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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노만도코로'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08.05.18 스루가고젠[駿河御前] -1- (8)
  2. 2008.04.14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6- (9)
  3. 2008.04.07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5- (4)
  4. 2008.03.23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4- (10)
  5. 2008.03.16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3- (8)

一.

 

 막내 여동생 아사히[旭]가 결혼할 즈음에 큰 오빠 히데요시[秀吉]는 그 근방에 없었다.

 

 “너에게는 7살 연상의 오빠가 있단다. 착실하게 괭이하고 가래질을 하고 있었으면 부모를 대신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하고 모친인 오나카[仲]는 투덜댔을 것이다. 오나카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는 죽은 첫 번째 남편인 야에몬[弥右衛門]과의 사이에 나온 자식으로, 그 때문에 야에몬이 죽은 뒤 재혼한 치쿠아미[竹阿弥]에게는 이 히데요시라는 존재가 조심스러웠고 불안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히데요시는 치쿠아미를 싫어하여 아직 꼬꼬마일 때 가출해 버렸다.

 그 후 바늘 장사를 하거나, 미카와[三河] 만담의 보조 광대[三河万(관련 사진(링크)][각주:1]되어 떠돌거나, 그릇을 굽는 곳에 노예로 몸을 팔거나[각주:2], 오와리[尾張]의 유랑인 길드라고도 할 수 있는 하치스카 코로쿠[蜂須賀 小六]의 길드원이 되는 등 수상쩍은 사회를 전전하고 있는 듯 하였다.

 

 그 히데요시가 오와리로 돌아와 오다 가문[織田家]의 허드레꾼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즈음, 여동생인 아사히는 결혼하였다.

 - 요즘은 키요스[洲] 오다 님의 하인들 무리에 꼽사리 껴서 산다고 하더군

 라는 소문이 나카무라[中村] 주변에서도 들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사히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 이름은 요즘 토우키치로우[藤吉郎]라고 고친 것 같더군

 라는 소문도 돌던 중 곧이어 하급 무사로 출세하여 키노시타[木下]라는 성(姓)을 쓰게 되었다고도 들었다. 그 사이 물론 그 토우키치로우가 이 나카무라에도 왔었다.

 

 아사히가 결혼한 곳에도 찾아왔다.

 

 “여기냐? 여기가 아사히의 집이냐?”

 

 하고 토우키치로우는 시끄러운 소리로 혼잣말하며 들어왔다. 시아버지에게도 싹싹하게 인사를 하였고, 처음 보는 남편에게도 여어~여어~하고 어깨동무라도 하며 친근감을 보였다.

 ‘시끄러운 사람이다’

 아사히에게는 이 어색하기만 한 오빠가 그렇게 비추어졌다. 극도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오빠가 말을 걸어도 부끄러움이 앞서 아무 말 않고 끄덕이거나, 바쁜 척을 하거나 둘 중 하나여서 한 문장으로 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아사히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하고 토우키치로우는 말했다.

 

 “니는 누구하고 닮았을까~?”

 

 아사히는 말이 많은 이 오빠와 너무도 달랐는데 생김새라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사히는 토우키치로우의 기괴한 상판과는 닮은 곳이 없어, 오나카의 배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눈코가 뚜렷하였고, 피부색도 농사일로 검게 타기는 하였지만 바탕은 흰 것 같았다.

 ‘눈가는 아비인 치쿠아미를 닮은 것 같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토우키치로우는 이미 죽은 양아비가 정말로 싫은 듯 그렇게 느꼈지만,

 - 치쿠아미랑 닮았구나

 라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와 닮았건 토우키치로우는 아사히가 막내 여동생인 것도 있어 너무도 귀엽다는 느낌을 가졌다.

 

 “어서 애를 낳으렴”

 

 그렇게 말하면서 오빠라기 보다는 남자의 시선으로 이 작은 몸집의 여동생 허리 주변을 눈으로 핥았다. 작은 몸집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육덕져 허리 주변이 과즙을 담고 있는 듯이 싱싱했다. 이 정도의 몸을 남편에게 바치면서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토우키치로우가 오다 가문의 중급 장교가 되어 스노마타[墨股] 요새의 수비장수가 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28인가 29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우키치로우는 나카무라에 사는 오나카 이하 혈연들을 이 성으로 초대하여 수일간 머물게 하며 대접하였다. 스노마타는 야전용 요새로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엮어 만들었을 뿐인 조악한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나카무라에 사는 미천한 백성의 마누라인 아시히에게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듯한 궁궐같이 보였다.

 

 그 나카무라의 일행이 돌아간 뒤 부인인 네네(寧)가,

 

 “아사히님은 정말 얌전하시더군요.”

 

 라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 연상의 막내 시누이는 머물던 중 어떤 일이건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바보는 아니겠지?’

 네네는 생각했지만 토우키치로우는,

 

 “아녀~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일 테지”

 

 하고 자신의 핏줄인 만큼 그러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토우키치로우에게 있어서 아사히보다도 더 관심이 갔던 것은 그 남편이었다. 켄스케[源助]라고 하던가? 카스케[嘉助]라고 했던가?

 ‘무사로 만들어 주자’

 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도 어엿한 중급 장교 나부랭이가 된 이상, 친척과 인척을 끌어들여 가신단의 중추로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그의 출신이 만약 태어나면서부터의 무사나 호족이었다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하나 분가(分家)의 무리들을 데리고 강고한 가신단을 형성해 가는데 아무런 힘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랑인 출신에 빈농의 자식인 토우키치로우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던 만큼, 어서 빨리 자신의 주변을 살펴 무사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네네 쪽의 친척에서 그녀의 양갓집 동생인 아사노 나가마사[野長政 – 아키[安芸] 아사노 가문의 가조(家祖)]나 숙부인 스기하라 시치로우자에몬[杉原 七左衛門 – 후에 후쿠치야마[福知山] 성주(城主)]을 채용하여, 각각 이 스노마타의 중요한 부서에서 일하게 하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의 일족에서는 동생인 코이치로우[小一郎]를 지금부터 교육하고자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아사히의 남편은 어떤가? 쓸만하다면 쓰고 싶다고 토우키치로우는 기대하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번 스노마타 초대를 기회로 면밀히 관찰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 남편에게는 눈여겨볼만한 곳이 없었다. 눈코는 사람이었지만 머리는 소나 말과 다를 바 없었고, 더구나 소하고 말만큼의 힘도 없으며 눈동자가 멍했다. 무사는 재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래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백성인가’

 라고 생각하여 실망한 만큼이나 아사히가 불쌍해졌다. 적어도 출납 장부라도 볼 줄 아는 남편이었다면 곧바로 창고나 수송대의 대장 정도는 맡겨줄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도 못하니 아사히는 평생 저 남편을 위해서 밭에서 기어 다녀야만 할 것이다.

