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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삼 년이 지났다.

 챠챠(茶々)는 20살이 되었다.

 “아자이 님(浅井殿)의 아씨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어느 날 밤에 히데요시에게 물은 것은 놀랍게도 그의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였다.

 “이미 시집갈 곳은 정하셨겠죠?”

 “아직이다”

 히데요시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이요?”

 “그렇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스무 살이옵니다”

 말할 것까지도 없사옵니다만 -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거듭 말했다.

 “보통 15살이면 시집을 갑니다. 20살이면 좋은 날이 다 가 정실이 먼저 죽은 곳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나이라고 할 수 있죠. 소중한 분을 맡고 계시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말한 것은 성안의 소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존귀한 핏줄이며 저렇게 미인인데도 – 하고 소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결혼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는 뭐랄까 그 거시기 한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필시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호색은 천하에 유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모이면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로 쑤군거렸다. 예를 들어 성안의 소문에 따르면 –

히데요시님은 옛날부터 챠챠 님의 모친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을 짝사랑하고 계셨었다. 아자이 씨(氏) 멸망 후 오이치 마님께서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돌아오셨을 때도, 제발~제발~하면서 돌아가신 노부나가 님께 매달려서는, 제 부인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고 부탁하였지만 정작 오이치 님께선 그 분을 싫어하여 우연히 정실이 돌아가셔 홀몸이셨던 시바타(柴田)님께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시바타 공격은 사랑의 복수이죠. 그 증거로 히데요시님은 좀처럼 적을 죽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시바타 님만은 용서하지 않고 텐슈각(天守閣)을 아예 재로 만드셨잖아요.

 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오이치가 아직 결혼하기 전엔 짝사랑하고자 하여도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오이치가 과부가 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그녀를 부인으로 하고 싶다며 울며 매달렸다고 하지만 히데요시에게는 비루한 신분일 때부터 처 네네(寧々) –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으면서도 이 조강지처를 유난히도 존중하며 둘도 없는 상담 상대로 하였고 겸해서 조심하는데 있어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처를 버리고 오이치를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우선 이 남자에 한해서 있을 수 없었다. 참고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공격하여 죽였을 때는,

 “카츠이에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몇 번이나 부하들에게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카츠이에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 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 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에게 놓여진 조건이 카츠이에를 죽여버렸다. 오다 정권의 필두가로를 이 세상에 살려두면 히데요시 정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원한을 몸 안에 저장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원한, 복수라는 에너지가 이 인물의 성정에서는 절대 끓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처음으로 성숙해진 챠챠를 보았을 때 이렇게 오이치님과 똑 빼 닮을 수 있을까? 하고 틀림없이 피가 끓었다. 오이치를 짝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고 하여도, 오이치를 이 세상에서 미모가 제일인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깊이 동경했었던 적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을 터이며 오이치는 그런 존재였다. 오이치는 하늘나라 사람이었다. 히데요시는 거기까지 손을 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현실인식 감각이 너무 예리했던 그 당시의 히데요시는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할 정도 별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치젠 이치죠우다니의 단계에서 달랐다.

 ‘이 아이는 내 날개 품 속에 있다’

 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이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녀와 쏙 빼 닮은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떨어져 자신의 날개 품에서 보호받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품어주마 하고 몰래 결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기분을 집요하게 윤색하고 왜곡하면 소문과 같은 이야기처럼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 삼 년 챠챠를 조용히 그 생활 속에서 살게 해 두었다.

 - 조용히……

 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챠챠에 대한 방침이며 머지않아 챠챠를 얻는 길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성전과도 닮아있었다.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도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도 히데요시는 결코 무리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장기 포위전 형태를 취하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로를 끊어 때로는 수공을 하여, 어쨌든 농성하는 병사들의 전의를 잃게 하는 전술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런 감각으로 챠챠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챠챠의 침실에 함부로 뛰어드는 식의 어리석음을 이 남자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챠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긴 시간이 챠챠가 가지고 있는 옛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빈번한… 그러나 담백하고 온정에 넘치는 접촉이 히데요시에 대한 챠챠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요 삼 년 궁중의례를 위해서 쿄우(京)에 올라와서 전쟁 때문에 몇 번이나 스즈카토우게(鈴鹿峠) 고개를 넘어[각주:1]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렇게 간 곳곳마다 반드시 챠챠에게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며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자연스레 챠챠도 예의상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챠챠에게 있어서 요 삼 년은 일분일초가 히데요시의 온정 속에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네네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거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시녀들에게서도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있었다. 편지 왕복 등도 챠챠의 시녀가 남들에게 흘렸기 때문에 네네의 귀까지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을 계속 하던 차에 몇 일전 오다 우라쿠(織田 有楽)가 차(茶)의 자리에서,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열심이더군요”

 라는 것을 네네에게 뜬금없이 말한 것이다. 우라쿠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네의 현명함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우미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오와리 파벌(尾張衆)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일 것이다. 오와리 파벌은 이 네네에게 옹호 받고 있다고 세간에서는 보고 있었다. 오와리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나 무장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면 반드시 네네에게 울며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 대한 중재를 부탁했다. 네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네에게 그 이상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성안의 소문은 달랐다. 오와리 파벌이라는 이 오오사카 성에서 가장 큰 관료, 무신 세력의 중심에 네네가 있다고 보고 있어, 네네의 존재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선명하게 정치적 자력(磁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네도 시녀의 입으로 그러한 풍문은 듣고 있었다.

 “오우미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오와리에 태어나고 싶었다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외였다. 오우미 파벌의 대다수는 이 네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며 부탁하러도 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극소수의 오우미 사람만이 네네와 접촉하고 있었다. 서 오우미 출신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나 비와고(琵琶湖) 호수 동쪽 중부 출신인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이 그들로, 그들은 오히려 같은 지역인 오우미 사람들과는 소원하며 오와리 파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참고로 오와리 파벌의 대표적 인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일 것이다. 그 외에 젊은 축으로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다소 나이가 있는 자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등이 있으며, 모두 초창기의 히데요시와 함께 전쟁터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성장한 역전의 무장들이었다. 오와리 파벌의 특색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 있었다.

