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95 2 7일 병사 40

1556~1595.

오우미[近江] 히노[日野] 성주 가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의 아들. 크리스트교를 믿어 세례명은 레오(는 레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공적으로 인하여 아이즈[津] 와카마츠[若松] 성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출진하지만 갑자기 병을 나서 급사.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명장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오우우[羽] 지방의 통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아이즈를 맡긴다고 하자 타다오키는 이런 큰 일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사퇴하였다.

 오우우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등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호족들이 많았다. 아이즈 쿠로카와[川] 42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것은 이런 호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검은 손길이 오우우에 미치지 않게 한다는 숨겨진 임무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정된 것이 가모우 우지사토였다.

 이세[伊勢] 마츠자카[松板]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경심(畏敬心)을 품게 하였다.


 또한 우지사토만큼이나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주인도 흔치 않았다. 주된 가신들을 모아서는 술자리를 열 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직접 뗄감을 집어 넣으며 물을 끓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스런 신하가 많았다.


오우우 평정에 조력


 히데요시는 이런 우지사토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처음엔 타다오키처럼 사퇴하였지만 히데요시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아이즈 쿠로카와 42만석을 받아 들인 거실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본 야마사키 우콘[山崎 右近]이 많은 영토를 가진 높은 신분으로 출세하여 기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요? 하고 묻자 우지사토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낮은 신분이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더라도 쿄우[] 근처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천하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을.... 아무리 높은 신분에 많은 영토라고 하여도 쿄우[]에서 먼 곳에 있다면 그런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도 모르게 분한 눈물을 흘렸다"

 고 대답했다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로 향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여 입었다. 오우우 부임은 히데요시를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두려웠기에 오우슈우[奧州]로 쫓아 보냈다고 근신(近臣)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라도 우지사토는 천하인(天下人)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재능을 오우슈우[奧州] 통치에 이용하려고 한 히데요시의 날카로운 안목을 칭찬해야만 할 것이다.


 우지사토의 말년은 오우우 통치에 전력을 쏟는 시기였다. 카사이-오오자키의 난[葛西大崎一揆]을 진압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처리하였다. [우지사토 기[氏鄕記]]에 따르면, 이때 우지사토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군법에 따라 군율을 엄격히 했다고 한다.


최후와 죽을 때 읊은 시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태어났다.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히데요시에게,
 [
우지사토의 진영을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이코우[太閤] 전하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면 이 이상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 죽여야만 합니다]
 
고 진언하여 독을 먹였다고 한다.
이야기로써는 흥미 깊지만 우지사토 독살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지사토가 발병한 것은 1593년의 히젠 나고야 출진 중이었다. 몇 월 몇 일인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하혈(下血)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의 일화에 나오는 듯이 히데요시나 미츠나리가 짐독(鴆毒)을 먹게 하였다면 그해 안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 중국산의 독조(毒鳥[각주:1]) 날개를 술에 담근 후 마시게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죽은 것은 1595 2 7일로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필시 하혈은 암()의 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카이[]의 의사 소우슈쿠[宗叔]의 진찰과 투약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달증상을 띠며 말라갔기에 히데요시도 걱정하여 당대의 명의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 玄朔][각주:2]에게 진찰시켰더니 [배에 물이 차거나 손발에 종기가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1594년. 히데요시는 또 다시 9명의 명의에게 우지사토를 진찰시켰다. 안타깝게도 명의들 대부분이 포기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어 4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의 의학에선 어떻게 판단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암(直腸癌)의 병상(病狀)과 비슷하다.


 그의 사세구()가 물의를 빚었다.

 りあればかねどるものをみじかき山嵐
 끝이 있으니 (바람)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지는 것을 마음도 급하구나 꽃샘바람

누군가에게 독살되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설이 태어났지만 명백한 오해이다. 현대의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암의 질환이다. 우지사토는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것이라 생각한다.