 다만, 토우키치로우의 이성은 그렇게 실망하였지만 감정은 남에게 한 없는 호의를 가지는 성격이었기에,

 

 “어떻겠나? 키노시타 성(姓)을 쓰시게”

 

 라고 말해 보았다. 자기와 동족(同族)으로 해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무사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사히의 남편은 썩소를 지으며 아니 원래가 그런 상판인 듯 했지만 –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양하게쯥니다”

 

 라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싫은가?”

 

 라고 묻자,

 

 “싫건 좋건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선조들의 위패가 있쯥지요”

 

 라고 말했다. 즉 미천한 백성이긴 하지만 어엿하게 이어 내려오는 가문이다, 그리 쉽게 마누라 쪽의 가문에 몸을 파는 듯한 행위는 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런 의미라고 한다면 이 좆병진 같은 남자라도 역시 나름대로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맘대로 하게”

 

 하고 화가 나 냅두고 있었지만, 그 후 10년 정도 히데요시가 전쟁터를 질주하는 동안, 오다 가문의 세력이 커져 히데요시의 사정도 크게 변했다. 노부나가오우미[近江]의 아자이 씨[井氏],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씨[朝倉氏]를 멸한 뒤, 자신 휘하의 군사령관들에게 지역을 나누어 준 것이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는 에치젠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는 남부 오우미[南近江]를, 히데요시에게는 북부 오우미[北近江]를 하사하였다. 히데요시는 비와[琵琶] 호반의 나가하마[長浜]에 성을 쌓아, 이때부터 성주(城主)의 신분이 되었다. 그 봉토는 20만석이었다. 이제는 신흥 귀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히를 저대로 버려 둘 수는 없다’

 불쌍하기도 했다. 거기에 이미 동생 코이치로우뿐만이 아닌 모친과 누나도 불러와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20만석 다이묘우[大名]의 여동생 되시는 분이 언제까지나 오와리 나카무라의 최하층 백성의 마누라로 좋은 것일까?

 

 “호우키[伯耆] 어떻게든 해봐”

 

 하고 히데요시는 명령했다.

 호우키[伯耆] - 라고 대단한 호칭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이 사람은 네네의 숙부 스기하라 시치로우자에몬 이에츠구[家次]였다. 무사로서는 능력이 없기에 하시바 가문[羽柴家] – 히데요시는 이 나가하마에 성을 쌓은 다음부터 키노시타에서 하시바 성으로 고쳤다 – 의 가재(家宰)를 맡고 있었다. 호우키는 곧바로 오와리로 내려가 아사히의 남편을 만나,

 

 “고맙게 생각하라. 자네를 무사로 만들어 주겠다”

 

 라고 전해자, 남편은 아둔한 얼굴로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왜 그러나?”

 

 하고 스기하라 호우키가 목소리를 높이자?

 

 “싫쯥니다”

 

 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를 대라”

 

 고 호우키는 반쯤 소리지르듯이 말하자, 이 백성에게는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한 줄 정리하면 있던 곳에서 움직이는 것이 싫었던 것뿐으로 환경이 변하는 것을 무조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것을 호우키가 달래듯이 하여 겨우 나가하마 이주를 승낙시켰다. 나가하마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준비되어 있었고, 놀면서 살면 되었다. 그러나 무가(武家)답게 성(姓)이 필요했다. 그 성도 스기하라 호우키는 준비해 두고 있었다. ‘사지[佐治]’라는 성이었다.

 '사지'라는 성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때부터 오와리에 번영했던 명족으로, 치타 반도[知多半島]에 그 성터가 남아 있어, 지금은 힘이 없지만 그래도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는 이 성을 쓰는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 신관(神主)가 있어, 스기하라 호우키는 특별히 부탁하여 그 성을 쓸 수 있게 허락 받은 후 나가하마로 데려왔다.

 가문의 문장은 부채였다. 그 문장이 들어간 옷과 갑옷 등도 호우키는 준비해 두었다. 결국 이 남편은 무사로 만들어 졌다. 사지 휴우가[佐治 日向]이다.

 

 그러나 나가하마의 으리으리한 저택 생활이 정말 맞지 않았나 보다. 사지 휴우가는 이곳으로 온 후 얼마 동안은 일단 살이 쪘고 곧이어 이전보다 더 말라,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야채처럼 쇠약해져 죽어 버렸다. 그것을 전후로 하여 이 남자가 나카무라에서 데려 온 양친도 죽어, 모처럼의 사지 가문도 끊겼다. 아사히는 하시바 가문으로 되돌아왔다.


사지 씨[佐治氏]에 대해


  1. 사진 중 부채를 든 인물을 타유우[太夫]라고 하는데, 춤을 추거나 재미 있는 말을 한다. 검은 북을 든 사람는 ‘사이조우[才蔵]’라는 보조로, 북을 쳐서 타유우의 춤을 흥겹게 하거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어 준다. [본문으로]
  2. 말은 노예지만, 결국 돈을 빌리고는 대신해서 그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것. 나중에 돈을 갚거나하면 면천되었다. [본문으로]
  3. 당시의 도기와 자기는 지금의 반도체와 맞먹는 가치가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본문으로]
  4. 미모는 근방에서 따를 자가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후에 에도 막부[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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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18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이에야스에게 시집가는 여인이지요? [대망]에서는 남편이 히데요시로부터 '마누라 회수' 명령을 받고 자결했다던데, 여기서는 그냥 죽어버리네요. 하긴 어느쪽이든 큰 상관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8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맞습니다. ...대망이라... 보다가 코웃음 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아서 중간까지만 읽은 듯 합니다. 전...
    (여담으로... 바벨2센지 3센지 그린 요코야마 미츠테루 선생이 그린 대망의 만화판은 과감한 삭제와 노부나가를 오히려 주인공으로 여기게 하는 부분이 있어 전 이쪽을 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19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생각해봤는데 같은 대정소님(;)의 자식이지만 치쿠아미의 씨들은 빨리 죽어버리는 듯 하군요. 히데나가도 간신히 50에, 스루가 고젠도 40대에 죽었으니..

