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1607 4 8 병사 34

1574 ~ 1607.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차남으로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형.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어,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 처음 전장에 출진했다. 후에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의 양자가 되어 시모우사[下総] 유우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에치젠[越前]을 하사 받았다.









쇼우군[将軍]이상의 성망(聲望)


 유우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지만 출생할 때부터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고 있어서[각주:1] 어릴 적에는 부친에게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고, 그  히데요시도 또한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 양자로 보냈다.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쪽으로 복귀하여 세키가하라에서는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진을 치고서 북방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방비한 것이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쇼우군의 자리는 이모제(異母弟)인 히데타다가 물려받았지만 에치젠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영주(領主)로서 68만석을 받은 것 외에도 와카사[若狹]시나노[信濃]월경지까지 합치면 카몬(家門[각주:2]), 후다이(譜代[각주:3])중에서는 대인 75만석의 신분으로 출세했다. 카가[加賀] 100만 석인 마에다 가문[前田]에 대한 방벽이라는 중대한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부친 이에야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쇼우군 히데타다가 확실히 그를 제어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듯하다. 히데타다도 형인 히데야스에게는 조심 또 조심을 하여 후시미[伏見]에 있던 히데야스가 처음으로 에도[江戶]에 왔을 때는 매사냥을 핑계로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을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짧은 장년(壯年)시대


 이렇듯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히데야스였지만 불행하게도 34세라는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다.

 에치젠의 국주(国主)가 된 1600 12 그는 아직 29세였다.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6년여.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가 이미 말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실제로 에치젠에 입국했던 것은 1601 5월인데 최초로 한 일은 영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중신들에게 기분 좋게 나누어 줌으로 인해 자신의 직할령이 부족하여 부족한 분은 사도[佐渡]에서 에도로 보내지는 금이나 물자에 통행료를 메겨 징수해서 메웠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전투는 잘해도 경제관념은 부족했던 모양이다.[각주:4]


 양부(養父)인 유우키 하루토모와 그의 식솔들을 시모우사의 유우키에서 키타노쇼우로 불러들였으며, 유우키 가문[結城)]의 사원(寺院) 등을 이전하거나 키타노쇼우 성의 개축, 정비, 새로운 혼마루[本丸[각주:5]]의 건축도 당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공사들에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은 여러 제후들이 협력했다고는 해도 히데야스의 고생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사들이 모여 사는 곳[각주:6]이나, 상인들의 마을[각주:7]을 조성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26개의 마을, 인구 2 5천여의 성 밑 마을(城下町)이다. 새로운 농업, 산업 정책의 책정이나 친번(親藩[각주:8])으로서 막부를 도우는 것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악질적인 병에 목숨을 빼앗기다


 1606년.

 히데야스는 마츠다이라 성[松平]을 하사 받아 토쿠가와 일문으로 복귀(이설이 있다)하였으며, 유우키 가문 5남 나오모토[直基]가 잇게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궁궐의 증축, 은퇴한 텐노우[天皇]를 위한 센토우어소[仙洞御所] 조영 공사의 총 책임자를 맡아 조정에도 그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궁중에서 쾌유를 빌며 신에게 받치는 춤(神楽=かぐら)이 행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히데야스의 육체는 이미 병마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궁궐 조영 중에도 일상생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공사 종료 후 막부가 히데야스를 후시미의 죠우다이[城代[각주:9]]에 임명하지만 히데야스는 곧바로 사임. 1607 3월에는 영국(領国)인 에치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윤 4 8일에 병사한 것이다.


 그의 병은 당창이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매독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이즈모의 오쿠니(出雲のお)] 등 여자 카부키 배우들과 문란한 교재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을 보면 그 방면에서 감염되었다고 여겨진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보면 이 병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타다나오[忠直]가 광란 끝에 카이에키[改易[각주:10]]당한 것도 부친에게서의 유전으로 여겨진다.


 오쿠니를 초대한 잔치에서 그녀에게 [너는 천하 제일의 무녀(舞女)가 되었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무장이 되지 못하였구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불행한 탄생으로 만들어진 히데야스의 마음에 있던 그림자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증식하여 그것이 병마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1. 모친이 헤픈 여성이기에 실제로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본문으로]
  2. 어삼가(御三家)와 어삼경(御三卿)를 제외한 쇼우군 가문(将軍家)인 토쿠가와(徳川)의 일문친척인 문벌. [본문으로]
  3. 주로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섬기던 문벌. [본문으로]
  4. 실제로 히데야스가 전투를 행한 적은 기껏해야 한 번이다. [본문으로]
  5. 성의 심장부인 천수(天守)를 둘러싼 성곽. [본문으로]
  6. 武家町 [본문으로]
  7. 町人町 [본문으로]
  8.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친척들이 번주로 있는 번. 여기에는 어삼가(御三家)나 어삼경(御三卿)도 포함된다. [본문으로]
  9. 죠우다이[城代]는 성주의 대리를 뜻하며, 특히 후시미성의 죠우다이는 당시 토요토미 가문과 쿄우토[京都]의 감시, 서국으로 간 토요토미 가신들의 감시 등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본문으로]
  10. 지위와 땅을 뺏어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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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

1633 1 25일 병사(病死) 64


1570 ~ 1633.