코우토쿠 사(興徳寺)에 있는 우지사토의 묘

  1. 가상의 새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의 양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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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600 10 12 자살 59

1542~1600.

토바[鳥羽]성주. 시마 수군[志摩水軍] 두령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나가시마 잇키[長島一揆][각주:1] 토벌,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朝鮮) 출병 등에서 전공을 세우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 측에 서 패배, 할복하였다.










쿠키 수군의 총수


 쿠키 요시타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해적대장군(海賊大將軍)'이며 제독(提督)이다.

 기묘하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쥐었을 때, 반대로 요시타카는 패배하여 자살함으로써 명암이 갈렸다.


 요시타카는 쿠마노 수군[熊野水軍]의 일파로 이세[伊勢] 코쿠시[国司]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에 굴복했던 시마 수군의 두령으로,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578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오오사카[大坂] 혼간사[本願寺] 공격에 참가하여 모우리 수군[毛利水軍]과의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면서였다.


 10 1일.

 철갑 전함 7척으로 구성된 '쿠키 함대'오오사카 만()의 키즈 강[木津川]의 입구로 출동시켜 혼간지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던 아키[安芸] 모우리 가문[毛利家] 휘하의 무라카미[村上], 코우노[河野]세토 내해[瀬戸内海] 수군 6백 수십 척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일본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대해전에서 노부나가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쿠키 함대 중 6척은 요시타카가 이세의 오오미나토[大溱]에서 건조한 것이고, 나머지 1척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이세의 시로코[白子]에서 건조하였다. 최신예의 철갑선으로 사카이[堺]로 회항한 그 모습을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에서는 가장 크며 그리고 또한 화려하다. 우리 포르투갈 왕국의 배와 닮았다. 이걸로 오오사카[각주:2]는 멸망할 것이다. 배에는 대포가 3문 탑재되어 있다

 고 감탄하며 기록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요시타카의 이런 전공에 큰 상을 내려 시마와 셋츠[摂津]의 후쿠시마[福島], 노다[野田] 등을 합하여 7천석을 더해 주었고, 나중에는 3 5천석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뒤로는 히데요시[秀吉] 섬기며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서 활약. 임진왜란 때에는 토바에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거대한 함선인 '니혼마루[日本丸]'를 건조하였다. 토바성은 정문을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당당한 석축[石垣]을 가진 '해적대장군의 본진'에 어울리는 성곽이었다. '니혼마루'는 전장 33.67미터, 1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1.9킬로그램의 탄환을 쓰는 대포 3문과 수부(水夫) 백 명을 태우는 일본 최초의 거대 전함이었다.


부자가 갈라선 세키가하라 합전


 1597. 56.

 조선에서 귀국하여 아들인 당시 24살의 모리타카[守隆]에게 가독과 토바성을 물려주고 이세 지방에 은거료[각주:3] 5천석을 받았다.


 3년 후인 1600년.

 천하의 향방을 결정하는 세키가하라에서 모리타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출진하였고 요시타카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이세, 이가[伊賀], 키이[紀伊]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서군에 참가한다.

 센고쿠[戦国] 무사의 피가 요동을 친 것일수도 있고, 시나노[信濃]의 사나다 가문[真田家]처럼 가문을 지키기 위한 '부자 분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는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옆 지방의 이나바 쿠란도[稲場 蔵人]가 지키는 이와데 성[岩出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시타카가 이와데 성을 공격하던 중 세키가하라에서는 서군이 패했고, 9 11 미츠나리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것을 단념했다.[각주:4]


 '니혼마루'에 타고서 시마의 나기리[波切] 항구를 출항하여 선조의 연이 닿아 있는 시마의 섬들을 한바퀴 돌고선, 토바의 앞바다에 있는 토우시지마[答志島] 섬에 상륙했다. 쵸우온 사[潮音寺]에 머물며, 잠시 푸른 바다와 녹색으로 가득 찬 섬들을 지켜본 후 10 12 토우센[洞仙] 암자로 들어가 할복 자살하였다.

