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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노만도코로'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08.03.08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2- (2)
  2. 2008.03.03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1- (8)
  3. 2008.01.1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6- (6)
  4. 2008.01.06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5- (7)
  5. 2007.12.30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4- (13)

二.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리자.

 삿사 나리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언도 받은 것은 1588년 윤5월로, 이 때문에 히고[肥後]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이 나리마사의 후임으로 누가 임명 받을까 하는 것이 성중(城中)의 화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일개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신분에서 갑자기 천하를 손에 넣었다. 때문에 에도 막부를 세우게 되는 토쿠가와 가문[家]과는 달리 그를 따랐던 부하들 중에 쿠니모치 다이묘우[ 大名][각주:1]가 될 정도의 기량이나 경력, 가문의 격()을 가진 자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싹수가 보이는 젊은 직속 가신 중에서 발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가 좋을까?

 

 히데요시는 침묵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사안일수록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나불대면서 하였다. 그것을 듣고 네네 아니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라고 해야만 할까 – 가 곧바로,

 

 “토라노스케[虎之助]야 말로 적임자겠죠”

 

라고 말하였다. 토라노스케라는 것은 키요마사[正]의 통칭이었다.

 키요마사라는 젊은이는 히데요시의 모친 나카(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친척으로, 키요마사가 5~6살 때 히데요시는 키요마사의 모친에게 양육을 부탁 받았다. 히데요시는 흔쾌히 수락하여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부엌 밥을 먹이며 키웠다. 네네가 타진 옷을 기워준 적도 있었으며, 여름이나 겨울에 입을 것도 네네가 걱정하였고, 심한 장난을 야단도 치며 때린 것도 네네였다. 키우느라 들였던 노력이 그대로 네네의 애정으로 바뀌어 있어, 그녀에게 키요마사 만큼이나 귀여운 무장은 없었다. 곧이어 꼬꼬마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서 불과 15살의 나이에 170석을 받는 몸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세운 공으로 인해 3000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키가 6척을 넘어[각주:2] 전쟁터에서는 위풍당당하였으며 또한 장재(將材), 무략(武略)도 있는 듯 했다. 거기에 네네의 눈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귀염성 있는 성격이었다. 지금 이 젊은이에게 토요토미 가문이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그 은혜를 반드시 갚으리라.

 

 아직 어려~”

 

 히데요시는 거부하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3000석의 직무밖에 경험하지 못한 26살의 젊은이를 갑자기 거대 다이묘우로 삼는 다는 것이 좀 그렇다는 의미였지만, 그러나 갑자기 정권을 얻은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뭐든지 속성(速成)으로 해야 했다.

 

 괜찮겠지

 

 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키요마사로 하겠다

 

 고 마음 정한 후, 히데요시는 이 인사(人事)에 자신의 장대한 다른 구상을 결부시켜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다른 구상이란 언젠가 대명(大明)을 공격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대명 정복이라는 것은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이었을 즈음부터의 꿈으로 살아있는 동안 이 꿈만은 실현하고 싶어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히메지 성[城]에서 아즈치[安土]로 가서 노부나가에게 인사를 올렸을 때 반은 농담삼아,

 

 큐우슈우[九州]를 하사해 주시면 그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라고 말한 것은 대명(大明)으로 바다를 건너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히고[肥後]는 큐우슈우에서도 온 지역에 미전(美田)으로 가득 차,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병사를 기를 수 있었다. 더욱이 히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있던 키쿠치 씨[菊池氏][각주:3] 이래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이 지역을 키요마사에게 하사하면 어떻게 될까? 히데요시 휘하에서 토라노스케 키요마사 만큼이나 외정(外征) 선봉대장에 어울리는 남자도 없었다. 히고[肥後]의 경제력은 그 과중한 군역(軍役)에 견디기에 충분했으며, 키요마사 정도의 남자가 히고 병사를 이끌고 가면 대명(大明)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반국()을 주자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고의 반이라고 하여도 25만석이여서, 3000석인 키요마사의 신분에서 말하면 기절할 정도의 출세였다.

 

 키요마사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히데요시의 큰 은혜를 느끼는 한편 그보다도 더 깊은 감정으로 자신의 양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막 목욕을 끝낸 모친의 향기를 맡고 싶어하는 듯한 기분과 같은 것이 언제나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한 키요마사의 마음 속에 있었다. 키요마사에게 표면적인 주인(主人)은 히데요시였으며, 감정상의 주인은 키타노만도코로였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머지 반국 24만석은 야쿠로우[弥九朗]에게 주기로 하였다. 사이 좋게 지내라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을 때, 키요마사는 얼굴을 숙여 절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약방(藥房) 출신의 야쿠로우 놈과……’

 라는 생각이 들자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키요마사는 무공(武功)이 있어야만 값어치가 있다는 소박한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보호자인 키타노만도코로의 가치관과 일치하였으며, 가치관이 일치하였기에 그녀는 키요마사를 사랑하였으며 키요마사도 그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런 키요마사에게 히데요시의 인사(人事)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으로 츄우고쿠[国] 공략을 하고 있을 때 주워온 남자였다.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외교 감각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그를 부하로 삼아 하급 참모장교로써 여러 곳에서 부렸다. 또한 유키나가의 부친인 사카이()약종상(藥種商)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나 형인 죠세이[清]도 가신으로 삼아 행정을 맡기거나  경리(經理)를 담당시키는 등 총애하고 중용하였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자 키요마사와 같은 야전(野戰), 공성(攻城)의 군인보다도 유키나가처럼 경제를 보는 눈이 있는 정략가(政略家) 쪽을 중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참고로 상인(商人)인 코니시 일족은 사카이[]에서 오오사카[大坂]에 걸쳐 번영하였지만, 유니나가의 코니시 가문은 그 일족 중에서도 중급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었기에 그쪽 방면에서도 명문가(名門家)라고 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약종상이라는 가업 상 대대로 조선 무역에 숙지(熟知)하여 유키나가도 몇 번인가 바다를 건너 간 적이 있어 조선의 지리나 정세에 밝았고 거기에 조선말도 할 줄 알았다. 그 점이 히데요시에게는 매력이었다. 언젠가는 대 조선 외교를 담당시키고 싶었고, 막상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키요마사와 함께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었다. 키요마사의 무용(武勇)에 유키나가의 기략(機略)과 해외 지식이라면 원정군에게는 범에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키요마사는 이해 할 수 없어,

 결국 이런 것이겠지

 라는 편견만으로 사태를 보았다. ()로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도 성 안의 방바닥에 앉아서 손바닥이나 비벼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무사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자보다 중용되어 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 성 안의 무리들이 토요토미 정권의 중추(中樞)에 들러붙어 강고한 단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재자(才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당수격(黨首格)이 되어 오우미[近江]계의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코니시 유키나가도 그 계열에 속해 있었다.