    뭐, 생각해보면 당시 평균수명에 비하면 그 정도면 선전 한 것 아닌가도 싶지만 자연사 한 센고쿠시대 인물들은 은근히 수명이 긴편이었던지라(...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9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자는... 당시 수명이 짧았다는 것은 통계의 허점이라고들 하더군요.
    유아 사망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지, 그걸 제외하면 평균 수명은 나름 있었던 편이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다메엣찌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암은 유전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치쿠아미 측의 부계 유전이었는지도 모르죠.

    요즘엔 아예 히데츠구의 어미 닛슈우 부터 막내 아사히까지 전부 야에몬의 자식들이라고도 합니다만...

    여담으로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일본 측 기록에는 없다네요), 젊은이 한 명이 이세(伊勢)에서 20~30명의 무리를 끌고 와 히데요시의 동생이라고 우겼다가, 이것을 히데요시가 오오만도코로에게 물어보자 대답을 궁색히 하며 낳은 적 없다고 하여 일당 전부 참수. 그 이후 또 여동생 하나를 찾아내어(오와리의 백성의 여편네를 하고 있었다네요) 오오사카로 데려와 역시 참수... 그런 것을 따지면 위에 두 명(닛슈우와 히데요시) 빼 놓고는 히데나가가 제일 오래(51~2살) 살았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24 1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이터에서는 대표값도 중요하지만, 분산 역시 중요하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0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는 있는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w_walker BlogIcon 친구 2008.06.12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이 쪘다가 말라서 죽었다..라는 말을 보니 꼭 당뇨같네요.. 부귀영화가 몸에 안 맞았던 듯..^_^;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6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안 맞아도 좋으니, 꼭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습니다!!!

六.

 윤
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각주: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南無妙法蓮華)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각주:2] 길이의 봉()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
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政所],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3], 코우조우스()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각주: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각주: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각주: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각주: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히데요리[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에 결혼은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할 것.
이라는 사사로이 멋대로 다이묘우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제를 남겼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혼자 무시한다고 하여도, 이에야스에게서 딸을 얻는 다른 다이묘우가 이를 꺼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여 이 일건에 대해서 키타노만도코로와 상담하기로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허락을 얻는다면 그녀를 따르는 또는 그녀와 친한 여러 다이묘우들은 부담 없이 이에야스와 인척관계를 맺을 것이다.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 府][각주: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각주: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각주: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津]야마토[大和] 근방에 성()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칸논 사[音寺]의 성주이며 승()이기도 한 센슌(詮舜][각주: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각주: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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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
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 9 6.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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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의 재기(才氣) 때문이다.
는 식의 말을 하였는데, 다소 빈정대는 듯하다. 그녀는 히데요시와 함께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칼을 꺼내어 그 뿌리를 끊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는 호담함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1.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2. 약 240cm [본문으로]
  3.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4.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6.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7.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8.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10.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11.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12.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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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아들네미 같았던 동군 소속 무장 모두보다 더 오래살았군요(;;;) 역시 여성의 여생이란 생각할게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있어서 요도도노 모자의 여생따위,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뭐 사실 그들 모자야 세키가하라 이후의 삶은 덤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네네도 장수했군요)
    다음 편도 벌써 기대가 되는데, 주인공 [야마토 다이나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빈약한 지식으로 추측해보면... 히데요시 동생 히데나가인가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길주는 함경도의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도 명명법이 목사-부였는지 병사-부였는지가 있는 대도시 두개의 이름을 따는 것인데요.(전라도는 전주랑 나주, 경상도는 경주랑 상주, 충청도는 충주랑 청조 같은 식이죠. 경기도는 일본의 긴키랑 같은 것이므로 예외 입니다만) 세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가 함길도 절제사 였습니다. 길주는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상당히 큰 도시로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 였다는 것이지요. 아마 세조때 였는지 예종때 였는지 함경도로 바뀌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편에서 전개가 갑자기 급하게 흘러간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네요.
    2대로 단절된 야마토 고리야마 도요토미 가문의 초대 도슈로 든든한 형의 오른팔이라, 기대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5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키타노만도코로 편 완결이네요 야마토다이나곤도 기대됩니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있는 학생이지만 아직 실력이 빈약한 관계로(고어, 고어체는 정말 쥐약-_-) 책을 구해도 읽을 수 없으니 이렇게 발해지랑님의 번역하신 것을 기다리고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ak81 BlogIcon 파악 2008.04.15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음...말씀해 주신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확실히 역사상의 결과만 보면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어떻게든 존재 의의를 찾아 주고 싶군요...또한 나름 살려고 발버둥 쳤던 인물들의 생을 덤으로 하기엔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뭐 조선침략 원흉의 핏줄이니 인과응보이기도 하지만요 ^^

    맹꽁서당님//재미있게 보셨으니 다행입니다. 밑에 신사본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야마토 다이나곤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이옵죠.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5744758 <- 전에 졸역했던 것입니다.

    지나가던님//드디어 저에게도 오셨군요. 그 유명한 '지나가던'님.... ^^
    실례했습니다. 좋은 지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신사본론님//이책은 챕터 별로 그 인물에 대한 것만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것에 더하여 과감한 삭제가 시바 선생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많이 읽어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요)
    기대는 하지 마십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

    박선생님//역시....기대는 마십시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 취향으로 재미있던 것 뿐이니까요
    아물러....고어 관련은 저도.... --;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연이 닿은 이웃이신 shotokanfist님이 그쪽으로 굉장하셔서 든든하답니다.
    박선생님도 함 그쪽 방문을 권하고 싶군요.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파악님//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보람을 느끼는군요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로 하시는 거라기엔 매끄러운 번역인듯 합니다^^
    shotokanfist님 블로그에도 방문 해봤는데 많은 자료들이 있네요(후한서부터 만엽집의 시가까지;)
    구경해보고나니 한문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참 배워야할게 많네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취미로 하다 보니 그렇게 까지 깊게 안 들어가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군요 ^^

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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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8 1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에서도 나와있는 내용이더군요.. 기가막힌 천재지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야(-_-...좀 네타려나..,)

    아무튼 키요마사는 상당히 인물은 인물이었던듯.. 이모저모에서 두려워했던걸 보면.. 혁신에서는 좀 과소평가된 느낌이 없잖아 들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의 콘도우 이사미(近藤 勇)도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라니까요.
    코에이의 게임에서라면... 확실히 내정치가 너무 낮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내정에 관한 것은 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3. 이노센스 2010.02.13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요마사가 외친 신의 이름은 다시 원문을 확인해봐야하지만 무가의 수호신인 '하치방 대보살'일 겁니다. 시바 료타로의 다른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가마쿠라 이래의 무사들은 궁시의 신인 하치방 대보살에게 승전을 기원하거나 맹세를 걸고는 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비사몬텐'이나 '마리지텐'일 수도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은
      "神仏も照覧あれ"...로 시작합지요.

