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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료우타로우'에 해당되는 글 62건

  1. 2009.03.03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9- (11)
  2. 2009.02.13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8- (8)
  3. 2009.02.02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7- (6)
  4. 2009.01.14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6-
  5. 2009.01.02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5-

九.

 소동은 천하의 소동이 되었다.
 1600년 9월 15일. 미츠나리(
三成)를 주모자로 하는 다이묘우(大名) 연합은 미노(美濃) 세키가하라()로 힘차게 나아가 이에야스(家康)와 거의 다섯 시간에 걸쳐 격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패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천하는 일변했다. 이에야스는 전쟁터에서부터 전투대형을 풀지 않은 채 군세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 오우미(近江)를 거쳐 쿄우(京)에 올랐고 거기서 오오사카(大坂)로 내려가 오오사카성 서쪽 성곽(
西)의 작은 텐슈(小天守)에 들어가 그곳을 임시 정무소로 하였다. 중앙 성곽(本丸)의 텐슈(天守)에는 히데요리(秀頼)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배알하여,

 "무사히 반역의 무리들을 미노 세키가하라에서 토멸하였사옵니다"

 하고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보고하였다.
 히데요리는 상석에서 유모의 시중을 받으며 앉아서는 흰 피부에 볼통통한 얼굴을 조금 들어올리며 이 뚱뚱한 노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말이 끝나자,

 "수고"

 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에야스의 공을 치하하였다. 알현이 있기 조금 전, 노신(老臣)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에게서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가 오거든 이렇게 말씀하시옵소서 – 라는 것을 미리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어린 히데요리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끝나고 어떤 일이 시작되고 있는 지를 몰랐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그대로 오오사카성 서쪽 성곽에 눌러앉아서는 토요토미 가문 대로 겸 히데요리 후견인이라는 자격으로 자신에게 거역했던 세키가하라 패배자들의 영지(領地)를 몰수하여 자신의 편을 들어준 무리들에게 나눠주는데 몰두하였다. 그러는 사이,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히데요시에게(秀吉)에게 그러했듯이 서쪽 성곽의 이에야스에게 출사하였고 쿄우(京)나 사카이()에서도 고급 귀족(公卿), 귀족이나 황가의 피를 잇는 승려(門跡), 상인, 스님 등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축하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성황은 히데요리 모자가 살고 있는 중앙 성곽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이 서쪽 성곽에서의 작업 – 논공행상 – 이 끝나 히데요시 시대의 다이묘우 배치가 전부 바뀌어 이에야스 중심의 편성으로 바꾸었을 즈음이 되자, 이에야스는 더 이상 같은 오오사카성에 있으면서도 중앙 성곽의 히데요리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게 되었다.

 "나이후는 더 이상 어제까지의 나이후가 아니다. 천하의 지배자인 것이다"

 라는 것을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부엌데기에게까지 철저히 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에도(
江戸)로 돌아가기 위해 오오사카(大坂)를 떠날 때도 부하를 히데요리에게 보내었을 뿐으로 자기자신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요?"

 하고 요도도노의 측근, 특히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 등은 이에야스의 돌변한 태도를 비난하였지만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낮아, 다른 시녀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여 요도도노에게만 속삭이고 있었다. 여하튼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후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하나하나를 전부 그 손으로 휘어잡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권위가 소멸되었다.

 처음에 요도도노는 세키가하라의 패전에 대해 둔감하여 단순히 이시다 미츠나리의 무리들이 몰락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이건 무엇보다 이에야스의 책략에 의한 것일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대승을 거두자마자 곧바로 사자(使者)를 오오사카로 급파하여,

 "세키가하라의 일건은 이시다 지부쇼우유우(石田 冶部少輔=미츠나리)의 사욕으로 인한 것이며 히데요리님과 그 어머님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원한 같은 것은 없사옵니다"

 라고 말하였고 그 말 덕분에 오오사카성이 쓸데없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요도도노도 안심하였다.

 "토쿠가와님이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요도도노도 그리 말하였고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성에 입성하자마자 태도를 바꾸어 갑자기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래도 세키가하라의 일건은 이시다 지부쇼우유우 지 혼자서만 짠 계획도 아닌 것 같다. 조사에 따라 만약 중대한 모의가 밝혀진다면 그 아무리 존귀한 분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라는 뜻의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성안에 퍼트렸다. 그 아무리 존귀한 분이라고 하더라도 – 라는 범주에는 물론 히데요리 모자가 들어갈 것이다. 이것에 요도도노는 떨었다. 예전 히데츠구(秀次)와 그 처첩, 자녀들처럼 산죠우(三条) 강변에서 꼬챙이에 꿰여 죽는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요도도노는 이에야스가 마음 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야스에 대해서 일절 비평을 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시녀단들에게 조심케 하였다.

 "오오사카 여자들이 숨 죽이고 있군"

 이에야스는 만족했다.

 "그래야 하기 쉬워지지"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요요도노들이 목을 움츠리고 있는 사이에 서쪽 성곽에서 논공행상 작업을 진행하면서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領地)를 기세 좋게 삭감해 버렸다.
그렇게 깎이고 남은 고(故) 히데요시의 유산이라는 것은 오오사카성 하나와 셋츠(
),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 세 지역()에 흩어진 65만 7400석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히데요리는 일개 다이묘우의 – 그것도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보다도 석고가 낮은 – 위치로 전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도도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 시녀들이 소문을 듣고서 웅성대기 시작한 것은 이에야스가 에도로 떠난 다음부터였다. 그녀들은 어리석게도 그때까지 토요토미 가문의 석고가 그 정도로 되어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럴 리가 없다"

 요도도노는 아직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勝元)를 호출하였다. 카츠모토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무장이며, 히데요시의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시대부터 친위대에 속하여 섬겼고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각주:1]에서는 크게 활약하여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동료 소년들과 함께 적진에 돌입, 그 공은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2])에 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만큼 인정받지 못하여 다이묘우가 되지는 못했다. 카츠모토가 무략가이지도 정략가이지도 않은 것이 그 이유로, 재주는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여 단지 성실함만이 장점으로 비쳐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 히데요시의 말년, 히데요시가 히데요리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키운 가신(家臣)의 존재를 소중히 여김에 따라 1만여석을 주어 약소이기는 하지만 다이묘우로 만들고 [상시 히데요리를 알현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히데요시가 주지 않았던 것은 이미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를 임명하고 있었으며, 정무에 있어서의 대리인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임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토시이에는 세키가하라 이전에 병으로 죽었으며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후 위와 같이 되어 천하의 호령자가 되었다. 어쨌든 토요토미 가문에는 가로(家老)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승리한 뒤 오오사카성에 들어서자 마자 카츠모토를 불러,

 "이치노카미(東市正=카츠모토)님이 히데요리님을 돌보시길"

 하고 히데요리 후견인 겸 토요토미 가문 가로라는 직책에 임명하는 한편 토요토미 가문 직할지에서 땅을 떼어 카츠모토의 녹을 늘려서는 1만 8천석으로 하였다. 단 이에야스는 요도도노와 이 인사(人事)에 대해서 아무런 상담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거의 타인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인물로, 거기에 이에야스가 임명한 가로라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어떤 꿍꿍이가 있는 듯하여 친근함을 가지려고 해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이 카츠모토에게 사정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치노카미. 히데요리님의 영지(領地)는 몇 석인가?"

 본론부터 말했다.