 

 먼 곳에 가면 어찌 될지……’

 라는 걱정이 당연히 키요마사에게는 있었다. 키요마사는 성 안의 무리들을 미워했고 또한 소원(疎遠)했기에, 중앙에서 말도 안 되는 참언(讒言)을 당하기라도 하면 삿사 나리마사와 같이 부임 후 영지(領地) 몰수 이어서 할복이라는 운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리마사가 만약 성 안의 무리들과 친했다면 중앙의 무마가 먹혀 들어 그런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키나가는 미츠나리와 사이가 좋다. 이런 점에서 잘 해나갈 것임에 틀림 없다

 라는 그 하나만이 키요마사를 신경 쓰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봉지(封地)로 떠나기에 앞서 키타노만도코로를 배알(拜謁)하여,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이 아뢰었다.

 

 저는 그 약방놈하고 사이가 나쁘옵니다. 한 나라() 50만석을 둘로 나누어 각각 통치하는 이상, 당연 분쟁도 일어나 서로간의 기분도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약방놈은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 = 미츠나리]를 통해서 주군에게 졸자(拙者)를 참언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시옵소서... 라는 것이 키요마사의 바램이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요마사가 앞날을 우려하는 것 - 이것을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상으로 같은 걱정을 하는 사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녀 자신도 키요마사와 같이 요즈음의 문치 중시로 치우친 토요토미 정권에 은근히 분노를 느끼고 있어 미츠나리나 유키나가와 같은 무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

 

 라고 그녀는 키요마사에게 말했다. 언제나 말이 명쾌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이 변함없는 시원시원함을 접하여 키요마사는 얼굴 표정까지 밝아져 들뜬 마음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명쾌하게 말했던 만큼 기분이 밝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키노시타 성[木下姓]이었을 즈음부터 그녀의 내조(內助) 없이는 히데요시의 공()을 말할 수 없었다. 인사(人事)의 상담도 하였고, 밖으로 원정을 나간 히데요시를 위해서 오다 가문과의 사교(社交)에도 힘썼으며, 가문 내의 정세도 조사하여 정리해서는 히데요시에게 알려주었고, 또한 일가의 가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부하들의 뒤도 잘 돌봐주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히데요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였던 하시바 성[羽柴姓]시대에도 그러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는 츄우고쿠[国] 방면에 나가 있어 거의 부재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성주는 그녀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그녀가 했던 그런 역할을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행정관[奉行]들이 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시스템이 정비됨과 동시에 그녀는 그 역할에서 실직(失職)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힘도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키요마사가 참언 당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처리하는 미츠나리 등의 행정기관에 그녀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호해 줄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1. 한 나라(国)를 소유할 정도의 거대 다이묘우. [본문으로]
  2. 1척 = 약 30.3cm 따라서 180 이상. [본문으로]
  3. 예전부터 많은 무용을 남겼다. 도(刀)가 주류였던 일본의 전쟁에 창[やり(槍)]를 발명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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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8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라도 있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그렇게까지는 마음쓰진 않았을 듯 싶은데.. 도요토미 가문에 적자가 없다는건 치명적인 약점이었군요.. 재능 있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음 참.. (세키가하라를 보면..-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9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교적인 권선징악에 따른 올바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시선에서 보면요 ^^)

一.

검은 백합 한 송이
라는 편지가 네네()에게 전해진 것은 1587년의 한창 더울 때였다.
근시일 내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낸이는 말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네네는 처음엔 그 목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합(百合)이 검다니 -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너무 괴이했다.

 뭔가의 착오겠죠

 라고 네네는 시녀(侍女)들에게도 말했다. 그녀는 남편인 히데요시[秀吉]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괴이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네[々], [々]라고도 쓴다. 네이코[寧子]라고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귀족이 되면서부터였다. 귀족의 여성은, 예를들면 '켄레이몬인 토쿠[門院 ][각주:1] '식으로 子자가 붙는다. 남편 히데요시가 칸파쿠()가 되었을 때, 칸파쿠의 정실(正室)은 키타노만도코로[政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간(世間)에서 그리 불렸다. 그 즈음 궁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
토요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
 
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해서 그녀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吉이라는 글자가 복스럽고 좋다는 뜻에서 그 글자가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네네가 어떤 글자의 이름으로 쓰여지건 그녀가 종일위(從一位)라는 여성으로써 최고의 위계(位階) 소유자이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가정과 후궁, 여관(女官)들의 총지배자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목록을 헌상한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 成政]였다.
 
나리마사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범죄자였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토박이 가신(家臣)이며, 노부나가[信長]에게 그 무용(武勇)과 강직(剛直)함을 사랑 받아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군의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 말년에는 호쿠리쿠 탄다이[北陸探題[각주:2]]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막하(幕下)에 배속되어 엣츄우[越中] 일국()을 소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어 호쿠리쿠의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가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웠을 때, 나리마사는 당연하게도 카츠이에 측에 서서 히데요시에게 대항하였다. 단순히 정치상의 소속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만큼이나 극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한 옛 오다 가문의 장수도 드물었다.

 히데요시는 호쿠리쿠를 제압하고 엣츄우[越中]로 진격해 들어가 나리마사를 항복시켰지만, 이 정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인물의 목숨을 이외로 살려주었다. 세상은 히데요시의 도량에 놀랐는데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리마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 목숨을 살려준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나리마사와 같이 단순하고 목이 뻣뻣한 인물에게 있어서는 생애 풀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보다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혐오하는 나리마사까지 죽이지 않았다는 평판은 천하로 널리 퍼져 나가, 그것을 전해들은 여러 지역의 대항자(對抗者)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성을 열고 활을 땅에 던지며 복종해 올 것이다. 그런 효과를 히데요시는 기대했다.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 나리마사에게 엣츄우의 일개 군()을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놀라 자빠졌다. 거기에 이어 큐우슈우[九州] 정복 후,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히고[肥後] 50여만석을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어째서 이 정도로 후은(厚恩)을 받는 것인가?’
 
라고 나리마사는 생각하여, 이 인물 나름대로 겨우 답을 낸 것이 네네의 존재였던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뒤, 나리마사는 잠시 오토기슈우[御伽衆[각주:3]]로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 즈음 네네에게도 배알(拜謁)하였고 또한 선물도 보냈다.
 