      글쎄요... 어느 신에게 빌었을지... 소설에서 나오는 글 가지고 너무 단정지어서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키요마사는 법화종의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깃발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치만대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을 믿었다면 그 쪽 깃발을 애용했겠지요.

四.

 네네의 몸가짐은 예절 바르다고는 할 수 없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세운 무릎 쪽의 발을 바꾸었고 바꿀 때도 옷자락 안쪽까지 보여버리기도 하였다. 뺨을 긁거나, 가래를 뱉거나 하여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배우질 못했다기 보다는 천성이 활달한 편이어서, 자기자신을 바른 예절이라는 틀에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네네가 요도도노의 어떤 소문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한 적이 있었다. 측실들이 말한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녀의 여관장(女官長)인 코우조우스[主]가 이야기한 것이었다. 요도도노가 자신의 슬하에 오우미([近江]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의 다이묘우[大名]를 말이다. 그들 오우미 계의 역사는 히데요시[秀吉]나가하마[長浜]입성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信長) 휘하에서 처음으로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는데, 그때 하사 받은 영지(領地)가 오우미의 나가하마였다. 석고는 구 아자이 가문[井家]영토인 3() 20만석이며, 이때부터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에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로 불리게 되었다. 20만석에 상당하는 부하를 데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각주:1], 그 지역에서 이름난 가문이나, 많은 전투를 경험한 낭인(浪人), 승려가 못된 인텔리[각주:2] 등을 급히 대량으로 채용하였다. 그런 그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되었으며, 그 출신상의 특징으로써 경리에 밝았다[각주:3]. 재무 감각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는 없는 장부(帳簿)의 기록 기술까지 이 지방의 출신자는 알고 있어, 그런 기능이 있었기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田 長盛]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오봉행(五奉行)에 발탁되어 재정과 여러 정무를 담당하며 오우미 파벌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 오우미 사람들(엄밀히 말하면 북부(北部) 오우미 사람들이지만)은 그 대부분이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 출신이었다.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망한 옛 주가(主家)에 대한 감정적인 충성심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요도도노의 등장과 함께 그 감정적인 마음은 대상을 얻었다. 히데요시가 예전에 섬기던 오다 가문의 오이치[市]에게 성스러운 고귀함을 느낀 것과 같이, 그들은 아자이 가문 핏줄인 요도도노에게 그것을 느꼈다. 요도도노야 말로 진정한 공주님에 걸맞은 존재였으며 더구나 주군의 직계 혈통으로, 이미 남자 계통이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하여 끊긴 지금, 혈통에서 끝나지 않고 옛 주인 그 자체라는 감정을 요도도노에게 가졌다. 자연히 그 슬하에 모였다.

 요도도노도 옛 신하라는 친근감을 가지고 그들과 접했다. 또한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 역시 오우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 오우미 계의 다이묘우들과는 친척이거나 몇 다리 건너면 친척이었고 또한 교류가 있어, 그 분위기 속에서 요도도노는 자연스레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요도도노가 나에게 대항하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을 코우조우스의 이야기에서 네네는 느꼈고 단순한 여관들의 뒷담화로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네에게는 히고[肥後]에 관해서도 키요마사와 함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책봉되었다는 현상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요도도노가 미츠나리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졸라서 그 파벌에 속해있는 코니시 유키나가를 추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송구스럽습니다만 요도도노가 키타노만도코로님을 언젠가는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라고 사물을 이해하는데 현명한 코우조우스는 말했다. 넘어선다고 하여도 정실(正室)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권세를 쥐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큼 가소로운 것이 없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 중에 인사(人事)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는 이 가문을 만든 조강지처인 자신 이외에는 없었다. 이외에 있을 턱이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었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네는 히데요시에게 그런 것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주인댁인 요도도노에게 기울면 기울수록, 네네에게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다정함과 배려를 잊지 않았으며, 그녀가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정실이라는 긍지를 더욱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도 성[城]은 이외로 빨리 완공되었다.
 
1589
1월에 착공하여 3개월 후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그 건축의 빠름보다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요도도노의 임신이었다. 요도 성()이 완공된지 2개월 후인 5 27일에 남자아이를 출산한 것이었다. 첫 아이인 츠루마츠[鶴松]였다.

 - 어쩌면……

 이라는 목소리가 성안에서 속삭여졌다. 태합(太閤)님의 씨 일리가 없다, 태합님은 속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이 각 건물에 있는 측실들 주변에서 속삭여졌다. 히데요시에게 씨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히데요시의 살을 접해왔던 측실들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만약 히데요시의 기능이 온전하다면 과거에 누군가가 임신했을 터였다. 그것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의심스럽지
 
라고 네네야말로 히데요시와의 함께 덮은 이불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누구보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네네는 그런 이상함을 절대 입밖에 내는 일 없이, 츠루마츠의 탄생을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로서 크게 축하하였다. 정실로서만이 아닌 네네는 법적으로 모친이기도 했다.

 '어머님[お母さま=おかかさま]'
 
이라고 그녀는 불렸다. 츠루마츠의 모친은 둘이 있는 것이 되어, 요도도노도 '어머님'이라 불렸다. 히데요시나 츠루마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구별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면 요도도노는 단순히 어머님’, 혹은 엄마[おふくろさま]이며 네네는,
 
'어마마마[まんおかかさま]'
 
라 칭해졌다. ‘[まん]이라는 것은 만도코로[政所]의 만을 지칭할 것이다. 츠루마츠에게 물건을 보낼 때도 네네 자신, -이것은 어마마마가 보내는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츠루마츠의 출생은 오우미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개가(凱歌)였을 것이다. 요도도노가 토요토미 가문에서 자리잡고 있던 위치는 측실에서 생모(生母)으로 껑충 뛰어 오른 것이다. 토자마[様][각주:4] 다이묘우들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선물을 보내기 보다는 요도도노에게 더 정성 들여 선물을 보내게 되었기에,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에서 네네의 위세는 당연하게도 후퇴했다. 네네는,
 
-
요도도노가 큰 공을 세웠군요.
 
