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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우키요마사'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08.07.20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5- (7)
  2. 2008.04.14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6- (9)
  3. 2008.04.07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5- (4)
  4. 2008.03.23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4- (10)
  5. 2008.03.08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2- (2)

五.

 이에야스[家康]는 그 흐름을 조종했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것은 히데야스[秀康]의 존재였다.
 - 그 분은 순진하시다.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잘 보좌하라.
 며 히데야스의 가로(家老)들을 불러 이에야스는 훈계하였다. 히데야스가 순진하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문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그 중 어느 한 쪽 진영에 옹립되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에야스의 숨겨두었던 의도가 무너질 수 가능성이 높았다.

 파벌은 두 개였다.
 이에야스를 정권 찬탈의 의도를 가진 야심가로 규탄하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秀吉)의 정무 보좌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그 무리들로, 그들은 히데요리[秀頼]의 생모 요도도노[淀殿]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두고 있었다.
 이 이시다 파벌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야전파(野戰派)라고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그의 친구들로, 그 파벌의 중심에는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자리잡고 있다.

 두 파벌 다 히데요시가 키운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요토미 정권이 확립되면서부터 이시다파는 문관(文官)으로 정권의 중추에 있었고, 카토우파는 야전 종사자가 되어 중추에서 밀려났다. 카토우 파는 자신들을 일이 있을 때마다 곤경에 빠뜨려온 것이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파였다고 보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 이제는 전하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시다 놈들을 죽이고 그 고기를 씹어 보자.
 고 울부짖으며 각각 오오사카[大坂)]의 자신들 저택을 무장하고, 공공연히 대립하며, 시가전까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內紛)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토요토미 가문 필두 대로(大老)로서 두 파벌을 중재하였고, 때로는 은근히 부추겼다. 이에야스가 은밀히 밀고 있었던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와 카토우 키요마사의 파벌이었다. 이에야스는 카토우파에 꼽사리 껴, 이 파벌이 이시다파를 향해서 뿜어대고 있는 증오의 에너지에 풀무질하고 두들겨 단단히 해서 만든 칼로 정권 교체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칸토우 군단(関東 軍團)을 가지고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들끼리 내부에서 싸우는 형식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 격화(激化)의 마지막 단계에 일대 결전을 연출하여, 그제서야 처음으로 쿠데타를 전개한다 – 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대로 이에야스는 착실히 돌을 깔았으며, 그렇게 깐 돌 한수 한수가 재미있을 정도로 성공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냥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버릴 지 알 수가 없다’
 고 이에야스가 생각한 것은 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히데야스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면 오오사카로 내려가 히데요리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를 따르게 되면 자연히 이시다파의 진영에 들어갈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식인 히데야스에게도 손을 썼다. 1599년 3월, 이에야스는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불러,

 “나를 경호해 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사정을 설명했다. 정세가 악화되어 이시다 측은 이에야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끊임없이 밀모를 꾸미고 있는 듯하다 – 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며 히데야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쿄우토[京都] 근방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병사가 소수밖에 없었다. 내 몸 지키기가 힘들구나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적자(嫡子)인 히데타다[秀忠]는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돌아가 에도[江戸]에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토쿠가와의 군사가 적다. 츄우나곤[中納言=히데타다]을 대신하여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는 그렇게 부탁함으로써 히데야스의 의협심을 자극시키고자 하였다. 바라던 대로 히데야스는 감격했다. 이 진짜 아비에게 이렇게 부탁 받은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히데야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나오려 했다.

 “불초한 소생이지만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고 히데야스는 거의 외치듯이 소리를 질렀으며, 이때 처음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의 일상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즉 이에야스의 저택, 숙소에 항상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외출도 못 하였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한층 맘이 놓이는군’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새장 속에만 넣어두면, 다른 야심가의 희생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599년 윤3월 3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에서 중재 세력이었던, 대로 차석(大老 次席)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오오사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죽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은 그로 인해 폭동의 자유를 얻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그 3일 뒤의 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오사카에서 죽이고자 시가전을 계획하였다. 미츠나리는 사전에 알아차리고, 홀홀 단신으로 후시미[伏見]로 도망쳤다. 카토우들은 그를 쫓았다.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였다.

 미츠나리는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자 대담하게도 후시미의 이에야스 저택으로 도망 와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쓰러뜨려 마땅한 숙적이었으며, 더구나 쫓아오는 일곱 장수들의 숨겨진 보호자였고, 그 장막 건너편의 수괴였다. 물론 그것을 미츠나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 숨겨진 사정을 반대로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죽일 리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보호하고 죽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부하들은,
 - 이 기회에 미츠나리를 죽이십시오.
 하고 헌책하는 자도 많았다. 계속 탄핵을 받고 있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일곱 장수의 호의를 얻는 편이 좋다 – 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들을 생각도 안 했다. 단 한 사람, 모신(謀臣)인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만은 이에야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를 보호하고 살려두어, 그의 거성(居城)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풀어준다. 후일 그는 반드시 책모(策謀)하고 다이묘우들을 긁어 모아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한 병사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야말로 쿠데타가 완성될 때이며, 그때까지는 미츠나리를 살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야스는 후시미까지 쫓아온 일곱 장수를 설득했다.