 "글쎄 그러니까 그것이…"

 카츠모토는 망설이는 표정을 보일 수는 없다며 얼굴을 바닥에 부딪힐 기세로 넙죽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문지르며 궁리를 짜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에야스에게서 그에게 일방적으로 통지되어 있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지(領地)에 대한 세금 목록과 토지대장도 정리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사실을 히데요리 모자에게 알려야 하나 어쩌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알게 되면 이 자존심 세고 세간에 대한 지식이 무지한 이 귀부인은 얼마나 미쳐댈 것이며 또한 어떤 사태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어쩌면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르지'
 고 한편으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히데요리는 어렸고 요도도노는 오오사카성 중앙 성곽(
本丸)만을 이 세상 전부로 여기며 시녀들만을 상대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만 있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처해진 상황은 알 필요도 없었으며 가령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히데요리님이 천하의 지배자시다 - 라는 어제 밤 꿈의 흔적을 계속 맛보고 계셔주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카츠모토의 뻔뻔함이라기 보다 무능함과 소심함의 결합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요도도노는 아무래도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카츠모토는 몇 번이나 말을 주저하기는 하였지만 결국 65만 7400석이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말했다.

 처음에 요도도노는 의미불명의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분노였을지 놀람이었을지 엎드리고 있던 카츠모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카츠모토의 귀로 충분히 파고들어왔다.

 "히데요리님을 대신하여 그쪽에게 묻겠습니다. 그쪽은 이에야스의 수하인가? 아니면 이 가문의 가신인가?"

 요도도노의 입장에서 보면 카츠모토는 토요토미 가문을 이에야스에게 팔아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중대한 – 히데요리가 어느새 일개 다이묘우의 위치로 전락해 버린 상태라는 믿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사태 – 에 대해 사전에 상담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하오나"

 하고 카츠모토는 그제서야 목구멍 저 안에서 말을 끄집어 내어, 그것이 전쟁인 것입니다. 요번 패전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조리돌림 끝에 참수. 안코쿠지 에케이(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밀지(密旨)를 내리신 히데요리님의 죄는 불경스럽습니다만 당연 – 이라고 말했을 때 요도도노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막았다.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사옵니다"

 카츠모토는 낭패하였지만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별개의 말을 하였다.

 "이는 준비금이옵니다"

 라고 이 혈색 나쁘고 몸집 작은 인물은 말하였다. '이는'이라는 것은 65만여석을 말하는 것이었다.

 "준비금?"

 "그 단어가 귀에 거슬리시면 히데요리님 양육에 따른 비용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호오~"

 요도도노는 흥미를 느낀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한가?"

 "그렇사옵니다"

 카츠모토는 자신에게 납득시키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65만여석을 히데요리가 성인인 될 때까지의 경비라고 해석하면 너무 많을 정도의 거액인 것이다.

 "나이후가 말하길"

 하고 카츠모토는 말을 이었다. 종전대로 크나큰 직할지를 어린 주군이 가지고 있으면 또다시 제2, 제3의 지부쇼우(미츠나리)가 나타나 천하를 흔들 뿐만 아니라 결국 토요토미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다. 나이후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여 그것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65만여석으로 한 것이다 - 고 말하였다.

 "정말인가?"

 "감히 거짓을 말씀 드리겠습니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크신 다음에는 천하를 히데요리님께 돌려준다는 것을 에도 나이다이진(戸内大臣=이에야스)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군"

 "그렇사옵니다"

 "확실한가?"

 "그렇사옵니다"

 카츠모토는 긍정은 차츰 애매해졌지만 요도도노와 시녀들은 수군거리다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카츠모토의 확답을 가장 믿지 않고 있는 이가 카츠모토 자신이었다.
 '설마 나이후가'
 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카츠모토 자신이 창작하여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 거짓말을 만들 정도의 재주도 이 남자에게는 없었지만 – '나이후의 심중'이라며 천하를 일시적으로 맡고 있겠다는 말은 이에야스의 모신(
謀臣)인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 요도님께서는 귀부인이시기에 흥분시키면 안 되오. 꼭 그렇게 말씀하시길.
 하고 혼다 마사노부는 구두로 지시하였다. 그때 카츠모토는 급히 진지한 얼굴로,

 "그건 정말이시죠?"

 라고 하면서 마사노부의 눈을 응시하였다. 마사노부는 조금 당황한 후 곧 크게 웃으며,

 "무슨 말을 하시나 했더니. 이런~ 이치노카미님까지 왜 이러시오~'

 하며 계속 웃었다. 이 파안대소는, 새삼스레 물을 것까지도 없이 그것이 나이후의 진심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 왜이래 선수끼리, 이제 와서 요상한 것을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 라는 의미인지 카츠모토의 능력으로는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고 또한 그것을 되물을 용기도 없었다. 이런 정도의 인물을 토요토미 가문의 재상으로 만든 것도 이에야스의 책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카츠모토조차 요도도노와 그 시녀단의 무지함에는 동정이 일 정도였다. 의문을 느껴야 할 곳을 잘못 찾고 있는 듯 했다.
 가령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직할지 중 사카이(
)와 하카타(博多)라는 2대 해외무역항을 장악해 버렸다는 것에 있었다. 지금까지 그 두 항구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관세(關稅)라는 막대한 돈이 토요토미 가문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것이 전부 에도(江戸)로 흘러가고 있다. 정말로 이에야스가 히데요리가 성인이 된 후에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으로 반환할 생각이라면 관세를 오오사카성의 금고로 쌓아두며 히데요리 장래를 위해 계속 저축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을 터였다. 그런 것 하나에서도 이에야스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은 헤아려야만 할 것이다.

2007/06/20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카타기리 카츠모토

  1. 1583년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전투.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히데요시는 일본의 패권을 손에 넣게 된다.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대활약하였다고 선전된 일곱명의 무장을 이른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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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03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불쌍한 카타기리 카츠모토군요..(;;)

    개인적으론 우직함 탓에 찾아온 재앙이 가슴아팠습니다만(;;)

    그렇다곤 해도 요도도노는 참.. 아무래도 총명한 외삼촌의 재능을 물려받진 못한 듯 하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난세에 저 무능은 죄악에 가까운 일인데말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3 2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 좋은 때 안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카츠모토는...

      어라~ 만화 꽃의 케이지...에서는
      그 후우마 코타로우(風魔 小太郎)의 카게(影)가 요도도노에게 "훗. 과연 센고쿠의 패왕 노부나가의 피를 잇는 여자군"..하는데 말이죠..(그러고 보니 노부나가의 피를 잇지는 않았군요. 여동생(お市)의 딸이니...어떤 곳에서는 노부나가와 이치가 금단의 사랑을 나누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쵸...난세에 무능은 죄악이죠..사족입니다만 요즘 해외도서를 살 때마다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05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챠챠히메라 불릴 때는 귀엽고 깜찍한 느낌, 요도도노로 불릴 때는 그냥 욕심많은 아줌마의 느낌이 나는군요;;

    그나저나 두집 살림을 차리셨군요! 두 개 모두 잘 운영하시길 바랍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5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감상으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챠챠~ 하면 발랄한 느낌이고, 요도...하면 왠지 쫌...뭐 그렇다고요..

      응원 감사드립니다.(..응원 맞죠? 빈정 아니신거죠!?)
      그냥도 괜찮겠지만 태그 모아둔 곳을 보면 너무 복잡해서요.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06 1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댓글 쓰면서 어투가 좀 이상한가 싶어 수정하려다가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넘어갔었어요. 이모티콘이라도 넣을걸 그랬나봐요 ㅋㅋ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7 1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고맙습니다...라고 하기에는 밋밋해서 저렇게 썼을 뿐입니다.
      (제 원래 말하는 스타일이 그러하옵니다)
      턴오버님이 이상한 점은 아무 것도 없습죠. 오해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3.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08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나이다이진과 나이후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나이후가 나이다이진을 중국식으로 읽은것이라는데 (나이다이진 나이후로 검색하니 발해지랑님 블로그가 나오더군요) 둘을 나눠쓰는 이유 같은게 있나 궁금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9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함...여기 가보세요.
      http://ja.wikipedia.org/wiki/唐名

      저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몇 년전부터 그냥 "사장"이라면 될 것을 "CEO"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어 들어가니 멋있어 보이나 봅니다.
      그리고..
      당시의 슈퍼 파워는 물론 중국...
      그렇기에 자기네식 이름보다는 중국식 이름이 멋있어 보였나 보죠.

