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타헤에[母里 太兵衛][각주:1]라고 하면 ‘쿠로다 타령[黒田節]’[각주:2]으로 유명한 무인이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히노모토 제일의 창[日ノ本一の槍]’ 니혼고우[日本号]는 원래 궁중에 있던 것이라고 하며,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하사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거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진 것이다. 창날이 약 70cm 거기에 약 2m30cm의 푸른 창자루가 달린 창이다.
 
어느 날 마사노리가 사자로 파견된 타헤에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려고 하면서, 이걸 마시면 뭐든 바라는 것을 준다고 하며 커다란 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라서 주자 타헤에는 그것을 완샷하고 난 뒤 니혼고우의 창을 냉큼 집어 들고 왔다고 한다[각주:3]. 즉 술로 따낸
것이다.

니혼고우[日本号]의 창날의 앞뒷면. 상기의 링크와 함께 보시길.

타헤에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를 섬겼으며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와는 동료였다. 임진왜란 때는 쿠로다 카즈시게[黒田 一成][각주:4], 고토우 마타베에와 서로 번갈아 가며 선봉대장을 맡았다. 쿠로다 가문[黒田家]이
치쿠젠[筑前] 52만석의 대봉(大封)을 받았을 때, 타헤에도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 8천석의 높은 봉록을 하사 받았다. 가신이라고는 해도 다이묘우[大名] 클래스의 석고(石高)였다.

 타헤에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기풍을 사랑하던 사나이로 상대가 주군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다.
 주군 나가마사의 적자 만토쿠마루[満徳丸=후의 타다유키[忠之]]가 4살이 되어 처음으로 바지[袴]를 입는 축하연 때의 일이다. 만토쿠마루의 후견인[お守り]이 된 타헤에는 이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어른이 되셔서 아버님을 능가하는 공명(功名)을 세우소서”
 라고 말하였다.
 나가마사는 그것을 듣고 화를 내며,
 “타지마(但馬=타헤에)!! 아비를 능가하는 공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조선에서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처럼 태평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만토쿠마루가 나를 능가하는 공적을 세울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말하며 실언을 취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타헤에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태연히 만토쿠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라고 말하며 말을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옆방에 있던 노신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가 중재하여 겨우 나가마사는 화를 풀었다.
 “이거 내가 실수했네. 이리 와서 이걸 마시게”
 하고 술잔을 건네자, 타헤에는 세 번이나 더 달라고 한 뒤 다 마신 후,
 “오늘은 경하스러운 자리인데 분위기가 내려갔군요. 제가 춤을 추어 다시 분위기를 끌어 올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마음 씀씀이가 깊은 것도 주군. 또한 사려가 부족한 것도 주군. 큰 얼간이는 타지마(=타헤에), 또한 믿음직스러운 것도 타지마”
 라고 했다고 한다.

 또 어느 해의 초반 신춘(新春)의 축하연에서 나가마사가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연이 시작되어 밤 10시 즈음이 되자 나가마사가,
 “내가 있으면 젊은이들이 맘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하겠지. 난 이만 가니 맘 놓고들 술을 마시게”
 하고 말하곤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역시 이 자리에 있던 타헤에가 일부러 큰 소리로,
 “이런 날 좀 더 자리에 앉아서 젊은이들과 속 터놓고 즐기면 좋을 것을… 어쨌든 자기 멋대로인 주군이시군. 정수리에 커다란 뜸이라도 놓아 정신차리게 해야지 이거야 원…”
 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타헤에의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완고함으로 주군이라 하더라도 안중에 없다는 듯한 센고쿠 생존자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타헤에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타헤에는 고토우 마타베에처럼 주군 가문을 버리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완고한 반면 주군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리 다헤[母里 太兵衛]
출생은 확실하지 않지만 씨는 모우리[毛利]였다고도 한다. 이름은 토모노부[友信]로 타지마노카미[但馬守]를 자칭하였다.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죠스이[如水]]-나가마사[長政]를 섬기며 조선에서도 공을 세워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8천석에 봉해졌다.

  1. 위키에 따르면 쿠로다 가문[黒田家] 내에서는 모리는 ‘보리ぼり’라고 읽는 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지금도 유명하여, 일본 유명 사회자인 타모리[タモリ]는 상대가 후쿠오카 사람일 경우 “후쿠오카의 결혼식에선 항상 술 취한 할배가 나와서 쿠로다 타령을 부른다”는 소재를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유명한 듯. [본문으로]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기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파견된 모리 타헤에에게 마사노리가 자꾸 술을 권했다. 타헤에는 행여라도 실수할까봐 계속 거부했지만, 마사노리는 '마시면 뭐든 다 주마'라고 하며 결국에는 '술도 못마시는 쿠로다의 무사' 운운해대며 쿠로다 가문을 굴욕하자 술을 다 마신 뒤 '니혼고우'를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가신 카토우 시게노리[加藤 重徳]의 아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아라키 무라시게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혔을 때 죠스이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때의 보살핌을 잊지 않은 죠스이는 무라시게가 패해 몰락한 카즈시게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일문으로 대했다. 후에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 52만석에 봉해지자 그도 1만 6200여석에 봉해져 그의 후손은 대대로 쿠로다 가문 필두중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구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1623년 윤8 4일 병사(病死) 55.

