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이 일행이 에치젠(越前)을 떠나 오오사카(大坂)에 들어섰을 땐 이미 히데요시가 각별한 건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그 건축 완성의 빠름으로 추측하건데,

 “아씨를 만나기 전부터 오오사카에 부하를 보내어 지시해 놓으셨나 봅니다”

 하고 유모는 또다시 히데요시(秀吉)를 칭찬하였다. 챠챠(茶々)는 여태껏 이렇게 훌륭한 건물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만족하였다. 유모는 말했다.

 “히데요시님이 얼마나 마음씀씀이가 좋은 분이신가 하면, 망부이신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님, 망모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의 기일(忌日)에는 스님을 불러 재를 올리라고 일부러 말씀해 주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의 이상인 것이옵니다.”

 하고 유모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으로,

 “아자이님 일족의 여성들을 불러도 괜찮네”

 라고도 히데요시는 말해주었다. 노부나가(信長) 시대의 아자이 가문은 천하의 대역죄인 이었다. 노부나가는 다년간 악전고투하며 아자이 가문을 멸하자마자, 자신의 매제인 나가마사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금가루를 입혀서 그것을 잔으로 해서는 술을 마셨고 부하들에게도 파도타기를 시켰다. 그럴 정도로 굉장히 증오하였다. 그의 일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 중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금제(禁制)를 풀어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 능력에 따라서는 거두어들이겠다.

 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옵니까?”

 유모는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치고는 평소 신앙하는 아타고(愛宕)의 승군지장(勝軍地藏) 쪽을 향해서 감사하였고, 챠챠에게도,

 “아씨 기뻐하십시오. 이리 되어야만 가문의 영령들 한 분 한 분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이리 기쁠 수가”

 하고 말했다. 하지만, 챠챠는 그다지 감동도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끄덕였을 뿐이었다. 딴 뜻이나 반감이 있어서 무감동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문의 영령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유모와 같이 박수를 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챠챠는 항상 이러했으며 항상 말이 없었다. 이런 말없음이 챠챠라는 소녀를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마음이 굴절된, 상대하기 어려운 소녀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유모조차 이 소녀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애태우는 일이 많았다.

 이 히데요시의 허가로 인해, 여기저기 숨어있던 아자이 가문의 일족들이 기어 나왔다. 낙성 후 타오 모에몬(田尾 茂右衛門)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있던 아자이 마사타카(浅井 政高), 거기에 아자이 오오이노스케(浅井 大炊助), 더욱이 아자이 나가마사 첩의 자식인 아자이 이요리(浅井 井頼)라는 자까지 나타났다. 챠챠에게 있어서는 배다른 동생이지만, 챠챠는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어~ 아자이의 핏줄들 왔는가? 반갑구먼. 모두 미노노카미(美濃守=히데나가(秀長))의 휘하로 들어가시게”

 라며 히데요시는 그렇게 조치해주었다.

 챠챠들은 오오사카 성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 주인이시옵니다.
 라는 히데요시의 챠챠들에 대한 존경 – 어느 정도 히데요시다운 과장이 들어있기는 하더라도 그 뜻이 성안 구석구석 수만 명의 남녀들에게까지 철저히 지켜져, 이 떠돌이 자매들로서는 결코 살기 힘든 장소는 아니었다. 거기에 챠챠나 동생들과 그 시녀들이 오오사카 성(城)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성안에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들이나 그 방계(傍系), 혹은 아자이 가문과 연이 있던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님의 직속 신하 10명중 3명은 오우미 사람이 아닐까요?”

 하고 유모도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이 망하면서부터 노부나가에게 아자이 가문의 영토 – 북 오우미(近江)의 3군(郡) 중 20만석을 얻어 처음으로 오다(織田) 가문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로 출세하였다. 오다니(小谷)성(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야 했지만 산성(山城)이라는 불편함도 있고 영내(領內)의 인심을 새로이 한다는 이유도 있어, 호숫가에 새로이 성을 쌓아 ‘나가하마(長浜)성(城)’이라 이름 지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20만석이라는 갑작스러운 신분에 필요한 만큼의 군용(軍容)을 갖추기 위해서 사졸(士卒)을 대량으로 모집하였고, 모집에 응한 사람들 대부분이 영내(領內)의 사람들이었기에 자연히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나 백성이 많았다.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다이묘우(大名) 급으로는 미야베 젠쇼우보우 케이쥰(宮部 善祥坊 継潤) 등이 있고, 실력 있는 야전가(野戰家)로서는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있으며, 관료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로서는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조금 신분은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을 보좌하는데 있어서는 천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그 외에 오우미 출신의 소규모 다이묘우(大名)로서는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 키무라 히타치노스케 시게모토(木村 常陸介 重茲) 등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있었다. 중급 이하의 부하에 대해서는 세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다만 통틀어 오우미(近江)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자이 씨(氏)와 연이 깊은 것은 북부 3군(郡)만으로, 중앙부는 이미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하여 흔적도 없는 롯카쿠(六角)씨(氏)의 옛 영토였고, 남부의 코우가(甲賀) 지방은 예부터 지역 무사들의 자립지역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와(琵琶) 호수 서안 산악지대의 쿠츠키(朽木)씨(氏) 등은 그다지 아자이 씨(氏)와 연이 없었다. 하지만 오우미(近江) 중에서도 성안에 가장 많은 것은 북부 오우미(近江)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 오다니(小谷=아자이 씨(氏))의 아씨께서 계시다.
 