이 부인(婦人)에게 허술히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나리마사에게 있었다. 일단 패해서 살아남은 인물인 만큼 그런 종류의 감각은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날카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사(人事)에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신(謀臣)쿠로다 죠스이[田 如水]나 초창기부터 선봉대장(先鋒大將)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등이 아닌, 이 키타노만도코로라는 것을 나리마사도 알게 되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나가하마[長浜]의 꼬꼬마 코쇼우[小姓] 때부터 손수 길러 어렸을 때의 싹수부터 꿰뚫어 보아 일치감치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것이 그녀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나리마사는 많이 듣고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녀의 인물 감정에는 신용을 하고 있었으며, 항상 그것을 존중하였고 그 의견을 허술히 하지 않았다. 토우키치로우[藤吉[각주:4]]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와 그녀의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네는 명랑한 성격에 더구나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조금도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는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 버릇이 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되어서도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가문 내의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평가에 사심이 없고 적확(的確)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도 그것을 존중하여 때로는 상담하거나 하였다. 자연히 그녀의 위복(威福)과 다정함을 우러르는 무장(武將)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카토우 키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거기에 그녀의 양갓집의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은 그 살롱(salon)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가 자신의 기괴할 정도의 영달이 어쩌면 키타노만도코로덕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것도 이런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 부인은 나 같은 놈에게 호의를?’
 
이라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았다. 네네의 남성에 대한 호의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어, 궁중에서 사교(社交)가 뛰어난 인물보다도 전쟁터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남자의 와일드함과 강직함을 사랑하였고, 예를 들어 그들이 저돌적인 것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녀는 오히려 그 실패를 미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언젠가 두서너명의 무사(武士) '면밀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이유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고 그들의 위해서 여러 번 옹호하여 결국에는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래에 모이는 무장들의 무리는 이윽고 무단파(武斷派)라는 인상을 세상에 끼치기에 이르는 것도 거슬러올라가면 그녀의 그러한 기분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리마사는 그런 점에서 자신과 같은 남자가 키타노만도코로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이유를 알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나리마사는 그녀나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점에서도 다소의 경향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에 많이 있는 오우[近江] 사람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과 같은 오와리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친근감을 보였다. 오와리 서부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히라 촌[比良村] 출신인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 이것만으로도 네네에게 타인(他人)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이 호의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
 
고 나리마사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인사(人事)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와의 유대(紐帶)를 강하게 해 두는 것이 앞으로 먼 지방에서 생활하는 몸으로써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내야 좋을지에 대해서 나리마사는 곤혹해 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물욕(物慾)이 없는 것에 더해 지금의 신분이라면 무엇을 보내건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깊게 생각한 끝에 나리마사는 자신이 예전에 지배하고 있던 엣츄우[越中]의 명산(名山) 타테야마 산[立山]의 높은 곳에 검은 백합이 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진귀한 꽃은 없었다. 엣츄우에서조차 검은 백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 기껏해야 쿠로베[部] 계곡에 사는 사냥꾼이나 타테야마 산의 권현(權現[각주:5])을 존숭(尊崇)하는 수행자들 몇몇이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정도였다. 나리마사는 이 검은 백합을 보내고자 하여, 한때는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엣츄우 지역의 무사들에게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그 채집을 의뢰하였다. 진귀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현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부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그루를 얻어서는 그것을 통에 넣어 오오사카[大坂]로 운반시켰다. 꽃은 뜨거운 날씨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송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것이 오오사카에 있는 나리마사 저택에 도착하자 나리마사는 곧바로 그 중 한 송이를 금(金)으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 옻칠을 한 통에 꽃꽂이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서(秘書)인 늙은 비구니 코우조우스()에게 보내었다. 코우조우스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방으로 가지고 가, 그곳의 도코노마(床の間)에 놓았다.

 이것이 편지에 있던 검은 백합인가……”

키타노만도코로는 말을 입에 머금은 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목을 쭈욱 내밀을 수 있을 만큼 내밀어 꽃에 몰입되었다. 검다……기 보다 엄밀히 말해 검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칠흑의 꽃잎보다도 그 자연스런 색조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 속에서는 선명하게 검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는 통통한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므츠지쥬우[従]님은 참으로 친절하시구나

 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마사는 이 당시, 하시바 성[羽柴姓]을 하사 받아[각주:6] 므츠노카미[守]가 되어 지쥬우[従]에 임명 받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시바 므츠지쥬우(羽柴 陸)라 통칭되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武士)는 이래야 하는 것이죠

 라고 목소리를 적셔서 말했다.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속에 이런 친절함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의 미의식(美意識)에 걸맞는 무장상(武將像)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우미[近江] 계의 봉행 나부랭이들에게 이렇게 빛과 색깔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비교해서 더욱더 나리마사라는 인물을 중히 평가하며,

 역시 사람에게 깐깐한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각주:7]]님의 눈에 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얄밉다고 할지…… 엣츄우[越中]에서 수백 리 길의 산과 강을 오르고 건너게 한, 이 꽃을 단 한 송이만 보낸 나리마사의 생각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노력과 비용 속에서 일편의 와비[[각주:8]]를 찾아낸 나리마사는 평소,

 졸자(拙者)는 차()를 모릅니다

 라고 말했으면서도 이것은 다도(茶道)의 극의(極意)가 아닌가?

 세상에 검은 백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면는 생각에, 이 검은 백합을 위한 다회(茶會)를 열고자 그 준비를 명했다. 그녀가 대접해야 하는 주인(=테이슈(亭主))이기는 했지만, 다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접대(=시타토리모치(下取持))에는 사카이[]의 모즈야[屋]의 젊은 부인이 맡았다. 모즈야의 부인은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딸 '오킨[おきん]'을 말하며,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부인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다회는 성공하여 큰 평판을 얻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에 있는 귀부인(貴婦人)들로 당연히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인들은 모두 이 높은 곳의 눈에서만 핀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에나 나오는 꽃에 감탄의 목소리를 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에 복을 받을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라고 입을 맞추었다.

 후세(後世).
 
이 다회에는 이야기가 더 추가되었다.
 
이 이야기에는 요도도노[淀殿]를 등장시키고 있다. 요도도노도 이 다회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는데 미리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거기에 한 번 더 궁리하여 자신도 수하를 엣츄우[越中]에 파견하여 검은 백합을 채집시켰다. 엣츄우[越中]는 삿사 나리마사 다음의 다이묘우[大名]를 두지 않고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으로 삼고 있었다. 직할령의 지배는 오오사카[大坂]의 봉행(奉行)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봉행들이야 말로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 요도도노를 보호자로 우러르고 있는 오우미[近江]계의 문관(文官)들로, 이 점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채집시킨 것이 아직 오오사카에 도착하기 전에 요도도노는 키타노만도코로가 주최한 다회의 손님이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송이의 검은 백합에 이 세상의 신비에 놀라움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만은 예외였다.
 