 이 점 오우미 파벌은 관리에 뛰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는 거의 ‘희대의’라고 붙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 관료로, 미츠나리 등은 거대하게 성장한 히데요시의 재산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각종 장부를 발명했다. 천하 재정을 위한 장부부터 부엌의 자잘한 출납장에 이르기까지 장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하위 관료들을 지휘하였고 관리하였다. 그들 오우미 파벌의 관료가 없으면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고, 직할지를 다스릴 수 없어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 이 신정권의 중추에는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의 걱정은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만약 결속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라쿠는 네네에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조심하시길, 만약 그들이 옛 주인격인 아자이 님(浅井殿=챠챠(茶々))을 옹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라기보다 좀더 대놓고 말하면,

- 그들은 아자이 님께서 측실이 되신다면……

 라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예 까놓고 말하면 그들 오우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1. 교통의 요지로 스즈카 산맥 중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 이로부터 동쪽을 東国이라 일컬었다. 쿄우토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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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이 일행이 에치젠(越前)을 떠나 오오사카(大坂)에 들어섰을 땐 이미 히데요시가 각별한 건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그 건축 완성의 빠름으로 추측하건데,

 “아씨를 만나기 전부터 오오사카에 부하를 보내어 지시해 놓으셨나 봅니다”

 하고 유모는 또다시 히데요시(秀吉)를 칭찬하였다. 챠챠(茶々)는 여태껏 이렇게 훌륭한 건물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만족하였다. 유모는 말했다.

 “히데요시님이 얼마나 마음씀씀이가 좋은 분이신가 하면, 망부이신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님, 망모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의 기일(忌日)에는 스님을 불러 재를 올리라고 일부러 말씀해 주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의 이상인 것이옵니다.”

 하고 유모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으로,

 “아자이님 일족의 여성들을 불러도 괜찮네”

 라고도 히데요시는 말해주었다. 노부나가(信長) 시대의 아자이 가문은 천하의 대역죄인 이었다. 노부나가는 다년간 악전고투하며 아자이 가문을 멸하자마자, 자신의 매제인 나가마사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금가루를 입혀서 그것을 잔으로 해서는 술을 마셨고 부하들에게도 파도타기를 시켰다. 그럴 정도로 굉장히 증오하였다. 그의 일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 중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금제(禁制)를 풀어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 능력에 따라서는 거두어들이겠다.

 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옵니까?”

 유모는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치고는 평소 신앙하는 아타고(愛宕)의 승군지장(勝軍地藏) 쪽을 향해서 감사하였고, 챠챠에게도,

 “아씨 기뻐하십시오. 이리 되어야만 가문의 영령들 한 분 한 분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이리 기쁠 수가”

 하고 말했다. 하지만, 챠챠는 그다지 감동도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끄덕였을 뿐이었다. 딴 뜻이나 반감이 있어서 무감동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문의 영령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유모와 같이 박수를 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챠챠는 항상 이러했으며 항상 말이 없었다. 이런 말없음이 챠챠라는 소녀를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마음이 굴절된, 상대하기 어려운 소녀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유모조차 이 소녀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애태우는 일이 많았다.

 이 히데요시의 허가로 인해, 여기저기 숨어있던 아자이 가문의 일족들이 기어 나왔다. 낙성 후 타오 모에몬(田尾 茂右衛門)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있던 아자이 마사타카(浅井 政高), 거기에 아자이 오오이노스케(浅井 大炊助), 더욱이 아자이 나가마사 첩의 자식인 아자이 이요리(浅井 井頼)라는 자까지 나타났다. 챠챠에게 있어서는 배다른 동생이지만, 챠챠는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어~ 아자이의 핏줄들 왔는가? 반갑구먼. 모두 미노노카미(美濃守=히데나가(秀長))의 휘하로 들어가시게”

 라며 히데요시는 그렇게 조치해주었다.

 챠챠들은 오오사카 성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 주인이시옵니다.
 라는 히데요시의 챠챠들에 대한 존경 – 어느 정도 히데요시다운 과장이 들어있기는 하더라도 그 뜻이 성안 구석구석 수만 명의 남녀들에게까지 철저히 지켜져, 이 떠돌이 자매들로서는 결코 살기 힘든 장소는 아니었다. 거기에 챠챠나 동생들과 그 시녀들이 오오사카 성(城)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성안에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들이나 그 방계(傍系), 혹은 아자이 가문과 연이 있던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님의 직속 신하 10명중 3명은 오우미 사람이 아닐까요?”

 하고 유모도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이 망하면서부터 노부나가에게 아자이 가문의 영토 – 북 오우미(近江)의 3군(郡) 중 20만석을 얻어 처음으로 오다(織田) 가문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로 출세하였다. 오다니(小谷)성(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야 했지만 산성(山城)이라는 불편함도 있고 영내(領內)의 인심을 새로이 한다는 이유도 있어, 호숫가에 새로이 성을 쌓아 ‘나가하마(長浜)성(城)’이라 이름 지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20만석이라는 갑작스러운 신분에 필요한 만큼의 군용(軍容)을 갖추기 위해서 사졸(士卒)을 대량으로 모집하였고, 모집에 응한 사람들 대부분이 영내(領內)의 사람들이었기에 자연히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나 백성이 많았다.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다이묘우(大名) 급으로는 미야베 젠쇼우보우 케이쥰(宮部 善祥坊 継潤) 등이 있고, 실력 있는 야전가(野戰家)로서는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있으며, 관료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로서는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조금 신분은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을 보좌하는데 있어서는 천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그 외에 오우미 출신의 소규모 다이묘우(大名)로서는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 키무라 히타치노스케 시게모토(木村 常陸介 重茲) 등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있었다. 중급 이하의 부하에 대해서는 세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다만 통틀어 오우미(近江)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자이 씨(氏)와 연이 깊은 것은 북부 3군(郡)만으로, 중앙부는 이미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하여 흔적도 없는 롯카쿠(六角)씨(氏)의 옛 영토였고, 남부의 코우가(甲賀) 지방은 예부터 지역 무사들의 자립지역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와(琵琶) 호수 서안 산악지대의 쿠츠키(朽木)씨(氏) 등은 그다지 아자이 씨(氏)와 연이 없었다. 하지만 오우미(近江) 중에서도 성안에 가장 많은 것은 북부 오우미(近江)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 오다니(小谷=아자이 씨(氏))의 아씨께서 계시다.
 