라며 챠챠들이 있는 건물에 그리움, 반가움에 더해 각별한 경의를 치렀고, 옛 주인에 대하는 예를 취했다. 그 중에서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떤 일이건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꼭 말씀해 주시길”

 하고 유모에게 몇 번이나 힘주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향당의식(鄕黨意識)은 이 챠챠가 사는 건물을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오와리(尾張)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고 유모는 챠챠에게 일러주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출신이 오와리(尾張)였기 때문에 이 성안에서 기세가 등등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억양이 억센 오와리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성(城)시대부터 섬긴 오우미(近江) 사람들은 어떤 일이건 결속하려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어 그 마음의 오갈 데를 챠챠들에게 향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챠챠 모친의 친정인 오다 가문 사람들 중 몇 명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었다. 노부히데(信秀[각주:1])의 12번째 아들인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도 그러하여, 성안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중개(仲介)하거나 차(茶) 놀이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도 챠챠의 외숙부이기에,

 “뭐 불편은 없느냐?”

 등등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 주었던 것이다. 단지 우라쿠는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또한 다인(茶人)이기에 성안의 뒷세계에도 정통하여, 일부의 오우미(近江) 사람들처럼 자신의 조카들에게 음습한 정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를 빨리 시집 보내는 편이 좋을 터인데”

 하고 은밀히 친구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斎)에게만은 말하였다. 우라쿠 나름의 이 신흥정권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히데요시다. 그는 저 아이에게 빠굴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만약 챠챠의 방에 히데요시가 들락날락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생길 것이다. 오우미 사람들이 측실인(아직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챠챠를 중심으로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 정권에는 오우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거기에 각각 실력을 가졌으며 또한 세력도 있었다. 그들이 챠챠라는 여성과 결속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오우미 사람들에게 농단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일소에 부쳤다. 유우사이만큼이나 그런 감각에 날카로운 인물조차, 우라쿠의 걱정이 너무 기우인 생각이라고 여겼다.

  1.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노부나가의 부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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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그 남자 히데요시(秀吉)의 진영으로 보내졌다고는 하여도, 본진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쪽에 있는 이치죠우다니()의 산 속이었다. 예전 이곳은 에치젠(越前)의 주인이었던 아사쿠라(朝倉)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산림 속에 주춧돌만 남아있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삼나무들이 많은 이 골짜기의 습도와 옛 성터의 한적한 분위기가 세 소녀의 신경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줄 것이라는 히데요시의 마음씀씀이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된 것인데, 히데요시라는 인물은 그러한 마음씀씀이가 후한때로는 너무 후하기까지 한 남자인 것 같았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인지 곧바로 그녀들과 만나지 않았다. 키타노쇼우(北ノ庄)성(城)을 낙성시킨 후, 카가(加賀)로 진격하여 각지의 성을 항복시키고 노토(能登), 엣츄우(越中)를 굴복시킨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에치젠(越前)으로 돌아왔다. 그 도중 히데요시는 이치죠우다니에 들렸다.

 

 챠챠()님과 만나자

 

 라고 말하였다. 그 만남의 장소는 절이었다. 히데요시는 절의 객관(書院)을 깨끗하게 청소시킨 후 그녀들을 불러서는 자신이 상석에 앉지 않고 자신과 동격의 자리를 주어,

 

 제가 치쿠젠(筑前)이옵니다.”

 

 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투도 평소 덜렁대며 명랑한 인물과는 달리 오래된 종을 울렸을 때와 같은 긴 여음(餘音)을 남겼고, 어조는 극히 자연스럽게 젖어 있었다.

 

 무문(武門)의 길이라고는 하여도 어쩔 수 없이 슈리(修理=카츠이에(勝家))와 다투게 되었으며, 더구나 슈리 무운이 다하여 아씨님들의 모친도 함께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는 졸자 너무 슬퍼 드릴 말씀도 없사옵니다.”

 

 라는 듯한 것을 막힘 없이, 더구나 흘러 넘치는듯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씨님들은 고() 우다이진(右大臣=노부나가(信長))님의 조카이십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졸자에게 있어서 주인이 되십니다. 이제부터는…”

 

 하고 히데요시는 말을 한 박자 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우다이진님을 대신하여 이 치쿠젠(筑前)이 지켜드리겠사옵니다

 

 멋진 말솜씨였다. 노부나가(信長)의 이름을 거론함에 따라 히데요시의 행적과 입장은 모두 정의가 되어버렸다. 예전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공격도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번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성의 경우도 이미 노부나가가 죽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오다(織田) 가문의 후계자를 어느 사람으로 하느냐는 것에 대해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의견이 서로 달라 그것을 이유로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쌍방 [사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다 가문을 위해서] 라는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이름만 이용하면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를 멸한 것도, 시바타 카츠이에를 자살로 몰아넣은 것도 히데요시는 아니다. 정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정의는 꼭 연기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막료들을 뒤돌아보며,

 