조용히 그것을 지긋이 본 후 형식적으로만 찬미하였다. 이 담담한 태도가 키타노만도코로를 의아케 하였다. 원래 둔감한 것일지도 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요도도노는 검은 백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지 않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일이 명확해졌다. 요도도노가 사는 니노마루[[각주:9]]의 긴 복도(長廊下)에서 꽃꽂이에 쓸 꽃을 채집하는 행사가 열려 키타노만도코로도 초대되었다. 그녀가 코우조우스를 데려 가자, 3일 전에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다회까지 열게 한 그 검은 백합이 다른 마타리 같은 잡초와 함께 바구니에 마구 담겨 주변을 장식하는 꽃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송이나 두 송이가 아닌 20, 30이나 아무렇게나 꽂혀가며,
 
-
검은 백합 같은 것은 진귀한 꽃도 아니다.
 
고 키타노만도코로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이런 창피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녀의 굴욕은 공개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들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요도도노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검은 백합을 헌상하여 이런 굴욕을 맛보게 한 삿사 나리마사에게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곧바로 히데요시를 움직여 나리마사에게서 새로운 영지(領地)인 히고[肥後]를 빼앗아 결국에는 셋츠[
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할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 한다.
 
이 이야기를 후세 후세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리마사가 영지(領地)를 몰수당한 1587년에는 아직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시기이며, 저 만큼의 기획을 짜서 키타노만도코로와 대항할 정도의 위세(威勢)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지지 못했다.
 
또한 삿사 나리마사의 실각(失脚)은 다른 사건과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빙자하기에는 너무 유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요도도노라는 두 규벌(閨閥)의 다툼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와 운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간다는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높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또 없을 것이다.

  1.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딸로 부친의 의향에 따라 황실에 들어가 안토쿠 텐노우[安徳天皇]를 낳았다. 헤이케[平家]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 [본문으로]
  2. '탄다이’란 그 지역의 군사, 정치, 판결권을 소유한 총책임하는 기관 혹은 인물. [본문으로]
  3. 히데요시의 말 상대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미관말직일 때의 이름 [본문으로]
  5. 일본은 산을 신으로 여기는 산악신앙이 있어, 타테야마 산을 이자나키[伊邪那岐]의 화신이라 여겼다. 또한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부처님들의 화신이라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에 따라 이자나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이라고도 여겼다. [본문으로]
  6.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를 칭하기 이전에 사용했던 성(姓). 유력한 인물들이나 공이 많았던 부하들에게 이 하시바 성을 하사하여 일문(一門)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지칭. [본문으로]
  8. 심플함 속에서 맑고 한적한 정취 [본문으로]
  9. 두 번째 성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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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4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삿사 나리마사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군요.. 어쩐지 겨우 이런일로 죽인다니 그 현명한 기타노 만도코로치고는 단순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뭐, 아무래도 자기 지방 사람들을 우대하는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글쎄요.. 왜그럴까요?(쿨럭;)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5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화나 에피소드에 있는 이야기들은 뛰어난 인물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백합이야기도 그런 의미가 아닐지...

    저도 그게 이해가 안가더군요... 자기 지역 출신 우대가...
    임진왜란 때 출진한 어느 부대(...음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군요)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무장단과 그렇지 않은 하급자들의 알력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전 생각합니다.
    당시는 세금 &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람 머리수를 갖추어야 했기에, 자기 영내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다른 쿠니(国)의 사람들과 만나기 힘들었고, 지금도 외국인을 배척하듯이 당시는 더욱 배타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다른 지역의 흉은 곧바로 받아들이지만, 칭찬은 믿기 힘든 것도 또한 사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없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일본은 있다"는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거기에 당시의 관습법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国質,郷質라는 것이 있어,
    같은 쿠니, 혹은 마을의 A라는 사람에게 타지역의 B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며, B는 A와 같은 쿠니 혹은 마을 사람인 C에게 돈을 받거나 물품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면에서 사기 치는 사람이 분명 생겼을 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서로간에 불신도 싹트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6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오오.. 생각할 점이 있는 답변을..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7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단 것에 오타가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군요.. --;;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

  5. 이노센스 2010.02.13 2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현은 일본어로는 곤겐이라 읽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속세에 내려온 부처를 이르는 호칭으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죽은 뒤에 도쇼구에 모셔져 도쇼다이곤겐의 칭호를 얻었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號)같이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권현'이란 불교 용어를 일본식으로 고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현은 신이 이 세상에 임시의 모습을 가지는 것으로 산악신앙과도 많은 연관이 있던 것 같더군요. 굳이 인간의 몸을 입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묻습니다만 이에야스 말고 또 権現의 호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명망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진다고 하시니 생각 외로 여러 명이 있었나 보군요.

      개인적으로는 이에야스가 곤겐이 된 것은 텐카이[天海]와 그의 말에 넘어간 히데타다[秀忠]에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6. 이노센스 2010.02.13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시물의 하단이 잘리는 것이 아쉽네요.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은 저도 서울 교보문고에서 일본어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 데 번역을 생각보다 잘 해놓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없어서 아쉬웠지만요. 다만 한글로 옮기기 곤란한 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다소의 장난기 어린 표현이 시바 료타로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망가뜨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어 번역보다 돌출되는 문제인 듯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이버에서 이쪽으로 오면서 뒷글이 많이 잘리더군요....근데 이번 편은 한 번 손을 본 곳이라 잘리지 않았는데...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주인공인 '하리마 바다 이야기[播磨灘物語]'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장난기 어린 표현...이라....
      ^^ 그렇군요. 이노센스님은 제가 쓴 장난기가 담긴 표현을 어떻게 표현하실수 있으시려나요? 시바 선생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살리는 방법 좀 알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히데요시[秀吉]의 사후(死後), 쟁란(爭亂)이 일어났다. 1600 5월 여름. 미츠나리[三成]가 거병하였다. 간적(奸賊) 이에야스[家康]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미츠나리에게 있어 모든 것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를 위해서였으며 이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자신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천하의 제후는 동서(東西)로 나뉘었다.

 이러는 사이,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쿄우[京]에 있었으며,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후 코우다이인[高台院]이라 불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를 후원하며, 이에야스의 힘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보존하고자 그녀의 영향 아래 있던 여러 무장들에게 권하여 이에야스 측에 가담시키려 하였고 거의 성공하였다. 단지 그녀는 히데아키[秀秋]의 우둔함이 두려웠다. 서군(西軍)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히데아키의 깃발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 이 젊은이에 한해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우다이인은 그를 쿄우로 불러,

 에도()[각주:1]은 당신의 은인입니다. 결코 방향을 틀리지 마시길

 하며 정성 들여 타일렀다. 히데아키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이미 그 몸이 오오사카[大坂]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온통 서군 뿐이라 서군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움에 이기고 난 후 100만석 영지를 준다는 뜻을 전해왔다. 히데아키는 다소 동요했다.
 