    •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11 0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꽤 오래전부터 그랬나보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4. 2013.09.07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는 죽을때까지 이거 걱정했는데 마누라가 정치는 하나도 몰라서 더 나빴다.마누라가 정치적으로 기민했으면 히데요시의 공백을 훌룡하게 채우고 히데요시와 자기가 낳은 아들이 일본을 지배하게 만들었을지도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3.09.07 1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방전은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해서 일어난 것이다 보니 여성 한 명이 어떻게 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八.

 히데요시(秀吉)의 죽음과 동시에 당연히 측근정치는 끝나고 그 정치적 붕당은 해산되어야만 했다. 붕당의 영수(領袖)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였다.
 하지만 제도로써 남았다. 히데요시는 유언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운영체재를 새로이 만들었다. 행정면에서 히데요리(秀
)의 대리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였으며 가정면에서의 보호자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이 둘을 최고 결정권자로 하여 최고 의결기관(議決機關)에는 그 둘을 포함한 다섯 명의 대로(大老)[각주:1]로 구성하였다. [오대로(五大老)]이다. 이어서 조정기관(調停機關)으로 [삼중로(三中老)][각주:2]를 두었고 거기에 그들 밑에 사실상 토요토미 가문 집행기관(執行機關)으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봉행(五奉行)][각주:3]을 두었다. 이 때문에 고인의 측근은 이 새로운 시대에서도 제도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각주:4]

 하지만 기껏해야 제도로써만이다. 그 측근으로서의 실질적 위력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이상 모든 신통력은 사라졌다.
- 토요토미 정권의 악(惡)은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다.
 라는 것이 히데요시 말년에 히데요시에게 피해를 입은 다이묘우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히데요시를 미워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 측근을 저주했다.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는 용서할 수 없다"

 라는 태도를 가장 농후하게 나타낸 것이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와 그 시녀단들이었다. 그녀들의 시각으로 보면 미츠나리는 천하의 행정관이 아닌 히데요시의 비서관에 지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비서관이 아닌 요도도노(淀殿)의 이익대변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당연하게도 어린 아이인 히데요리와 그 어미가 되었다. 그 대리인이 미츠나리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히데요시 시대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다행히 집정관 이시다 미츠나리 위에는 상부기관이 있었다. 그 대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로 키타노만도코로와 그 시녀단은 이 이에야스의 힘을 빌려 저 요도도노 모자와 그 대리인의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 고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키타노만도코로와 이에야스는 급속도로 가까워져 한때는 성안에서
- 두 분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까?
 하는 즈질적인 소문이 날 정도로 그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둘의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 등은 특히 그랬다.

 이 당시 조선에서 돌아온 장수들 중 대부분이 그곳에 있을 때 본국에서 행해진 전공평가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었고, 그 불공평의 원흉이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라고 하여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포함한 일곱 명의 다이묘우[각주:5]는 귀국 후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에서 시가전을 전개하여 미츠나리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당연 미츠나리파도 방비를 하였다. 때문에 오오사카, 후시미 성 밑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 전쟁이 일어난다~
 고 오오사카와 후시미의 시민 중 눈치 빠른 자들은 재산을 멀리 그리고 뿔뿔이 분산시키는 사람이 많았다. 퍼진 소문에 따르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님의 뒤를 밀어주고 있는 것이 요도도노라고 한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요도도노 그 자체는 아무런 위계(位階)도 가지지 못하였고 어떠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어린 주군인 히데요리를 그 무릎 위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존재로 세간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 마저 세간의 그런 풍문을 믿어

 "우리들은 키타노만도코로님의 힘을 얻지 않으면"

 하고 지금은 비구니가 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비호를 부탁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도 충분히 납득하여 그들의 보호를 대로 필두인 이에야스에게 부탁해서는 그 내락을 얻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을 기뻐하며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며 오히려 은밀히 부채질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일들이 돌아가는 동안, 요도도노는 백치 같았다.
 - 아무래도 여러 다이묘우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 것 같다.
 는 것을 그녀가 안 것은 훨씬 후 –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에게 오봉행의 자리에서 파면되어 오오사카 성(城)을 떠나 자신의 거성(居城)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佐和山) 성()으로 은거 (위장이지만)한 전후[각주:6]였다. 그녀는 시세에 관해서 남들이 싸우는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세간에서는 그녀와 친밀하다고들 하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자주 만난 적도 없었으며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단지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에게서,

 "이는 소문이옵니다만 에도 나이다이진(江戸内大臣=이에야스)이 히데요리님의 천하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더군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녀는,

 "설마"

 라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에야스라는 – 저 뚱뚱한 50대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 온화한 풍모 이외에 지식이 없었다. 자연히 실감도 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척도로 그것을 부정했다. 관팔주(八州=칸토우(東))의 주인에 불과한 이에야스가 천하의 제후(諸侯)들을 거느린 토요토미 가문에게 감히 칼을 들이댈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 자신이 아무래도 엄청난 풍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사와야마에서 은거 중이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은밀히 거성(居城)에서 빠져 나와 밀행하여 오오사카 성(城)에 나타나면서였다. 요도도노와 대면했다.

 "나이후(府=이에야스)가 가진 야망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얼마나 교묘한 수단으로 토요토미 가문에게서 정권을 찬탈하려는 가에 대해서 그 풍부한 정세인식과 너무도 날카로울 정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했다.
 '말이 참 많구나'
 요도도노에게는 때때로 따분한 이야기였으며 때때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미츠나리라는 인물은 여성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은지에 관한 지식을 재능으로써 갖추자 못하고 있었다.

 "어려운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추측에 따르면 츄우나곤님(中納言=히데요리)은 어떻게 되신다는 것입니까?"

 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요도도노는 되물었다. 미츠나리는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위협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와뢰옵기 황송하오나 츄우나곤님은 얼마 안가 저 히데츠구님과 같이 되실 것이옵니다"

 "말도 안 됩니다. 히데츠구님은 나쁜 반역을 꾀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옵니다. 히데요리님이 반역이라뇨?"

 '이렇게 무지할 수가'
 하고 미츠나리는 생각했다. 히데츠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토멸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행동에 따른 죄가 아니라는 것이 이 요도도노에게는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츠나리는 방법을 바꾸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기후 츄우나곤님(岐阜中納言=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처럼 되실 것입니다"

 "기후 츄우나곤님?"

 요도도노는 미츠나리가 말하는 뜻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곁에 있던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에게 손짓하여 귓가로 와 설명하게 하였다.