 아 아씨님들께서는 내 주인에 해당하시며 또한 불행한 환경에 처해있으시니, 너희들도 그런 것을 마음에 잘 새겨 정성을 다해 모시거라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리며 부하들의 정성을 요구했다. 본심이었다. 히데요시는 언제나 자신의 본심을 남들이 다 볼 수 있게 목의 핏줄처럼 드러내놓고 있는 인물이며 언제나 진심으로, 설령 거짓말을 할 때도 본심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드문 종류의 인물이었다. 성실이라는 것이 일편단심이라는 우둔함이 그에게는 없었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성실도 본심도 그 몸 안에 있는 혈관의 수만큼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죽은 옛 주군을 생각하며 추억할 때는 항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의 충성심을 가졌고,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옛 주군의 정권을 옛 주군의 자식에게 건네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실제로 그 끝없는 야망을 위해 병사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히데요시의 본심인 것이다.

 

 동시에,

 이 아씨를…’

 하고 히데요시는 자기 몸을 욱신거리게 만들 정도로 새하얀 챠챠의 목줄기를 주욱 훑어보며

 품고 심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또한 어김없는 본심으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고()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심과 조금도 모순이 없었다. 오히려 옛 주군에 대한 동경이 이 욕망을 부채질하였다. 히데요시는 재앙이라고 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하며, 취향은 하천(下賤)한 여성이 아닌 귀족이었다. 귀족의 여성이야말로 이 비천(卑賤) 출신의 남자를 정염으로 불태웠다. 귀족이라고 하여도 그냥 귀족이어서는 안 되었다.

 상급 귀족인 쿠교우(公卿)의 딸은 관심 밖이었다. 쿠교우가 귀족중의 귀족이라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지금까지 인생길로 보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가귀족(武家貴族)이 아니면 안 되었다. 때문이 이미 히데요시는 쿄우고쿠(京極) 가문 출신의 여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우키타(宇喜多)()의 후처와도 통하였고, 혼간지(本願寺) 주지(門跡)의 부인과도 몇 번인가 연을 가졌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의 실감 속에서의 귀족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 하건 오다 가문이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웃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다 가문 같은 것은 노부나가의 부친 대가 되어서야 갑자기 오와리(尾張) 반 정도의 주인이 된 신흥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고, 그 선조가 뭐 하던 사람이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원숭이라 불렸던 밑바닥 즈음부터의 주인 가문으로, 오다 가문의 가족들이라고 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구름 위의 사람이었다. 그 가문의 딸들은 그에게 있어서 신과 같이 성스러웠고,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이 아름다웠다. 가령 오다 가문의 여성 한 명이라도 품을 수 있다면 천명의 미녀를 포기하여도 후회가 없어, 이런 마음이 설사 천하고 비열할지라도, 동경이라는 점에서는 옛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 아씨의 모친도 아름다우셨지

 하고 카츠이에와 함께 불타는 키타노쇼우(北ノ庄)()에서 죽은 오이치() 부인을 생각하였다. 오이치는 희대의 미녀라 불릴 정도의 절색으로, 히데요시는 예전 이루지 못할 바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맘속으로 그것을 바랬다. 그 딸이 미모는 조금 떨어질지 모른다고 해도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하고 오다 가문에 대한 동경이 커지면 커질수록 - 언젠가 이 소녀와 이루어 지게 될 이불 속에서의 여러가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당사자인 챠챠는 눈을 내리깔고 히데요시를 한 번 쳐다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남자라고?’

 챠챠는 다소 이외였다. 자기에게 그렇게까지 위해를 계속 가해왔던 인물치고는, 그냥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처럼 천진난만하고, 명랑하게 떠들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로 웃었고,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의 하늘과 같이 맑아, 어딘가 얼이라도 빠진 듯한 남자였다. 이런 것에당혹했다.

 그 남자가 아니다

 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 남자라는 것은, 꼬꼬마 시절 자신의 오다니(小谷)()을 공격해서 무너뜨린 저 요코야마(山)성(城)오다니 성()을 감시하던 성 의 성주 토우키치로우(藤吉)는 이 남자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챠챠는 토오키치로우라는 남자의 별다른 모습을 뿌리박은 채 계속 자라왔건만 이 눈앞의 남자가 아니었다.

 

 저분은 좋은 분이십니다

 

 하고 나중에 말을 꺼낸 것은, 예전 토오키치로우에 대한 별개의 인상을 챠챠에게 계속 주입해 왔었던 유모였다. 유모는 서서히 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변한 듯했다. 이 즈음 태도도 묘하게 밝아져 히데요시에 대한 것을 자주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이야기의 요소요소에 예찬 가득한 형용사가 들어가, 명백히 챠챠가 히데요시를 좋아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는 듯 했다.

 왜 이러지?’