라고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코우조우스 이하 네네 휘하의 여관들에게 있어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항상 가시 돋친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대로 츠루마츠가 어른이 된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에 요도도노와 이 적자가 자리잡게 되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위세 같은 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깃거리나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츠루마츠가 출생한 다음 해인 1590 8.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가 칸토우[東]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호우죠우 씨[氏]를 그들의 거성(居城)오다와라[小田原]에 몰아 넣었다.
 
히데요시는 장기 포위 방침을 취하여, 성안을 천천히 말라 죽이는 한편 포위한하고 있는 심심해 하는 부하 사졸들을 위해서 유녀(娼女)들을 불러 모으거나, 사루가쿠[]판을 벌리거나 하였다. 또한 다이묘우[大名]들에게는 각자의 처첩(妻妾)들을 부르게 하였다.

 [그렇게 하였다]

 고 네네에게도 편지로 알려왔다. 그 편지라는 것은,

재빠르게 적을 새장 속에 집어 넣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위험한 전투는 없을 것이기에 걱정 마시길.
도련님(츠루마츠)이 보고 싶지만, 그러나 이것도 장래를 위해서, 천하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니 그립다고 생각하는 기분도 떨쳐버릴 수가 있다. 나도 여기서 뜸 같은 것을 받으며 몸에 신경 쓰고 있으니 아무쪼록 걱정하지 말길.

 어쨌든 이번 오다와라 싸움은 오래 걸릴 것이라고 지시하였다. 그 때문에 다이묘우[大名]들에게는 마누라를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래서~

 라고 히데요시는 본제에 들어갔다. 요컨대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 그 점에 대해서 네네의 심정과 입장을 살피고 자질구레하게 이것저것 가져다 붙인 후 또한 거기에 그녀의 자존심에 주름이 가지 안도록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붓을 멈추지 않고 단번에 써내려 갔다.

우와같이(위와 같이)
싸움이 오래될 것이라고 말하였슨 즉
그 때문에
요도 녀석을 부르려고 하네
그쪽도
슬슬 요도에게 말하여 이쪽으로 오는 건에 대한 준비를 시키게
그쪽 다음은 요도도노가 나랑 마음이 맞는 것 같더군

 정실인 네네에게서 요도도노에게 오다와라로 내려가라고 명령해 주길 바란다, 준비를 시켜주게~하고 히데요시는 그녀의 지위와 체면을 그렇게 세워주고, 그녀가 가질 것 같은 불쾌함을, 그렇게 명령하게 함으로써 바꾸고자 하고 있었다.
 
여전하시군
 
하고 네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하는 마음 밑바닥을 꿰뚫어보면서도 이래서는 화내기도 조금 그랬다. 더구나 편지에서,

그쪽 다음으로 요도도노가 나랑 마음이 맞는다.
 고 뻔뻔하게 네네를 우선시하는 것 같아서 이 편지 자체가 네네에 대한 사랑의 편지인지 하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말미에는,
나도 늙었다.
 는 한 줄을 히데요시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곧이어 오다와라에서 행해질 터인 요도도노와의 사이의 뜨거운 이불 속에 대해서 네네의 상상이나 연상을, 이 한 줄로 막아버리고자 하는 배려이며 이것은 네네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는 뭐 둘러대기에는 좋지만 그러한 상냥함의 표현으로 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늙었으니 네네는 조금만 질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라고 네네는 코우조우스에게 보여주었다. 네네는 오다와라에 오라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코우조우스에게 읽게 하여도 치욕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에서는 히데요시가 네네를 요도도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네네의 지위를 요도도노에 대해서도 윗줄이며 명령권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오다와라에서 확인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네는 요도도노에 대해서 그리 가벼이 몸을 움직여 자신의 입으로 준비를 시킬 정도로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네네라면 오히려 히데요시도 편했을 것이다. 이번 경우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 편지를 써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잘 하도록 힘써주세요

 라며 코우조우스에게 명령했을 뿐이었다. 코우조우스는 당혹했다. 요도도노에게 어떻게 힘쓰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하며 어느 정도로 요도도노의 준비를 도와야 하나?

 “…글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사옵니까?”

 라고 네네에게 되묻자,

 뭘 당혹해 할 것은 없습니다

 라고 처음으로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네네가 말하기를 자기에게도 이렇게까지 마음 쓴 편지를 보내는 히데요시이다. 당사자인 요도도노에 대해서도 편지를 보내어 충분한 것을 세세하게 지시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으니, 이쪽에서 뭔가를 해 줄 것도 없다. 있을 턱이 없다. 쓸데 없는 것을 하면 반대로 창피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코우조우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편지에는 네네에게서 요도도노에게 말하라고 써있지 않은가?

 코우조우스도 융통성이 없으시군요

 네네는 한번 웃고는,

 그것은 즉, ‘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의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부는 이미 네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만으로 목적을 이루었다. 내용에 대해서 거기까지 꼼꼼히 할 필요는 없었다.

 당신이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에게 이번에 칸토우[東]로 가는 거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 정도만 해 두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라고 네네는 말했다.

  1. 노부나가는 부하들이 쓸데 없이 축재(蓄財)하는 것을 싫어했다. 영지(領地)를 하사하면 그 영지에 걸맞게 부하들을 등용하여 더 많은 활약을 하길 원했다. 그 예로 중신 서열 No.1인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같은 경우는 영지를 하사하여도 그것을 이용하여 부하들을 등용하기는커녕 자기 배만 불리자 쫓아버릴 정도였다(물론 이것 외에도 서열과 영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던 것도 있었다). [본문으로]
  2. 제대로 된 정식 승려가 되기에는 돈과 빽이 필요했다. [본문으로]
  3. 우리나라에 ‘개성상인’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일본에도 ‘오우미상인[오우미쇼우닌=近江商人)]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재가 뛰어났다. [본문으로]
  4. 여기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이 아닌 나중에 항복한 다이묘우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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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4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곧 츠루마츠의 사망과 히로이의 탄생이 이어지겠군요(ㅎㄷㄷ..)

    최근에 이 시기와 관련이 있다면 있는 엔도 슈사쿠의 '숙적'을 읽고 있어서인지 한결 더 다가 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출판사답게 전문번역이라고 보기엔 좀;; 기타노만도코로를 북정소로 번역한 센스는;;; 히데요시의 어머니를 '대정소'로 번역 해 놓은것도 참..)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5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저도 돈 받고 일반 독자에게 읽혀야 하는 번역을 한다면, 북정소나 대정소로 번역했을 걸요 ^^
    거기다가 각 이름들도 국어 외래어 표기법에 맞추어...
    카토우 키요마사 -> 가토 기요마사... 라던가..
    이시다 미츠나리 -> 이시다 미쓰나리....
    라던가....
    .
    .
    저는 이글을 번역할 때, 당시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는 분들을 기준으로 쓰는 것이고, 아마 카톨릭 출판사의 번역가 분은 당시 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분들도 생각해야 하기에 그러시지 않으셨을지..