히타치[常陸] 오오타[太田]성주. 아키타 번[秋田藩]의 번조(藩祖).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무사시[武蔵]로 출진. 부친인 요시시게[義重]의 활약에 힘입어 히타치[常陸]를 통일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는 움직이지 않고 중립을 선택했기 때문에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전봉(転封)되었다.










아키타 전봉(転封)의 이유


 사타케 가문[佐竹家]이 히타치 미토[水戶] 54만석에서 데와[出羽] 아키타[秋田] 20만석으로 전봉된 것은 1602 7 27일이었다.

 이에야스[家康]에게서 온 명령서에는 데와[出羽]의 아키타[秋田]와 센키타[仙北]로 가라는 말만 있을 뿐 석고(石高)가 명시되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요시노부[義宣]를 시작으로 가신들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이에야스[家康]가 내린 징벌 좌천 인사였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요시노부는 서군 총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깊은 친분으로 마음이 흔들렸기에 요시노부를 의심한 이에야스에게 칸토우[関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미츠나리와의 깊은 관계라 함은, 요시노부의 맹우였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 国綱]카이에키[改易[각주:1]]에 휩쓸려 사타케 가문이 처분받을 뻔한 때에 미츠나리 덕분에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요시노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豊臣]의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의 내분으로 인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7명의 무장이 미츠나리를 습격했을 때에는 요시노부가 구출했던 때도 있었다.


역전의 발상


 히타치 54만석은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에 요시노부의 영지 20만석. 거기에 은거한 부친 요시시게[義重]에게 5만석, 사타케 3가의 하나인 히가시 요시히사[東 義久]에게 6만석, 그 외는 요리키 다이묘우[与力 大名][각주:2]들의 영지 등으로 인해 '나라 안에 나라'가 있는 상태였다.


 요시노부는 아키타 전봉을 이러 변칙 체제의 타파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영지는 전부 무시하고 아키타에서 새로 영지를 분배하였고 그것을 봉급으로 했다. 요시히사의 아들 요시카타[義賢]에게는 10분의 1 6000석만을 지급했다. 가신중에서도 200석 이상은 불과 25명 이었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가격(家格[각주:3]), 관례에 구속 당하지 않는 새로운 정략의 실시를 가능케 하여 새로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했다.


 신천지에서 우선 영내(領內)의 안정에 힘써 쿠보타 성[久保田城] 축성과 안도우 씨[安東氏], 아키타 씨[秋田氏]에게서 이어 받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에 힘을 쏟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고 광산 개발에 힘썼다.


 한편 막부가 일으킨 오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大坂の陣]의 군역(軍役)은 물론 계속되는 막부의 요청에 의한 토목공사에도 나서서 응했다.

 요시노부의 아키타 번에 30년 간 부과되어진 주요한 토목 공사에는 에도 성[江戶城] 수리를 시작으로 우치사쿠라다[內桜田]의 칸다바시 문[神田橋門]의 수리, 소토사쿠라다[外桜田] 코우지마치[麹町]의 토라 문[虎門]과 이어지는 담 공사 등 도합 5.

 군역(軍役)은 오오사카의 진[大坂の陣]외에 유리[由利]()의 인수, 에치젠[越前]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 忠直]의 카이에키[改易][각주:4]에 동원 등 합계 4, 쇼우군[将軍]이 쿄우토[京都]에 갈 때 같이 간 것이 4, 그 외에 19번의 참근(参勤[각주:5])이 있었다. 한 시도 맘을 놓을 수 없는 봉공(奉公)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막부에게 쓸데없는 의심 받을까 하여 성에는 천수각도 담도 쌓지 않는 철저함을 보였다. 적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부친 요시시게[義重]의 물음에, "나가서 공격할 뿐입니다. 이런 작은 성에서 농성해서는 운도 트일 리 없습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앙집권화에 따른 정치 체제의 변화와 전술의 진보에 따라 축성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하에서 이에야스[家康]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로쿠다이쇼우(六大将[각주:6])]로 평가되어 온 요시노부가 이렇게까지 막부에 대해 신경을 썼기에, 의심이 많은 이에야스도 요시노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이 세상에 사타케 요시노부 만큼 정직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하면서도, "그래도 너무 정직해서도 곤란해"하며 충고할 정도였다.