 하고 챠챠는 생각하지 않았다. 챠챠는 이런 점에서 자라온 환경에 있을 법한 둔감함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챠챠가 눈치챈 것은 유모의 의복이 어느새 비싸고 화려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유모는 어느새 자신의 고향 탄바(丹波)의 오오노(大野)에서 자식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유모는 탄바 오오노의 토착 사무라이(地侍)인 오오노 슈리노스케(大野修理亮)의 부인으로, 오다니 성()에 있었을 즈음에는 슈리노스케도 아자이 가문의 신하였지만, 낙성 후 그들은 탄바로 돌아갔었다. 남편은 그 후 병으로 죽었지만, 두 아이들은 무사히 성인이 되어, 장남은 이미 20살이 가까워져서는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탄바의 오오노라는 곳은 미야즈(宮津) 서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었지. 맞어마을 근처에 타케노가와(竹野川)라는 강이 흘러 작은 계속을 만들고 있지

 

 하고 히데요시는 이 유모만 단독으로 불렀을 때 그렇게 그녀의 출신지에 대해 말했다. 히데요시는 탄바 오오노 같은 곳에 대해 몰랐었지만 마침 그 휘하에 있던 탄바의 다이묘우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에게 물어서 미리 지식을 얻어 놓고 있었다. 이에 유모는 감동을 먹었다. 그런 산골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갑자기 친근감이 들었다.

 

 자식은 있는가?”

 

 하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있사옵니다

 

 하고 답하자,

 

 자네의 아이라면 똑똑하겠군. 이쪽으로 데려오시게. 내 친위대(馬廻)에 넣어주고서는 기량을 보아 나중에 높은 위치에 두고서 크게 쓰겠네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고마운 일이

 유모는 이날부터 몸 안의 내장이 바뀌기라도 한 듯이 사람이 변했다. 곧바로 파발꾼(飛脚)을 고향으로 보내었고, 유모의 자식들을 탄바 미야즈 항(港)에서 배로 에치젠(越前) 미쿠니() 에 입항해서는 빨리도 왔다. 히데요시는 약속대로 그 두 형제를 부하로 삼았다.

 챠챠는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 그렇기에 그 눈은 언제나 빈틈없이 깜빡이며, 항상 반짝반짝 하고 괴이한 광채를 머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모의 자식이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그것과 유모의 태도 변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류의 지혜는 어째서인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성이라 할까? 그러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오오사카(大坂) ()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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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히데요시(秀吉)가 남들과 다른 것 중에 하나는, 그가 너무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것에 있을 것이다. 장년일 즈음에는 그것을 자제하였다. 말년에는 자제의 테가 느슨해졌다. 요도도노(淀殿)는 그 시기에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았고, 히데요리()를 낳았다.

 

 이 여성은 오우미(近江) 출신이다. 꼬마숙녀일 즈음 - 7살까지 오우미에서 살았다.

 친가(親家)는 오우미 북부의 지배자였던 아자이()()이다. 거성(居城)은 오다니(小谷)에 있었다.

 오다니 성(城)은 산꼭대기에 있던 성이었다. 뒤로 이어진 산맥은 멀리 호쿠리쿠(北陸)까지 이어졌으며, 동남쪽으로 이부키야마(伊吹山) 이 있고, 산꼭대기에 서면 눈 아래로 비와(琵琶) 호수를 오가는 흰 돛단배가 조그만 벌레의 날개와 같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산꼭대기의 성새(城塞)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생이 다할 때까지 그녀는 이 성과 이곳의 풍경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꼬마숙녀기는 슬픔이 많았다. 철이 들었을 때는 성과 산이 적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산허리까지 차오른 적의 깃발과 인마(人馬) 속에서 꼬마숙녀기를 보내며, 매일 총소리를 들었으며 그 총소리 아래서의 생활은 아득할 정도로 길었다. 1570 7월부터 1573 9월까지 만 3년하고 2개월이나 이어졌다.

 

 - 적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 히데요시(木下 藤吉 秀吉)

 라고 유모 후에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 – 의 입에서 나오는 증오가 담긴 이름을 계속 들어왔다. 정확하게 하자면 적의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라고 말해야만 옳았다. 그러나 유모는 그 이름에 삼감이 있었다. 오다 가문은 꼬마숙녀의 모친 오이치()의 친정으로, 노부나가는 오이치의 오빠이기에 이 꼬마숙녀에게 있어서는 외삼촌이었다.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는 그의 부하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토우키치로우라는 인물은 이 아자이 씨()의 오다니 성() 공격을 위한, 오다 가문에 있어서의 담당관이었다. 그 이름을 증오하면 지장이 없었다.

 

 꼬마숙녀는 평생 기억하고 있었다. 성의 남측 벽에 있는 활을 쏘는 구멍()을 통해 내려다 보면, 멀리 아래로 벌판을 사이에 두고 언덕이 있고 거기에 적인 토우키치로우의 본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민들은 그 언덕을 요코야마(山) 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완만한 경사의 고분(古墳)이었다. 고분에는 견고한 성이 세워져 있어 낮에는 수많은 깃발이 나부꼈고, 밤에는 무수한 화톳불이 춤을 추었다. 그것이 32개월 동안의 풍경이었으며, 거기에서 아시가루()부터 벼락출세했다는 오다 가문의 부하장수 토우키치로우가 핍박하는 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저 남자를 아시옵니까?”

 

 하고 모친인 오이치에게 물어보았다. 오이치는 알고 있을 터였다. 오이치가 이 아자이 가문에 시집올 즈음 이미 히데요시는 상당한 지위에 있었고, 실제로 그녀가 기후(岐阜)에서 오우미(近江)로 시집가는 행렬의 관리관 중 한 명이었다. 애교 있는 미소와 날카로운 눈, 밝고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난쟁이처럼 작고, 얼굴은 막 태어난 미숙아처럼 추했다.