라며 챠챠들이 있는 건물에 그리움, 반가움에 더해 각별한 경의를 치렀고, 옛 주인에 대하는 예를 취했다. 그 중에서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떤 일이건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꼭 말씀해 주시길”

 하고 유모에게 몇 번이나 힘주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향당의식(鄕黨意識)은 이 챠챠가 사는 건물을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오와리(尾張)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고 유모는 챠챠에게 일러주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출신이 오와리(尾張)였기 때문에 이 성안에서 기세가 등등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억양이 억센 오와리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성(城)시대부터 섬긴 오우미(近江) 사람들은 어떤 일이건 결속하려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어 그 마음의 오갈 데를 챠챠들에게 향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챠챠 모친의 친정인 오다 가문 사람들 중 몇 명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었다. 노부히데(信秀[각주:1])의 12번째 아들인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도 그러하여, 성안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중개(仲介)하거나 차(茶) 놀이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도 챠챠의 외숙부이기에,

 “뭐 불편은 없느냐?”

 등등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 주었던 것이다. 단지 우라쿠는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또한 다인(茶人)이기에 성안의 뒷세계에도 정통하여, 일부의 오우미(近江) 사람들처럼 자신의 조카들에게 음습한 정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를 빨리 시집 보내는 편이 좋을 터인데”

 하고 은밀히 친구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斎)에게만은 말하였다. 우라쿠 나름의 이 신흥정권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히데요시다. 그는 저 아이에게 빠굴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만약 챠챠의 방에 히데요시가 들락날락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생길 것이다. 오우미 사람들이 측실인(아직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챠챠를 중심으로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 정권에는 오우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거기에 각각 실력을 가졌으며 또한 세력도 있었다. 그들이 챠챠라는 여성과 결속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오우미 사람들에게 농단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일소에 부쳤다. 유우사이만큼이나 그런 감각에 날카로운 인물조차, 우라쿠의 걱정이 너무 기우인 생각이라고 여겼다.

  1.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노부나가의 부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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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그 남자 히데요시(秀吉)의 진영으로 보내졌다고는 하여도, 본진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쪽에 있는 이치죠우다니()의 산 속이었다. 예전 이곳은 에치젠(越前)의 주인이었던 아사쿠라(朝倉)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산림 속에 주춧돌만 남아있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삼나무들이 많은 이 골짜기의 습도와 옛 성터의 한적한 분위기가 세 소녀의 신경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줄 것이라는 히데요시의 마음씀씀이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된 것인데, 히데요시라는 인물은 그러한 마음씀씀이가 후한때로는 너무 후하기까지 한 남자인 것 같았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인지 곧바로 그녀들과 만나지 않았다. 키타노쇼우(北ノ庄)성(城)을 낙성시킨 후, 카가(加賀)로 진격하여 각지의 성을 항복시키고 노토(能登), 엣츄우(越中)를 굴복시킨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에치젠(越前)으로 돌아왔다. 그 도중 히데요시는 이치죠우다니에 들렸다.

 

 챠챠()님과 만나자

 

 라고 말하였다. 그 만남의 장소는 절이었다. 히데요시는 절의 객관(書院)을 깨끗하게 청소시킨 후 그녀들을 불러서는 자신이 상석에 앉지 않고 자신과 동격의 자리를 주어,

 

 제가 치쿠젠(筑前)이옵니다.”

 

 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투도 평소 덜렁대며 명랑한 인물과는 달리 오래된 종을 울렸을 때와 같은 긴 여음(餘音)을 남겼고, 어조는 극히 자연스럽게 젖어 있었다.

 

 무문(武門)의 길이라고는 하여도 어쩔 수 없이 슈리(修理=카츠이에(勝家))와 다투게 되었으며, 더구나 슈리 무운이 다하여 아씨님들의 모친도 함께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는 졸자 너무 슬퍼 드릴 말씀도 없사옵니다.”

 

 라는 듯한 것을 막힘 없이, 더구나 흘러 넘치는듯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씨님들은 고() 우다이진(右大臣=노부나가(信長))님의 조카이십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졸자에게 있어서 주인이 되십니다. 이제부터는…”

 

 하고 히데요시는 말을 한 박자 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우다이진님을 대신하여 이 치쿠젠(筑前)이 지켜드리겠사옵니다

 

 멋진 말솜씨였다. 노부나가(信長)의 이름을 거론함에 따라 히데요시의 행적과 입장은 모두 정의가 되어버렸다. 예전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공격도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번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성의 경우도 이미 노부나가가 죽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오다(織田) 가문의 후계자를 어느 사람으로 하느냐는 것에 대해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의견이 서로 달라 그것을 이유로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쌍방 [사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다 가문을 위해서] 라는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이름만 이용하면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를 멸한 것도, 시바타 카츠이에를 자살로 몰아넣은 것도 히데요시는 아니다. 정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정의는 꼭 연기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막료들을 뒤돌아보며,

 

 아 아씨님들께서는 내 주인에 해당하시며 또한 불행한 환경에 처해있으시니, 너희들도 그런 것을 마음에 잘 새겨 정성을 다해 모시거라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리며 부하들의 정성을 요구했다. 본심이었다. 히데요시는 언제나 자신의 본심을 남들이 다 볼 수 있게 목의 핏줄처럼 드러내놓고 있는 인물이며 언제나 진심으로, 설령 거짓말을 할 때도 본심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드문 종류의 인물이었다. 성실이라는 것이 일편단심이라는 우둔함이 그에게는 없었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성실도 본심도 그 몸 안에 있는 혈관의 수만큼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죽은 옛 주군을 생각하며 추억할 때는 항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의 충성심을 가졌고,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옛 주군의 정권을 옛 주군의 자식에게 건네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실제로 그 끝없는 야망을 위해 병사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히데요시의 본심인 것이다.