    참... 근데 淀殿는 어떻게 표현했나요? ^^
    요거 번역의 차이도 제 나름대로 흥미가 일더군요.
    요도도노인지... 요도기미...인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기미로 나왔던걸로... 음, 그런데 요시카와 모토하루는 좀 에러였던걸로(;;;) 쩝;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5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기미군요...^^
    (당시는 사용되지 않던 에도 시대 비속어다 보니 전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 해서 어떻게 하셨나 궁금해서요)

    확실히 모토하루의 성은 에러군요... 하긴 센고쿠 덕후들이나 킷카와라고 읽지 보통은 요시카와로 읽겠죠^^(...그거 번역한 분은 조금 공부가 부족했나 보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초반에는 키츠카와(킷카와를 한국 표기법으로 쓰면 키츠카와가 되는가요? 좀 다를법 하긴 하지만서도..) 모토하루로 적더니만 2권에서 근성이 떨어졌는데 요시카와 모토하루로 쓰는 센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분이 썼다던데 센고쿠 덕후분은 아니셨던듯(ㅁ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떨어졌는데->떨어졌는지

    개인적으로 ctrl+V가 안되서 전부수정은 좀 버겁군요(쿨럭)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6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키츠카와는....(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책에 한자 위에 후리가나 붙여 있는 것(ルビ)이... 워낙 작다보니 'つ'하고'っ' 가 구분이 안 가셔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마 초반에는 독자를 위해서 きつかわ 라고 루비가 달려있었을 것입니다. (근데 센고쿠 덕후가 아니시다 보니 킷카와는 들어보지 못하셨겠고, 당연 키츠카와...) 하지만 책에서도 한번 나온 이후부터는 그냥 한자만 있었을 테고...
    그러다보니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새로운 모토하루의 등장인가!! 더구나 이 놈은 요시카와이고..."가 되지 않았을지...(즉 번역가분은 스토리를 이해 못하면서 번역하셨나 보네요..아쉽군요.)
    그리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つ'와'っ'구분이 안되었는데, 21세기 들어와서는 그것도 구분이 될 수 있게 발전하더군요.

    ps;대사관이라고 하니 예전에 얼핏 흘려 본 것이 떠오르는군요... 한국 어느 외교관은 일본 주재(駐在)인 주제에 일본말은 못하고 영어만 써서, 어느 신문란에 가십 처리 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쓸데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일반지는 아니고 스포츠지 사회면에 조그맣게...(물론 일본 스포츠지도 막장이라 없는 사실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한국 외교관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ps2;저도 오타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다보니 신경쓰지 마시길..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6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도 슈사쿠 원서를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네요(ㅎㅎ)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도 깃카와씨는 있지 않나요? 요시카와씨가 더 흔해서 그렇지…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있겠죠...저는 갑자원 야구 중계 보면서 "노부나가(信長)"란는 성(姓)도 본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그녀에 대한 태도는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특별에서도 특별하니까

 라고 히데요시는 말버릇처럼 말했다. 수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있지만 네네 당신과 그녀들은 다르다. 각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사랑스럽다는 애정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지위를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일한 정실(正室)이며 토요토미 가문 그 자체였다. 많은 측실들은 법제상 고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히데요시가 주군(主君)인 것과 마찬가지로 네네 역시 주군이었다. 때문에 '특별에서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사실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인 네네의 지위는 어떤 시대의 어느 귀부인(貴婦人)보다 더욱 화려했다.
 
히데요시가 나이다이진[大臣]이 되었을 때[각주:1] 동시에 그녀는 종삼위(從三位)가 되었고, 더욱 지위가 높아져 1587년에는 종이위(從二位)가 되었다. 계속해서 이 해의 9 12, 그녀는 시어머니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와 함께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의 쥬라쿠테이[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취향대로 꾸며진 행렬, 행장(行裝)은 과거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수행하는 여관(女官) 만으로도 500명 이상에 달했을 것이다. 네 명 이상이 메는 화려하게 치장한 가마가 2백정, 두 명이 메는 평범한 가마가 100, 짐을 멘 상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따르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경호 무사들은 전부 타는 듯이 붉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 이 나라 최고 귀부인(貴婦人)의 상경 행렬을 장식하는데 어울렸다.

 더구나 길가에서 남성은 구경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라고 하더라도 구경꾼 속에 섞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젊은 여관(女官)들의 미모를 보고 저속한 마음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배려 때문이었다. 속으로 품는 마음조차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해서 불경(不敬)이라고 하였다. 이 행렬은 굉장한 평판을 불러 천하에 선전되었다. 키타노만도코로야 말로 일본국 넘버 원 귀부인이라는 인상을 60여주()에 전해진 것은 히데요시가 연출한 이 행렬의 성공에 의한 것이 컸다.

 다음해인 1588 4 19.
 
즉 키요마사가 히고[肥後] 책봉되기 1개월 전, '토오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는 종일위(從一位)로 승진하였다. 이미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위계였다.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의 다세대 주택에서 조악한 결혼식을 올린 옛날을 생각해보면 그녀 자신조차 믿기 힘든 영달(榮達)이었다.

 그러나 제가 저 자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요

 라고 네네는 항상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굉장한 점은 그 영달보다도 오히려 그 영달로 인해 조금도 그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종일위(從一位)가 되었어도 절대 쿄우[京] 말투나 궁중 말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건 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썼다. 평소 히데요시에게도 그러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의 마누라라고 불렸던 아주 옛날 화장도 못하던 맨얼굴일 때랑 조금도 변함이 없어,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떠들썩하게 말싸움을 펼쳤으며, 또한 시녀들을 상대로 항상 큰소리로 웃었고, 밤에 이야기라도 할 때에는 옛날 가난한 시대의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말하여 모두를 웃겼다.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부인인 오마츠[松]와는 기후 성[岐阜城] 밑의 오다 가문[織田家]의 무사들이 사는 곳에서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 당시 담을 사이에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네네의 태도는 오마츠에 대해서도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다시는 없을 분이시다

 고 오마츠는 자주 말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님은 타이코우(太閤)님 이상 일지도 모른다

 오마츠는 예전부터 그 적자(嫡子)인 토시나가[利長], 둘째인 토시마사[利政]에게 말했다.
 