 “돌아가신 전하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또한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후시미에서 일을 낸다면 불충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오. 만약 그래도 여전히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하신다면, 이 이에야스가 상대를 하겠는데, 어떠신지?”

 하고 반 공갈을 하였다. 모두 이에야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미츠나리를 자택에서 머물게 하고, 다음날 아침 그를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의 배려는 세심했다.

 “소장(少将=히데야스), 당신이 세타[瀬田]의 다리까지 보내드리시게”

 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불러 미츠나리의 경호를 명했다. 히데야스는 알았다고 하며 만약을 위해 질문을 하였다.

 “만약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라”

 하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한마디가 히데야스를 흥분시켰다. 이렇게까지 뛰어난 기상과 재기(才氣)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데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도 종군하였으며, 조선침략에 있어서도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까지 따라는 갔었다. 그러나 야전에 나가지 않았다. 히데야스의 기량은 여태까지 실전에서 시험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안심하고 싸우라고 하였다. 전투가 일어날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야스가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 키요마사들이 히데야스의 경호대를 공격하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할 리가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히데야스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 도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미츠나리와 말머리를 함께하며 다이고 가도[醍醐 街道]를 나아가며, 반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미츠나리를 염려하며 말했다.

 “목숨을 바꿔서라도 공을 지키겠소이다”

 하고 히데야스는 볼에 젊디젊은 피로 붉게 물들이게 하며 말했다. 미츠나리는 이 말을 오해했다.
 ‘역시 이 분은 다르다. 히데요리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이에야스나 그 외의 사람들과는 별개의 감정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가지고 있다. 아군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고 자신의 의도에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곧이어 세타의 물길에 걸려있는 세타 대교[瀬田 大橋]의 서편까지 왔다. 동쪽으로 이 다리를 건너면
오우미[近江] 평야가 펼쳐져 있다. 북 오우미의 산야는 미츠나리의 영지(領地)였다.

 “그럼 이제는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히데야스가 정중하게 말했다. 미츠나리도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마사무네[正宗][각주:1]의 단도(短刀)를 히데야스에게 선물하였다. 이 즈음 미츠나리가 소유하고 있던 이 단도의 명성은 온 천하에 울리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선물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감사와 호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단도는 후세, 이시다 마사무네[石田正宗]라 칭해지며 전해 내려오고 있다.

  1. 여기서 ‘마사무네’는 칼 상표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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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생부터 불행하더니 자신의 힘을 펼칠 수도 없고 친부한테는 계속 이용당하네요
    시로유메님 말씀처럼 역시 인생은 운!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행한 히데야스를, 시바 선생은 더욱 극대화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여기서 이시다가 유우키 히데야스에게 칼을 주는군요..

    더불어, 무려 나츠코미때(;) 상경하시어 오덕질 할 시간 쪼개시어 기간한청 이시다 마사무네 공개판을 찍어오신 이름 없는 일본분께 박수를(ㅎㄷㄷ)

    どうやら刀の受け傷らしく、ここから「石田切込正宗」の号がついたらしいです。
    切込라게 칼에 난 금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러한 이명이 있군요. 덕택에 국보는 아니고 중요문화재라지만, 왠지 몇몇 기스가 더 칼로서의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봐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나츠코니...라는 것이 오덕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보군요. 정확하게는 어떤 것인가요?
    검색해 보아도, 그냥 참가했다는 글들만 보여서...

    칼은 칼등으로 막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칼 등에 상처난 것 또한 좋더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름 코믹마켓(만화 동인지등을 파는 큰 시장..이랄까나요)이요. 그걸 줄여서 나츠코미(夏コミ)라고 하는 듯 하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6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게 줄인 것이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六.