 "나의 목을 이에야스님께 보인 후에는 이 섬 어딘가에 토바성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다오. 쿠키의 가문을.. 모리타카를 부탁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비젠[備前]의 명도(名刀) '신코쿠[信国]'를 왼쪽 배에 찔러 오른쪽으로 그은 후, 다시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근습(近習)인 아오야마 부젠[靑山 豊前]이 카이샤쿠[介錯][각주:5]하였다. 향년 59.

 '해적대장군'에 어울리는 당당한 최후였다. 목 무덤과 몸통 무덤이 지금도 토우시지마에 있다.


모리타카의 오열

 

 그러나 요시타카가 배를 가를 즈음, 아들 모리타카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전공을 바꿔서라도' 부친을 살려달라고 탄원.

 이에야스도 '쿠키님은 세키가하라의 본 전장에는 나오지 않으셨지'라며 허락하여 사면 소식을 전하는 배가 섬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의 죽음을 안 모리타카는 오열했다.

 아오야마 등 근습들을 '아버지께 죽음을 서두르게 한 불충한 놈들'이라 화를 내며 톱 베기[각주:6], 참수[각주:7]에 처했다.

요시타카는 모리타카를 각별히 사랑했으며 모리타카도 부친을 경애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하게 여겨 모리타카에게 2만석을 가증해 주어, 토바성 5만석의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쿠키 가문탄바[丹波], 셋츠[摂津]로 영지를 옮겼으며 더구나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 등으로 영지를 바꾸었다. 해적대장군의 영광을 두려워한 정략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키 가은 지금의 쿄우토[京都] 아야베 시[綾部市]와 효우고[兵庫] 미타 시[三田市]에 '산 속의 수군 도시'를 만들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번영시켰다.

  1. 나가시마 주변의 종교반란군. [본문으로]
  2. 혼간 사[本願寺]를 지칭. [본문으로]
  3. 가독을 물려 준 전 당주에서 주는 땅. [본문으로]
  4. 여담으로 이와데 성을 지키던 이나바 쿠란도 미치토오[稲葉 蔵人 道通]는 이때 쿠키를 저지한 공적으로 2만석을 가증 총 4만5300석이 되어 이세[伊勢] 타마루[田丸]로 이봉(移封)되었다. [본문으로]
  5. 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을 쳐주는 것.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신뢰의 상징이었기에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6. 죄인을 머리만 남기고 땅 속에 파 묻은 다음, 죄상을 적은 팻말과 함께 톱을 놔두어 지나가던 행인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목을 톱으로 베게 하는 형벌 [본문으로]
  7. 당시 무사는 할복을 무사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복을 못하게 하고 목이 베이는 것을 평민의 형벌이라 생각하여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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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asangstory BlogIcon 플랑슈 2006.09.24 0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감사