 

 “……………”

 

 오이치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는 것도 싫다 고 할 정도로 세찬 증오심이 날카로운 칼과 같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꼬마숙녀는 모친의 얼굴에 생긴 험악함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낙성의 날이 왔다. 꼬마숙녀에게는 전황에 대해 어떠한 지식도 전해지지 않았으며, 단지 이날 아침 미명에 깨워져 부친 나가마사(長政)와 대면했다. 그 후 모친인 오이치, 유모들, 거기에 두 여동생들과 함께 각각 가마(駕籠)에 태워져 성문을 나왔다.

 -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고 가마 안에서 창을 두들기며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유모는 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오다 가문의 진중으로 옮겨져, 외삼촌이라는 노부나가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노부나가는 갑주를 입지 않고 시원하게 명주로 된 코소데(小袖) 한 벌만을 입고 있었다. 그 옆에 놀랄 만큼 왜소한 무장이 퉁퉁 부은 눈으로 여전히 울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라는 남자는 이 자가 아닐까?’

 하고 후년 어렴풋이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기억으로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들은 오와리(尾張) 키요스(洲)성(城)으로 보내져 거기서 살았다.

 

 참고로 그녀는 그 생애에 있어 적어도 8개 이상의 성에 살았을 것이다. 평생 성에서 성으로 전전했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성(城), 야마시로(山城) 요도(淀)성(城), 사가미(相模) 오다와라(小田原)성(城)을 포위하던 성, 치쿠젠(筑前) 나고야(名護屋) 성(城),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 성(城), 오오사카(大坂) 성(城). …

 

 오와리 키요스 성()에서 생활한 기간도 길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젠 키타노쇼우 성()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그 성의 성주이며, 또한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방면 총사령관(元締)이었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가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성도 함락당한다.


 적은 친가인 오다니 성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토우키치로우였다. 10년 동안 토우키치로우의 신분은 변화하여 그 호칭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로 바뀌어있었다. 이전 오다니 공격 때와 달라져 있던 것은, 그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에치젠에 난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의지로 대군을 일으켜 그 인마(人馬)를 이끌고 키노메토우게(芽峠) 고개를 넘어 에치젠 평야에 난입해서는 키타노쇼우 성을 포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노부나가가 이 세상에 없었다. 이 해의 전년, 쿄우토(京都)의 혼노우(本能)()에서 자신의 부하장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미츠히데는 히데요시의 재빠른 도전에 의해 쓰러졌다. 자연히 오다 정권의 후계자 자리에 히데요시가 앉을 듯한 기세로 이어졌지만, 그러나 노신(老臣) No.1인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서로 반목하고 단교(斷交)하여 결국 북부 오우미(近江)시즈가타케(賤ヶ岳)옛 오다니 성에서 가까운 에서 결전을 벌이기에 이르러서는, 히데요시가 해낸 절묘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군사를 잘 이끌어 카츠이에의 진영은 무너졌고 카츠이에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거성 키타노쇼우(北ノ庄) ()에 도망쳐 들어와 성문을 닫았다. 히데요시는 쉬지 않고 그것을 추적했다. 그 하시바 측의 대군이 성을 포위하였을 때,

 어째서 저 남자는 이러는 것인가?’

 하고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이나 자신의 생활을 부수려는 듯 총을 쏘아 대는 그 남자에게 증오보다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4 24, 밤이 아직 밝기 전 즈음, 성이 무너질 정도로 흔드는 총성이 일제히 일어나,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서 튕겨지듯이 일어나고 곧 쓰러졌다. 유모가 그녀의 포동포동한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는 17살이 되어있었다. 어두웠다. 방에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밤입니까?”

 

 겨우 말을 하였다.

 

 아니옵니다. 좀 있으면 밝아지겠지만, 그러나 아직 밝지는 않사옵니다

 

 하고 유모가 귀에 대고 느릿하게 소곤거렸다. 그렇게 소곤대는 것은 기억의 한 구석에 있었다. 오다니 성이 함락될 때도, 이 유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간도, 그 미칠듯한 총 소리도, 하나하나가 오다니 성에서의 그 때와 닮아있었다.

 그녀가 쓰러진 이 시각에, 이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은 성내의 한곳에 돌입해 있었다. 성 안이 전쟁터가 되었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텐슈(天守)로 이동했다. 이미 이 성주와 그 가족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가 200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양부(養父) –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녀의 망부(亡父) 아자이 나가마사와 농후하게 공통되는 점은, 자신의 마지막에 화려함을 희구하고자 하는 기질에 있었다. 실제로 카츠이에는 그러하였다.