서군에 붙을까?’
 그러나, 칸토우[東]에도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러는 한편 서군에 붙어 동군(東軍)의 소부대(小部隊)가 수비하는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히데아키는 어느 쪽에 붙어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후 서군의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우미[近江]의 타카미야[高宮]라는 곳에 틀어박혀서는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거동을 의심하여,
 
아군에게 큰 해가 된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 히데아키를 불러들여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히데아키는 응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뿐만 아니라 칸토우[東]에 있던 이에야스도 히데아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
 
뭐라 해도 좆병진이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의 밀사(密使)가 왔어도 만족스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戰場)으로 향하던 도중,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또 다시 히데아키의 밀사가 이에야스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그것을 이에야스의 부하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가 응대하여 이에야스에게 만날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용건은 '서군을 배반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날 필요 없다

 고 이에야스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서군에 가담한 여러 무장들을 와해(瓦解)시키고자 온 힘을 다하여 뒷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료(幕僚)들은 이런 이외의 태도에 놀랐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서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대부대(大部隊)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머릿수는 얕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내응(內應)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데, 그걸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은 어쩌자는 것일까?

 애송이 놈의 말, ()을 주기에 부족하다

 라고 이에야스는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함부로 응했다가 막상 그 때가 되어서 내응하지 않았을 경우 애송이의 잔머리에 넘어간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야스로써는 승패 이상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5
일 후, 이에야스가 시라스카[白須賀]에 도착했을 때 히데아키의 세번째 밀사가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부하에게 시켜 적당히 응대하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1600 9 15일 아침부터 벌어졌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서군에 속하여있었으며 더구나 계속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분지(盆地)의 서남부에 있는 표고(標高) 293미터인 마츠오 산[松尾山]의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아래쪽의 전황(戰況)을 관망(觀望)하고 있었다.

 킨고[金吾]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그 산을 올려보는 동서 양군의 어느 누구던 그런 의혹을 가졌다. ()은 마치 저 먼 하늘에 있는 듯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가 킨고를 위해서 붙여준 히라오카 이와미[平岡 石見], 이나바 탄고[ 丹後] 두 명은 이미 이 전날 밤 동군의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를 통해서 내응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나가마사가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히데아키의 신청을 승낙했다. 더구나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되지 않게 토쿠가와 가문에서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平 貞治], 쿠로다 가문[黒田家]에서는 오오쿠보 이노스케[大久保 猪之助]가 각각 연락과 감시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진중에 가 있었다.

 한편, 서군 측도 될 수 있는 만큼의 회유(懷柔策)은 쓰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입니다

 라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단순한 충절론(忠節論)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에게 거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은,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시기 전까지 킨고님에게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관백[白]추대(推戴)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조건에는 히데아키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 좁은 세키가하라 분지에 동군 약 7, 서군 약 8만의 군세가 대치하였다.
 아침. 전날 밤에 내린 비가 갬과 동시에 교전 상태가 되어
정오(正午)가 가까워짐에 따라 전황이 격렬해졌다. 더구나 서군의 주력 부대인 이시다[石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 등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밀린 동군은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어서 오전 11시가 넘자 동군의 일부에서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8천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내려올 기색조차 없이 동서 어느 쪽에도 붙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아키는 산 아래의 전황이 뜻밖이었다. 아군인 서군이 진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인 동군에 내응을 약속하였는데 산 아래의 전황은 서군이 유리했다. 산꼭대기에서 히데아키는 이 남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였다. 이대로 상황을 봐서 이기는 것이 결정된 쪽에 붙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이다.

 한편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시다 쪽의 분전은 더욱 뜻밖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몇 번이나 마츠오 산을 올려다보며,

 킨고는 아직인가? 아직 내응하지 않는 건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단 말인가? 하지만 산꼭대기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코바야카와 가의 깃발은 움직이질 않았고 그 거취도 알 수 없었다. 히데아키의 거동은 이에야스가 예측했던 대로가 되었다. 결국 정오 전의 이에야스는 그가 낭패(狼狽)했을 때의 버릇인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해,

 애송이에게 속다니…… 분하구나 분해!”

 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위협이었다. 곧 철포대의 일부를 전진시켜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야마의 기슭으로 보내 산꼭대기를 향해서 이에야스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이 연달아 발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히데아키라는 남자에게는 이 발포가 무엇보다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산꼭대기의 히데아키는 놀라 두려움에 허둥거리듯이 서군을 향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정오였다. 8천의 코바야카와 군세는 산을 내려와 아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전세(戰勢)는 이 순간 역전되었다.

 싸움에 이긴 후 분지 서쪽의 이에야스 진지에 여러 무장들이 모여들어 축하가 이어졌지만 이 싸움에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인 히데아키만은 아직 자신의 진지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혼난다
 는 공포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이 얼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킨고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군

 하고 이에야스가 말하여 전령(傳令)인 무라코시 모스케[村越 茂助]에게 맞이해 오도록 명했다.
 
저 좆병진에게는 여러 번 손이 가는구먼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곧이어 히데아키가 왔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축하는 형태로 이에야스의 진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만은 예()를 취하여 우선 자리에서 내려와, 투구의 턱끈만 풀고 말하길,

 츄우나곤님. 오늘의 전공(戰功)이 아주 크시니 앞으로 원한을 가지지 않겠소

 라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히데아키는 놀라 앞으로 자빠지듯이 절을 하였다. 원래의 태생으로 돌아간 듯 마치 백성과 같았다. 이런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일문(一門)이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 그곳에 있던 토요토미 계()의 여러 무장들 역시 창피해져 모두 눈을 돌렸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소곤거렸다. 마사노리는,

 당연한 것.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노리 자신도 아직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새가 몇 시간 동안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가 결국 공포에 떤 나머지 뛰쳐나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만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地下)의 히데요시도 이 양자(養子)가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전공을 칭찬하며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0만석을 하사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 후 히데아키는 매일 밤 광란(狂亂)하며 음란(淫亂)에 빠졌고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곤 취하여 곧이어,

 세키가하라의 전공 일등은 내다!”

 고 시녀(侍女)들을 모아서는 칼을 뽑아 들고 전쟁 흉내를 내었다. 보좌하던 노신(老臣)들도 그 광포함을 두려워하여 주요한 자는 대부분 그가 살아있을 때 뿔뿔이 흩어졌다. 곧이어 머리에 병을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2년 후인 1602 9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

  죽었다고?”

 쿄우[]의 코우다이인[高台院]은 이 조카의 부고(訃告)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었다. 계명(戒名)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가 만든 이 양자는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완수하였다.

=======================================================金吾中納言,======================
  1.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거성이 에도에 있었기 때문이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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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jw321 BlogIcon 이그네스 2008.01.12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의야망 혁신에서는 소성 패다가 오히러 자기가 죽는 그런 비슷한 이벤이 있었던거 같은데.. (본인은 대충 봐 넘겨서 정확하진 않지만....) 여기선 병으로 죽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2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군요(왜 이게 해석이 저는 그토록 어려웠던걸까요..ㅎㄷㄷ; 해석하느라고 참새와 매에 관한 소설을 머릿속에서 한편 썼었더랩던;;)

    그나저나 시바선생은 몰년의 히데아키의 나이를 기입하지 않는 센스를 보여주심으로서 '실수'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시는 센스를 발휘하셨군요(-_-..ㅎㄷ...)