병법가, 다도가(茶道家)로서의 일면


 요시노부는 화약의 조제법을 연구해서 책을 쓸 정도의 병법가였다. 한 편 취미인 차를 즐기는 것도 달인의 영역에 달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따라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일 때 영지로 보낸 편지에 자기 스스로 칸토우[関東] 제일의 다도가라고 할 정도였다. 요시노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에게 직접 전수받은 다도를 말년에 즐겼다.


 요시노부는 16331 25. 에도의 칸다[神田]의 저택에서 죽었다. 향년은 64.

 [정월 7일부터 산기(疝氣)를 앓으셨다.] [羽陰史略]에 적혀 있다. 산기라는 것은 대장 또는 소장 혹은 허리부분이 아파지는 병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순사(殉死[각주:7])를 금했다. 막부가 순사 금지령을 발포하기 30년 전이므로 영단이라 할 수 있다.


 17살에 가독을 이은 요시노부는 24살 때 일찍 죽은 정실과 나중에 맞아 들인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동생인 이와키 사다타카[岩城 貞隆]의 첫째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여 요시타카[義隆]로 이름 지어 세자로 삼았다. 아키타 6() 20만석의 영지가 확정된 것은 요시노부가 죽은 다음해 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2. 배하(配下)의 다이묘우[大名]. 즉 요시노부가 명령권을 가진 다이묘우. [본문으로]
  3. 가문의 등급.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의 2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장남.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으나 은상이 적은 것(차항아리[茶壷] 한 개)에 불만을 표하고 참근교대도 안 하였기에 카이에키. [본문으로]
  5.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내를 오고 가는 것. [본문으로]
  6. 여섯 개의 큰 가문. 토쿠가와, 마에다[前田],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우에스기[上杉]와 더불어. [본문으로]
  7.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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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oowee BlogIcon 수위 2005.11.27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감사...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614년 1월 19일 병사(病死) 69세.

1546년 ~ 1614년.
데와[出羽] 야마가타[山形]성주. 쇼우나이[庄內] 지방에 진출해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들과 싸웠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호우죠우 씨[北条氏]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공격하자 참진(參陣)한 덕분에 본령(本領)을 안도받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싸웠다.




효장(驍将)의 전환기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가독(家督)을 놓고 싸운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죽였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일족이라고 해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후환을 남기는 것 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항복한 무장에게는 잘 대해주었기 때문인지 근린의 무장들은 요시아키를 효장이라며 두려워 했다.

 이런 요시아키에게 전환기가 찾아 온 것은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였다. 참진을 명령 받은 여러 무장들은 앞다투어 참진하여 소령 안도장을 받아 내었으나 요시아키는 부친인 요시모리[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어 6월달이 되어서야 겨우 착진할 수 있었다. 그 전에 히데요시가 발령한 사투금지령을 위반하고 쇼우나이[庄內]에서 영토 쟁탈전을 계속해서 벌여 온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눈밖에 나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예전부터 연락을 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부탁해 그의 중재 덕분에 겨우 소령(所領)을 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시아키처럼 늦은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소령에서 아이즈[会津]를 빼앗겼고 참진하지 않았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과 무장들은 소령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일은 요시아키를 놀라게 했다. 때는 요시아키 45세. 1571년 가독을 이은지 20년만에 처음으로 모가미 가문(最上家] 위급존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환심(歡心)가로 변신

 천하인의 강대한 무력과 중앙 집권 정치의 진정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요시아키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남의 영토를 빼앗는 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하였으며 주변의 영주들과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결과 중앙 정권과 끈을 이어 놓는 것에 게을리 한 것을 후회했다[각주:1]. 요시아키는 센고쿠[戦囯]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요시아키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요시아키는 천하인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마음먹고 무슨 짓을 해서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실시한 것이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2])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정에 맞지 않는 오우우[奥羽]를 주요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회의 발달이 늦어져 다른 지역보다 향촌제(鄕村制)가 미발달한 오우우에서 이것을 강행할 경우 각지에서 호족의 내란과 농민들의 발발이 예상되었기에 히데요시도 상당한 각오로 임한 것이었다. 검지가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복속해 있던 무장과 호족들의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커다란 위험이 예상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솔선해서 처자를 동반하여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아이즈의 코우토쿠지[興德寺]에 가서 알현했다. 이 때의 일이 [다테 가문 문서(伊達家文書)]에 남겨져 있다. 참고로 요시아키는 다테 가문[伊達家]와 싸우기도 했지만 당주인 마사무네[政宗]는 요시아키의 여동생 요시히메[義姬]와 선대 테루무네[輝宗] 사이의 적자이니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외삼촌이 된다.