이 오마츠라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조강지처 자체가 토시이에의 창업(創業)을 도우며 왔던 만큼 보통의 여성은 아니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는,
 
'
호우슌인[芳春院]'
 
이라는 요염한 법명(法名)으로 불리며[각주:2], 마에다 가문에서는 '비구니 쇼우군[尼将軍]'[각주:3]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세가 있었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그녀는 마에다 가문의 앞날에 대해서 하나하나 네네와 상담하였고, 하나하나 네네의 의향에 따랐다. 그 적자(嫡子) 토시나가에게도,

 모든 것을 키타노만도코로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따르렴

 이라 훈계하였다. 이럴 정도로 네네가 가진 소탈함과 총명함은 그녀의 인기를 만들었고, 그것이 토요토미 다이묘우[大名]들 속에서 은연 중에 정치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네네가 가진 위엄과 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네네에 대한 과대할 정도의 애정과 존경이 세상에 투영되어 있었다. 세상의 누구나 히데요시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 중 넘버 원은 키타만도코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보게, 이보게

 하고 히데요시는 쿠게(公家) 말투로 네네를 불렀다. 편지에도 그렇게 썼다.

 이보게 밥을 많이 취하시게

 라는 단지 그렇게만 써서는 성을 지키고 있는 네네에게 보냈다. 밥을 많이 먹고 있는가? 라는 정도의 것만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농담도 잘 하셔
 
라고 그럴 때마다 네네는 생각했다. 그녀는 남다른 정도로 건강하였으며 평소 식욕이 왕성하였고, 그렇지 않아도 살집도 넉넉한데 이 이상 먹는 것에 격려 받는다고 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앙상한 히데요시는 풍만한 여성을 좋아하는 부분도 있었으며, 시대도 그러한 여성을 미인이라고 하였기에 미용 상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식욕이 어떻든 이러한 히데요시의 극진함이 토요토미 가문에서 그녀의 위치에 한층 더 무게를 실려 준 것은 확실했다. 예를 들면 1587년의 큐우슈우[九州] 공략전에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수백 리 떨어진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의 진영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투 상황이나 큐우슈우(九州)의 정세 등을 알린 후 그 말미에

아니~ 나도 이번 싸움에서는 나이를 먹은 게 느껴지더군. 나도 모르는 새에 흰머리가 많아진 것이 아닌가? 이래서는 하나하나 뽑는 것도 힘들 정도야. 이제는 그쪽과 만나는 것도 창피할 정도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듯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네네를 기쁘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흰머리가 늘었다고 해도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그쪽이라면 거리낄 것도 없지. 그쪽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흰머리가 늘어난 것이니까

 여전히 아부는 천하제일이시군
 
라고 네네는 반은 어처구니 없이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본심은 기쁘지 않을 턱이 없다. 그 증거로 이 편지를,

 모두 보세요. 칸파쿠(関白) 전하의 웃긴 편지를

 라고 말하면서 시녀들에게도 읽게 해 주었다.
 
히데요시의 육체는 이 즈음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한 즈음부터 밤에 네네의 침실을 찾아 오는 것이 드물어 졌다. 오더라도,

 여어~ 건강하신가? 오늘도 밥은 취했나?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지

 라고 여전히 시끄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더욱더 네네에 대해서 친밀한 태도를 보이기만 할 뿐으로, 그런 주제에 남편으로써의 의무인 침실의 일까지는 기력이 미치질 못했다. 과연…… 히데요시는 늙었다. 먼 큐우슈우의 진중에서 보내왔던 늙음을 한탄한 편지의 내용대로 몸이 쇠약해졌을 것이다. 다른 측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칸파쿠님이 너무 오시질 않사옵니다

 라고 그녀들은 규원(閨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쓸쓸함을 네네에게 호소했다. 네네는 허물없이 그것을 들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네네는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특히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산죠우도노[三条殿],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등은 네네를 마치 언니와 같이 따랐다. 이 때문에 그녀들의 친정에서도 네네를 우러르는 곳이 많았다. 카가노츠보네는 마에다 토시이에와 그 부인인 위에서 언급한 오마츠를 양친으로 하는 딸이었으며, 산죠우도노는 카모우 가문[蒲生家] 출신이었고, 마츠노마루도노는 쿄우고쿠 가문[京極家] 출신이었다. 그녀들의 친정은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다이묘우(大名)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으며, 그런 가문들이 히데요시의 측실들을 통해서 네네와 엮여, 그것을 연줄로 삼고 있었다. 네네의 강한 정치력은 그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여도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토요토미 가문 내의 세력에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이 남을 배려하는데 세심했던 남자이기에 여태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단 한 여성의 침실에만 완전히 빠져 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浅井家] 출신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을 챠챠[々],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와서 처음엔 니노마루도노[丸殿]라 불리며, 결국에는 요도도노[淀殿]라 불리게 된 여성이었다. 그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요도도노의 혈통만큼은 히데요시가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네네는 깨닫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비천한 몸에서 출세를 했기 때문인지 귀한 가문에서 자란 여성에 이상할 정도로 동경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의 신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아직 낮은 신분이었을 때, 당시의 위치로써는 오다 가문의 하급 무사를 양갓집으로 하고 있는 네네가 그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의 동경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어도 성장하지 않는 듯하군
 
하고 네네는 오히려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귀족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무가(武家) 귀족 만으로 상급귀족[公卿]이나 친왕(親王)의 딸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상급귀족이나 친왕의 딸들을 후궁에 데려오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그런 귀족들을 히데요시가 아직 젊었을 적에는 본 적도 없었기에, 현실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성적인 동경은 젊은 시절 눈으로 스친 범위 안을 한계로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히데요시의 가까운 무가 귀족은 오다 가문[織田家]이었다. 그 즈음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노부나가[信長]의 일족만이 최고의 귀족이었으며, 그 피를 잇는 여성이야 말로 히데요시에게는 공주님이라 불리기에 어울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 즈음 오다 가문에는 오이치[市]라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이 있었다. 미모를 따지면 가까운 지역에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의 용색을 가지고 있어기에, 히데요시도 맘 속으로는 높은 곳의 꽃이라도 쳐다보는 듯이 사모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오이치는 오다 가문에서 북() 오우미[近江]의 다이묘우[大名]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정세가 변하여 아자이 씨는 오다 가문에 멸망 당하여고, 오이치는 딸들을 데리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재혼하였다. 그 카츠이에를 히데요시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에 몰아넣고 멸망시켰을 때 오이치도 자살했다. 남겨진 딸들은 '우다이진[右大臣=오다 노부나가']님의 조카분들 이다'고 하며 소중히 다루고 교육시켰다. 그 세 명의 딸 중 장녀가 요도도노였다. 그녀를 오오사카 성[大坂城] 두 번째 성곽에서 살게 하였기 때문에 '니노마루도노[丸殿]'라 통칭되었는데, 그 즈음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받아들였는지 어땠는지는 네네에게도 알 수 없었다. 네네가 추측하기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그 침실에 받아들인 것은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 후인 1588년 가을 즈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증거로 이 해 즉 1589 1월 히데요시는 갑자기,