 [기후 츄우나곤님]
 이라는 인물은 정삼위(正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를 말한다. 히데노부는 노부나가(信長)의 적손(嫡孫)으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정통 후계자였다. 히데요시에게서 노부나가 때부터의 거성(居城)인 기후 성(岐阜城)을 하사 받고 총 13만3천석의 영지(領地)에 봉해져 있었다. 나이는 20살 전후[각주:7]로 조부 노부나가에게 물려받은 듯한 수려한 용모와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을 이어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그릇과 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못하여 활달한 성격만이 장점인 평범한 젊은이였다.
 - 원래대로라면 기후 츄우나곤님이 천하의 주인이시다.
 고 제후(諸侯)들간에 은밀히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당시 옛 주인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치른 뒤 이 오다 히데노부에게 오다 가문 600만석의 패권을 상속시키지 않고 은근슬쩍 자신이 오다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이끌고 이곳 저곳의 적을 평정하여 그 영역을 천만석 이상으로 불린 다음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칸파쿠(
白)에 임명 받았다. 칸파쿠가 되면 오다 가문보다 가문의 격이 높으며 더구나 칸파쿠라는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직책은 텐노우(天皇)를 대신하여 일본의 정치를 통괄하는 직무인 이상 당연히 옛 주인 노부나가의 자식이나 손자도 일본의 종주(宗主)인 텐노우(天皇)의 권위에 따라 히데요시에게 지배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논리에 따라 히데요시는 세상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오다 가문의 정권을 녹이듯이 없애버려 노부나가의 자식이나 손자도 자기 산하의 다이묘우로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그 오다 히데노부는 히데요시를 앙모(仰慕)하여 오히려 진짜 아비인양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오다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하고 요도도노는 미츠나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변하며 상체를 세차게 떨었다. 그러던 중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가 다가가 마치 여자아이를 대하듯이 요도도노의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듯이 덮었다. 히데요리가 일개 다이묘우라는 위치로 떨어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죽이면 될 일이지?"

 그 반역을 꾀한다는 이에야스를 말이다. 미츠나리는 넙죽 엎드렸다. 그 말 한마디가 필요했다. 나머지는 히데요리의 도장이 찍힌 교서(敎書)를 만들어 사방의 다이묘우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오오사카로 불러들이면 되었다.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一氏). [본문으로]
  3.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4. 상기의 오대로, 오봉행이 제도로써 정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 들어서의 군기물(ex.甫庵太閤記)에 나온 것으로 당시 오대로는 五人の衆 혹은 五人御奉行(다섯 명의 행정관)등으로 표현되었다. 오봉행은 꼭 다섯 명이나 상기의 인물들이 아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가 있는 등 확실치 않았다고 한다. '토요토미가문의 사람들 - 우키타 나오이에' 편에 언급된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히데요시의 유언을 적은 곳에 오봉행에 해당하는 단어는 "행정관 다섯 명(年寄衆五人)" 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6. 위에서 언급한 일곱 명에게 습격을 당할 뻔한 미츠나리는 기책을 발휘하여 오히려 그 숨겨진 수괴인 이에야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였고, 이에야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일곱 명을 납득시키기기 위해서 사와야마 은거를 명하였다. [본문으로]
  7. 히데노부는 1580년생으로 이 당시(1599년)에는 19살...이지만 당시는 일본도 태어나면서 나이를 세어(数え年) 20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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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2.14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도노 편은 특히 분량이 많군요. 마지막 오사카 싸움은 어떻게 서술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15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그냥 다른 편들의 두 배정도이지만...

      가령 히데나가 편은 쓰는 저도 재미가 있다 보니 단 번에 번역할 수 있었는데 이번 편은 그냥 덤덤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2.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2.15 0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젠 토시이에도 죽고 코바야카와 크리가 터지겠군요;;

  3.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2 1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의 본거지인 사와야마가 사카이와 멀지 않은, 예전 미요시 일당의 근거지중 한곳이었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3 1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에 사와야마 링크 건 곳으로 가 축소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와야마는 오우미(近江)에서도 미노 측에 가까운 곳이고 사카이는 현재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곳입니다.

      미요시씨의 최전성기 때도 오우미에는 롯카쿠 사다요리(六角 定頼)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그의 거성 칸논지 성(観音寺城)보다 동쪽에 있는 사와야마까지는 손을 뻗칠 수는 없었죠.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지역과 착각을 했나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아직 많이 틀리는 편이라... ^^

七.

 오히로이(お拾い=히데요리)는 세 살이 되었다.

 이 해는 1595년이다. 그 7월 15일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모반을 꾀했다는 석연찮은 혐의로 자살을 강요 받았고 그의 처첩이나 자식들은 카모() 강변에서 끌려 나와 천민들의 손에 살해당하여 이를 듣고 본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해졌다.
 - 믿을 수가 없다.
 고 히데요시(
秀吉)의 과거를 아는 노인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과거 히데요시는 그렇게나 많이 전쟁터에 나갔으면서도 아군을 쓸데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일 없이, 적을 쓸데없이 죽이는 일 없이 될 수 있는 한 적을 항복시키고 항복시킨 후에는 그에 걸맞은 봉록과 지위, 체면을 유지시켜주었다. 이런 불살주의(不殺主義)는 책략이라기 보다는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난세를 진정시키는 데는 크게 힘을 발휘하여 적들도 또한 안심하고 히데요시에게 몸을 맡기는 자들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그런 성격이 - 오히로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식으로 완전히 변했다. 양자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마치 풀이라도 뽑아 없애듯이 멸절시키는 인물을 도저히 이전의 히데요시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육체도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히데츠구 사건보다 조금 전인 이 해의 4월 15일 밤에 히데요시는 실금(失禁)하여 이불에 엄청난 양의 오줌을 싸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일어나서야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쇠약해진 것에 충격을 먹었다. 이쯤부터 히데요시는 피부가 검어지고 거칠어졌으며 활력을 잃고 식욕이 없어져 자주 설사를 하였다.
 - 배에 병이 있으시다.
 라는 소문과 이 실금은 곧바로 성안에 퍼졌다. 후시미(伏見) 성 아래에 저택을 가진 제후들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
家康)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 히데요시는 얼마 남지 않았군.
이에야스는 남몰래 자신의 앞길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야스와는 다른 반응을 가진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 오우미(近江) 파벌의 관리들 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들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사실만큼이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이며 겸해서 히데요시의 비서관으로 더해서 동시에 요도도노(淀殿)와 히데요리(秀頼)를 위해서는 장래의 보좌관이 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그들 측근 권력집단은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하여 칸파쿠 히데츠구와 그 측근들 –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 들 –이 정권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그 때문에 칸파쿠(히데츠구)님은 살해당한 것이다"

 라고 이에야스조차 칸파쿠 히데츠구 사건은 오우미 파벌의 중추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책모, 참언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
政所)도 믿었다. 세간도 믿었다. 특히 히데츠구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히데츠구와 친했던 다이묘우(大名)들인데 그런 다이묘우 중 대표격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도 그리 믿었다. 타다오키는 히데츠구 모반이라는 의혹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같은 벌을 받을 뻔하였다. 이때의 미츠나리에 대한 원한 – 실제로는 히데요시와 그 정권에 대한 원한이 히데요시 사후 타다오키를 이에야스 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 억울한 누명일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히데츠구님은 히데요리님의 장래를 위해서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히데요시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에 히데요시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것만을 온 종일 생각하였다. 자신의 노쇠를 깨닫고 겸해서 히데요리의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이 겹쳐졌을 때, 이 천성적으로 인정미 넘치는 인물이 – 더구나 이성(理性)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져버린 심신미약자가 – 빠지게 되는 함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히데츠구를 죽여 후환을 끊는 일일 것이다.

 이것과는 다른 일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후에 일어났다. 히데요시가 죽는 해인 1598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잠잤다가는 깨고 또 자는 노쇠인(老衰人)의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 즈음 히데요리는 자신의 늙은 아비와 같이 있지 않았고 어쩌다 쿄우(京)에서 히데요시가 옷 갈아 있을 때 이용하는 저택에 있었다. 히데요리는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불과 여섯 살이면서도 그의 늙은 아비의 희망과 주청에 의해 곤츄우나곤(
権中納言)으로 승진해 있었다. 여섯 살의 곤츄우나곤은 긴 조정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이 수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서는 그 시녀들을 놀이상대로 매일 저택을 떠들썩하게 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발육은 보통 이상이었다.
아이에게도 당연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 시녀 중 네 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키츠(おきつ), 오카메(おかめ), 오야스(おやす), 오이시(おいし)의 네 명으로 히데요리는 그녀들을 어려워하였고 시녀들도 히데요리의 난폭함에 애를 먹었다. 이것이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곧바로 붓을 들어 히데요리에게 편지(아직 글자를 읽지는 못하지만)를 썼다.