 [다테 가문 문서]에는 요시아키의 충성스런 모습에 어처구니 없어하며 혀를 차는 다테 가문과 굉장히 기뻐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노 가문 문서(浅野家文書)]에도 다테와 모가미 가문은 자신들 영내의 호족들의 처자들을 스스로 쿄우토(京都)로 보내 살게 했다고 한다. 남들보다 먼저 처자를 인질로 바친 요시아키와 마사무네는 오우우의 여러 무장들의 모범으로 평가 받았고 다른 무장들도 이것에 따르라는 요청받게 된다. 한 때 히데요시에게 냉우받았던 요시아키는 면목을 세우게 된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말년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영국(領国)의 안태를 지켜 토쿠가와 정권에서는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요시아키이지만 비극은 이 수법으로 인해 생긴다.

 요시아키는 사랑스런 딸인 코마히메[駒姬]를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에게 측실로 받쳤고, 차남 이에치카[家親]를 이에야스의 부하로 사용해 주길 바란다고 보내어 이에야스를 기쁘게 했으며, 셋째 아들 요시치카[義親]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秀頼]를 섬기게 했다.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포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마히메는 [살생관백(殺生関白)]이라는 악평을 남기고 자결한 히데츠구에 휘말려 다른 처첩들과 함께 니죠우 강변[二条 河原]에서 사형 당했다.

 요시아키는 자신도 부친에게 미움 받았으면서도 자신 역시 같은 일을 벌이게 된다. 30세가 되어도 가독을 잇지 못한 장남 요시야스[義康]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이에야스가 언질을 주자 분노한 나머지 모살해버린다. 요시야스가 죽은 후 유품에서 부자간의 사이가 화목하도록 절실히 기도한 기원문이 발견되었다. 후회막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이에야스 쪽에 붙어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싸운 후 부터 요시아키는 병에 자주 걸리게 되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순푸[駿府]의 이에야스를 방문해 모가미가의 안태를 부탁한 후 야마가타로 돌아와 죽었다. 1614년 1월 19일 향년은 69세. 노환에 따른 병이라고 한다.

  1. 1580년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살아 있을 시에 노부나가에게 매와 말을 한 마리 씩 보내 줄을 놓고 있었다. [본문으로]
  2.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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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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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ne157 BlogIcon 슈퍼스타 2008.04.12 2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요 ^^

  2. nhuh 2009.10.19 0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당연히 있는 그대로 기록 되어야한다. 다테 마사무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왜장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비열한 놈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아는가? 무수한 조선의 백성이 이놈의 손에 처절하게 학살되었다. 진주성 함락후 살아 숨쉬는 것은 다 죽이라고 명했든 진주성의 비극에도 다테 마사무네라는 살인귀의 이름이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19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는 당연히 있는 그대로 기록 되어야한다.
      ->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다테 마사무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왜장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비열한 놈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아는가?
      ->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에 관한 기록을 아시는 것이 있으면 링크나 서적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수한 조선의 백성이 이놈의 손에 처절하게 학살되었다.
      -> 아~ 이놈도 그랬나요? 혹시 출처를 아시면 가르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진주성 함락후 살아 숨쉬는 것은 다 죽이라고 명했든 진주성의 비극에도 다테 마사무네라는 살인귀의 이름이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 아~ 이놈도 그랬나요? 제가 알기론 이때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뒤로 물러나라고 해서 면목을 잃었다며 나중에 절교하는 원인이 됩니다만(따라서 학살 등에는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도 아시는 것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알기로 다테 마사무네는 3000명이라는 소군세에 그가 조선에 건너왔을 시의 일본 주력은 서쪽 다이묘우들이다 보니 그다지 활약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행여라도 활약이라도 하면 토요토미 정권의 요주의 인물 중 하나인 마사무네를 키워주는 꼴이 되니까요). 제가 좀 무지한 편이니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리겠습니다.

  3. nhuh 2009.10.19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은 위키백과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카피했습니다.

    <일본 대하드라마 천지인에서>이놈은 젊은 나이에 아이즈를 침략합니다. 성안에 남은 남녀노소 특히 어린애까지 모조리 도살하여 당시 일본인들의 치를 떨게한 선천적 살인마입니다.

    임진왜란 [편집]
    다테 마사무네의 경우,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하여 나고야의 대본영으로 돌아온 9월까지 진주성등에서 전투를 치뤘다.

    조선으로 출병할 당시 다테가의 부대의 행렬이 화려하다고 소문이 돌았고, 수는 3000명, 혹은 15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군이 통과할때, 조용하던 교토의 주민도 다테군이 지나갈 때 그 화려함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 후,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다테모노(伊達者)'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편집]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유언 중 하나인 다이묘의 자녀끼리의 결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깨고, 1599년, 장녀 이로하히메와 이에야스의 6남 다다테루와 결혼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에 붙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이 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구사항에 따른다는 가정 하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테 마사무네에게 고쿠다카 100만석을 보증해 줬으나, 다테 마사무네가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키가하라 전투기간 내내 고쿠다카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상부의 명령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병력을 일으키는 등 허술하게 처신하여 결국 전투 후 다테 마사무네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던 100만석의 약속은 백지화 되어 버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테 마사무네의 고쿠다카를 57만석에서 62만석으로 약간 인상해 주는 선에서 다테 마사무네에 대한 논공행상을 마쳤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으나, 1614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천주교 신부를 무력으로 위협하고 심지어 자신의 진영으로 온 천주교 신자를 학살했다. 그래서 진짜 천주교 신자인 것보다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간양록》에서는 눈이 외눈이고 왜장 중 가장 음흉하고 사악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임진왜란 참전용사로서 임진왜란에 해당되는 전투 중 많은 조선인이 불타 죽은 진주성 전투에 그도 있었다.