 

 동시에,

 이 아씨를…’

 하고 히데요시는 자기 몸을 욱신거리게 만들 정도로 새하얀 챠챠의 목줄기를 주욱 훑어보며

 품고 심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또한 어김없는 본심으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고()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심과 조금도 모순이 없었다. 오히려 옛 주군에 대한 동경이 이 욕망을 부채질하였다. 히데요시는 재앙이라고 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하며, 취향은 하천(下賤)한 여성이 아닌 귀족이었다. 귀족의 여성이야말로 이 비천(卑賤) 출신의 남자를 정염으로 불태웠다. 귀족이라고 하여도 그냥 귀족이어서는 안 되었다.

 상급 귀족인 쿠교우(公卿)의 딸은 관심 밖이었다. 쿠교우가 귀족중의 귀족이라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지금까지 인생길로 보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가귀족(武家貴族)이 아니면 안 되었다. 때문이 이미 히데요시는 쿄우고쿠(京極) 가문 출신의 여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우키타(宇喜多)()의 후처와도 통하였고, 혼간지(本願寺) 주지(門跡)의 부인과도 몇 번인가 연을 가졌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의 실감 속에서의 귀족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 하건 오다 가문이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웃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다 가문 같은 것은 노부나가의 부친 대가 되어서야 갑자기 오와리(尾張) 반 정도의 주인이 된 신흥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고, 그 선조가 뭐 하던 사람이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원숭이라 불렸던 밑바닥 즈음부터의 주인 가문으로, 오다 가문의 가족들이라고 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구름 위의 사람이었다. 그 가문의 딸들은 그에게 있어서 신과 같이 성스러웠고,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이 아름다웠다. 가령 오다 가문의 여성 한 명이라도 품을 수 있다면 천명의 미녀를 포기하여도 후회가 없어, 이런 마음이 설사 천하고 비열할지라도, 동경이라는 점에서는 옛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 아씨의 모친도 아름다우셨지

 하고 카츠이에와 함께 불타는 키타노쇼우(北ノ庄)()에서 죽은 오이치() 부인을 생각하였다. 오이치는 희대의 미녀라 불릴 정도의 절색으로, 히데요시는 예전 이루지 못할 바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맘속으로 그것을 바랬다. 그 딸이 미모는 조금 떨어질지 모른다고 해도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하고 오다 가문에 대한 동경이 커지면 커질수록 - 언젠가 이 소녀와 이루어 지게 될 이불 속에서의 여러가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당사자인 챠챠는 눈을 내리깔고 히데요시를 한 번 쳐다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남자라고?’

 챠챠는 다소 이외였다. 자기에게 그렇게까지 위해를 계속 가해왔던 인물치고는, 그냥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처럼 천진난만하고, 명랑하게 떠들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로 웃었고,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의 하늘과 같이 맑아, 어딘가 얼이라도 빠진 듯한 남자였다. 이런 것에당혹했다.

 그 남자가 아니다

 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 남자라는 것은, 꼬꼬마 시절 자신의 오다니(小谷)()을 공격해서 무너뜨린 저 요코야마(山)성(城)오다니 성()을 감시하던 성 의 성주 토우키치로우(藤吉)는 이 남자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챠챠는 토오키치로우라는 남자의 별다른 모습을 뿌리박은 채 계속 자라왔건만 이 눈앞의 남자가 아니었다.

 

 저분은 좋은 분이십니다

 

 하고 나중에 말을 꺼낸 것은, 예전 토오키치로우에 대한 별개의 인상을 챠챠에게 계속 주입해 왔었던 유모였다. 유모는 서서히 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변한 듯했다. 이 즈음 태도도 묘하게 밝아져 히데요시에 대한 것을 자주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이야기의 요소요소에 예찬 가득한 형용사가 들어가, 명백히 챠챠가 히데요시를 좋아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는 듯 했다.

 왜 이러지?’

 하고 챠챠는 생각하지 않았다. 챠챠는 이런 점에서 자라온 환경에 있을 법한 둔감함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챠챠가 눈치챈 것은 유모의 의복이 어느새 비싸고 화려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유모는 어느새 자신의 고향 탄바(丹波)의 오오노(大野)에서 자식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유모는 탄바 오오노의 토착 사무라이(地侍)인 오오노 슈리노스케(大野修理亮)의 부인으로, 오다니 성()에 있었을 즈음에는 슈리노스케도 아자이 가문의 신하였지만, 낙성 후 그들은 탄바로 돌아갔었다. 남편은 그 후 병으로 죽었지만, 두 아이들은 무사히 성인이 되어, 장남은 이미 20살이 가까워져서는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탄바의 오오노라는 곳은 미야즈(宮津) 서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었지. 맞어마을 근처에 타케노가와(竹野川)라는 강이 흘러 작은 계속을 만들고 있지

 

 하고 히데요시는 이 유모만 단독으로 불렀을 때 그렇게 그녀의 출신지에 대해 말했다. 히데요시는 탄바 오오노 같은 곳에 대해 몰랐었지만 마침 그 휘하에 있던 탄바의 다이묘우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에게 물어서 미리 지식을 얻어 놓고 있었다. 이에 유모는 감동을 먹었다. 그런 산골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갑자기 친근감이 들었다.

 

 자식은 있는가?”

 

 하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있사옵니다

 

 하고 답하자,

 

 자네의 아이라면 똑똑하겠군. 이쪽으로 데려오시게. 내 친위대(馬廻)에 넣어주고서는 기량을 보아 나중에 높은 위치에 두고서 크게 쓰겠네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고마운 일이

 유모는 이날부터 몸 안의 내장이 바뀌기라도 한 듯이 사람이 변했다. 곧바로 파발꾼(飛脚)을 고향으로 보내었고, 유모의 자식들을 탄바 미야즈 항(港)에서 배로 에치젠(越前) 미쿠니() 에 입항해서는 빨리도 왔다. 히데요시는 약속대로 그 두 형제를 부하로 삼았다.