 윤
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각주: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南無妙法蓮華)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각주:2] 길이의 봉()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
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政所],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3], 코우조우스()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각주: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각주: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각주: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각주: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히데요리[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에 결혼은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할 것.
이라는 사사로이 멋대로 다이묘우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제를 남겼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혼자 무시한다고 하여도, 이에야스에게서 딸을 얻는 다른 다이묘우가 이를 꺼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여 이 일건에 대해서 키타노만도코로와 상담하기로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허락을 얻는다면 그녀를 따르는 또는 그녀와 친한 여러 다이묘우들은 부담 없이 이에야스와 인척관계를 맺을 것이다.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 府][각주: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각주: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각주: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津]야마토[大和] 근방에 성()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칸논 사[音寺]의 성주이며 승()이기도 한 센슌(詮舜][각주: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각주: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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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
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 9 6.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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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의 재기(才氣) 때문이다.
는 식의 말을 하였는데, 다소 빈정대는 듯하다. 그녀는 히데요시와 함께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칼을 꺼내어 그 뿌리를 끊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는 호담함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1.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2. 약 240cm [본문으로]
  3.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4.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6.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7.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8.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10.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11.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12.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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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아들네미 같았던 동군 소속 무장 모두보다 더 오래살았군요(;;;) 역시 여성의 여생이란 생각할게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있어서 요도도노 모자의 여생따위,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뭐 사실 그들 모자야 세키가하라 이후의 삶은 덤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네네도 장수했군요)
    다음 편도 벌써 기대가 되는데, 주인공 [야마토 다이나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빈약한 지식으로 추측해보면... 히데요시 동생 히데나가인가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길주는 함경도의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도 명명법이 목사-부였는지 병사-부였는지가 있는 대도시 두개의 이름을 따는 것인데요.(전라도는 전주랑 나주, 경상도는 경주랑 상주, 충청도는 충주랑 청조 같은 식이죠. 경기도는 일본의 긴키랑 같은 것이므로 예외 입니다만) 세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가 함길도 절제사 였습니다. 길주는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상당히 큰 도시로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 였다는 것이지요. 아마 세조때 였는지 예종때 였는지 함경도로 바뀌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편에서 전개가 갑자기 급하게 흘러간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네요.
    2대로 단절된 야마토 고리야마 도요토미 가문의 초대 도슈로 든든한 형의 오른팔이라, 기대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5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키타노만도코로 편 완결이네요 야마토다이나곤도 기대됩니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있는 학생이지만 아직 실력이 빈약한 관계로(고어, 고어체는 정말 쥐약-_-) 책을 구해도 읽을 수 없으니 이렇게 발해지랑님의 번역하신 것을 기다리고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ak81 BlogIcon 파악 2008.04.15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음...말씀해 주신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확실히 역사상의 결과만 보면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어떻게든 존재 의의를 찾아 주고 싶군요...또한 나름 살려고 발버둥 쳤던 인물들의 생을 덤으로 하기엔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뭐 조선침략 원흉의 핏줄이니 인과응보이기도 하지만요 ^^

    맹꽁서당님//재미있게 보셨으니 다행입니다. 밑에 신사본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야마토 다이나곤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이옵죠.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5744758 <- 전에 졸역했던 것입니다.

    지나가던님//드디어 저에게도 오셨군요. 그 유명한 '지나가던'님.... ^^
    실례했습니다. 좋은 지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신사본론님//이책은 챕터 별로 그 인물에 대한 것만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것에 더하여 과감한 삭제가 시바 선생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많이 읽어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요)
    기대는 하지 마십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

    박선생님//역시....기대는 마십시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 취향으로 재미있던 것 뿐이니까요
    아물러....고어 관련은 저도.... --;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연이 닿은 이웃이신 shotokanfist님이 그쪽으로 굉장하셔서 든든하답니다.
    박선생님도 함 그쪽 방문을 권하고 싶군요.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파악님//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보람을 느끼는군요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로 하시는 거라기엔 매끄러운 번역인듯 합니다^^
    shotokanfist님 블로그에도 방문 해봤는데 많은 자료들이 있네요(후한서부터 만엽집의 시가까지;)
    구경해보고나니 한문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참 배워야할게 많네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취미로 하다 보니 그렇게 까지 깊게 안 들어가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군요 ^^

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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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8 1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에서도 나와있는 내용이더군요.. 기가막힌 천재지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야(-_-...좀 네타려나..,)

    아무튼 키요마사는 상당히 인물은 인물이었던듯.. 이모저모에서 두려워했던걸 보면.. 혁신에서는 좀 과소평가된 느낌이 없잖아 들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의 콘도우 이사미(近藤 勇)도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라니까요.
    코에이의 게임에서라면... 확실히 내정치가 너무 낮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내정에 관한 것은 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3. 이노센스 2010.02.13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요마사가 외친 신의 이름은 다시 원문을 확인해봐야하지만 무가의 수호신인 '하치방 대보살'일 겁니다. 시바 료타로의 다른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가마쿠라 이래의 무사들은 궁시의 신인 하치방 대보살에게 승전을 기원하거나 맹세를 걸고는 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비사몬텐'이나 '마리지텐'일 수도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은
      "神仏も照覧あれ"...로 시작합지요.

      글쎄요... 어느 신에게 빌었을지... 소설에서 나오는 글 가지고 너무 단정지어서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키요마사는 법화종의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깃발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치만대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을 믿었다면 그 쪽 깃발을 애용했겠지요.

四.