츄우나곤 님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돼먹지 못한 것들이니 그 네 명을 새끼줄로 한꺼번에 묶어 이 아빠가 쿄우(京)에 갈 때까지 어딘 가에 던져놓고 있으렴. 내가 가서는 전부 때려 죽여주마.
용서할 수 없도다.

 결국 죽이지 않았다. 추방시켰다. 유모인 우쿄우노다유우(右京太夫)에게도 엄중히 주의를 주며 [츄우나곤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안 죽을 정도로만 때려놓으면 좋아질 것이다]고 써서 보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에 있는 무사들 중 반이 바다를 건너 조선의 각지에서 명나라의 구원군과 조우하여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그런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고, 쿄우(京)-오오사카(大坂)의 사람들은 쌀값이 폭등하여 엄청난 생활난에 빠져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관심은 이미 히데요리밖에 없었다.

 "저 아이의 존재가 천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고 당시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그늘에서 소근거리며 히데요시와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이묘우(大名)에게는 가령 초빙을 받더라도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세이카는 후시미 성(伏見) 성 아래에 살고 있던 전시포로인 조선인 학자('강항(姜沆)'을 말한다. – 역자 주)와 필담하며, "지금 천하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이 토요토미 정권을 저주하고 있소이다. 만약 명나라의 군사와 조선의 군사가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가는 곳마다 관용에 넘치는 선정을 펼치며 진군해 간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뻐하며 당신네 군사들을 맞이하고 다이묘우(大名)들도 당신들에게 달려가 북쪽 오우슈우() 시라카와노세키(白河[각주:1])에 갈 때까지 파죽지세처럼 곧바로 평정되어 버릴 것이오"[각주:2]라고까지 말하였다. 명나라빠인 세이카다운 과장이 있다고는 하여도 이 정치학자가 보기에 토요토미 가문에는 더 이상 이 시세와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어린 후계자와 그것을 낳은 요도도노(淀殿)의 이익 지키기에만 정치가 쏠려 있는 상태이기에 모든 정치악(政治惡)은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정치악을 조장하고 정책화하고 있는 것은 세이카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우미(近江) 계열의 문벌관료들이며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받치는 헌책은 전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라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히데요리의 장래를 위해서라며 일부 다이묘우의 봉지(封地)를 바꾸거나 혹은 바꾸려고 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춘추필법을 따르자면 히데요리는 이제 여섯 살의 나이로 이 포악한 정치의 책임자인 것이다"

 라고 까지 세이카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이카에겐 요도도노의 출현과 그녀가 낳은 적자의 출산에 따른 토요토미 가문의 변모야말로 이 정권과 천하의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혼자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6월 16일은 한 여름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카죠우(嘉祥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부터 시작된 명절.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음력 6월 16일에 16개의 떡이나 과자를 신에게 바친 다음에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화폐로 통용되던 가정통보(嘉定通寶)의 약칭인 가통(嘉通)의 일본식 발음(かつう)이 '이긴다'는 뜻의 동사 'つ(かつ)'와 비슷했기에 무가에서는 특히 중히 여겼다. – 역자 주)의 날이었다. 이 1598년의 이날, 히데요시는 병상에 있었지만 등성(登城)한 다이묘우(大名)들을 인견()기 위해서 주치의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 인견의 자리에 나갔다. 일부러 쿄우()에서 불러들인 히데요리를 자신 옆에 앉혀두고 오늘은 좋은 날이라며 직접 과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이묘우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며,

 "아아~ 이렇게 슬플 수가…. 적어도 이 히데요리가 15살이 내가 살아 오늘처럼 여러 다이묘우들을 알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내 생명은 꺼져가는구나. 그것을 어찌 할 수도 없어"

 하고 도중에 울먹였고 결국에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다이묘우들은 목을 숙이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쳐들 생각도 안 했다. 그들의 가슴 속은 제각기 복잡했을 것이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토요토미 가문은 물론 그 사후에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정변 속에서 자기 가문을 어떻게 지켜가야 할 지가 훨씬 절실했다.

이 해의 8월 18일.
히데요시는 죽었다.

  1.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원문은 日本生民之憔悴. 未有甚於此時. 朝鮮若能共唐兵弔民伐罪. 先令降倭及舌人. 以倭諺揭榜知委. 以示救民水火之意. 師行所過.秋毫不犯. 則雖至白河關可也. -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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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2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편도 잘 보고 갑니다. 필시 음력일테지만 저 8월 18일이 양력 제 생일인지라-_-; 어릴적에 이 사실을 알게 됐을때(뭐 지금이라고 늙진 않았습니다만;) 제법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저 히데요시의 인물상은 일본인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는지 -저 추악한 말년을 제외하면- 실제로 모 게임에서의 주인공 모티프로 쓰이고 있덥니다. (Generation of Chaos 1이라는 게임의 히로인입니다만; 역시나 한국정발은 되지 않았기에 아주 마이너할겝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3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 제 생일도 8월입니다...
      (...뭐 상관은 없지만 공통점 만들어서 친한 척하고 싶어서요 ^^; )

      허~ 그런 게임이?
      주군의 신발을...이건 너무 대놓고..군요.
      낮은 신분에서 출세하여 천하를 손에 넣는 듯한 식인가 보군요. 위키 검색 좀 해봐야 겠군요.

  2.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2.04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히데요시는 말년에 혼이 빠진 느낌이랄까...그렇군요;;

    딴 얘기로 블로그에 대해서인데 머리가 아파지실것 같지만...카테고리 클릭이나 검색을 하면 오른쪽 사이드바가 밑으로 밀려가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포기했던 꿈이 이루어지자 제 정신이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블로그..
      그거 먼저 번 스킨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러더군요...그래서 아예 포기 상태..시간나면 만져 보아야 겠다~ 라고만 생각 중입죠.

  3. 본다충승 2009.02.05 0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명나라빠 세이카 라는 유머러스한 글까지.. ㅎ 공명의 갈림길에서 주인공 카즈토요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말년의 건강함을 비교한 말이 떠오르네요. 이 나이때의 히데요시가 골골했던 방면, 이에야스는 쌩쌩하다는 식...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좀 언어구사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큰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제 몸을 신경써야 하나 봅니다. 그다지 의학적인 에피소드가 없는 히데요시보다 자기 먹을 약은 자기가 만들어 먹었다는 이에야스는 저 말에 부합되는 것 같군요.

六.

 즈질적이고 너저분한 서술을 조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바로 그 점이 - 요도도노(淀殿)와의 이불 속에서의 일이 – 그 후의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豊臣白) 정권의 질을 바꾸어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운(運)의 신자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강렬한 합리주의와 왕성한 계산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운의 신자이면서 반대로 운을 믿지 않았고 만사를 마지막까지 계산하였다. 하지만 계산의 마지막 바로 전 즈음에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천운(天運)을 믿었다.
- 나는 운 좋은 사람이다.
 라는 자기신앙(自己信仰)을 히데요시는 가졌으며, 사실 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시기인 전반생은 호운(好運)에서 호운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영향 받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만큼 명쾌한 무신론자이지는 않았지만 신과 부처를 인간생활의 장식물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신앙했다. 자기자신 중에서도 자신에게 붙어있는 천운을 믿었다.