    인물 [편집]
    다테 마사무네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전형적인 까불이 스타일의 인물이였다. 물론 24살때 이런 기질 덕분에 오슈의 패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반면 세키가하라 전투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하면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의도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스스로 봉지(封地)를 획득하려고 무리하게 군대를 일으켜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약속했던 100만석은 이런 다테 마사무네의 행동과 상쇄되어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툭하면 '내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내가 전국의 패자(覇者)가 되었을 텐데...'라고 한탄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대다이묘의 신분으로서 마에다 도시이에의 조카 마에다 도시마스에게 그런 점으로 훈계를 듣고도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누군가에게 출처를 요구 받을 경우 해선 안 될(해도 되지만 무시받습니다) 일 중 하나가 위키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위키도 물론 좋습니다. 저도 뻔질나게 이용하니까요. 다만 근거를 댈 때는 위키에서 나온 출처를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가령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위키에 '간양록'이라는 서적이 나왔으니 그 간양록에 나온 구절이라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가령 간양록에 마사무네는 6번 등장하며, 그 중 진주와 연관된 것은 진주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마 진주성을 함락당하여 학살이 일어난 정유년의 것이 아니라 임진년에 김시민 장군에게 깨졌을 때의 이야기를 말합니다.(왜냐면 마사무네는 정유재란 때는 조선에 오지 않은 듯 하니까요. 위키랑 틀리죠? 위키는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출처 요구 시 쓰면 안 되는 것이고요 - 같은 날 18시 50분 쯤 이하 추가 -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못 알고 있었군요. 2차 진주성 전투는 정유년(1597년)이 아닌 1593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2차때 마사무네는 참전했습니다. 잘못된 글 달아서 죄송합니다. - 이상 추가)

      덧붙여 간양록의 저자 강항은 붙잡혀 있었기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적은 것이라 그것이 곧 사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학살과 약탈은 그만큼 활약한 부대에게 상대 편의 재산을 가지고 가라는 일종의 보너스 였습니다. 그렇기에 활약하지 못한 놈이 참가할 순 없었죠.

      여담으로 다테 마사무네의 오테모리 성의 학살에 관해서도 근래에는 자신에게 그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개기면 다 몰살이야~ 그러니 개기지마..라면 싸우지 않고 좋으니까요) 마사무네 스스로가 날조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뵐 수 있었음 좋겠군요.

  4. nhuh 2009.10.22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주성 학살은 정유재란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정유재란 1597년
    1차 진주성 (승전) 1592년 10월 5일
    2차 진주성 (몰살) 1593년 7월 22일
    다테 마사무네의 참전기간 - 1593년 4월 부터 1593년 9월 (약 반년)
    2차 진주성 전투와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물론 조선침략에 동의하지 않았든 장수 중에 다테 마사무네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을 침략한 왜장중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다는 사실은 나와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 또한 하나도 없네요.
    조선을 침략했다고해서 다 도매금으로 넘겨 나쁜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의 전쟁 속성까지 부정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민을 학살하고 악질적 살륙을 자행했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합니다.

    또한 성안에 남아있든 어린이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 했다는 일본의 기록과, 그 사실이 입증된 금세기 일본의 드라머가, 그 자신이 날조한 말조차 구분하지 못했을까요?"
    일본의 기록은 에도시대에 들어와 다소 날조된 부분도 있으나 센고구시대의 기록은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원본들입니다.

    살인마의 화신을 영웅으로 치겨세워서는 안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유재란 1597년
      1차 진주성 (승전) 1592년 10월 5일
      2차 진주성 (몰살) 1593년 7월 22일
      다테 마사무네의 참전기간 - 1593년 4월 부터 1593년 9월 (약 반년)
      2차 진주성 전투와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예 그건 제가 실수했습니다. 급하게 적다보니 제2차 진주성이 벌어진 일시를 헷갈렸네요.

      그러나 그가 조선을 침략한 왜장중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다는 사실은 나와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 또한 하나도 없네요.
      ->그래서 교차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여기선 강항)만 말했다면 그것을 진실로 만들 또 다른 사료가 있어야 하죠. 그래서 전 그런 것을 본 적이 없기에 nhuh님이 혹시 아시면 그것을 알려주셨음 한 것이고요.

