루에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코우야(高野) 칩거의 꿈


 시게하루의 장남 시게카도(重門)가 기록한 [토요카가미(豊鑑)] 히데요시의 한 없는 슬픔을 [제갈 공명]을 잃은 [유비]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시게하루 죽은 뒤에도 군사 회의를 할 때마다 히데요시는 반드시 시게하루를 언급했다고 한다.([寬永諸家系図伝])


 한편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시게하루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서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시게하루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고생만 시키며 그의 위세를 꺾으려 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은 시게하루는 미키성을 함락하면 코우야 산에 올라가 은퇴하여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한다.([竹中家譜])


 시게하루의 유골은 미키성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졌다. 죽어서도 아군을 고무하며 전군을 지휘하려고 했을 것이다. 미키성이 낙성된 것은 시게하루가 죽은 반년 후인 1580 1월이었다.

  1.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의 손자. [본문으로]
  2. 조력자...를 말한다. 주군이 부하에게 도움이 될 부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격을 따지자면 동격임. [본문으로]
  3. 갑옷 위에 입는 조끼와 같은 덧옷 [본문으로]
  4. 성 탈취의 원인은 이 히타노카미가 시게하루에게 오줌을 쌌기 때문. [본문으로]
  5.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의 별칭. [본문으로]
  6. 합전 혹은 공성용으로 임시적으로 세워두는 주둔용 요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