 그 밝고 긍정정인 성격과 관련이 있는지 그의 여성취향은 살집이 두껍고 생명력이 뚜렷하며 투명한 수액(水滴)을 끊임없이 흘리는 듯한 여성을 좋아했다.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네네(寧)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이만큼이나 쌕을 좋아하는 남자가 마지막까지 네네를 계속 사랑하였던 것은 네네의 외모가 히데요시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취향이라기 보다 더욱 심오한 히데요시가 가진 자기신앙에 걸맞았기 때문에 틀림이 없었다.
- 네네는 내 행운의 여신이다.
 라고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네네를 얻으면서부터 히데요시는 운이 트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운이 트여, 운이 히데요시의 뒤를 헐레벌떡하며 뒤쫓아 오던 시기가 이어졌다. 만약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 행운의 근원은 – 바로 네네가 아닐까?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가진 조강지처에 대한 경애의 방식, 깊음은 동시대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부자리에서 네네와의 관계가 끊긴 다음에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단순한 애정이라기 보다 히데요시에게는 네네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네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 하고 계속 혼자서 생각했다. 소중히 함으로써 하늘의 은혜가 이어지며 막 대하면 그 은혜가 도망간다고 까지 - 히데요시는 남몰래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 때,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요도에 있는 아이(淀の者)를 이곳으로 부르고 싶다"

 고 정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 편지라는 것이,

 "요도에 있는 아이를 부르려고 한다. 자네도 부디 (요도도노에게) 명령하여 떠날 준비 같은 것을 시켜주길 바라네. 자네 다음으로 요도에 있는 아이가 내 맘에 든다"

 고 써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네네가 제일이며 요도도노가 2번째라고 말을 돌려 네네에 대한 미묘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주었다. 더해서 요도도노만을 원정 중인 곳으로 부르는 것에 다소 신경이 쓰였는지 네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이렇게 가필했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다. 올해 안에 자네에게 가 쌓인 이야기도 하고 싶다. 오오만도코로(모친)나 도련님(츠루마츠(鶴松))의 얼굴도 보고 싶다"

 - 히데요시는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미천한 신분일 즈음부터의 처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씀씀이를 보이는 것은 애정 말고도 네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남몰래 일종의 신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도도노를 얻으면서부터는,
 '이 여자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재수 좋음을, 아니 요도도노 그 자체가 재수를 불러들이는 듯한, 더 말하면 그녀는 운(運)의 신이 보낸 천사라고 식의, 그러한 실감 – 신앙이라고 말해도 좋다 – 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되는데 여성의 성기를 행운의 대상으로 하는 미신이 히데요시와 동시대인 센고쿠 무사들 사이에 습관화되어 있었다. 여음(女陰)의 그림이나 남녀가 교접하고 있는 그림을 화가에게 그리게 하여 그것을 대나무 통에 넣어서 어깨에 짊어지고는 그런 모습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그 공력에 의해 화살이나 총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졌으며 생각하지 못했던 무운과 만나 – 예를 들면 이름 있는 적의 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서양 기사의 경우에서 말하는 mascot 신앙일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그렇게 보았다.
 요도도노를 이후에도 즉 조전침략 때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도 데려갔는데 이때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한 다른 측실들에 대하 변명으로,

 "그 아이(요도도노)는 오다와라에도 데려가 바라던 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터의 길례(吉例)이다. 이번에도 데려간다."

 라고 말하였다. 주위에 대한 변명이라곤 하지만 그녀를 길례로 보는 것은 히데요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엄청 큰 운을 가져다 주었다. 히젠 나고야 성에서 그녀는 두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나이가 되어 또다시!"

 하고 히데요시는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 道三)의 손을 잡고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다. 아비가 된 히데요시는 56살이었다.
 곧바로 요도도노를 그녀의 성으로 돌려보냈다.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요도 성(淀城)에서 히데요리(秀
)를 낳았다. 히데요시도 서둘러 치쿠젠(筑前) 본영에서 돌아왔다. 이제는 조선 침공이란 안중에 없었다.

 요도 성으로 가 오히로이(히데요리의 아명)와 만나,

 "너는 주어왔다. 주운 것이다. 내 자식이 아니다"

 고 흐물흐물하게 웃으며 얼굴을 아기의 코 앞으로 내밀었다. 주워 온 자식은 튼튼하게 자란다고 한다. 친자식이더라도 일단 버린 뒤 남에게 주워오게 하는 형식을 취한다. 주워 오는 역할에 임명된 것은 요도도노를 시종하며 요도 성에 올라와 있던 마츠우라 사누키노카미 시게마사(松浦 岐守 重政)였다.

 요도도노는 이미 산후의 쇠약에서 회복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말랐나?"

 히데요시는 그날 밤 요도도노를 옆에 누이고 침상 안에서 그 몸을 쓰다듬었다. 예전 츠루마츠가 살아있을 적에 히데요시는 진중에서 자신이 키워 온 마음의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20일 즈음에는 반드시 돌아가마.
도련님(츠루마츠)를 안고 싶구나
그날 밤 너도 옆에서 재우고 싶구나. 모처럼이니 기다릴 것.

 이번에도 요도 성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저런 종류의 편지를 보내어 요도도노의 마음을 계속 자신에게 쏠리게 했다. 때문에 요도도노는 자신이 항상 히데요시와 함께 이부자리에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이젠 새삼 부끄러워 할 필요 없이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로 하나가 되었고 그 환락 속에 몸을 열었다.
 '이거야'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의 감동은 무엇보다 요도도노의 여성으로서의 그 부분이었다.

 "너를 얻으면서 토요토미 가문도 변하였다"

 예전엔 네네의 거기를 신앙했다. 앞으로는 그 이상으로 거대한 행운을 이 요도도노가 가져다 줄 것이다.

 "바로 이거지"

 하고 히데요시는 그 젖은 부분의 명칭을 오와리(尾張) 사투리로 몇 번이나 외쳤다.

 "오히로이(お拾い)에게도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겠군"

 히데요시는 자신이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것을 이 갓난아기에게 주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 성(
大坂城)였다.

 "그 성을 오히로이에게 주마. 내 성으로써 따로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하였다.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嫡子)인 이상, 이제 막 태어났다고 하여도 천하제일인 성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후들에 대한 존엄과 무위를 가지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
 이것이 실행에 옮겨졌을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그 측근에게 중얼거렸다. 오오사카 성을 오히로이에게 물려주고 히데요시는 새로이 자신의 거성(居城)으로써 후시미 성(伏見)를 만든다는 뜻 – 을 행정관(奉行)을 통해서 제후들에게 발표한 것이었다. 그 후시미 성 조영에 관해서는 오오사카 성을 기점으로 동 일본의 제후들에게 명해졌다.

 "이 또한 돈과 쌀의 낭비지"

 라는 목소리가 그런 제후들 사이에서 소곤거려졌다. 참고로 그 동 일본의 제후들은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조선으로 출정을 명령 받은 것은 서 일본의 제후들이었기에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평등하게 돈을 쓰게 하기 위해서 동일본 제후들에게 공사의 분담을 명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피폐함을 알고 있던 제후들에게 있어서는 민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쓸데없이……
 라고 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천성이 자그마한 땅 주인과 같이 검소한 이에야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지(領地)인 칸토우(
) 경영을 위해 에도(江戸)에 새로이 수도를 세웠지만, 성곽은 극히 소박하여 성은 이시가키(石垣)도 세우지 않았고 해자를 팔 때 푼 흙으로 담을 쌓았으며, 성과 건물의 현관 같은 것도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때부터의 초가지붕을 사용하였으며, 마루도 배의 밑바닥 나무를 이용한 조악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아끼고 있는데 히데요시의 없어도 괜찮은 별장 같은 성곽을 위해서 막대한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성 같은 게 필요하냔 말이다.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의 광기의 징조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미친 사람 아닌가? 이에야스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자신의 측근에게,

 "오오사카 성은 오히로이의 장난감이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오사카 성은 서양 신부들이 말하길 콘스탄티노플보다 동쪽으로는 최고로 큰 성이라고 한다. 갓난아기의 장난감으로 그런 것을 주고 자신은 후시미에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이 피폐한 것을 모른다. 미쳤나? 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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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이 1586년 12월에 칸파쿠(関白) 히데요시는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하사 받음으로써 타이라 씨(平氏), 미나모토 씨(源氏), 후지와라 씨(藤原氏)라는 고귀한 성(姓)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 귀족으로서의 위치와 체면을 확립하였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궁중에서의 예식이나 축하연회 등으로 쿠게(公家) 사회에서의 사교로 매우 바빴다. 쿄우(京)에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주거하고 있었다. 쥬라쿠테이는 이 해의 2월에 완공되었고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와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2])도 불려와 그대로 쿄우(京)에 있었다.