 네네의 몸가짐은 예절 바르다고는 할 수 없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세운 무릎 쪽의 발을 바꾸었고 바꿀 때도 옷자락 안쪽까지 보여버리기도 하였다. 뺨을 긁거나, 가래를 뱉거나 하여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배우질 못했다기 보다는 천성이 활달한 편이어서, 자기자신을 바른 예절이라는 틀에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네네가 요도도노의 어떤 소문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한 적이 있었다. 측실들이 말한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녀의 여관장(女官長)인 코우조우스[主]가 이야기한 것이었다. 요도도노가 자신의 슬하에 오우미([近江]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의 다이묘우[大名]를 말이다. 그들 오우미 계의 역사는 히데요시[秀吉]나가하마[長浜]입성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信長) 휘하에서 처음으로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는데, 그때 하사 받은 영지(領地)가 오우미의 나가하마였다. 석고는 구 아자이 가문[井家]영토인 3() 20만석이며, 이때부터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에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로 불리게 되었다. 20만석에 상당하는 부하를 데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각주:1], 그 지역에서 이름난 가문이나, 많은 전투를 경험한 낭인(浪人), 승려가 못된 인텔리[각주:2] 등을 급히 대량으로 채용하였다. 그런 그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되었으며, 그 출신상의 특징으로써 경리에 밝았다[각주:3]. 재무 감각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는 없는 장부(帳簿)의 기록 기술까지 이 지방의 출신자는 알고 있어, 그런 기능이 있었기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田 長盛]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오봉행(五奉行)에 발탁되어 재정과 여러 정무를 담당하며 오우미 파벌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 오우미 사람들(엄밀히 말하면 북부(北部) 오우미 사람들이지만)은 그 대부분이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 출신이었다.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망한 옛 주가(主家)에 대한 감정적인 충성심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요도도노의 등장과 함께 그 감정적인 마음은 대상을 얻었다. 히데요시가 예전에 섬기던 오다 가문의 오이치[市]에게 성스러운 고귀함을 느낀 것과 같이, 그들은 아자이 가문 핏줄인 요도도노에게 그것을 느꼈다. 요도도노야 말로 진정한 공주님에 걸맞은 존재였으며 더구나 주군의 직계 혈통으로, 이미 남자 계통이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하여 끊긴 지금, 혈통에서 끝나지 않고 옛 주인 그 자체라는 감정을 요도도노에게 가졌다. 자연히 그 슬하에 모였다.

 요도도노도 옛 신하라는 친근감을 가지고 그들과 접했다. 또한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 역시 오우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 오우미 계의 다이묘우들과는 친척이거나 몇 다리 건너면 친척이었고 또한 교류가 있어, 그 분위기 속에서 요도도노는 자연스레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요도도노가 나에게 대항하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을 코우조우스의 이야기에서 네네는 느꼈고 단순한 여관들의 뒷담화로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네에게는 히고[肥後]에 관해서도 키요마사와 함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책봉되었다는 현상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요도도노가 미츠나리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졸라서 그 파벌에 속해있는 코니시 유키나가를 추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송구스럽습니다만 요도도노가 키타노만도코로님을 언젠가는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라고 사물을 이해하는데 현명한 코우조우스는 말했다. 넘어선다고 하여도 정실(正室)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권세를 쥐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것만큼 가소로운 것이 없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 중에 인사(人事)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는 이 가문을 만든 조강지처인 자신 이외에는 없었다. 이외에 있을 턱이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었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네는 히데요시에게 그런 것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주인댁인 요도도노에게 기울면 기울수록, 네네에게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다정함과 배려를 잊지 않았으며, 그녀가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정실이라는 긍지를 더욱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도 성[城]은 이외로 빨리 완공되었다.
 
1589
1월에 착공하여 3개월 후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그 건축의 빠름보다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요도도노의 임신이었다. 요도 성()이 완공된지 2개월 후인 5 27일에 남자아이를 출산한 것이었다. 첫 아이인 츠루마츠[鶴松]였다.

 - 어쩌면……

 이라는 목소리가 성안에서 속삭여졌다. 태합(太閤)님의 씨 일리가 없다, 태합님은 속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이 각 건물에 있는 측실들 주변에서 속삭여졌다. 히데요시에게 씨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히데요시의 살을 접해왔던 측실들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만약 히데요시의 기능이 온전하다면 과거에 누군가가 임신했을 터였다. 그것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의심스럽지
 
라고 네네야말로 히데요시와의 함께 덮은 이불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누구보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네네는 그런 이상함을 절대 입밖에 내는 일 없이, 츠루마츠의 탄생을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로서 크게 축하하였다. 정실로서만이 아닌 네네는 법적으로 모친이기도 했다.

 '어머님[お母さま=おかかさま]'
 
이라고 그녀는 불렸다. 츠루마츠의 모친은 둘이 있는 것이 되어, 요도도노도 '어머님'이라 불렸다. 히데요시나 츠루마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구별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면 요도도노는 단순히 어머님’, 혹은 엄마[おふくろさま]이며 네네는,
 
'어마마마[まんおかかさま]'
 
라 칭해졌다. ‘[まん]이라는 것은 만도코로[政所]의 만을 지칭할 것이다. 츠루마츠에게 물건을 보낼 때도 네네 자신, -이것은 어마마마가 보내는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츠루마츠의 출생은 오우미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개가(凱歌)였을 것이다. 요도도노가 토요토미 가문에서 자리잡고 있던 위치는 측실에서 생모(生母)으로 껑충 뛰어 오른 것이다. 토자마[様][각주:4] 다이묘우들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선물을 보내기 보다는 요도도노에게 더 정성 들여 선물을 보내게 되었기에,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에서 네네의 위세는 당연하게도 후퇴했다. 네네는,
 
-
요도도노가 큰 공을 세웠군요.
 