 챠챠는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 그렇기에 그 눈은 언제나 빈틈없이 깜빡이며, 항상 반짝반짝 하고 괴이한 광채를 머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모의 자식이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그것과 유모의 태도 변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류의 지혜는 어째서인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성이라 할까? 그러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오오사카(大坂) ()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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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히데요시(秀吉)가 남들과 다른 것 중에 하나는, 그가 너무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것에 있을 것이다. 장년일 즈음에는 그것을 자제하였다. 말년에는 자제의 테가 느슨해졌다. 요도도노(淀殿)는 그 시기에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았고, 히데요리()를 낳았다.

 

 이 여성은 오우미(近江) 출신이다. 꼬마숙녀일 즈음 - 7살까지 오우미에서 살았다.

 친가(親家)는 오우미 북부의 지배자였던 아자이()()이다. 거성(居城)은 오다니(小谷)에 있었다.

 오다니 성(城)은 산꼭대기에 있던 성이었다. 뒤로 이어진 산맥은 멀리 호쿠리쿠(北陸)까지 이어졌으며, 동남쪽으로 이부키야마(伊吹山) 이 있고, 산꼭대기에 서면 눈 아래로 비와(琵琶) 호수를 오가는 흰 돛단배가 조그만 벌레의 날개와 같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산꼭대기의 성새(城塞)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생이 다할 때까지 그녀는 이 성과 이곳의 풍경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꼬마숙녀기는 슬픔이 많았다. 철이 들었을 때는 성과 산이 적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산허리까지 차오른 적의 깃발과 인마(人馬) 속에서 꼬마숙녀기를 보내며, 매일 총소리를 들었으며 그 총소리 아래서의 생활은 아득할 정도로 길었다. 1570 7월부터 1573 9월까지 만 3년하고 2개월이나 이어졌다.

 

 - 적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 히데요시(木下 藤吉 秀吉)

 라고 유모 후에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 – 의 입에서 나오는 증오가 담긴 이름을 계속 들어왔다. 정확하게 하자면 적의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라고 말해야만 옳았다. 그러나 유모는 그 이름에 삼감이 있었다. 오다 가문은 꼬마숙녀의 모친 오이치()의 친정으로, 노부나가는 오이치의 오빠이기에 이 꼬마숙녀에게 있어서는 외삼촌이었다.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는 그의 부하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토우키치로우라는 인물은 이 아자이 씨()의 오다니 성() 공격을 위한, 오다 가문에 있어서의 담당관이었다. 그 이름을 증오하면 지장이 없었다.

 

 꼬마숙녀는 평생 기억하고 있었다. 성의 남측 벽에 있는 활을 쏘는 구멍()을 통해 내려다 보면, 멀리 아래로 벌판을 사이에 두고 언덕이 있고 거기에 적인 토우키치로우의 본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민들은 그 언덕을 요코야마(山) 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완만한 경사의 고분(古墳)이었다. 고분에는 견고한 성이 세워져 있어 낮에는 수많은 깃발이 나부꼈고, 밤에는 무수한 화톳불이 춤을 추었다. 그것이 32개월 동안의 풍경이었으며, 거기에서 아시가루()부터 벼락출세했다는 오다 가문의 부하장수 토우키치로우가 핍박하는 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저 남자를 아시옵니까?”

 

 하고 모친인 오이치에게 물어보았다. 오이치는 알고 있을 터였다. 오이치가 이 아자이 가문에 시집올 즈음 이미 히데요시는 상당한 지위에 있었고, 실제로 그녀가 기후(岐阜)에서 오우미(近江)로 시집가는 행렬의 관리관 중 한 명이었다. 애교 있는 미소와 날카로운 눈, 밝고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난쟁이처럼 작고, 얼굴은 막 태어난 미숙아처럼 추했다.

 

 “……………”

 

 오이치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는 것도 싫다 고 할 정도로 세찬 증오심이 날카로운 칼과 같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꼬마숙녀는 모친의 얼굴에 생긴 험악함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낙성의 날이 왔다. 꼬마숙녀에게는 전황에 대해 어떠한 지식도 전해지지 않았으며, 단지 이날 아침 미명에 깨워져 부친 나가마사(長政)와 대면했다. 그 후 모친인 오이치, 유모들, 거기에 두 여동생들과 함께 각각 가마(駕籠)에 태워져 성문을 나왔다.

 -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고 가마 안에서 창을 두들기며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유모는 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오다 가문의 진중으로 옮겨져, 외삼촌이라는 노부나가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노부나가는 갑주를 입지 않고 시원하게 명주로 된 코소데(小袖) 한 벌만을 입고 있었다. 그 옆에 놀랄 만큼 왜소한 무장이 퉁퉁 부은 눈으로 여전히 울고 있었다.

 토우키치로우라는 남자는 이 자가 아닐까?’

 하고 후년 어렴풋이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기억으로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들은 오와리(尾張) 키요스(洲)성(城)으로 보내져 거기서 살았다.

 

 참고로 그녀는 그 생애에 있어 적어도 8개 이상의 성에 살았을 것이다. 평생 성에서 성으로 전전했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성(城), 야마시로(山城) 요도(淀)성(城), 사가미(相模) 오다와라(小田原)성(城)을 포위하던 성, 치쿠젠(筑前) 나고야(名護屋) 성(城),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 성(城), 오오사카(大坂) 성(城). …

 

 오와리 키요스 성()에서 생활한 기간도 길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젠 키타노쇼우 성()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그 성의 성주이며, 또한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방면 총사령관(元締)이었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가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성도 함락당한다.