  2. 구귀가륭 2012.07.30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랄하네 그냥 해적대장이지 뭔 개드립이야
    병신이네. 쿠키가아니라 구키다 병1신아.
    꼭 좆도 모르는애들이 이렇게 이름부터 틀리더라.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31 0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블로그는 "최영애-김용옥 일본어 표기법 http://ko.wikipedia.org/wiki/%EC%B5%9C%EC%98%81%EC%95%A0-%EA%B9%80%EC%9A%A9%EC%98%A5_%EC%9D%BC%EB%B3%B8%EC%96%B4_%ED%91%9C%EA%B8%B0%EB%B2%95 "을 바탕으로 음소별로 한글과 1:1 대응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くき よしたか'는 '쿠키 요시타카'로 표기된 것이죠.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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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jjang1798 BlogIcon 쌀집 2006.06.03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overmint BlogIcon 한걸음씩 2006.07.28 2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갈게요... 정말 잘 쓰셨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갔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지나가다 한마디 적고 갑니다. 말년에 이에야스 암살계획 시 직접 이에야스를 베겠다고 자청한 자가 바로 토시나가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봉행자(미츠나리 등)들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던 사람은 토시이에였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08.13 1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오히려 전 유코유코님의 토시나가 주도설을 처음 듣는군요. 토시나가가 그렇게 과감했다면, 토쿠가와 막부가 아닌 마에다 막부가 들어섰을 것 같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ovenoran BlogIcon 럽노란 2006.10.09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가 딸 치요가 결혼한 사람은 호시카와 타다타카 였습니다. 타다오키의 아들입니다. 타다오키의 부인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 부인이었구요~ 세키가하라 이후 치요히메는 호소카와 가로부터 이혼당합니다. 하지만 타다타카는 아버지의 이혼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채 이혼후에도 교토에서 치요히메랑 몇 년간 함께 살았다고 하더군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10.09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럽노란'님의 말씀이 맞군요.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입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16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라고 좋게 말을해도 우리입장에서는 국토를 유린하고 인구의 1/3이상이 죽었으며..10만명가량이 포로로 끌려간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정권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이죠..내가 일본사람이었다면 뭐..조금은 멋있었다고도 생각할수도 있으나..한국인의 입장에서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6.16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시각에서의 주장 고맙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군요. 종국엔 토요토미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세금을 낸 일반 시민들 까지도 모두 미워해야 할테니까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25 0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인전체를 미워한다는 시각이 아니라..특정정권의 중심인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위에 자료는 정말 좋은 자료인것은 분명하나..저건 분명 일본인의 시각에서의 역사적사실이니까요..토시이에라는 인물이 임진왜란때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는데..위의 자료 이상의 자료는 찾을수가 없네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noir3197 BlogIcon 누와르 2007.08.02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토시이에와 마츠를 보면서 알게?榮쨉 주인공이라 그런지 호감도가 팍팍 상승하더군요.. 히데요시에게 이런 멋진 가신이 있었다니..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02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케일이 워낙 커진 토시이에다 보니, '가신'이라는 말씀에 위화감이 드는군요. ^^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830922790210 BlogIcon 830922790210 2008.04.03 0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830922790210 BlogIcon 830922790210 2008.06.28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토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함께 임진왜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시대 통일 후, 즉, 도요토미 정권의 모든 무장이 전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지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은 정권의 정점에 있던 대명(다이모)들보다 전국시대 이후 공적을 세울 수 없어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의 참전이 더 많았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는 도요토미와는 오다 노부나가의 근습이였던 시절부터 친구라고는 하나 그의 유언장을 보면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향수는 없고 오다가의 가신이었을 때를 회상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오다 노부나가에 더 향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다 차치하고도 일단 한국사람인지라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호감도 상승입니다...;;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음, 굳이 변명하자면 전 황금왕보다는 오다가 좋다는... 그쪽으로 좀 더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토시이에의 유훈의 내용에 대해서도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은 이에야스에게 남긴 말 중에 몇가지만을 기억할 뿐...;; 도쿠가와라는 둥 도요토미라는 둥 떠드는 소리가 만연한데 지나간 도요토미에 몰중에서 도쿠가와를 무시하는 자나 반대로 도요토미를 무시자들을 멀리하라라던지, 전국시대의 유물을 계승하지 말고 천하인으로서 신도나 불교, 상업과 외교 가능하면 크리스찬도 포용하라고 했다든지 말년에 병으로 인해 누워만있던 토시이에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히데요리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진정 도요토미가를 생각한 장은 도시이에 뿐' 이라는 말도 전해지는 것 같고 말이지요. 정말 개인적으로는 전국시대 당시 오다가의 수하에서 함께 싸우던 이누(犬)와 사루(猿),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와 키노시타 토오키치 시절까지가 제가 좋아하는 기간이랄까...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했을 당시부터 지략가로서의 기량을 더 펼치는 도요토미이지만 왠지 싫다는... 그것도 다 저 또한 갖고 있는 전국시대 오와리에서부터 시작한 오다가의 향수랄까요...;;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끔없는 이야기 입니다만...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의 무기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아무리 찾아도 도요토미에게 하사받았다라고 해야할까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여하튼 현재 일본 국보로 마에다육성회에서 소지하고 있는 오오텐타 미츠요(大典太 光世)라는 칼에 대해서만 나올 뿐 애용했던 창의 이름이랄까 하는 것은 없더군요. 혹시 아신다면 리리플 부탁드리겠습니다...