라고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코우조우스 이하 네네 휘하의 여관들에게 있어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항상 가시 돋친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대로 츠루마츠가 어른이 된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에 요도도노와 이 적자가 자리잡게 되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위세 같은 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깃거리나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츠루마츠가 출생한 다음 해인 1590 8.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가 칸토우[東]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호우죠우 씨[氏]를 그들의 거성(居城)오다와라[小田原]에 몰아 넣었다.
 
히데요시는 장기 포위 방침을 취하여, 성안을 천천히 말라 죽이는 한편 포위한하고 있는 심심해 하는 부하 사졸들을 위해서 유녀(娼女)들을 불러 모으거나, 사루가쿠[]판을 벌리거나 하였다. 또한 다이묘우[大名]들에게는 각자의 처첩(妻妾)들을 부르게 하였다.

 [그렇게 하였다]

 고 네네에게도 편지로 알려왔다. 그 편지라는 것은,

재빠르게 적을 새장 속에 집어 넣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위험한 전투는 없을 것이기에 걱정 마시길.
도련님(츠루마츠)이 보고 싶지만, 그러나 이것도 장래를 위해서, 천하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니 그립다고 생각하는 기분도 떨쳐버릴 수가 있다. 나도 여기서 뜸 같은 것을 받으며 몸에 신경 쓰고 있으니 아무쪼록 걱정하지 말길.

 어쨌든 이번 오다와라 싸움은 오래 걸릴 것이라고 지시하였다. 그 때문에 다이묘우[大名]들에게는 마누라를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래서~

 라고 히데요시는 본제에 들어갔다. 요컨대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 그 점에 대해서 네네의 심정과 입장을 살피고 자질구레하게 이것저것 가져다 붙인 후 또한 거기에 그녀의 자존심에 주름이 가지 안도록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붓을 멈추지 않고 단번에 써내려 갔다.

우와같이(위와 같이)
싸움이 오래될 것이라고 말하였슨 즉
그 때문에
요도 녀석을 부르려고 하네
그쪽도
슬슬 요도에게 말하여 이쪽으로 오는 건에 대한 준비를 시키게
그쪽 다음은 요도도노가 나랑 마음이 맞는 것 같더군

 정실인 네네에게서 요도도노에게 오다와라로 내려가라고 명령해 주길 바란다, 준비를 시켜주게~하고 히데요시는 그녀의 지위와 체면을 그렇게 세워주고, 그녀가 가질 것 같은 불쾌함을, 그렇게 명령하게 함으로써 바꾸고자 하고 있었다.
 
여전하시군
 
하고 네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하는 마음 밑바닥을 꿰뚫어보면서도 이래서는 화내기도 조금 그랬다. 더구나 편지에서,

그쪽 다음으로 요도도노가 나랑 마음이 맞는다.
 고 뻔뻔하게 네네를 우선시하는 것 같아서 이 편지 자체가 네네에 대한 사랑의 편지인지 하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말미에는,
나도 늙었다.
 는 한 줄을 히데요시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곧이어 오다와라에서 행해질 터인 요도도노와의 사이의 뜨거운 이불 속에 대해서 네네의 상상이나 연상을, 이 한 줄로 막아버리고자 하는 배려이며 이것은 네네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는 뭐 둘러대기에는 좋지만 그러한 상냥함의 표현으로 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늙었으니 네네는 조금만 질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라고 네네는 코우조우스에게 보여주었다. 네네는 오다와라에 오라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코우조우스에게 읽게 하여도 치욕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에서는 히데요시가 네네를 요도도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네네의 지위를 요도도노에 대해서도 윗줄이며 명령권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오다와라에서 확인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네는 요도도노에 대해서 그리 가벼이 몸을 움직여 자신의 입으로 준비를 시킬 정도로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네네라면 오히려 히데요시도 편했을 것이다. 이번 경우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 편지를 써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잘 하도록 힘써주세요

 라며 코우조우스에게 명령했을 뿐이었다. 코우조우스는 당혹했다. 요도도노에게 어떻게 힘쓰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하며 어느 정도로 요도도노의 준비를 도와야 하나?

 “…글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사옵니까?”

 라고 네네에게 되묻자,

 뭘 당혹해 할 것은 없습니다

 라고 처음으로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네네가 말하기를 자기에게도 이렇게까지 마음 쓴 편지를 보내는 히데요시이다. 당사자인 요도도노에 대해서도 편지를 보내어 충분한 것을 세세하게 지시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으니, 이쪽에서 뭔가를 해 줄 것도 없다. 있을 턱이 없다. 쓸데 없는 것을 하면 반대로 창피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코우조우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편지에는 네네에게서 요도도노에게 말하라고 써있지 않은가?