 적은 친가인 오다니 성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토우키치로우였다. 10년 동안 토우키치로우의 신분은 변화하여 그 호칭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로 바뀌어있었다. 이전 오다니 공격 때와 달라져 있던 것은, 그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에치젠에 난입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의지로 대군을 일으켜 그 인마(人馬)를 이끌고 키노메토우게(芽峠) 고개를 넘어 에치젠 평야에 난입해서는 키타노쇼우 성을 포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노부나가가 이 세상에 없었다. 이 해의 전년, 쿄우토(京都)의 혼노우(本能)()에서 자신의 부하장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미츠히데는 히데요시의 재빠른 도전에 의해 쓰러졌다. 자연히 오다 정권의 후계자 자리에 히데요시가 앉을 듯한 기세로 이어졌지만, 그러나 노신(老臣) No.1인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서로 반목하고 단교(斷交)하여 결국 북부 오우미(近江)시즈가타케(賤ヶ岳)옛 오다니 성에서 가까운 에서 결전을 벌이기에 이르러서는, 히데요시가 해낸 절묘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군사를 잘 이끌어 카츠이에의 진영은 무너졌고 카츠이에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거성 키타노쇼우(北ノ庄) ()에 도망쳐 들어와 성문을 닫았다. 히데요시는 쉬지 않고 그것을 추적했다. 그 하시바 측의 대군이 성을 포위하였을 때,

 어째서 저 남자는 이러는 것인가?’

 하고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이나 자신의 생활을 부수려는 듯 총을 쏘아 대는 그 남자에게 증오보다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4 24, 밤이 아직 밝기 전 즈음, 성이 무너질 정도로 흔드는 총성이 일제히 일어나,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서 튕겨지듯이 일어나고 곧 쓰러졌다. 유모가 그녀의 포동포동한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는 17살이 되어있었다. 어두웠다. 방에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밤입니까?”

 

 겨우 말을 하였다.

 

 아니옵니다. 좀 있으면 밝아지겠지만, 그러나 아직 밝지는 않사옵니다

 

 하고 유모가 귀에 대고 느릿하게 소곤거렸다. 그렇게 소곤대는 것은 기억의 한 구석에 있었다. 오다니 성이 함락될 때도, 이 유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간도, 그 미칠듯한 총 소리도, 하나하나가 오다니 성에서의 그 때와 닮아있었다.

 그녀가 쓰러진 이 시각에, 이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은 성내의 한곳에 돌입해 있었다. 성 안이 전쟁터가 되었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텐슈(天守)로 이동했다. 이미 이 성주와 그 가족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가 200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양부(養父) –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녀의 망부(亡父) 아자이 나가마사와 농후하게 공통되는 점은, 자신의 마지막에 화려함을 희구하고자 하는 기질에 있었다. 실제로 카츠이에는 그러하였다.

 카츠이에는 적을 향해서, 자신이 자인(自刃)한다는 뜻을 통고했다. 그 후 텐슈의 누상에서 주연(酒宴)을 열었다. 살아남은 무사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신은 검붉은색의 잠옷을 입고 화려하게 춤을 추는 낙성 당할 때의 연회를 작법대로 행한 후, 이어서 적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금부터 텐슈에 불을 질러 자인한다. 그러니 멀리 물러나 있으라

 

 하고 충고하였다. 텐슈에는 20년간 모은 화약이 꽉 차있었다. 불타오르면 여기에 불이 붙고 폭발해서 기둥이건 지붕이건 날려버릴 것이다. 부상 당하지 마라 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텐슈는 굉음과 함께 땅을 울렸고 곧이어 하늘 쪽으로 날라갔다. 양부 카츠이에, 친모 오이치는 30여명의 신하들과 함께 자신들의 시체를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이번에도 더 살게 만들었다. 그녀는 두 여동생들과 함께 카츠이에의 명령으로 적 측으로 보내졌다. 카츠이에는 자살하기 전에, 

 - 이 세 소녀를 구하도록 

 하고 히데요시에게 요구했다. 그 이유는, 

이 세 소녀는 귀하도 아는 바대로 이 카츠이에의 자식이 아니라,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이들일세. 따라서 돌아가신 우다이진(右大臣=노부나가) 님의 조카딸이며, 귀하에게 있어서는 주인댁이다. 보호할 것.
 이라는 것으로, 히데요시는 물론 받아들였다. 이런 점도 오다니 함락 시와 같았으며, 오히려 너무 똑같았다. 이 아명이 챠챠()라는 소녀는 - 꼬마숙녀 때부터 한창 꽃필 나이에 걸쳐, 살아서 지옥의 업화를 경험하였고 더구나 그것도 마치 지옥의 옥졸들이 착각이라도 한 듯이 같은 종류의 지옥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최초의 지옥에서 친아비가 죽었고, 다음 지옥에서 친어미가 죽었다. 항상 그 지옥을 출현시켰던 것은 같은 남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적극성 있다고 평가 받는 남자였다. 그 남자…… 예전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였고, 지금은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라고 불리고 있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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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kun BlogIcon 고어핀드 2008.10.05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정성스레 번역해 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난세가 다 그렇지만, 요도도노의 삶은 정말 기구하기 짝이 없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10.05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아자이때도 히데요시고 시바타때도 히데요시군요..-_-; 충분히 증오할만도 하겠다 싶습니다마는, 그렇다고는 해도 뭐 히데요시 말년에는 충분히 그 노망난 영감을 이용했으니 피장파장이려나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10.06 0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년에 시작하는 nhk 대하드라마에서 요도기미를 후카다 쿄코가 연기한다더군요.
    일단 보기전 느낌은 뭔가 영 매치가 안되는 느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10.06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어핀드님//좋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亂世라 불리나 봅니다.

    다메엣찌님//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이용했다면 다메엣찌님 말씀마따나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 머리 속의 요도도노는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움직인 것 같지는 않더군요.

    zardizm님//오~ 그렇습니까??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후카?을 일본 여성 중에서 가장 이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기대감 만빵입니다. 우헤헤~ (어울리지 않나요? 맹하고 어눌한 말투하며... 거기다 통통하기까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10.07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덕진 후카다 쿄코 -_-)b 기대되는군요~!!!