  1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변명을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측면을 살펴 보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근거로 한 가지만을 가지고 내세워서는 조금 그렇지 않나? 라는 뜻에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글쎄요. 저도 아는 것이라고는 그 천하오검의 하나인 오오텐타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토시이에 정도의 인물이 어떤 한 무기에 구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오오텐타는 미술품일 뿐이고).

  1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2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님... 의견 감사드립니다. 다만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 보다는,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원정에 나섰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하신 토시이에의 유훈(遺誡11か条)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위키는 그렇게 쓰여 있는 듯 합니다만).
    히데요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난이 일어날 때의 대처 등이 쓰여있으며, 노부나가에 대한 것은 '공격시는 무조건 침공! 자국에서 방어 즐~. 노부나가공은 한 번도 자국내에서 합전을 한 적이 없다'인데, 그 외는 합전 시의 마음가짐, 중신과 공신에 대한 처우와 평가 등인데 이걸로 노부나가만 짱, 히데요시 그냥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위키는 개인적인 감상이 개입될 수 있는 백과사전입니다)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

1633 1 25일 병사(病死) 64


1570 ~ 1633.

히타치[常陸] 오오타[太田]성주. 아키타 번[秋田藩]의 번조(藩祖).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무사시[武蔵]로 출진. 부친인 요시시게[義重]의 활약에 힘입어 히타치[常陸]를 통일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는 움직이지 않고 중립을 선택했기 때문에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전봉(転封)되었다.










아키타 전봉(転封)의 이유


 사타케 가문[佐竹家]이 히타치 미토[水戶] 54만석에서 데와[出羽] 아키타[秋田] 20만석으로 전봉된 것은 1602 7 27일이었다.

 이에야스[家康]에게서 온 명령서에는 데와[出羽]의 아키타[秋田]와 센키타[仙北]로 가라는 말만 있을 뿐 석고(石高)가 명시되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요시노부[義宣]를 시작으로 가신들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이에야스[家康]가 내린 징벌 좌천 인사였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요시노부는 서군 총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깊은 친분으로 마음이 흔들렸기에 요시노부를 의심한 이에야스에게 칸토우[関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미츠나리와의 깊은 관계라 함은, 요시노부의 맹우였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 国綱]카이에키[改易[각주:1]]에 휩쓸려 사타케 가문이 처분받을 뻔한 때에 미츠나리 덕분에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요시노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豊臣]의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의 내분으로 인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7명의 무장이 미츠나리를 습격했을 때에는 요시노부가 구출했던 때도 있었다.


역전의 발상


 히타치 54만석은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에 요시노부의 영지 20만석. 거기에 은거한 부친 요시시게[義重]에게 5만석, 사타케 3가의 하나인 히가시 요시히사[東 義久]에게 6만석, 그 외는 요리키 다이묘우[与力 大名][각주:2]들의 영지 등으로 인해 '나라 안에 나라'가 있는 상태였다.


 요시노부는 아키타 전봉을 이러 변칙 체제의 타파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영지는 전부 무시하고 아키타에서 새로 영지를 분배하였고 그것을 봉급으로 했다. 요시히사의 아들 요시카타[義賢]에게는 10분의 1 6000석만을 지급했다. 가신중에서도 200석 이상은 불과 25명 이었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가격(家格[각주:3]), 관례에 구속 당하지 않는 새로운 정략의 실시를 가능케 하여 새로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했다.