 코우조우스도 융통성이 없으시군요

 네네는 한번 웃고는,

 그것은 즉, ‘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의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 아부는 이미 네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만으로 목적을 이루었다. 내용에 대해서 거기까지 꼼꼼히 할 필요는 없었다.

 당신이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에게 이번에 칸토우[東]로 가는 거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말 정도만 해 두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라고 네네는 말했다.

  1. 노부나가는 부하들이 쓸데 없이 축재(蓄財)하는 것을 싫어했다. 영지(領地)를 하사하면 그 영지에 걸맞게 부하들을 등용하여 더 많은 활약을 하길 원했다. 그 예로 중신 서열 No.1인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같은 경우는 영지를 하사하여도 그것을 이용하여 부하들을 등용하기는커녕 자기 배만 불리자 쫓아버릴 정도였다(물론 이것 외에도 서열과 영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던 것도 있었다). [본문으로]
  2. 제대로 된 정식 승려가 되기에는 돈과 빽이 필요했다. [본문으로]
  3. 우리나라에 ‘개성상인’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일본에도 ‘오우미상인[오우미쇼우닌=近江商人)]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재가 뛰어났다. [본문으로]
  4. 여기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이 아닌 나중에 항복한 다이묘우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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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4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곧 츠루마츠의 사망과 히로이의 탄생이 이어지겠군요(ㅎㄷㄷ..)

    최근에 이 시기와 관련이 있다면 있는 엔도 슈사쿠의 '숙적'을 읽고 있어서인지 한결 더 다가 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출판사답게 전문번역이라고 보기엔 좀;; 기타노만도코로를 북정소로 번역한 센스는;;; 히데요시의 어머니를 '대정소'로 번역 해 놓은것도 참..)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5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저도 돈 받고 일반 독자에게 읽혀야 하는 번역을 한다면, 북정소나 대정소로 번역했을 걸요 ^^
    거기다가 각 이름들도 국어 외래어 표기법에 맞추어...
    카토우 키요마사 -> 가토 기요마사... 라던가..
    이시다 미츠나리 -> 이시다 미쓰나리....
    라던가....
    .
    .
    저는 이글을 번역할 때, 당시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는 분들을 기준으로 쓰는 것이고, 아마 카톨릭 출판사의 번역가 분은 당시 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분들도 생각해야 하기에 그러시지 않으셨을지..

    참... 근데 淀殿는 어떻게 표현했나요? ^^
    요거 번역의 차이도 제 나름대로 흥미가 일더군요.
    요도도노인지... 요도기미...인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기미로 나왔던걸로... 음, 그런데 요시카와 모토하루는 좀 에러였던걸로(;;;) 쩝;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5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기미군요...^^
    (당시는 사용되지 않던 에도 시대 비속어다 보니 전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 해서 어떻게 하셨나 궁금해서요)

    확실히 모토하루의 성은 에러군요... 하긴 센고쿠 덕후들이나 킷카와라고 읽지 보통은 요시카와로 읽겠죠^^(...그거 번역한 분은 조금 공부가 부족했나 보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초반에는 키츠카와(킷카와를 한국 표기법으로 쓰면 키츠카와가 되는가요? 좀 다를법 하긴 하지만서도..) 모토하루로 적더니만 2권에서 근성이 떨어졌는데 요시카와 모토하루로 쓰는 센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분이 썼다던데 센고쿠 덕후분은 아니셨던듯(ㅁ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5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떨어졌는데->떨어졌는지

    개인적으로 ctrl+V가 안되서 전부수정은 좀 버겁군요(쿨럭)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6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키츠카와는....(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책에 한자 위에 후리가나 붙여 있는 것(ルビ)이... 워낙 작다보니 'つ'하고'っ' 가 구분이 안 가셔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마 초반에는 독자를 위해서 きつかわ 라고 루비가 달려있었을 것입니다. (근데 센고쿠 덕후가 아니시다 보니 킷카와는 들어보지 못하셨겠고, 당연 키츠카와...) 하지만 책에서도 한번 나온 이후부터는 그냥 한자만 있었을 테고...
    그러다보니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새로운 모토하루의 등장인가!! 더구나 이 놈은 요시카와이고..."가 되지 않았을지...(즉 번역가분은 스토리를 이해 못하면서 번역하셨나 보네요..아쉽군요.)
    그리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つ'와'っ'구분이 안되었는데, 21세기 들어와서는 그것도 구분이 될 수 있게 발전하더군요.

    ps;대사관이라고 하니 예전에 얼핏 흘려 본 것이 떠오르는군요... 한국 어느 외교관은 일본 주재(駐在)인 주제에 일본말은 못하고 영어만 써서, 어느 신문란에 가십 처리 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쓸데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일반지는 아니고 스포츠지 사회면에 조그맣게...(물론 일본 스포츠지도 막장이라 없는 사실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한국 외교관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ps2;저도 오타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다보니 신경쓰지 마시길..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6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도 슈사쿠 원서를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네요(ㅎㅎ)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도 깃카와씨는 있지 않나요? 요시카와씨가 더 흔해서 그렇지…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있겠죠...저는 갑자원 야구 중계 보면서 "노부나가(信長)"란는 성(姓)도 본 적이 있으니까요.