七.

 하치죠우노미야토모히토 친왕[八宮智仁親王]이 가진 히데요시에 대한 추억은 그 정도밖에 없다. 미야[宮]는 너무 어렸다. 히데요시가 지혜를 뽐내며 기운이 넘칠 때의 미야는 꼬꼬마나 소년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 풍부해지기 시작할 즈음의 그 히데요시는 노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하지만 미야의 정신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미야의 마음 속에 있는 히데요시도 그의 사후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듯 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이 시작된 것은 미야가 24살 때이다.
 -
이에야스[家康]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은 궁정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이전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 휘하의 일개 다이묘우[大名] 주제에 단독으로 궁정에 접근하여 금은(金銀) 등을 헌상하였다. 그 꿍꿍이는 장래에 무언가 일으켰을 경우를 상정하여 미리 궁정의 호의를 얻어두기 위함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사이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율법을 어기며 자주 오오사카 정부[大坂公儀]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 감정을 대표해서 일어선 것이 오봉행(五奉行)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로, 이에야스의 죄를 꾸짖고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에야스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천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동서(東西) 어느 쪽에건 속하게 되었다.

 미야의 시학(歌) 스승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탄고[丹後] 타나베 성[城]에 머문 채 이에야스에 속했다. 유우사이는 자기 가문의 생존을 이에야스 측에 걸었다. 도박은 결과로써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궁지로 몰렸다. 왜냐면 서군의 대군단이 이 타나베 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서군의 병사수는 1만 5천이었고, 농성하는 유우사이 측은 불과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우사이의 아들인 타다오키[忠興]가 호소카와 가문의 주력을 이끌고 칸토우[東]에 있었기 때문에 유우사이 아래에 남아있던 병사는 그것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잘 싸웠다.

 “도저히 유우사이는 이길 수 없겠지. 유우사이는 죽을 것이다”

 하고 세간의 누구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유우사이에게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를 경탄케 할 정도의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 이상으로 이 인물에게는 지모(智謀)가 있었다. 이 사지(死地)에서 자신의 목숨을 탈출시키는 한편 세상의 비웃음 받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이 노인은 가지고 있었다.

 하치죠우노미야[八宮]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우사이는 재작년이래 고요우제이[後陽成]와 이 미야를 위해서 옛 시집 전체[古今集全巻]에 걸쳐서 주석을 강의하여 작년에 완료하였다. 제1회는 70여 일을 필요로 했으며, 제2회는 40여 일을 필요로 했다. 그걸로 전부강의한 것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거기에 ‘비전(秘傳)’이라 부름직한 것이었다.
 [
고금전수(古今)]
 
라고 세상에서는 일컫는 것으로, 옛 시집(古今集) 해석의 비전이며 게임에서 말하는 필살기이다. 이것은 문외불출(門外不出)로 만약 유우사이가 전사라도 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우사이의 지모가 노리는 바였다.

 “나의 죽음은 가볍다. 그러나 고금전수(古今)는 중하다. 내가 죽기 전에 그것을 하치죠우노미야에게 물려드려서 후세에 전하고 싶다”

 며 쿄우토[京都]에 있는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 밀사(密使)로서 유우사이의 가신(家臣)이 포위을 돌파하여 하치죠우노미야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미야는 경악했다.
 
곧바로 입궐하여 형인 텐노우[天皇]를 배알하고서는 탄고의 전황을 알리면서 고금전수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유우사이는 황상께 전수해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하며 다소 왜곡하였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전수받는다 하더라도 천하는 신경도 쓰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텐노우[天皇]가 전수를 받는다고 한다면 칙명으로 정전(停戰)을 시킬 수 있고, 칙명이라면 유우사이의 목숨도 떳떳하게 구할 수있게 된다. 유우사이는 미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야라면 그렇게 말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텐노우[天皇]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칙사를 오오사카의 히데요리[秀頼]에게 보내어 탄고 방면의 서군(西軍)에게 정전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 칙사로서 시에 밝은 산죠우니시 다이나곤 사네에다[三西 大納言 実条], 나카노인 츄우나곤 미치카츠[中院 中納言 通勝],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烏丸 頭弁 光広] 등 3명이 내려갔다. 히데요리는 승낙했다. 칙명을 황송해하며 받드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가법이었다.

 현지에 칙사로서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가 임명되어 떠났으며,히데요리에게서는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前田 主膳正 義勝 – 토요토미 가문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아들)] 사자로 임명되었다. 이들보다 한발 앞서 미야의 개인적인 사자로서 가신 오오이시 진스케[大石 甚助]라는 자가 탄고 타나베로 급행하여 양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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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사가 내려오신다.
 
는 뜻을 알리고 또한 유우사이와 만나서는, 미야가 유우사이의 말과는 달리 ‘고금전수’를 자신이 아닌 텐노우[天皇]가 받는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유우사이는 복잡한 연기를 하였다.
 
칙사가 성안으로 들어서자 처음엔 그 정전권고의 칙명을 사양했다. 목숨을 아쉬워하는 것 같이 보여 무도(武道)의 길을 가는 자로서 수치스럽사옵니다 – 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는 한편 칸토우[東]의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이에야스에게도 이에 대한 사정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나중을 위해서 좋지 않았다.
 
설왕설래 끝에 겨우 개성해서는, 그 성을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에게 맡긴다는 명목으로 성을 나왔다. 동시에 포위군도 진을 풀고 떠났다.
 