 오오사카(大坂)에는 챠챠(茶々)가 있었다. 챠챠에게는 토요토미 가문 일족의 쿠게(公家) 사교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입으로 쥬라쿠테이의 화려함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 한번 보고 싶구나
 하고 유모에게도 말하였지만 이것만은 유모도 어찌 해 줄 수 없었다. 쥬라쿠테이는 친왕, 상급귀족(公卿), 몬제키(門跡[각주:3]) 그리고 위계가 높은 무장들의 사교 장소이기에 아무런 위계도 가지지 못한 몰락 다이묘우(大名)의 고아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말 화려하겠구나”

 챠챠는 동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위계를 가지고 계신가?”

 “칸파쿠의 부인이시니까요.”

 여성이면서 종이위(從二位)였다. 다이나곤(大納言) 등보다도 상석이었다.

 굉장히 화려할 것이다. 챠챠는 쿄우(京)의 번화함을 상상하였다.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피여서는 저마다의 미를 자랑하는 화원을 연상했다. 쥬라쿠테이 주변에는 끊이지 않고 음악이 울려 퍼지며 시회(詩會)나 다회(茶會)가 열리고 항상 그 중심에 히데요시와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갑자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내려왔다. 성안은 북새통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챠챠의 유모를 불렀다. 유모는 서둘러 수 많은 복도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히데요시는 이외로 혼자 있었다.

 “여어~”

 하고 히데요시는 유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쓰윽 쓰다듬었다. 식초라도 마신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더구나 쪽팔리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알겠나? 이 얼굴”

 히데요시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도 보지 않고 아는 것 같았다. 이 얼굴을 보아라, 이 얼굴로 추측하라, 쪽 팔려서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 고 말했다. 유모는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유모는 이해했다. 챠챠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여 참지 못하고 이렇게 오오사카로 돌아왔네. 알겠나? 내일은 쿄우(京)로 돌아간다”

 ‘내일은 쿄우에?’
 그렇다면 오늘 밤만이 기회였다. 이렇게 경황없는 명령이라니……

 “허락하마. 그 편지상자를 열어보아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유모는 눈 앞에 편지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송해하며 그것을 열어 안에서의 한 장의 시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놀랍게도 연애시였다. 히데요시는 요즘 시에 열심으로 또한 현실적인 필요로 인해 쿠게(公家)의 습관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애에 대해서까지 쿠게(公家) 풍으로 흉내 내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사람을 꼬시는 데 있어서의 천재가 챠챠에게만은 이렇게 고풍스런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챠챠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익살꾼의 단순한 장난인가?

함께 자고픈 마음이 오오사카에 다녀온 듯하다
팔베개하며 꾼 오늘 밤의 꿈.
想い寝の心や御津に通ふらむ
今宵逢ひみる手まくらの夢

 음률도 갖추어져 있었다. 히데요시 시의 첨삭은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가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시도 그런 것일까?

 “내가 만든 시다”

 히데요시는 일부러 말했다. 유모는 황송해하며 그것을 편지상자 집어넣어 뚜껑을 덮고 보라색 끈을 묶어 머리 위로 공손히 들어올렸다.

 “오늘 밤 술시(밤 여덟 시)에 건너가겠다. 이불에 있으라고 하라, 누워 있으라고 전해라”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이런 것은 쿠게(公家) 풍이라기 보다는 말 위에서 천하를 획득한 무사 정권의 우두머리다웠다.
 유모는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불러 멈추게 하고는 시동(児小姓)을 불렀다. 시동은 흰 나무로 된 작은 상을 머리 위로 받쳐들고 와서는 유모 앞에 내려 놓았다. 하사품이었다. 더구나 황금이었다. 유모는 물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모는 히데요시의 방에서 나와 긴 복도를 건너면서 생각하였다.
 ‘전하는 3년이나 공들이셨다’
 라는 실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유모도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좋은 도우미가 되어 있었다. 다른 오우미 사람(近江人) – 예를 들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등에게서도 유모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어서 와야 함에 대해 음습한 기대가 담긴 말로 들은 적도 있었다. 어쨌든 챠챠가 가지고 있는 히데요시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도록 얼마나 신경을 쓰며 얼마나 손을 써 왔는지 몰랐다. 그것은 우선 성공하였다. 유모에게 있어 적어도 운이 좋았던 것이 챠챠는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お市)처럼 도리가 명쾌한 뚜렷한 성격이 아닌 감정적으로 무엇이든 그렇게만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유모는 제대로 처리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이기에 막상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해’
 유모는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고무하였다. 그것이 결국 챠챠에 대한 충성이 되는 것이며, 결코 꿈에서라도 – 챠챠를 황금에 판 것은 아닌 것이다.

 이날 밤.
 술시. 히데요시는 챠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있어라, 누워 있으라고 유모에게 명령해 두었는데도 챠챠는 옷을 입은 채 촛대에 둘러싸여 앉아있었다.

 “여어~ 이 향은?”

 하고 히데요시는 순간적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자신을 쪽팔림에서 건져 올리려 하였다. 방에는 향이 피워지고 있었다. 향이 피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히데요시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은 여러 종류가 섞인 혼합 향(組香)인 듯 했다. 그런 쪽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코로 하나하나 맞출 수 있다.

 “향의 이름은 무엇인고?”

 히데요시는 턱을 들어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이제 막 쿠게(公家) 문화를 배우기 시작한 히데요시가 맞추기에는 무리였다.

 “어린 나물(若菜)의 향이옵니다”

 하고 챠챠는 희미하게 듣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지만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 눈은 거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챠챠는 히데요시에 대해서 그다지 예의가 바르지 못하였고 때때로 존대하기까지 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용했다. 챠챠에 한해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만났을 때부터 계속 그런 태도를 허용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히데요시는 그런 태도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없었다.
 히데요시의 측실은 많았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방계 출신인 히메지도노(姫路殿),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명문가인 쿄우고쿠 씨(京極氏) 출신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 산죠우노츠보네(三条局) 등 많은 명문가 출신들이 있었지만 모두 히데요시 앞에서는 숨죽이고 그의 심기를 민감하게 살피며 열심히 섬겼다. 히데요시도 역시 그녀들에게 상냥하였으며 오히려 너무 상냥할 정도였다. 그녀들 또한 히데요시의 그런 상냥함에 감동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섬겼다. 하지만 이 챠챠만은 달랐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 같았지만 히데요시 만큼이나 사람의 심성에 대해 정통한 사람도 그리 생각하지는 못하고 이 아가씨는 자신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어딘가에 항상 품고서는 계속 원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반해있었던 것이다. 그 반해있음이 히데요시의 태도를 약하게 하였다.

 “이 향은 히메가 피운 것인가?”

 하고 히데요시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말했다.

 “아니요”

 하고 챠챠는 말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챠챠라는 아가씨에게는 혼합 향을 조화시킬 수 있는 듯한 재주가 없었다. 이는 유모가 피웠다. 피웠을 뿐만 아니라, 아씨 잊지 마시옵소서. 이 혼합 향은 ‘어린 나물’이라고 하옵니다. 어린 나물이옵니다. 이와 연관된 옛 시(古歌)는 이것과 이것입니다, 하고 쪽지에 적어서는 하나하나 가르쳐갔다. 그랬을 뿐인 장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오해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것은 챠챠의 겸손함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 교양의 깊음에 탄복하였다. 이런 점 -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향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단다. 이 봄나물에는 어떠한 옛 시가 있는고?”