 카츠이에는 적을 향해서, 자신이 자인(自刃)한다는 뜻을 통고했다. 그 후 텐슈의 누상에서 주연(酒宴)을 열었다. 살아남은 무사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신은 검붉은색의 잠옷을 입고 화려하게 춤을 추는 낙성 당할 때의 연회를 작법대로 행한 후, 이어서 적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금부터 텐슈에 불을 질러 자인한다. 그러니 멀리 물러나 있으라

 

 하고 충고하였다. 텐슈에는 20년간 모은 화약이 꽉 차있었다. 불타오르면 여기에 불이 붙고 폭발해서 기둥이건 지붕이건 날려버릴 것이다. 부상 당하지 마라 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텐슈는 굉음과 함께 땅을 울렸고 곧이어 하늘 쪽으로 날라갔다. 양부 카츠이에, 친모 오이치는 30여명의 신하들과 함께 자신들의 시체를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이번에도 더 살게 만들었다. 그녀는 두 여동생들과 함께 카츠이에의 명령으로 적 측으로 보내졌다. 카츠이에는 자살하기 전에, 

 - 이 세 소녀를 구하도록 

 하고 히데요시에게 요구했다. 그 이유는, 

이 세 소녀는 귀하도 아는 바대로 이 카츠이에의 자식이 아니라,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이들일세. 따라서 돌아가신 우다이진(右大臣=노부나가) 님의 조카딸이며, 귀하에게 있어서는 주인댁이다. 보호할 것.
 이라는 것으로, 히데요시는 물론 받아들였다. 이런 점도 오다니 함락 시와 같았으며, 오히려 너무 똑같았다. 이 아명이 챠챠()라는 소녀는 - 꼬마숙녀 때부터 한창 꽃필 나이에 걸쳐, 살아서 지옥의 업화를 경험하였고 더구나 그것도 마치 지옥의 옥졸들이 착각이라도 한 듯이 같은 종류의 지옥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최초의 지옥에서 친아비가 죽었고, 다음 지옥에서 친어미가 죽었다. 항상 그 지옥을 출현시켰던 것은 같은 남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적극성 있다고 평가 받는 남자였다. 그 남자…… 예전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였고, 지금은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라고 불리고 있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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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kun BlogIcon 고어핀드 2008.10.05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정성스레 번역해 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난세가 다 그렇지만, 요도도노의 삶은 정말 기구하기 짝이 없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10.05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아자이때도 히데요시고 시바타때도 히데요시군요..-_-; 충분히 증오할만도 하겠다 싶습니다마는, 그렇다고는 해도 뭐 히데요시 말년에는 충분히 그 노망난 영감을 이용했으니 피장파장이려나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10.06 0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년에 시작하는 nhk 대하드라마에서 요도기미를 후카다 쿄코가 연기한다더군요.
    일단 보기전 느낌은 뭔가 영 매치가 안되는 느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10.06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어핀드님//좋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亂世라 불리나 봅니다.

    다메엣찌님//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이용했다면 다메엣찌님 말씀마따나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 머리 속의 요도도노는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움직인 것 같지는 않더군요.

    zardizm님//오~ 그렇습니까??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후카?을 일본 여성 중에서 가장 이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기대감 만빵입니다. 우헤헤~ (어울리지 않나요? 맹하고 어눌한 말투하며... 거기다 통통하기까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10.07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덕진 후카다 쿄코 -_-)b 기대되는군요~!!!

五.

 이에야스[家康]는 그 흐름을 조종했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것은 히데야스[秀康]의 존재였다.
 - 그 분은 순진하시다.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잘 보좌하라.
 며 히데야스의 가로(家老)들을 불러 이에야스는 훈계하였다. 히데야스가 순진하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문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그 중 어느 한 쪽 진영에 옹립되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에야스의 숨겨두었던 의도가 무너질 수 가능성이 높았다.

 파벌은 두 개였다.
 이에야스를 정권 찬탈의 의도를 가진 야심가로 규탄하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秀吉)의 정무 보좌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그 무리들로, 그들은 히데요리[秀頼]의 생모 요도도노[淀殿]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두고 있었다.
 이 이시다 파벌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야전파(野戰派)라고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그의 친구들로, 그 파벌의 중심에는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자리잡고 있다.

 두 파벌 다 히데요시가 키운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요토미 정권이 확립되면서부터 이시다파는 문관(文官)으로 정권의 중추에 있었고, 카토우파는 야전 종사자가 되어 중추에서 밀려났다. 카토우 파는 자신들을 일이 있을 때마다 곤경에 빠뜨려온 것이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파였다고 보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 이제는 전하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시다 놈들을 죽이고 그 고기를 씹어 보자.
 고 울부짖으며 각각 오오사카[大坂)]의 자신들 저택을 무장하고, 공공연히 대립하며, 시가전까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內紛)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토요토미 가문 필두 대로(大老)로서 두 파벌을 중재하였고, 때로는 은근히 부추겼다. 이에야스가 은밀히 밀고 있었던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와 카토우 키요마사의 파벌이었다. 이에야스는 카토우파에 꼽사리 껴, 이 파벌이 이시다파를 향해서 뿜어대고 있는 증오의 에너지에 풀무질하고 두들겨 단단히 해서 만든 칼로 정권 교체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칸토우 군단(関東 軍團)을 가지고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들끼리 내부에서 싸우는 형식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 격화(激化)의 마지막 단계에 일대 결전을 연출하여, 그제서야 처음으로 쿠데타를 전개한다 – 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대로 이에야스는 착실히 돌을 깔았으며, 그렇게 깐 돌 한수 한수가 재미있을 정도로 성공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냥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버릴 지 알 수가 없다’
 고 이에야스가 생각한 것은 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히데야스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면 오오사카로 내려가 히데요리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를 따르게 되면 자연히 이시다파의 진영에 들어갈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식인 히데야스에게도 손을 썼다. 1599년 3월, 이에야스는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불러,