    그.. 히데아키의 죽음에 관한 여러 이설을 안 넣고, 그냥 '뇌에 병이 들어 죽었다'로 간결하게 끝내는 센스도, 괜찮더군요. 역시 시바선생..이라는 느낌이랄까.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미려한 히데이에 차례이군요(ㅎㅎ..)-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13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그네스님//그런 설도 있습니다. 술 먹고 전쟁 흉내내다가 소성 혹은 시녀에게 칼을 빼앗겨 죽었다는 설이나, 매사냥 나갔다 오다가 파이어볼을 채여서 그걸로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 혹은 (가장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유령에 괴롭힘 받다가 죽었다는 설. 혹은 암살 & 독살설 등...
    한번 이것도 읽어 보시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9195550

    다메엣찌님//참새 & 매는 문맥상 그렇게 했습니다. 대항한다는 글자로 쓰여있긴 합니다만, 까분듯하게..
    저는 그 다음 문맥의 것을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드네요. [그가 말하는 ~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투구의 턱끈만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そんなこといっちゃダメ!

    저 간결함 정말 맘에 들더군요. ^^ 보통 생각하면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저주의 말 한마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냥 [이 순간 전세가 역전 되었다]로 끝내시다니..

    그쵸.. 다음은 [미남의 파동]에 눈을 뜬 [미의 극에 달한 히메] 고우키(豪姫)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정한 미남을 찾다가 걸린 눈이 아름다운 청년 히데이에... 그의 고난과 역경이 다음 주부터 여러분을 찾아갑니다.(by CAPCOM)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3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 아무튼 세키가하라 이후 반세기 넘게 사신 분이니.. 천수까지 복받은 미남자(ㅋ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투구의 턱끈만 풀어놓는다" 라는것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히데아키에게 각인시키려고한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 과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전 예의상의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나름 많은 책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본 표현이거든요)
    근데 히데아키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에야스가 과연 생각했을지...
    (...라고 할까 마치 세익스피어 문학 토론하는 것 같군요 ^^)

.

 

 다음 해인 1598 4.

 히데아키[秀秋]는 귀환 명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키요마[清正] 이하 수비군을 전장(戰場)에 남겨둔 채 후시미[伏見]개선(凱旋)하였다. 히데아키는 전쟁터에서 얻은 햇볕에 멋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멋진 때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아직 공사 중이었던 후시미 성[伏見城]은 완성되어 있었다. 히데아키는 가슴을 펴고 입성하여 히데요시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히데요시[秀吉]의 노성(怒聲)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이다.

 히데요시는 울산성 구원 때 히데아키가 졸병들과 함께 창질이나 한 것에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나는 너 같은 놈을 상장(上將)으로 삼을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까지 말하여 히데아키의 공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뭔 일이래

 처음엔 멍했다. 이어서 이거야 말로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 모두가 원망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참언(讒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히데아키는 천성이 소심한 탓인지 격앙()하여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더듬은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이 양아버지였으면서 이모부를 공갈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지 않아…아니…않사옵니다. 전하는 트린 틀린 보고를 받으신 거다 아니 겁니다.”

 

 라고 외치곤,

 

 그렇다면 여기에 감찰관들을 불러 주십시오. 그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 놈도 불러주세요. 전하의 앞에서 흑배 아니 흑백을 가릴 테니

 

 니 뭔 말을 한다냐?”

 

 히데요시도 오와리[尾張]의 사투리로 히데아키보다 더 큰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에 비해 히데요시는 이미 (老衰)해 있어 그 쇠약함에는 죽음의 그림자 조차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때 역사를 창조했던 그의 이성(理性)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단지 감정(感情)만이 그의 몸을 가늘게 흔들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이 괴이한 소년을(이라고는 해도 21살이었지만) 귀족으로 만들어 주며, 거대 다이묘우도 만들어 준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이 늙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큰소리 치며 공갈을 하다니 이 무슨 배은망덕이란 말인가.

 

 히데요시는 혓바닥을 잃어버린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가 그를 지배하여 호우(설명, 그림) 속에서 떨었다. 히데요시가 이런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원래 말이 많았으며 재치가 뛰어났고, 너무나도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 그런 점에서도 지금까지의 히데요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 말 않은 채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자리에 들겠다

 

 히데요시는 시중드는 신하에게 그리 말했다. 먼젓번에는 몸이 쇠약한 나머지 잠자리에서 오줌을 지려 몸이 오줌으로 적셔진 적도 있었다. 오늘의 히데요시는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분했고 불안했다. 저 배은망덕한 놈이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 상태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처분을 새삼 결심하였다.

 

 한편 히데아키는 아직도 성안에서 큰소리를 질러대며 히데요시의 측근들에게 욕설을 퍼부는 식으로 지랄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를 이리 내오라~ 고 하였다.
 그
미츠나리가 나왔다.

 

 킨고님 부르셨습니까?”

 

 미츠나리는 양 눈을 똑바로 쳐들고, 히데아키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히데아키님의 지금 상태로는 히데요시님의 분노가 당장 풀릴 것 같지가 않사옵니다. 나중에 히데요시님의 기분이 풀리시면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겠사오니 오늘은 일찍 자택으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조금도 떨림 없이 말했다.

 

 ……지부쇼우!!”

 

 히데아키는 작은 [脇差]의 칼자루를 쥐고 달려 들었다. 진짜로 벨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승이며 가로(家老)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제지했다. 그 손을 히데아키는 떨쳐버리고서는,

 

 네 놈도 저 지부쇼우와 한 편이냐?”

 

 라고 소리질렀다. 이 폭언에는 아무리 마사히로라도 참을 수 없어, 이 일이 있은 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스승 겸 가로의 자리에서 물러나, 그의 영지(領地)카가[加賀] 다이쇼우지 성[大聖寺城](6만석)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때 부속 가로인 스기하라 시게마사[杉原 重政]가 지랄하는 히데아키의 등 뒤에 매달리며 말렸다. 그러는 사이 이러한 소동을 알현(謁見)에 동석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의 대로(大老)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곧이어 일어서서는,

 

 킨고님, 졸자는 성을 나서려 합니다. 함께 나가시지요

 

 라고 조용히 말하자, 히데아키는 일종의 위압감에 굴복했는지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몸이 일순간에 멈추어지며 얌전해졌다. 이 광경은 익살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무게감있고 의지할만한 장로의 풍모로 토요토미 가문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의 뱃속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 반드시 올 것인 정변(政變) 만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예전부터 키타노만도코로[政所]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던 운도 있기에, 키타노만도코로를 통해 그녀를 따르는 다이묘우[大名]들의 신뢰를 얻고자 틈만 나면 은혜를 팔려고 하였다. 히데아키는 어리석다고 하여도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이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에 대해서 과분할 정도의 친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껴안기 듯 성을 나왔다. 자택에 돌아가 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3~4잔 정도로 숨 쉬는 것을 괴로워할 정도로 취했다. 원래 이 남자는 술에 약했다.