二.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리자.

 삿사 나리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언도 받은 것은 1588년 윤5월로, 이 때문에 히고[肥後]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이 나리마사의 후임으로 누가 임명 받을까 하는 것이 성중(城中)의 화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일개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신분에서 갑자기 천하를 손에 넣었다. 때문에 에도 막부를 세우게 되는 토쿠가와 가문[家]과는 달리 그를 따랐던 부하들 중에 쿠니모치 다이묘우[ 大名][각주:1]가 될 정도의 기량이나 경력, 가문의 격()을 가진 자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싹수가 보이는 젊은 직속 가신 중에서 발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가 좋을까?

 

 히데요시는 침묵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사안일수록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나불대면서 하였다. 그것을 듣고 네네 아니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라고 해야만 할까 – 가 곧바로,

 

 “토라노스케[虎之助]야 말로 적임자겠죠”

 

라고 말하였다. 토라노스케라는 것은 키요마사[正]의 통칭이었다.

 키요마사라는 젊은이는 히데요시의 모친 나카(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친척으로, 키요마사가 5~6살 때 히데요시는 키요마사의 모친에게 양육을 부탁 받았다. 히데요시는 흔쾌히 수락하여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부엌 밥을 먹이며 키웠다. 네네가 타진 옷을 기워준 적도 있었으며, 여름이나 겨울에 입을 것도 네네가 걱정하였고, 심한 장난을 야단도 치며 때린 것도 네네였다. 키우느라 들였던 노력이 그대로 네네의 애정으로 바뀌어 있어, 그녀에게 키요마사 만큼이나 귀여운 무장은 없었다. 곧이어 꼬꼬마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서 불과 15살의 나이에 170석을 받는 몸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세운 공으로 인해 3000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키가 6척을 넘어[각주:2] 전쟁터에서는 위풍당당하였으며 또한 장재(將材), 무략(武略)도 있는 듯 했다. 거기에 네네의 눈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귀염성 있는 성격이었다. 지금 이 젊은이에게 토요토미 가문이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그 은혜를 반드시 갚으리라.

 

 아직 어려~”

 

 히데요시는 거부하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3000석의 직무밖에 경험하지 못한 26살의 젊은이를 갑자기 거대 다이묘우로 삼는 다는 것이 좀 그렇다는 의미였지만, 그러나 갑자기 정권을 얻은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뭐든지 속성(速成)으로 해야 했다.

 

 괜찮겠지

 

 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키요마사로 하겠다

 

 고 마음 정한 후, 히데요시는 이 인사(人事)에 자신의 장대한 다른 구상을 결부시켜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다른 구상이란 언젠가 대명(大明)을 공격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대명 정복이라는 것은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이었을 즈음부터의 꿈으로 살아있는 동안 이 꿈만은 실현하고 싶어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히메지 성[城]에서 아즈치[安土]로 가서 노부나가에게 인사를 올렸을 때 반은 농담삼아,

 

 큐우슈우[九州]를 하사해 주시면 그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라고 말한 것은 대명(大明)으로 바다를 건너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히고[肥後]는 큐우슈우에서도 온 지역에 미전(美田)으로 가득 차,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병사를 기를 수 있었다. 더욱이 히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있던 키쿠치 씨[菊池氏][각주:3] 이래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이 지역을 키요마사에게 하사하면 어떻게 될까? 히데요시 휘하에서 토라노스케 키요마사 만큼이나 외정(外征) 선봉대장에 어울리는 남자도 없었다. 히고[肥後]의 경제력은 그 과중한 군역(軍役)에 견디기에 충분했으며, 키요마사 정도의 남자가 히고 병사를 이끌고 가면 대명(大明)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반국()을 주자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고의 반이라고 하여도 25만석이여서, 3000석인 키요마사의 신분에서 말하면 기절할 정도의 출세였다.

 

 키요마사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히데요시의 큰 은혜를 느끼는 한편 그보다도 더 깊은 감정으로 자신의 양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막 목욕을 끝낸 모친의 향기를 맡고 싶어하는 듯한 기분과 같은 것이 언제나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한 키요마사의 마음 속에 있었다. 키요마사에게 표면적인 주인(主人)은 히데요시였으며, 감정상의 주인은 키타노만도코로였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머지 반국 24만석은 야쿠로우[弥九朗]에게 주기로 하였다. 사이 좋게 지내라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을 때, 키요마사는 얼굴을 숙여 절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약방(藥房) 출신의 야쿠로우 놈과……’