1568 ~ 1623.

쿠로다 요시타카[田 孝高]의 장남. 부친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때 데뷔전[初陣].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어 조선 침공[朝鮮役][각주:1]에 종군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筑前] 52만석을 하사 받아, 후쿠오카 번[福岡藩]번조(藩祖)가 되었다.








모친과 처를 탈출시켜 준 것에 대한 은상(恩賞)


 1600 12 11일.
 쿠로다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다음 해인 1601년에는 후쿠오카 성[福岡城] 축성에 착수함과 동시에 영내(領內) 6개의 지성(支城)을 쌓아, 세키가하라[
ヶ原] 때 전공이 있던 중신들을 죠우다이[城代][각주:2]로 임명, 배치하였다.

 쿠라테 군[鞍手郡]의 타카토리 성[鷹取城]의 죠우다이에는 모리 타헤이[母里 太兵衛]가 임명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서 명창(名槍) '니혼고우[日本号]'를 술내기로 따낸 일화로 유명한 타헤이는 세키가하라 때도 활약하였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家康]의 우에스기 토벌[会津征伐][각주:3]에 출진하자, 나가마사의 예언대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세력은 오오사카[大坂] 텐마[
満]의 쿠로다 저택을 포위했다. 타헤에는 밤을 기다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부인 코우엔[幸圓]과 나가마사의 부인인 네네[]를 가마니 안에 넣고, 두 개의 가마니를 바구니에 담아 긴 막대 끝에 걸쳤다.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그 막대를 어깨에 메고 뒷문 쪽에 있는 목욕탕의 벽을 뚫고 탈출, 쿠로다 가[黒田家]에 출입하는 상인 나야 쇼우자에몬[納屋 小左衛門]의 집으로 옮겨 숨겼다.


 부친 죠스이가 나카츠[中津]에서 파견한 배가 오오사카[大坂] 포구에 도착했지만, 이시다 측의 군선이나 작은 배들, 병사들의 경비가 심해서 타헤이,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 미야자키 스케다유우[宮崎 助太夫]의 세 가노(家老)들은 당혹하였다.


 7 17일 밤.
 타마츠쿠리[玉造]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시다 쪽의 인질요청을 거부하고 자살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각주:4]와 호소카와 저택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경비하던 병사들이 타마츠쿠리로 향한 틈을 타서 코우엔과 네네는 729일 본국인 나카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모친과 부인을 탈출시킨 그들의 공적을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던 나가마사는 새로운 영지(領地) 후쿠오카 번()을 지배함에 있어서 지성 주둔 제도를 택하여 타헤이를 타카토리 성(),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아사쿠라 군[朝倉郡] 마테라 성[左右良城]에 죠우다이로 각각 임명했다. 또한 가중 통제의 일환으로 '화내지 않는 모임[腹立てずの会]'이라는 것을 만들어, 중신부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나가마사에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의 미래를 생각하며……


 1623.
 55
세가 된 나가마사는 에도[
戸]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지만, 열격(噎膈)이 같이 생겼다. 쿄우토[京都]에 들리지 않고 후시미[伏見]에서 오오사카[大坂]로 이동. 치쿠젠에 귀국해서 몸을 돌보려 했지만, 이에미츠[家光] 3대 쇼우군[軍] 취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결국 오오사카에서 2~3일 정도 머문 후 상경하여 호우온 사[報恩寺]를 숙소로 정했다. 상경한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도 나가마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병문안 하였다.


 나가마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부하에게,

 지금 죽을 때가 되니 안타까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쿠로다 가문 족보[黑田家譜]).


 [첫째는 어머니 코우엔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며,
 
둘째는 적자(嫡子) 타다유키[忠之]가 아직 약관(21)임에도 뒤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죽는 것.
  셋째는 휘하의 장졸들을 데리고 평소 훈련시키며, 전투에 임해서는 엄숙과 절제를 지키고, 내 수족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이 이외에 미련은 없다.]


 윤 8 4일.

 나가마사는 일어나 앉아서 타다유키에게,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자비롭게 대하거라. 절대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속세를 떠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돌아간다 극락정토의 하늘로

 此のほどはうき世の旅にまよひきて今こそかへれあんらくの空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성주를 대신해서 성과 그 주변을 행정, 관리, 방어하는 직책. [본문으로]
  3.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4.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이 글에선 자살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기에 가신에게 자신을 창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