 자택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히데아키에게 사자(使者)로 코우조우스[主]가 파견되었다. 코우조우스에 대해서는 제 1 [살생관백]에서 언급하였다. 토요토미 가문 가정 내의 것들을 다스리는 여관장(女官長)이다. 히데아키는 토요토미 일족의 예우를 받고 있었기에, 사자도 딱딱한 관리가 아닌 토요토미 가문의 여관장이 맡았다. 히데츠구의 쥬라쿠테이[第]에서 물러나게 설득한 것도 이 비구니였다. 사람됨이 둥글둥글하여 누구에게나 경애 받았다. 그 비구니가 토요토미 가문의 두 양자인 경우에는 2번 다 저승사자가 되었다. 비구니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치쿠젠[筑前]과 그 외의 영지(領地)들은 몰수 되었습니다. 어여 빨리 에치젠[越前]으로 옮기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외치려 하였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대며 숨이 거칠어 졌다. 코우조우스는 이런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망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비구니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봐~ 내는 죄가 없다

 

 전하의 말씀이십니다. 얌전히 따르시는 것이 신상(身上)에 좋습니다

 

 죄가 어없단 말이다. 그런데

 

 히데아키의 뇌리에, 형 뻘이었던 히데츠구와 그 처첩들의 비참한 최후가 떠올랐다.

 도 죄라고 하던 모반의 사실 등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다.

 

 나를 죽여라

 

 라고 외쳤다. 미친 것은 아니었다. 히데아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냉정하다고 생각하였다.

 

 죽여 주길 바란다. 살아 있는 동안은 전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에치젠[越前]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을 내리신다면 더 이상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구니! 그렇게 전해주게. 차라리 이 킨고[金吾]를 죽이라고

 

 코우조우스는 도망치듯이 저택을 나왔지만, 그러나 이런 상태로 성으로 돌아가 아까 본 모습을 보고할 순 없었다. 곤란한 나머지 타고 있던 가마를 재촉하여 큰 길의 서쪽으로 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하고자 한 것이다.

 

 어찐 일이신가?”

 

 이에야스는 잘 여문듯한 볼에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킨고님에 대한 것입니다

 

 킨고님?”

 

 킨고님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사나워 한번 신경을 폭발시키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

 

 라고 히데아키의 상태를 고한 뒤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수긍하여 부하에게 구두로 계책을 알려 코바야카와[小早川] 저택으로 보냈다. 이에야스의 계책은,

 

 신상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이봉(移封)을 받아들이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치쿠젠[筑前]에서 곧바로 옮기지 말고, 또한 중신들도 옮기지 않으며, 우선은 부속 다이묘우[大名]의 부하들이나, 신규 채용한 부하들을 몇 명씩 에치젠[越前]으로 보내십시오. 한줄 요약하면 옮기는 척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졸자(이에야스)가 어떻게든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 전하에게 부탁하여, 명령을 철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에야스의 이치에 맞는 더구나 마음이 담긴 조언에는 히데아키도 감격하여,

 

 어떻게든 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모든 것을 맡겼다.

 

 다음 날 이에야스는 등성하여 누가 보아도 급한 일이 있는 듯이 히데요시에게 내알(內謁)을 청했다. 히데요시는 자리로 나왔지만 이에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쌍한 척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였다. 그 후 두 마디 정도 날씨나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물러났다.

 다음 날도 똑같이 내알을 청하였고 그러나 역시 똑 같은 짓을 하였다. 3일째도 그러했다. 히데요시는 수상히 여겨,

 

 나이후[内府=이에야스]께서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라고 물었다. 히데요시는 항상 이에야스에 대해서만은 부하라기 보다는 손님의 예를 취하여 다른 제후와는 다른 말씨를 사용했다.

 이에야스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킨고 츄우나곤님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알현을 청하였으면서도 막상 말할 때가 되면 전하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여 이렇게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 그일 때문인가

 

 히데요시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그 후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야스는 굳이 말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다음 날도 성에 올랐으며 또한 그 다음 날도 알현하여 끈질기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왜 그러신가? 아직도 킨고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가?”

 

 몇 일 지나 히데요시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에야스의 대답은 먼젓번과 같았다. 히데요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히데아키의 죄는 명백. 그러나 처분에 대해서는 나이후에게 맡기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희열에 찬 표정을 만들어,

 

 그렇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먼 장래를 위해서 좋은 계책을 내 놓겠습니다.”

 

 고 절을 하며 대답했다. 히데요시는 그 말 만으로도,

 

 아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이후의 그 말 한마디. 부처님의 목소리처럼 성스럽게 들렸습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부탁 드리겠다는 말은 히데아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리를 말한 것이다. 히데요리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처분을 잘 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성을 나와 자택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가로들을 불러 모아 히데요시의 말을 전했다.

 모두 이에야스의 호의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또한 이에야스는,

 

 나는 공의(公儀=정부(政府))의 대로(大老)로서 킨고님의 처분을 행하게 되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영지(領地)에 대해서는 예전과 같이 치쿠젠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싶다. 그러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곧바로 그럴 수는 없다. 히데요시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송구스럽다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처분은 세심했다.

 

 우선 각각의 자택에서 근신(謹愼)할 것

 

 이라는 것과,

 

 그 후 좋은 소식을 기다릴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생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죽어버리면 그 뒤는 흐지부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이 처분은 사무면에서 다소의 혼란을 만들었다. 이미 히데아키의 치쿠젠[筑前]의 옛 영토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되었기에, 미츠나리 등은 코바야카와 가문에게 비우라고 재촉을 하였다. 히데아키는 다시 이에야스에게 울며 매달렸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서,

 

 조금씩 반환하시길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코바야카와 가문은 영지(領地)를 조금씩 반납했다. 때문에 일부의 가신들은 코바야카와 가문에서 받았던 영지(領地)를 잃었기에 낭인(浪人)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낭인들이 100명 정도 생겼을 즈음 히데요시가 죽었다. 히데아키가 죄를 얻어서부터 4달이 지난 1598 8 18일이었다. 이에야스의 예상대로 히데아키는 그대로 옛 영토에 눌러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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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의 막장은 계속되는군요(;;;)
    -쓰던 코멘트가 다 날아가 버려서 이거야 원;;-

    코우조우스는 전하도 돌아가셨는데 어쩔련지 모르겠습니다(-_-ㄲ..)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8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그래서 '가끔' 다 쓰고 난 뒤 우선 Ctrl+C를 눌러 복사를 해 둡니다 ^^
    (문제는 가끔 하다 보니 어떤 때는 왕창 쓰고 난 뒤 그냥 전송했다가 날라가고 난 뒤에야,
    '아~ 왜 하필 오늘따라 복사 해두지 않았지..'하면서 후회할 때가 더 많지만 말이죠..--;)

    코우조우스는 키타노만도코로 쪽 인간이다 보니 그 후에도 잘 살았겠죠.(줄 잘 서는 것도 능력)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이 블로그에서 안전하게 코맨트를 남기려면 메모장에서 우선 써놓고 ctrl+a + ctrl+c ctrl+v 3연타를 때리는게 안전한데...