유우사이는 전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城]으로 몸을 피했고, 곧이어 싸움이 동군(東軍) 측의 승리로 끝나자 우선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했다.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미야에게 ‘고금전수’를 전수하기 위해 하치죠우노미야 저택에 들렸다. 미야는 이 날의 의식을 위해서 일부러 저택 내에 방 하나를 따로 만들어 전수를 받는 곳으로 하였다. 전수의 내용은 특별한 것도 없었다. 옛 시집(古今集) 중 난해한 몇 개소나 구절 등에 대해 하나하나 메모지를 끼워 넣으며 구전(口傳)하는 것으로, 내용보다도 오히려 권위를 신비화시키기 위한 종교의례였다. 미야는 전해 내려오는 작법대로 유우사이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서약서에는 [천지신명에게 맹세컨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음. 만약 어기는일이라도 있을 때는 어떠한 신벌불벌(神罰佛罰)이건 달게 받겠음]이라고 쓰여있었다.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빠심이 있었던 고요우제이[後陽成]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찾아온 이 변화에 실망하여 텐노우[天皇]인 것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퇴위하여 뒤를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그의 관료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 시대의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궁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퇴위는 토쿠가와 가문[川家]에 대한 비꼼과 같은 것이며 그러한 제멋대로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신다는 것은 특히 적절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미야는 한때 히데요시의 유자였던 분으로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황위에 오르시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시대와는 달랐다. 히데요시가 있을때 설치되었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은 어디까지나 궁정본위인 - 궁정의 아래에서 용무를 원활하게 하는 기관이었지만, 이에야스의 치세가 되어 설치된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는 궁정의 감시역[目付]으로, 때로는 검단관(檢斷官)과 같은 위압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 때문에 텐노우[天皇] 이하 여관(女官)에 이르기까지 일상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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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문 것입니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天皇]를 위로하였다. 태양은 히데요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궁정에게 있어서 히데요시의 출현은 태양이 솟아오른 것과 같았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 궁정에는 하루 종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그늘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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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원래부터 토요토미 씨와는 다르옵니다.
 
라고도 미야는 말했다. 미야가 이에야스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모습은 결코 시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시인이었다. 시인이 아니기에 궁정의 고상함과 아름다움, 예술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궁정에 대한 애정도 생길 턱이 없었다.

 그 후 십 년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황위를 유지하였으며 이어서 황위를 세자인 코토히토 친왕[政仁 親王]에게 물려주었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이다. 1615년 이에야스는 소위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陣]’ 을 일으켜, 히데요리를 포위해서는 불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쿄우토[京都]에 사람들을 보내어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봉우리에 있는 히데요시의 묘소(墓所)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그에게 내려진 호칭인 [호우코쿠다이묘우진[大明神]]을 박탈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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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미야는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이에야스는 궁정도 그 활동을 궁궐 안으로 제약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속박했다. [공가법도(公家法度)]가 그것이다.

 미야는 모든 것에 실망했다. 결국 쿄우토를 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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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미야는 카츠라가와 강[桂川] 근처에 오이구경(瓜見)을 하러 간다. 그러다 거기에 살 장소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별장을 만들어 거기에 살고 그러면서 일본 시의 아름다움 속에서 몰두하다 죽고자 하였다.
 
이 미야는 후세에 말하는 ‘카츠라 별궁(桂離宮)을 만들었다. 현재 있는 별궁의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았고 그는 원형만을 만들어 나머지는 늦은 결혼으로 태어난 적자(嫡子) 토모타다친왕[智忠 親王]에 의해 완성되었다.
 
미야가 만든 별장은, 미야의 표현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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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밭의 아담한 찻집[瓜畑のかろき茶屋]
 
이었다. 아담하기는 하였어도 궁정에서 그 아름다움은 평판이 자자하였다. 미야는 이 별장의 설계에 있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일본 시집(古今和歌集)거기에 미야가 좋아한 ‘백씨문집(白氏文集)등에서 발상(發想)하여, 그런 시들의 마음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여름 달이 오이 밭 위로 떠오르는 밤에는 이 별장에 히데요시를 되살려서 초대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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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치세인 1629년에 50살의 나이로 죽었다. 미야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츠케[下野] 닛코우[日光]에 이에야스의 묘소인 토우쇼우 궁[東照宮]을 조영(造營)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후년 사람들은 토우쇼우 궁(宮)에서 볼 수 있는 토쿠가와 가문의 미의식과 쿄우토(京都) 교외에 있는 이 카츠라 별궁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극과 극이라며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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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9.30 0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성을 내어준 것은 모양새가 어찌되었든 무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서 그 아들은 아버지와 대면하는것도 수년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래서야 연기를 한 것도 허사가 되었달지(웃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30 0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에 대해 "와카 한 수 제대로 지을 줄 모르는 놈은 죽어버려"
    라고 '문학소년 미야'는 생각했을지도...^^;
    어느덧 마지막까지 달려오셨네요
    늦어도 좋으니 마지막 편도 부탁드립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9.30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후지타다.ㅋㅋ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30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 보았습니다.
    미야는 히데요리도 좋아했으려나요... 특별히 교류 같은게 없어 보이는듯 하기도 하고...
    음..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시마시고 작업하세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30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박선생님 너무 웃겨요. 문학소년 미야 ㅋ 풍신가의 사람들 마지막은 요도도노와 히데요리 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30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천하로 따지면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쿄-는 미야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랄까..하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군요.
    하긴 정치의 중심이 에도로 넘어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30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왠지 타다오키라면 능히 그랬을 것 같군요 ^^

    박선생님//'죽어버려~!!'라는 장면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공님//섬긴 주군들이 다 멸망하는데도 끝까지 살아 남았으니 [역시]의 칭호를 붙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zardizm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땠을까요.... 히데요리에 대해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히데요시'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상의 미야는 '시(歌)'를 우선시하다 보니, 히데요리의 시를 보아야 그에게 호불호를 느끼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본다충승님//예.... 꽤 두껍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서있습죠.

    다메엣찌님//좀 이야기가 새지만....'風光る'라는 신선조가 중심인 만화에서 히지카타 토시조우가 말하는 것인데...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게 한 다음에 떨어뜨려야 제대로 된 절망을 맛보지'(뭐 대충 이런 뉘앙스)...
    라는 대사가 있습죠...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만나 몇 백년 동안 잊고 있었던 양지를 맛보다,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라는 놈을 곧바로 만나 버로우 할 수 밖에 없었던 쿠게(公家) 측 사람들의 실망은 정말 컷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