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이 시대에 학문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센고쿠(戦国)를 헤쳐 나온 거친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없었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말년이 되어서야 논어(論語)의 강석(講釋)을 듣고 나선, 세상엔 재미있는 것이 있구나 라고 하며, 카즈에노카미(主計頭)도 한 번 들어보게나, 라고 아주 신기한 듯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권할 정도였다. 히데요시도 전혀 관심이 없어, 언젠가 비서가 ‘다이고(醍醐)사(寺)’의 다이(醍)라는 글자가 안 떠올라 곤혹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짓것 ‘다이(大)’라고 쓰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학문적 교양의 전통을 간신히 지키고 있던 곳은, 오산(五山 -
* 하단 역자 주)의 중들과 귀족(公家)정도로, 히데요시 이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술에는 관심이 있어도 학문에는 무관심하여 그것이 토요토미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런 상화에서 히타치노스케는 칸파쿠 히데츠구를 학문의 보호자로 꾸밈으로써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원천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리려 했다.

 히타치노스케는 이 계획을 히데츠구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에게 추진시켰다.
 겐류우 사이도우(玄隆 西堂).
 토우후쿠(東福)사(寺)에
승적(僧籍)을 두고 젊으면서도 오산에서는 제법 유명한 학승(学僧)이다. 사이도우가 히데츠구의 학문에 대한 것을 모두 처리했다.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오산의 승들을 모아, 시회(詩會)가 열리는 것이 정례화(定例化) 되었다.
희서(稀書)나 진서(珍書) 종류도 히데츠구의 명령으로 모아졌다. 시모츠케(下野) 아시카가 학교(足利学校[각주:1])나 카네자와 문고(金沢 文庫[각주:2])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제출시켜 쿄우(京)에 모아서는 쇼우코쿠(相国)사(寺)에 보관하며 일반에게 관람을 허용하였다.

 또한 온갖 수단을 다하여 모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각주:3]), 속일본기(続日本紀[각주:4]), 일본후기(日本後紀[각주:5]),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각주:6]), 문덕실록(文徳実録[각주:7]), 삼대실록(三代実録[각주:8]), 실사기(実事記), 백련초(百練抄[각주:9]), 여인호(女院号), 류취삼대격(類聚三代格[각주:10]), 령 35권(令三十五巻) 등을 조정에 헌상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야마토(大和)의 여러 큰 절의 중 17명을 소집하여,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필사(筆寫)시켰다.
 -무식한 풋내기
 라고 처음 상급 귀족(公卿)들 사이에서 은근히 기피당하고 있던 이 남자를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새삼 달리 보는 사람도 나타났다. 하기는 반대로 오바이트 쏠릴 정도라며 히데츠구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몇 번이나 초대를 받아도 히데츠구를 피하여 결국 끝까지 만나지 않았다. 학문이 더러워진다고 세이카는 은밀히 지우(知友)에게 소근거린 것을 보면 이 남자만은 히데츠구가 인기를 얻고자 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이카는 또한 그 지우에게,

 “저 인간 죽을지도 모른다”

 고 예언했다.

 “타이코우(太閤)의 자식이 생겼는데도 뻔뻔스럽게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앉아서는 도무지 관직에서 사퇴하여 물려날 생각을 하지 않는군. 필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세이카는 내다보았다. 세이카뿐만 아니라 쿄우(京)의 상급 귀족들는 숨을 죽이고 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가로인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만은,

 “타이코우 전하께서 칸파쿠 직(職)에서 물러나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물러나실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칸파쿠 자리는 다이묘우(大名)하고는 다르게 조정의 직(職)이며 천자(天子)에게 임명받는 것입니다. 만약 자진해서 물러나신다면 타이코우 전하가 내리신 훈계 제 3항의 조정을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말씀을 어기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마시길”

 이라고 논리적으로 못을 박았다. 히데츠구도 그것이 도리(道理)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타치노스케는 지금 여기서 히데츠구가 칸파쿠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지위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실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타치노스케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남자는 요컨대 히데츠구가 어떤 일에건 자신감을 갖게 하여 독립적인 인격을 주장할 때까지 교육해 가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이 즈음부터 히데츠구는, 그 소심하고 두려움에 떨던 마고시치로우와는 다른 인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인(武人)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말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궁정에서 사교를 행함에 있어 지식이 부족했던 이 남자는 상급 귀족(公卿)이 아닌 무인이라는 그 하나만을 크게 내세우는 것 외에는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진정한 무인 – 자신의 부하나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다이묘우들 – 에게는 자신이 무시받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민감히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의 무(武)를 세상에 알려주마’
 라고 생각했다.
 이 기세는 처음엔 지극히 온당하고 얌전한 형태를 취했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병법(兵法[각주:11])이라는 개인 격투기의 시합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산죠우(三条) 오오하시(大橋)에 방을 내걸고 방랑 병법자를 모아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서로 싸우게 하였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병법이라는 기술에 신뢰를 갖지 않았으며 병법자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검술(剣術)이 가능하다고 해서 고용한 적도 없었으며 더구나 검술지남역(剣術指南役[각주:12]) 등은 두지 않았고 그런 시합을 구경하고자 하는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히데츠구는 그 반대를 취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병법 유행의 중심지로 만들려 하였다. 라기보다는 그는 이 격투기 시합이 이외로 재미있음을 알았다.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는 것이었다.
 피가 낭자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고 하여 결국 시합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진검과 진짜 창이어야만 한다고 포고했다. 그 서로 죽어나가는 경기를 많은 처첩들과 함께 구경했다. 여자들이 그 처참함에 비명을 질러 기절이라도 하면 히데츠구는 크게 자존심을 만족시켜,