 신천지에서 우선 영내(領內)의 안정에 힘써 쿠보타 성[久保田城] 축성과 안도우 씨[安東氏], 아키타 씨[秋田氏]에게서 이어 받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에 힘을 쏟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고 광산 개발에 힘썼다.


 한편 막부가 일으킨 오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大坂の陣]의 군역(軍役)은 물론 계속되는 막부의 요청에 의한 토목공사에도 나서서 응했다.

 요시노부의 아키타 번에 30년 간 부과되어진 주요한 토목 공사에는 에도 성[江戶城] 수리를 시작으로 우치사쿠라다[內桜田]의 칸다바시 문[神田橋門]의 수리, 소토사쿠라다[外桜田] 코우지마치[麹町]의 토라 문[虎門]과 이어지는 담 공사 등 도합 5.

 군역(軍役)은 오오사카의 진[大坂の陣]외에 유리[由利]()의 인수, 에치젠[越前]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 忠直]의 카이에키[改易][각주:4]에 동원 등 합계 4, 쇼우군[将軍]이 쿄우토[京都]에 갈 때 같이 간 것이 4, 그 외에 19번의 참근(参勤[각주:5])이 있었다. 한 시도 맘을 놓을 수 없는 봉공(奉公)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막부에게 쓸데없는 의심 받을까 하여 성에는 천수각도 담도 쌓지 않는 철저함을 보였다. 적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부친 요시시게[義重]의 물음에, "나가서 공격할 뿐입니다. 이런 작은 성에서 농성해서는 운도 트일 리 없습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앙집권화에 따른 정치 체제의 변화와 전술의 진보에 따라 축성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하에서 이에야스[家康]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로쿠다이쇼우(六大将[각주:6])]로 평가되어 온 요시노부가 이렇게까지 막부에 대해 신경을 썼기에, 의심이 많은 이에야스도 요시노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이 세상에 사타케 요시노부 만큼 정직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하면서도, "그래도 너무 정직해서도 곤란해"하며 충고할 정도였다.


병법가, 다도가(茶道家)로서의 일면


 요시노부는 화약의 조제법을 연구해서 책을 쓸 정도의 병법가였다. 한 편 취미인 차를 즐기는 것도 달인의 영역에 달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따라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일 때 영지로 보낸 편지에 자기 스스로 칸토우[関東] 제일의 다도가라고 할 정도였다. 요시노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에게 직접 전수받은 다도를 말년에 즐겼다.


 요시노부는 16331 25. 에도의 칸다[神田]의 저택에서 죽었다. 향년은 64.

 [정월 7일부터 산기(疝氣)를 앓으셨다.] [羽陰史略]에 적혀 있다. 산기라는 것은 대장 또는 소장 혹은 허리부분이 아파지는 병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순사(殉死[각주:7])를 금했다. 막부가 순사 금지령을 발포하기 30년 전이므로 영단이라 할 수 있다.


 17살에 가독을 이은 요시노부는 24살 때 일찍 죽은 정실과 나중에 맞아 들인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동생인 이와키 사다타카[岩城 貞隆]의 첫째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여 요시타카[義隆]로 이름 지어 세자로 삼았다. 아키타 6() 20만석의 영지가 확정된 것은 요시노부가 죽은 다음해 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2. 배하(配下)의 다이묘우[大名]. 즉 요시노부가 명령권을 가진 다이묘우. [본문으로]
  3. 가문의 등급.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의 2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장남.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으나 은상이 적은 것(차항아리[茶壷] 한 개)에 불만을 표하고 참근교대도 안 하였기에 카이에키. [본문으로]
  5.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내를 오고 가는 것. [본문으로]
  6. 여섯 개의 큰 가문. 토쿠가와, 마에다[前田],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우에스기[上杉]와 더불어. [본문으로]
  7.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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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oowee BlogIcon 수위 2005.11.27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