      그러나 양민을 학살하고 악질적 살륙을 자행했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출처를 부탁드립니다. 마사무네가 했다는 것으로요.

      또한 성안에 남아있든 어린이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 했다는 일본의 기록,
      ->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압니다. 다만 nhuh님이 처음 댓글 다시면서
      "진주성 함락후 살아 숨쉬는 것은 다 죽이라고 명했든 진주성의 비극에도 다테 마사무네라는 살인귀의 이름이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라고 하시길레, '마사무네는 아사노 나가마사가 뒤로 빠지라는 말을 듣고 그러했으며 그런 사정을 히데요시에게 잘 말해주지 않아서 나중에 둘은 절교를 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 학살과 약탈은 활약한 부대에게 보너스 격인 것이다. 그렇기에 마사무네는 그런 학살에 참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계속 마사무네가 학살에 참여했다고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그런 기록을 알려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금세기 일본의 드라머가, 그 자신이 날조한 말조차 구분하지 못했을까요?"
      ->드라마를 기준으로 말씀하시면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원균은 정말 그렇게 나름 명장이었을까요?

      일본의 기록은 에도시대에 들어와 다소 날조된 부분도 있으나 센고구시대의 기록은 상당히 자세히 기록된 원본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록된 원본들을 부탁드립니다.

      살인마의 화신을 영웅으로 치겨세워서는 안됩니다.
      ->영웅으로 치켜 세운 적도 없으며 치켜 세울 생각도 없습니다. 행여나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본 글을 일본 서적의 번역글입니다. 또한 역사상 전쟁을 일으킨 학살자는 그 나라에선 영웅이 되는 것 정도는 아시고 계시겠죠? 가령 징기스칸과 그의 군대들은 기원 후 가장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고 합니다만 지금 몽고에서 국가적 영웅인 것 처럼요.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만 그런 기록들을 부탁드립니다.
      이래 뵈도 나름 대인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무지로 인한 쪽팔림 아무래도 좋습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기쁨은 그런 쪽팔림을 상회하니까요.

  5. Favicon of https://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2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번동아제님 블로그에서 봤던 내용인데 마사무네의 마상총이 근세기까지 남아있었다는 루머도 있더군요. 정말로 루머같긴 합니다만;; -_-

    http://lyuen.egloos.com/1310658

    마사무네가 좀 성급하고 잔인하게 묘사되는 부분들이 있던것 같은데 실제로도 그런지 좀 궁금합니다. 요코야마 미쯔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선 오사카 전투에서 전투중에 피아를 안 가리고 모조리 몰살시켜버리는 장면도 나오더군요. 어릴적에 좀 불우하게 자란 냥반이라 그런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3 0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존재를 의문시 하시는지 어떠신지 쓰신 글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1855년에 간행된 무도예술비전도회[武道芸術秘伝図解]라는 책에는 마상총에 대해서 나오는 것 같더군요.

      저도 번동아제님의 블로그는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어줍짢겠습니다만 짱!입죠. 번동아제님의 글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면 진보우[神保]의 부대를 몰살한 이야기가 오오사카 농성전에 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군인 진보우의 부대가 무너지다 보니 그 무너진 파급이 아군에게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진보우의 부대에 총격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있습죠.
      자라온 환경이다기 보다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6. 일빠색히 2009.12.28 0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www.hiten.net/tenkafubu/content/commonView.php?assign=s_makeanoise&seqno=222&page=1

    여기에 다테마사무네 임진왜란 전과기록 다있네

    ㅉㅉ

  7. 일빠색히 2009.12.28 1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가 원하는 대답은 사무라이 놈들이 우린 조선 침략한 적 없다라는 왜곡된 증거냐?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닙니다.
      진주성 학살은 가장 먼저 성벽을 넘었다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 그 중에서도 코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부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엄한 사람 욕하기 말고 진짜 욕 먹어야 할 놈을 욕하자는 것입니다.

      ps; 일본애들도 남의 블로그에 와서 익명을 무기로 반말 찍찍 해대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2ch의 혐한찌질이들이나 그런 일하죠. 님은 2ch의 혐한찌질이와 같은 레벨이 되고 싶으십니까?

  8. Favicon of http://kr.blog.yahoo.com/pershing11111 BlogIcon ╋만슈타인╋ 2010.04.10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kr.blog.yahoo.com/pershing11111/1383684

    최근들어 센고쿠지다이 관련 NHK 대하드라마들이 많이 DVD 출시되고 있는데 비싼 엔화 덕분에 한번에 전부 구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현실이죠.

    그냥 저들이 떠드는 것은 내버려두세요.

    하여간 일본에 대해 다루면 무조건 일빠, 친일파가 되어버리는 정저와( 井底蛙 )들의 국가에서 뭘 더 바라겠어요.