 “역시 여자군~. 이 정도를 가지고”

 라고 앙상한 배를 부여잡고 통렬히 웃어대며 더욱 좋아하였다.
 자기야말로 용사(勇士)라고 생각했다.
 한층 더 떠 다른 사람의 시합을 보는 것만이 아닌 자신도 이 살육에 참가하고자 했다.
 밤중에
미복(微服)한 채 길 끄트머리에 숨어서 약할 것 같은 사람이 오면 달려 나가 베었다.

 “이번엔 오른쪽 어깨부터 비스듬히 베어주마”

 “다음엔 정면에서 내려 쳐 주마”

 “간만에 여자의 목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싶다”

 등을 지껄이며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사람을 쓰러뜨렸다. 쓰러질 때, 사람은 생각 외로 세찬 땅울림을 내며 쓰러졌다. 이 죽이는 손맛에,

 “매사냥은 좆도 아니구만~”

 라고 히데츠구는 말했다.

 “내 무(武)를 보아라!!!”

 라고 어쩌다 단칼에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면 포효하듯이 목소리를 높여서는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사냥감인 시체의 옆에 모이게 해서는 심장에 귀를 대게 하여 확실이 멈추었는지 어땠는지를 확인시켰다. 나중에는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칼질하러 나왔다.

 키타노 텐만(北野 天神)의 토리이(鳥居) 옆을 미행(微行)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눈먼 장님이 지팡이로 발 밑을 살피며 다가왔다. 장님은 - 이 살인취미를 맛들인 사람에게 있어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손맛이 날까? 히데츠구는 침을 삼키며 다가가서는,

 “이보게~”

 하고 불렀다.


  1. 칸토우(関東) 아시카가 지역에 있던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였으나, 이 즈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후원자였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가(家)가 멸망 당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극심한 고난에 처해있었다. 때문에 이 때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사시(武蔵) 카네자와에 있던 서고(書庫). 카마쿠라(鎌倉) 시대 중기에 설립. [본문으로]
  3. 신대(神代)~697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4. 697년~791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5. 792년~833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6. 833년~850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7. 日本文徳天皇実録의 약자. 850년~858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8. 日本三代実録의 약자 – 858~887년까지 기록, 이상의 6개를 율령시대의 역사라 하여 ‘육국사(六国史 - 릿코쿠시)’라 한다 . [본문으로]
  9. 카마쿠라 시대의 역사서. 바쿠후(鎌倉 幕府), 무가(武家)의 역사 기록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와 대조되는 조정 쿠게(公家)쪽의 역사서. [본문으로]
  10. 헤이안(平安)시대의 법령집으로, 율령제 시대의 관직으로는 일 처리에 무리가 있었기에, 각 관직의 계급이나 배치를 사례별로 나누어서 일 처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 [본문으로]
  11. 이 당시 일본에선 '검법(劍法)'을 병벙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12. 검술 사범을 말한다. 다이묘우(大名) 등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고용되어 검술을 가르치는 직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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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히데요시[秀吉]가 이 마고시치로우[孫七郎]를 위해서 붙여 준 숙노(宿老)라는 것은 -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 直末],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로 모두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장교일 때부터 직접 키워 온 다이묘우[大名]들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히데요시의 의도인지.
  그들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온화하며 상식적이고 세상일에 익숙하여 [얼굴에 주름 많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건 조용히, 어떤 일이건 모나지 않게, 무슨 일이건, 참으세요, 참으세요 - 하고 그들은 입을 열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계속 그렇게 말하며 마고시치로우를 인형처럼 다루며 마고시치로우의 자유를 능수능란하게 봉하였고 더구나 히데요시에게는,

 "굉장히 뛰어난 기획력이 가지고 계시옵니다.”

 라고 하며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한 것처럼 말하여 히데요시의 기분을 좋게 하는데 전념했다.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마고시치로우가 큰 잘못이 없자,
 '과연……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변하는 법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타사(又左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도 그랬지”

 하고 측근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마에다 토시이에도 10대일 때는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양아치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토시이에가 옛날의 그 마타사인가하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후한 인물로 변해있다.