 “몇몇이 있사옵니다”

 하고 챠챠는 매우 부드럽게 답했다. 유모가 가르쳐 주었듯이 ‘어린 나물’에 연관된 옛 시 중 다음과 같은 것은 읊조렸다.

내일부터는 어린 나물을 캐자고 약속한 들에
어제도 오늘도 눈은 계속 내리고
明日よりは若菜摘むとしめし野に
昨日も今日も雪は降りつつ

 히데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내리는 눈’이라는 것은 거부하는 ‘수수께끼’인 것 같았다. 적어도 무언가의 사정으로 오늘은 어린 나물을 캘 수 없습니다, 고 챠챠는 말하는 듯했다.

 "허어~ 캘 수 없나?”

 히데요시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쿠게(公家)의 귀공자라면 아니 적어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무렵의 도련님들이라면 이렇게까지 수수께끼가 던져지면 여성의 방에서 물러나 나중에 시를 보내는 것이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같은 귀족이라도 말 위에서 검을 쥐고 칸파쿠(関白)의 의관을 쟁취한 전쟁터의 사나이였다. 물러나지 않았다.

 “히메! 기왕 이렇게 된 것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오른손을 뻗쳤다. 행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뻗친 손으로 청자(靑磁)로 된 향로를 집어서는 뚜껑을 거칠게 열고 피워져 있는 불에 물통의 물을 부었다. 재가 일고 향기가 사라지며 동시에 ‘어린 나물’도 옛 시도 수수께끼도 사라졌다.
  키득, 하고 히데요시는 웃었다.
 ‘앗’
 하고 챠챠가 놀랄 정도로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에는 흠뻑 빠져버릴 듯한 애교가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바로 그 웃는 얼굴을 지웠다.
 곧이어 챠챠를 노려보았다.

 “귀족놀이는 이제 그만하자”

 그것은 선언이었다. 무문(武門)에는 무문만의 사랑에 대한 작법이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나에게 맡기라”

 위엄을 가지고 명령했다. 항복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무문의 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오히려 히데요시에게는 더 나았다. 챠챠는 순종적이 되었다. 그 하얀 오른 손을 히데요시 쪽으로 내밀었다. 마음이 멍해지며,
 ‘무엇을 하려고?’
 하고 챠챠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히데요시는 그 손을 잡았고 잡자마자 챠챠를 무릎 위에 눕혔다.

 “챠챠야”

 하고 히데요시가 ‘히메’라는 존칭을 버렸을 때는 이미 챠챠의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자그마한 남자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일까? 그대로 이불 위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기서 히데요시의 힘이 다했다. 히데요시는 OTL이 되어 거친 숨을 토했고 토하고는 들이마셨다.

 “나도 늙었다”

 히데요시는 자조적이 되고 싶었을 터이지만 젊은 챠챠에게 허세도 부려야 했기에 무턱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사냥감은 바로 앞에 뉘여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숨이 진정될 때까지 뭔가를 떠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 몸은 작지만 다할래야 다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체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었지. 그러나 천하를 갈고 닦기 위한 큰일을 하다보니 조금 피곤해졌다. 옛날이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들었을 텐데……”

 ‘거짓말
 하고 챠챠는 엎드려 있으면서도 저 초로를 훨씬 넘긴 남자의 허풍이 웃겼다.

 “챠챠야 내 아이를 낳아라”

 히데요시는 OTL인 채로 고개만 쳐 들고 말했다.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의 아이를 낳으라고 거듭 말했다. 히데요시가 이럴 때 쓰는 상투적인 문구였으며 어느 여성에게건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어느 여성도 그 명령에 따르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아기씨가 드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석녀(石女)들과만 조우하였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챠챠는 히데요시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세가 취해졌다.
 받아 들였다.
 이 순간만큼 거대한 사건은 토요토미 가문 역사 속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자연적인 – 챠챠의 옷이 펼쳐지고 히데요시가 그 육체를 꽉 껴안았을 뿐인 단지 그랬을 뿐의 자연적인 행위가 이 순간부터 토요토미 가문의 체질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았다.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이 이불 속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이 상냥함이란…… 그것이 끝났더라도 챠챠를 놓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였다. 이 가련한 이를 위해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성(城)을 갖고 싶지 않은가?”

 하고 히데요시는 챠챠의 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히데요시는 말했다. – 바다 건너온 비단이나 면으로 된 옷 같은 것을 사라, 시녀의 수도 늘려라, 그러나 챠챠가 가져야 할 것은 성이다. 성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성을?”

 챠챠는 놀람과 동시에 자신의 정부(情夫)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천하의 지배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천하인의 선물이라는 것은 당연 성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여자이기에 성은 필요 없사옵니다.”

 “사양하지 마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꼭 성을 주고 싶다. 그 이유로 히데요시는 쿄우(京)와 오오사카(大坂)를 왕복하니 그 중간인 요도(淀) 근방에 휴식을 위한 성을 하나 두고 싶었는데 그것을 쌓아 챠챠를 살게 하면 그녀도 기쁘고 자신도 편리했다.
 ‘단 다른 여성들에게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안 되지’
 다른 측실들은 모두 오오사카 성에서 살고 있는데 챠챠만이 [성주]가 된다면 대부분 질투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가 심술내지 않도록 이것저것 이유를 만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의 버릇으로 생각나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빨랐다. 그날부터 몇 일 내에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大納言 秀長)를 불러,

 “요도에 성을 쌓아라”

 고 명령했다. 장소는 카츠라가와 강(桂川)과 우지가와 강(宇治川)이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가 되는 합류점으로, 거기에는 예부터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将軍家)의 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과 보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폐허인 성을 부활시켜 작지만 견고한 성을 만들어라, 건물을 화려하게 지어라, 귀부인을 위한 건물로 해라, 여성 침실의 앞마당에는 꽃나무를 잊지 말도록, 화장실도 특별히 생각을 해서 만들라고 명했다.

 요도 성(淀城)은 5개월 만에 만들어져 챠챠는 오오사카에서 거기로 옮겼다. 아자이 씨(浅井氏) 일족이나 시녀를 포함하면 이 새로운 성에서 생활하는 사람 수는 남녀 200이 넘을 것이다. 챠챠는 세간에게 ‘요도도노(淀殿)’라 불렸으며 히데요시에게는 ‘요도노모노(淀の者)’, ‘요도노뇨우보우(淀の女房)’ 등으로 불리거나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도도노는,
 - 어머님(お袋様).
 이라고 세간에서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첫아들 츠루마츠(鶴松)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 츠루마츠는 2년 후에 죽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낙담하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에 대한 애정은 더욱더 깊어졌다. 곧이어 조선침략이 시작되어 그 대본영인 치쿠젠(筑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도 그녀를 데려갔다. 이 나고야의 행궁에서 요도도노는 또다시 임신했다. 히데요시는 춤을 추며 기뻐했다.
 - 남자아이를 낳아라
 고 히데요시는 요도도노의 배에 손을 대고는 굉장히 진지하게 빌었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기적을 요도도노는 별 힘 안들이고 실현해 주게 되었다. 그 해 –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이미 요도 성(淀城)에 돌아와 있었다. 이날 히데요시의 희망대로 남자아이를 낳았다. 


 히데요리(秀頼)였다.

  1. 히데요시의 부인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모친 [본문으로]
  3. 거대 사찰 혹은 그런 사찰의 주지가 된 황족이나 상급귀족의 자제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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