    • 무협랑 2013.08.26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을 좋아하는 건 취미라 뭐라 안하는데 자기네 역사도 모르면서 일본 역사나 문화를 달달 외우는 건 욕먹을 만하죠. 예전에 와세다생하고 토론 한적이 있는데 같이 갔던 다른 대학생이 "니네 불상 다 우리 거다" 하니까 와세다생이 그럼 불상의 재질이나 합장법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벙어리가 되던데말이죠. 저는 말려들기 귀찮아서(당시 저는 B'Z라는 일봅 그룹에 대하여 토론 중) 울트라맨이라고 농담삼아 하긴 했지만 실은 밀교의 12합장법 중 여러개로 다 의미가 있긴 하죠 근데 그 말하기엔 일본어가 딸리는지라 그냥 울트라맨;; 재질도 소나무죠 일본에서 안나는 소나무
      X-JAPAN 노래들은게 어언 20여년 전이네요 그땐 일본 노래 듣는것만으로도 매국노 취급이긴 했는데 최소한 한국역사도 빠삭한 편이서 욕은 좀 덜먹었었네요.

  9. 무협랑 2013.08.26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조실록 26년 7월 16일에 의하면,
    촉석루에서부터 남강의 북쪽 언덕에 이르기까지에는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쳐 있고, 청천강(菁川江)으로부터 무봉(武峰)에 이르는 5리 사이에는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가고 있었다. 라고 적혀있고 그에 의하여 패전보고가 들어오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진주성 시민 6만여명이 단지 두 부대에 학살되었다는건 많은 비약이 있는것 같은데요. 그게 그들의 법도라고 이해하라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요. 객관적으로 보는 것도 좋긴한데 말이죠. 근데 그말이 일본식으로 보라는 건 아니거든요. 저도 일본 문화나 역사는 좋아하지만 일단 조선 쳐들어온 것만으로 욕먹을 근거는 되는 걸로 압니다. 뭐 1차 전범은 선조와 히데요시이겠지만서도..

  10. 무협랑 2013.08.26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간양록을 직접보고 들은게 아니라고 비하하시는데 그럼 역사를 왜 배우나요 역사도 저희가 직접보고 들은게 아닌데 말이죠. 흠 말이좀 과했네요. 보통 소문에는 7할의 진실과 3할의 거짓이 섞여있다고 하지요. 근데 일단 외모를 애꾸눈 왜장이라고 외모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으며 다음에 성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로 판단한다면 거짓으로 적은 건 아닌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3.08.26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부 그대로 믿기에는 좀 힘들다는 것이 어째서 비하가 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직접 기술하신 강항선생은 그래도 자신의 말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라고 한다'는 식으로 전해 들었다고 적었는데, 몇백년 지난 후세인은 그 말에 전혀 틀림이 없다는 식으로 단정짓다니.. 재밌군요.

쓰가루 다메노부[津軽 為信]
1607년 12월 5일 병사 58세.

1550 ~ 1607.

히로사키[弘前]의 번조(藩祖). 처음엔 오오우라[大浦]씨를 칭하나 난부[南部]씨의 지배가 약화되자 독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 지방의 지배를 인정 받아, 츠가루를 성(姓)으로 삼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동군에 속해 오오가키[大垣] 공략에 참가하였다.

 

 

 




 



전국말기에 주가를 배반한 무장.

 

 오오우라 성[大浦城]의 성주 오오우라 타메노리[大浦 爲則]의 사위인 타메노부[爲信]는 그 때까지 난부[南部]의 성(姓)을 썼었다. 츠가루[津軽]라는 성은 1589년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공략을 위해 참진하여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에 3개 군(郡)을 안도 받으면서 쓴 성이다.


 난부 가문 츠가루 담당관(郡代)의 집사(執事)를 맡고 있던 타메노부가 츠가루 지역 일원을 난부 가문에게서 무력으로 강탈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난부 가문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타메노부는 불만이 많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와 손을 잡는 한편 아세이시 성[浅瀬石城]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난부 가문의 가신 센토쿠 마사우지[千德 政氏]와 맹약을 맺고 지금까지 츠가루의 영민을 잘 다스린 실적을 기반으로 츠가루 일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이런 강탈 행위가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오우 총무사령[関東奧羽㹅無事令]'[각주:1]이 발령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어 센고쿠 시대 말기에 자신의 영토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속공과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류를 잘 살펴 민정에 힘을 쏟은 점이 특징적이다. 지용겸비의 무장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놀랄만한 전략으로 영토를 안도

 

 군웅할거의 센고쿠 시대는 힘 있는 자가 내키는대로 빼았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타메노부는 신빙성 높은 정보를 모아서 중앙 정국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빨리 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인물에게 접근하면 유리한가를 정확히 판단했다. 센고쿠 무장의 대부분은 중앙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진기한 물건이나 재보를 헌상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타메노부도 그렇게 하여 성공한 무장 중의 한 명이다.