    군바리다 보니 귀찮군요(...;)

    기다리다 못해서(아.. 근성이 없어서 원;) 긴코츄나곤 뒷쪽도 좀 읽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후, 이에야스 앞에서 쭈삑쭈삣되는 히데아키를 외면하는 키타노만도코로 당 애들을 보니 참.. 한편의 블랙코메디랄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킨고'가 맞겠지요..(이런 실수를;;)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8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리 읽으셨다면 저도 허투루 할 수 없으니 더 조심해서 써야겠죠 ^^

    그 애들도 우스웠겠죠. 자신들은 피를 뒤집어 쓰며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혈통으로 그 자리에 오른 킨고가 좋게는 보이지 않았겠죠.(더구나 비굴한 모습을 보았으면 더욱 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9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7.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 수완이 대단하네요. 계속 찾아가서 될때까지 뚱하니 있는다ㅎㅎ

.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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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31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허.. 치쿠젠 52만이 에치젠 15만석이 됐더라면야.. 세키가하라에서의 그 참혹한 꼴도 없었겠군요;

    킨고 녀석에게도 미츠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품을 만도 했겠는데요..(그런데도 뭘 믿고 미츠나리는 킨고 녀석이 서군에 남을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1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곳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칸파쿠 + 카미카타(上方)에 1개국 추가... 로 꼬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이 글에선 히데아키의 소령이 52만석이라고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후 얻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영토 55만(혹은 50만석...) 카미카타에 가까워 졌다곤 하지만, 전투를 결정지은 것에 비하면 적을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이 때는 33만 여석 근처가 아니었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어도 일본 위키를 보면 52만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군요.(ㅁㅎㅎ)

    徳川家康 (関東に256万石)
    前田利家 (加賀など83万石)
    宇喜多秀家(吉備東半57万石)
    毛利輝元 (吉備西半・安芸など120万石)
    小早川隆景(筑前33万石)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なお小早川隆景死後、上杉景勝(会津120万石)が大老となり、前田利家死後、嫡子の利長がその地位を継い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바야카와 석고가 의외로 적었군요. 뭐, 많은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 종가에 비하면..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8.01.03 0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히데아키의 그릇이야 그렇다지만 다른 소설속에서의 미츠나리는 음모에 능하고 째째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기도..
    반면 요즈음 評도 그렇고 葵徳川3代였던가? 드라마에서는 忠義者로 나오던데...긍정적으로 보는 면도 많은 것 같아요^.^
    만약関ヶ原에서 미츠나리가 이겼다면..이라던지...
    어쨌든 미츠나리는 고지식한 점으로 자신을 파멸시켰지만 센스만점에 교양도 겸비한..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 놓고 봤을 때 흥미만점 인물인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그 봉토라는 것이 저한텐 복잡 미묘하더군요.
    종가인 모우리 가에 비하면 (같은 오대로급이지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모우리 가문이 츄우고쿠 국인 연합체 중 맹주 격인 역사를 가졌다 보니, 히데요시가 이 만큼 다 니 땅~ 이라고 인정을 하여도, 동급의 다른 도자마(국인)들에겐 어쩔 수 없이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직할령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지...
    그에 비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치쿠젠에 새로 영지를 하사받은 만큼, 데리고 있던 국인들을 직신화 & 영지의 직할령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52만석의 근거는 후에 기어 들어 온 쿠로다 가문이 신고한 영지가 약 50만석 근처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쨩님//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방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이시다 미츠나리는 굉장히 유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소위 문치파 관료 조직이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꺼라 생각합니다.(후방 행정 보급 지원 없이 십만 단위가 넘는 인원을 움직일 순 없을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시다 미츠나리는 패장이기에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가모우 우지사토의 유능한 전투 집단이 그대로 미츠나리의 품에 안긴 것이나, 참언했다고 알려진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부하들도 세키가하라 때는 미츠나라 측에서 목숨을 던진 것을 보면,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나 세키가하라 때와 임진왜란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제가 과문한 탓일지도...), 갑자기 임진왜란 때와 세키가하라 사이에 두고 이시다에 대한 안 좋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혼자 음모론 놀이 하기에도 재미있더군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업데이트는 일요일 즈음이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부분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일단 히데아키의 봉토는 치쿠젠일국, 치쿠고와 히젠의 일부분 도합 35만7천석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

    그런데, 치쿠젠은 영제국상으로는 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일개국 만으로도 30만석强에 해당하지요. 그러면 치쿠고와 히젠을 더하지 않고도 표고 35만석에 달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히데아키 이후에 입봉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아키와는 달리 치쿠고, 히젠을 제외한 치쿠젠국 1개국 만으로도 50만석 이상(52만석인가 53만석인가)의 석고거든요.

    이것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고무줄 석고가 되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태합검지라는 실시의 과도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할 부분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생각해 보면, 히데아키가 치쿠젠에 재봉하던 당시, 表高는 35만석이라 해도, 實高는 50만석 이상(60만석 까지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후 쿠로다씨가 치쿠젠 일국에 입봉되었을 때는 검지결과가 반영되어 표고가 실고에 맞게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위 내용에서 히데요시의 독백인 "치쿠젠 52만석은 너무 많다."라는 말은 치쿠젠 검지가 끝났으나, 아직 실제 표고 상향조정은 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중에는 그래도 고증을 잘 해주는 시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
    그런데, 제가 큐슈쪽 검지 완료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뻘쭘하네요.
    단순히 쿠로다 나가마사의 후쿠시마번 52만석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시바선생의 면목을 봐서라도 검지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6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흐르는 돌입니다 ^^(流石)
    저는 그 쪽으론 생각도 못하고, 혹시 쿠라이리치(蔵入地)를 코바야카와 가문이 담당하기에 그런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서(어느 책인가에 있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적었는데... 이야~ 역시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요. ^^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6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 리플은 거의 추리(...) 수준이어서 신빙성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