 요도()에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을 꺼내 그 건축을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 大納言 秀長]에게 명하였다. 요도는 야마시로[山城]에 있으며,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京]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거기에 요도도노를 살게 하겠다고 하였다. 측실을 위해서 성 하나를 세운 예는 지금까지 히데요시에게 없었던 것으로, 그만큼 이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굉장한 일이군요

 라고 네네는 그것을 들었을 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히데요시는 목을 움츠리며 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들었는가?”

 마치 남일을 딴사람이 들을까 두렵다는 듯한 그런 말투였지만, 얼굴만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애교로 가득 찬, 악의를 완전히 없애버린 웃는 얼굴에 네네는 몇 번이나 속아 넘어왔던 것일까? 어쩌면 반평생을 웃는 얼굴에 낚여서 보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건 주인댁이시다

 라고 히데요시는 힘을 실어 말했다. 보통의 측실이나 여관(女官)들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조카인 이상 주인댁이다. 주인댁이기 때문에 각별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의리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주인댁인 것입니까?”

 노부나가에게서 보면 여동생의 딸이었다. 여동생의 딸까지 주인댁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주인댁이다

 히데요시는 근거를 들었다. 1583 4 23.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의 옛 동료 시바타 카츠이에를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로 몰아넣었을 때, 카츠이에는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자살하겠다는 뜻을 히데요시에게 통고하였다. 그때 토미나가 신로쿠로우[富永 新六郎]라는 가신을 히데요시의 진영에 파견하여,

 여기 세 명의 딸이 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들이다. 귀하도 알고 있겠지만 3명은 돌아가신 주군과 같은 피를 잇고 있으니, 귀하에게 있어서도 주군의 혈통에 해당한다. 필시 귀하라면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귀하의 진영으로 보낸다.”

 고 입으로 전해왔다. 히데요시는 당연히 카츠이에의 희망을 받아들였다. 이 때 [주군의 혈통]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도도노와 두 명의 여동생이 히데요시 주군의 혈통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이미 공시되었고 공인되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네네에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며, 그에 따라 요도도노에게 행하는 각별한 대우에 이유를 붙이고자 하였다.

 그건 당연히...

 죽은 노부나가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만

 하고 네네는 말하며 턱을 끌어서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이상 이 호색한을 몰아넣어보았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의 핑계로는 그녀의 이성도 감정도 납득은 할 수 없었다.
 
주군의 혈통이기에, 즉 그렇기에 밤마다 그 여성의 침실에서만 보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점을 언제나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죠우도노나 카가노츠보네도 그 점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들은 네네의 방에 놀러 올 때마다 자란 환경에 비하면 이외라 할 정도로 노골적이게 험담을 하였다. 물론 히데요시에 대한 험담이 아니었다. 요도도노에 대해서였다.
 
요도도노는 자신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거나, 콧대가 높아서 히데요시님에게 대해서도 거만하다거나, 요도도노 소속 시녀(侍女)의 수는 밥짓는 여자까지 포함하면 500명은 될 거라는 거나, 또 요도도노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나 쇼우에이니() , 예전 아자이 가문을 섬겼던 여자 낭인(浪人)들을 너무 모으고 계십니다 등, 그러 종류의 험담이었다.

 저런~저런~”

 네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안색도 바꾸지 않고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있었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들에게 동조했다가는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라는 자신의 입장과 체면을 손상시킬 것이다.

 우선은 화를 푸시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켜 보아 주세요.”

 라고 네네는 때때로 그녀들을, 그녀들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1. 1583년. 정이위(正二位). [본문으로]
  2. 방춘(호우슌=芳春)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젊은 시절’이란 뜻이 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죽자 비구니가 된 그의 부인 호우죠우 마사코[北条 政子]가 아직 어린 쇼우군[将軍]의 정무를 대행했던 예가 있어, 이후 성주 혹은 다이묘우[大名]였던 남편이 죽고 후계자가 어려 미망인이 권세를 가졌을 때 ‘비구니 쇼우군’이라 일컬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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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eomin61 BlogIcon 푸른하늘 2008.03.16 1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좋은 글이라 불펌해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네요. ㅎㅎㅎㅎ
    그런데... 이런 좋은 콘텐츠가지고 계시면서 네이버 블로그에 남아있을 필요가... 있나요?
    티스토리 같은데로 독립해 보지 그러세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6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른하늘님 오셨군요 ^^
    방문 감사드립니다. 네이버에도 좋은 분들은 많으셔서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16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역시나 요도도노는 참 인기가 없으시군요(-_-;;) 뭐 제가 봐도 아버지의 원수에게 잠자리를 허락하면서 썩 건실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긴 힘드리라 생각은 했지만서도.. 아무래도 요도도노 그 개인의 자질의 문제이려나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싹싹했더라도 역시 미움받지 않았을까요? 이건 행동의 문제라기 보다는 질투라는 정신적인 문제이다 보니 그 때가서는 또 다른 것을 가지고 꼬투리잡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3.17 0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총애 측면에서는 마츠노마루나 카가씨가 더 뛰어났는데도 요도기미만 유독 두번이나 수태한걸 보면 역시 의심스럽지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7 2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治長)랑 칙폭해서 나은 거 같기는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 전에도 (실존은 불분명하지만) 1남1녀를 가진 적도 있은 만큼 단정은 지을 수는 없는 것 같더군요.
    요도도노만 임신한 것도 그녀가 난자를 많이 배란할 수 있는 몸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현재도 임신 유도제 같은 것을 먹을 경우 쌍동이 낳을 확률이 높다고 하니까요).

  7. 이노센스 2010.02.13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내인 마츠의 법명은 일본어로 호슌인이라 읽습니다. 난코보 덴카이처럼 승려의 이름이나 은거 이후의 자호는 대개 음독으로 읽는다는 이 점 참고하시면 더욱 매끄러운 번역이 되시리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