 라는 생각이 들자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키요마사는 무공(武功)이 있어야만 값어치가 있다는 소박한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보호자인 키타노만도코로의 가치관과 일치하였으며, 가치관이 일치하였기에 그녀는 키요마사를 사랑하였으며 키요마사도 그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런 키요마사에게 히데요시의 인사(人事)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으로 츄우고쿠[国] 공략을 하고 있을 때 주워온 남자였다.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외교 감각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그를 부하로 삼아 하급 참모장교로써 여러 곳에서 부렸다. 또한 유키나가의 부친인 사카이()약종상(藥種商)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나 형인 죠세이[清]도 가신으로 삼아 행정을 맡기거나  경리(經理)를 담당시키는 등 총애하고 중용하였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자 키요마사와 같은 야전(野戰), 공성(攻城)의 군인보다도 유키나가처럼 경제를 보는 눈이 있는 정략가(政略家) 쪽을 중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참고로 상인(商人)인 코니시 일족은 사카이[]에서 오오사카[大坂]에 걸쳐 번영하였지만, 유니나가의 코니시 가문은 그 일족 중에서도 중급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었기에 그쪽 방면에서도 명문가(名門家)라고 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약종상이라는 가업 상 대대로 조선 무역에 숙지(熟知)하여 유키나가도 몇 번인가 바다를 건너 간 적이 있어 조선의 지리나 정세에 밝았고 거기에 조선말도 할 줄 알았다. 그 점이 히데요시에게는 매력이었다. 언젠가는 대 조선 외교를 담당시키고 싶었고, 막상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키요마사와 함께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었다. 키요마사의 무용(武勇)에 유키나가의 기략(機略)과 해외 지식이라면 원정군에게는 범에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키요마사는 이해 할 수 없어,

 결국 이런 것이겠지

 라는 편견만으로 사태를 보았다. ()로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도 성 안의 방바닥에 앉아서 손바닥이나 비벼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무사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자보다 중용되어 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 성 안의 무리들이 토요토미 정권의 중추(中樞)에 들러붙어 강고한 단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재자(才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당수격(黨首格)이 되어 오우미[近江]계의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코니시 유키나가도 그 계열에 속해 있었다.

 

 먼 곳에 가면 어찌 될지……’

 라는 걱정이 당연히 키요마사에게는 있었다. 키요마사는 성 안의 무리들을 미워했고 또한 소원(疎遠)했기에, 중앙에서 말도 안 되는 참언(讒言)을 당하기라도 하면 삿사 나리마사와 같이 부임 후 영지(領地) 몰수 이어서 할복이라는 운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리마사가 만약 성 안의 무리들과 친했다면 중앙의 무마가 먹혀 들어 그런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키나가는 미츠나리와 사이가 좋다. 이런 점에서 잘 해나갈 것임에 틀림 없다

 라는 그 하나만이 키요마사를 신경 쓰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봉지(封地)로 떠나기에 앞서 키타노만도코로를 배알(拜謁)하여,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이 아뢰었다.

 

 저는 그 약방놈하고 사이가 나쁘옵니다. 한 나라() 50만석을 둘로 나누어 각각 통치하는 이상, 당연 분쟁도 일어나 서로간의 기분도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약방놈은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 = 미츠나리]를 통해서 주군에게 졸자(拙者)를 참언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시옵소서... 라는 것이 키요마사의 바램이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요마사가 앞날을 우려하는 것 - 이것을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상으로 같은 걱정을 하는 사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녀 자신도 키요마사와 같이 요즈음의 문치 중시로 치우친 토요토미 정권에 은근히 분노를 느끼고 있어 미츠나리나 유키나가와 같은 무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

 

 라고 그녀는 키요마사에게 말했다. 언제나 말이 명쾌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이 변함없는 시원시원함을 접하여 키요마사는 얼굴 표정까지 밝아져 들뜬 마음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명쾌하게 말했던 만큼 기분이 밝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키노시타 성[木下姓]이었을 즈음부터 그녀의 내조(內助) 없이는 히데요시의 공()을 말할 수 없었다. 인사(人事)의 상담도 하였고, 밖으로 원정을 나간 히데요시를 위해서 오다 가문과의 사교(社交)에도 힘썼으며, 가문 내의 정세도 조사하여 정리해서는 히데요시에게 알려주었고, 또한 일가의 가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부하들의 뒤도 잘 돌봐주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히데요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였던 하시바 성[羽柴姓]시대에도 그러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는 츄우고쿠[国] 방면에 나가 있어 거의 부재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성주는 그녀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그녀가 했던 그런 역할을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행정관[奉行]들이 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시스템이 정비됨과 동시에 그녀는 그 역할에서 실직(失職)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힘도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키요마사가 참언 당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처리하는 미츠나리 등의 행정기관에 그녀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호해 줄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1. 한 나라(国)를 소유할 정도의 거대 다이묘우. [본문으로]
  2. 1척 = 약 30.3cm 따라서 180 이상. [본문으로]
  3. 예전부터 많은 무용을 남겼다. 도(刀)가 주류였던 일본의 전쟁에 창[やり(槍)]를 발명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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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8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라도 있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그렇게까지는 마음쓰진 않았을 듯 싶은데.. 도요토미 가문에 적자가 없다는건 치명적인 약점이었군요.. 재능 있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음 참.. (세키가하라를 보면..-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9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교적인 권선징악에 따른 올바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시선에서 보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