 “나를 경호해 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사정을 설명했다. 정세가 악화되어 이시다 측은 이에야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끊임없이 밀모를 꾸미고 있는 듯하다 – 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며 히데야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쿄우토[京都] 근방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병사가 소수밖에 없었다. 내 몸 지키기가 힘들구나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적자(嫡子)인 히데타다[秀忠]는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돌아가 에도[江戸]에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토쿠가와의 군사가 적다. 츄우나곤[中納言=히데타다]을 대신하여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는 그렇게 부탁함으로써 히데야스의 의협심을 자극시키고자 하였다. 바라던 대로 히데야스는 감격했다. 이 진짜 아비에게 이렇게 부탁 받은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히데야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나오려 했다.

 “불초한 소생이지만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고 히데야스는 거의 외치듯이 소리를 질렀으며, 이때 처음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의 일상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즉 이에야스의 저택, 숙소에 항상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외출도 못 하였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한층 맘이 놓이는군’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새장 속에만 넣어두면, 다른 야심가의 희생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599년 윤3월 3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에서 중재 세력이었던, 대로 차석(大老 次席)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오오사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죽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은 그로 인해 폭동의 자유를 얻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그 3일 뒤의 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오사카에서 죽이고자 시가전을 계획하였다. 미츠나리는 사전에 알아차리고, 홀홀 단신으로 후시미[伏見]로 도망쳤다. 카토우들은 그를 쫓았다.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였다.

 미츠나리는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자 대담하게도 후시미의 이에야스 저택으로 도망 와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쓰러뜨려 마땅한 숙적이었으며, 더구나 쫓아오는 일곱 장수들의 숨겨진 보호자였고, 그 장막 건너편의 수괴였다. 물론 그것을 미츠나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 숨겨진 사정을 반대로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죽일 리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보호하고 죽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부하들은,
 - 이 기회에 미츠나리를 죽이십시오.
 하고 헌책하는 자도 많았다. 계속 탄핵을 받고 있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일곱 장수의 호의를 얻는 편이 좋다 – 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들을 생각도 안 했다. 단 한 사람, 모신(謀臣)인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만은 이에야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를 보호하고 살려두어, 그의 거성(居城)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풀어준다. 후일 그는 반드시 책모(策謀)하고 다이묘우들을 긁어 모아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한 병사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야말로 쿠데타가 완성될 때이며, 그때까지는 미츠나리를 살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야스는 후시미까지 쫓아온 일곱 장수를 설득했다.

 “돌아가신 전하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또한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후시미에서 일을 낸다면 불충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오. 만약 그래도 여전히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하신다면, 이 이에야스가 상대를 하겠는데, 어떠신지?”

 하고 반 공갈을 하였다. 모두 이에야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미츠나리를 자택에서 머물게 하고, 다음날 아침 그를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의 배려는 세심했다.

 “소장(少将=히데야스), 당신이 세타[瀬田]의 다리까지 보내드리시게”

 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불러 미츠나리의 경호를 명했다. 히데야스는 알았다고 하며 만약을 위해 질문을 하였다.

 “만약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라”

 하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한마디가 히데야스를 흥분시켰다. 이렇게까지 뛰어난 기상과 재기(才氣)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데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도 종군하였으며, 조선침략에 있어서도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까지 따라는 갔었다. 그러나 야전에 나가지 않았다. 히데야스의 기량은 여태까지 실전에서 시험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안심하고 싸우라고 하였다. 전투가 일어날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야스가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 키요마사들이 히데야스의 경호대를 공격하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할 리가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히데야스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 도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미츠나리와 말머리를 함께하며 다이고 가도[醍醐 街道]를 나아가며, 반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미츠나리를 염려하며 말했다.

 “목숨을 바꿔서라도 공을 지키겠소이다”

 하고 히데야스는 볼에 젊디젊은 피로 붉게 물들이게 하며 말했다. 미츠나리는 이 말을 오해했다.
 ‘역시 이 분은 다르다. 히데요리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이에야스나 그 외의 사람들과는 별개의 감정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가지고 있다. 아군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고 자신의 의도에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곧이어 세타의 물길에 걸려있는 세타 대교[瀬田 大橋]의 서편까지 왔다. 동쪽으로 이 다리를 건너면
오우미[近江] 평야가 펼쳐져 있다. 북 오우미의 산야는 미츠나리의 영지(領地)였다.

 “그럼 이제는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히데야스가 정중하게 말했다. 미츠나리도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마사무네[正宗][각주:1]의 단도(短刀)를 히데야스에게 선물하였다. 이 즈음 미츠나리가 소유하고 있던 이 단도의 명성은 온 천하에 울리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선물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감사와 호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단도는 후세, 이시다 마사무네[石田正宗]라 칭해지며 전해 내려오고 있다.

  1. 여기서 ‘마사무네’는 칼 상표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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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생부터 불행하더니 자신의 힘을 펼칠 수도 없고 친부한테는 계속 이용당하네요
    시로유메님 말씀처럼 역시 인생은 운!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행한 히데야스를, 시바 선생은 더욱 극대화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여기서 이시다가 유우키 히데야스에게 칼을 주는군요..