 

 주인이었던 난부 가문에 반기를 든 대담함에 더하여 치밀함을 소유한 타메노부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허례허식에 묶일 필요가 없었다. 창피함이라던가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는 지가 최선인가를 재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희대의 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히데요시에게서 영토를 인정 받으려 할 때 나타난다.

 타메노부는 불과 18기(騎)의 부하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다와라 공략 중인 히데요시의 본진을 목표로 내달려, 누마즈[沼津]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해서는 영토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난부 종가(宗家)의 노부나오[信直]가 히데요시를 알현하기 3일 전이라는 아슬아슬함이었다. 1590년 3월 27일의 일이었다.

 

 타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츠가루 일대의 지배를 인정받은 다음부터 '쿠노헤의 란[九戸の乱]' 출병을 시작으로 많은 군역(軍役)을 부과 받지만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德川]를 선택, 오오카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하여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한편 쿄우토[京都] 조정에서 존중받고 있던 오섭가[五摂家][각주:2]의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과 친교를 맺는 등 여타의 무장들과는 다른 수법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타메노부 자신도 3번 쿄우토에 올라 재물을 받치고 감사의 뜻을 올리면서 쿄우토 산죠우 거리[三条通り]에 있는 츠가루 번(藩)의 저택에 머물면서 때때로 자식들을 불러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곤 했다.

 

말년과 죽음

 

 본의는 아니지만 가문의 안정을 위해서 츠가루 통일의 공로자인 센토쿠 일족을 모략으로 멸망시킨 타메노부는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고치고자 남들보다 더 불교에 정진하여 마음의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해서찾아 왔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장남 노부타케[信建]는 츠가루를 버리고 떠난 뒤 쿄우토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3대 번주로 눈 여겨 두고 있던 손자인 오오쿠마[大熊]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고 계속해서 귀여워하던 딸 토미히메[富姬]가 자신 보다 먼저 죽는 비운을 맞보게 된다.

 

 츠가루 10만석의 번조(藩祖) 타메노부의 말년은 깊은 쓸쓸함과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 가득차게 되었다.

 오오우라 성에서 호리코시 성[堀越城]으로 옮긴 타메노부는 요해지인 타카가오카[鷹ヶ岡]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 했으나 막부(幕府)에 허락 받지 못해 생전에 실현을 보지 못했다.(2대째의 노부히라[信枚]대에 완성).

 중앙 정권에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영지의 안태를 꾀했던 타메노부는 심혈을 쏟아부은듯 1607년 12월 5일 58세를 일기로 쿄우토에서 죽었다. 쿄우토의 츠가루 번의 저택이 아닌, 야마시나[山料]의 칼 장인(刀工)인 라이쿠니미치[來囯道]의 저택이라 한다. 히데요시처럼 심한 기침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타메노부는 죽음을 앞두고 3남 노부히라를 머리맡으로 불러 가독을 물려주었다. 2남 노부카타[信堅]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노부히라는 운 좋게도 후에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滿天姬]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마테히메는 이에야스의 이부제 마츠다이라 야스모토[松平 康元]의 딸이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楅島 正則]의 양자 마사유키[正之]에게 시집갔었으나 마사유키가 폐적, 참살당해 19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부히라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1. 칸토우[関東]와 오우우[奥羽] 지방의 무사들에게 사적인 타툼을 하지 말라는 명령. [본문으로]
  2. '고셋케'라고 발음. 칸파쿠[関白]를 배출할 수 있는 코노에[近衛], 이치죠우[一条], 니죠우[二条], 쿠죠우[九条], 타카츠카사[鷹司]를 말한다. 서열은 필두 코노에 가문을 제외하고 모두 동급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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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24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중에 마테히메와 마사유키의 아들내미가 후쿠시마 재흥운동을 한다고 난리를 쳤다더군요.. 결국 독살당했다지만(ㅎㄷㄷ..)

    P.S. 마테히메가 독살한걸련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25 0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쪽 지역은 다테 마사무네 부터 흘러져 내려오는 전통인가 봅니다.
    '여행 떠나는 아들에게 독 먹이기...'
    이 정도의 독에서 살아 남을 수 없으면 대망을 이루지 못하니리...
    인자한 눈으로 아들의 먹을 것에 독을 타지만 마음 속으로는 피 눈물을 흘리면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25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북쪽은 참 무섭군요(ㅎㄷㄷ..)

  4. 2009.06.28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29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방문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들려주세요 ^^)

      예전 네이버 블로그를 쓰다가 이사와서...꽤 지났지만 게으르다 보니 아직도 정리를 다 못하고 있네요. 읽으시는데 불편한 점이 많아 죄송스럽습니다.

      広前는 히로사키가 맞습니다. 그냥 제가 틀린 것입니다. 前가 나오니 그냥 '마에'로 써버렸네요.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또 발견하시면 부탁드립니다. ^^;)

      비밀글님도 좋은 하루되시길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