    더불어, 무려 나츠코미때(;) 상경하시어 오덕질 할 시간 쪼개시어 기간한청 이시다 마사무네 공개판을 찍어오신 이름 없는 일본분께 박수를(ㅎㄷㄷ)

    どうやら刀の受け傷らしく、ここから「石田切込正宗」の号がついたらしいです。
    切込라게 칼에 난 금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러한 이명이 있군요. 덕택에 국보는 아니고 중요문화재라지만, 왠지 몇몇 기스가 더 칼로서의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봐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나츠코니...라는 것이 오덕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보군요. 정확하게는 어떤 것인가요?
    검색해 보아도, 그냥 참가했다는 글들만 보여서...

    칼은 칼등으로 막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칼 등에 상처난 것 또한 좋더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름 코믹마켓(만화 동인지등을 파는 큰 시장..이랄까나요)이요. 그걸 줄여서 나츠코미(夏コミ)라고 하는 듯 하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6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게 줄인 것이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六.

 윤
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각주: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南無妙法蓮華)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각주:2] 길이의 봉()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
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政所],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3], 코우조우스()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각주: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각주: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각주: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각주: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히데요리[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에 결혼은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할 것.
이라는 사사로이 멋대로 다이묘우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제를 남겼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혼자 무시한다고 하여도, 이에야스에게서 딸을 얻는 다른 다이묘우가 이를 꺼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여 이 일건에 대해서 키타노만도코로와 상담하기로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허락을 얻는다면 그녀를 따르는 또는 그녀와 친한 여러 다이묘우들은 부담 없이 이에야스와 인척관계를 맺을 것이다.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 府][각주: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각주: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각주: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津]야마토[大和] 근방에 성()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칸논 사[音寺]의 성주이며 승()이기도 한 센슌(詮舜][각주: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각주: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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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
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 9 6.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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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의 재기(才氣) 때문이다.
는 식의 말을 하였는데, 다소 빈정대는 듯하다. 그녀는 히데요시와 함께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칼을 꺼내어 그 뿌리를 끊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는 호담함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1.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2. 약 240cm [본문으로]
  3.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4.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6.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7.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8.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10.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11.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12.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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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아들네미 같았던 동군 소속 무장 모두보다 더 오래살았군요(;;;) 역시 여성의 여생이란 생각할게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있어서 요도도노 모자의 여생따위,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뭐 사실 그들 모자야 세키가하라 이후의 삶은 덤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네네도 장수했군요)
    다음 편도 벌써 기대가 되는데, 주인공 [야마토 다이나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빈약한 지식으로 추측해보면... 히데요시 동생 히데나가인가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길주는 함경도의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도 명명법이 목사-부였는지 병사-부였는지가 있는 대도시 두개의 이름을 따는 것인데요.(전라도는 전주랑 나주, 경상도는 경주랑 상주, 충청도는 충주랑 청조 같은 식이죠. 경기도는 일본의 긴키랑 같은 것이므로 예외 입니다만) 세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가 함길도 절제사 였습니다. 길주는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상당히 큰 도시로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 였다는 것이지요. 아마 세조때 였는지 예종때 였는지 함경도로 바뀌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편에서 전개가 갑자기 급하게 흘러간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네요.
    2대로 단절된 야마토 고리야마 도요토미 가문의 초대 도슈로 든든한 형의 오른팔이라, 기대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5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키타노만도코로 편 완결이네요 야마토다이나곤도 기대됩니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있는 학생이지만 아직 실력이 빈약한 관계로(고어, 고어체는 정말 쥐약-_-) 책을 구해도 읽을 수 없으니 이렇게 발해지랑님의 번역하신 것을 기다리고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ak81 BlogIcon 파악 2008.04.15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음...말씀해 주신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확실히 역사상의 결과만 보면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어떻게든 존재 의의를 찾아 주고 싶군요...또한 나름 살려고 발버둥 쳤던 인물들의 생을 덤으로 하기엔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뭐 조선침략 원흉의 핏줄이니 인과응보이기도 하지만요 ^^

    맹꽁서당님//재미있게 보셨으니 다행입니다. 밑에 신사본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야마토 다이나곤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이옵죠.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5744758 <- 전에 졸역했던 것입니다.

    지나가던님//드디어 저에게도 오셨군요. 그 유명한 '지나가던'님.... ^^
    실례했습니다. 좋은 지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신사본론님//이책은 챕터 별로 그 인물에 대한 것만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것에 더하여 과감한 삭제가 시바 선생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많이 읽어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요)
    기대는 하지 마십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

    박선생님//역시....기대는 마십시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 취향으로 재미있던 것 뿐이니까요
    아물러....고어 관련은 저도.... --;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연이 닿은 이웃이신 shotokanfist님이 그쪽으로 굉장하셔서 든든하답니다.
    박선생님도 함 그쪽 방문을 권하고 싶군요.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파악님//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보람을 느끼는군요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로 하시는 거라기엔 매끄러운 번역인듯 합니다^^
    shotokanfist님 블로그에도 방문 해봤는데 많은 자료들이 있네요(후한서부터 만엽집의 시가까지;)
    구경해보고나니 한문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참 배워야할게 많네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취미로 하다 보니 그렇게 까지 깊게 안 들어가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