“송충이가 나비가 나비가 되듯이 마고녀석도 언제까지나 송충이일 턱이 없지”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도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이 혈연자 중 우두머리인 젊은이를 다음 해인 1585년 아직 18살짜리를 키슈우[紀州] 정벌군의 부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큰 실수는 없었다. 이어서 그 해에 시코쿠[四国]정벌에 참가시켰고 이때도 큰 실수 없이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드디어 마음을 굳혀 같은 해의 윤8월 마고시치로우에게 하시바 성[羽柴姓]을 허용함과 동시에 오우미[近江]를 하사했다. 또한 히데요시가 칸파쿠[関白]가 되자 마고시치로우는 아직 18살이지만 – 조정에 요청하여 종사위하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로 만들었다.
 성(姓)도 없이 백성으로 자란 젊은이가 갑자기 조정의 대신이 된 적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다음해인 19살에 산기[参議]가 되었다. 이미 산기 이상은 공경(公卿)이다.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행운에 공포를 느낀 사람이 있었다.
 실부(實父)인 야스케[弥助] – 지금은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였다. 쿄우[京]에서 자신의 아들인 마고시치로우를 만나,

 “천도(天道)를 두려워혀라”

 하고 오와리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로 지겹도록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야스케는 어디서 들었는지,

 “감투가 크면 어깨를 누른다는 말이 있고, 높은 가지가 부러지기 쉽다는 말이 있다. 옛날부터 그 실력 없이 영달을 얻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말로를 보낸 사람이 읍어.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딘다. 두려워혀라”

 고 야스케는 말했다.

 “필시 너는 너무 빠른 승진 때문에 니 마음이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여 결국 마음이건 뭐건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여. 그것을 두려워혀라”

 하고 계속 말했다.

 “어떻게 두려워하라는 건데요?”

 마고시치로우는 무능한 그리고 언제나 무언가에 떨고 있는 듯한 이 친아비의 안스러운 농사꾼 얼굴이,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기분 좋지 않았다. 마고시치로우는 말했다.

 “나는 무예가 뛰어나요. 지위는 그것에 걸맞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녀 아녀, 너는 잘못 생각혀고 있다”

 고 야스케는 말했지만, 산기[參議] 히데츠구 공[秀次公]이 된 마고시치로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되받아 칠 기력도 없어 고개를 숙였다. 침묵은 했지만 야스케는 마고시치로우가 장식 인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일 턱이 없다.
 단순히 토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 증거가 자신이었다. 오와리 오오타카 마을에서 끌려와 세 명의 아들을 전부 빼앗겼고, 더구나 자신은 토요토미 가문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서 자기 성과 이름도 아닌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고향 사람들은 이런 나를 뒤에서 뭐라고들 지껄이고 있을까?

 “아버지. 이젠 오지 마세요”

 마고시치로우는 참다 못하여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였다. 이미 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받았으며, 후지와라 성[藤原姓]을 가진 입만 산 공경(公卿)들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되는 이때에, 궁상맞은 얼굴을 하고 이곳에 와서는 오와리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것을 하나하나 말하는 부친이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날 괴롭히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양부(養父)인 히데요시는 달랐다.
 마고시치로우에게 부귀영화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천하의 모두가 납득할 만한 화려한 이력을 계속해서 만들어 주었다.

 20살 때에는 히데요시를 따라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때도 숙노(宿老)들의 보좌로 큰 잘못 없이 맡았고, 다음 해인 1588년에는 정삼위(正三位) 곤쥬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거기에 그 다음 달에는 종이위(從二位)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이례였다.

 “이 상태라면 필시 내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이 되실 것입니다”

 하고, 이 즈음 토요토미 가문에서 조정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승려 출신의 쿄우토 봉행[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는 맛깔머리 없는 아부를 하여, 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가 될 것 같은 젊은이를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고시치로우는 너무도 빠른 승진에 이미 감동이 둔해져 있었다.

 “그런가……내년에는 다이나곤인가”

 하고 멍해서는 기뻐하지도 않았기에 겡이는 마음속으로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바보녀석’

 겡이는 안색 하나 바꾸진 않았지만 마고시치로우의 예법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겡이였던 만큼, 이 마고시치로우를 경멸하는데 겡이만한  인간도 없었다.
 ‘이건 암만 가르쳐도 안 되겠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시 다이나곤이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이나곤이라는 함은 후지와라 가문[藤原家]의 공경(公卿)중에서도 아네코우지[姉小路], 아스카이[飛鳥井] 가문이라는 우린[羽林[각주:1]]의 가격을 지닌 가문조차 노년(老年)이 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관위(官位)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이진[大臣[각주:2]] 다음 가는 관위이옵지요.”

 라고 말을 하자, 과연 마고시치로우도 안색을 바꾸며,

“그런가? 그런 다이나곤에 내년에는 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기뻐 되물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사건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에게 있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사였다. 히데요시의 측실 아자이씨[浅井氏[각주:3]]
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내 몸에는 아기씨가 없는 것인가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장수(長壽)를 약속한다는 미신에 따라, 스테[捨[각주:4]]라고 이름 지어졌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뻤했다.
 천하는 거기에 맞추어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각각 영지(領地)가 휘청댈 정도로 수 많은 양의 축하 선물을 보냈었으며, 텐노우[天皇]조차 이 새롭게 등장한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호화로운 애기 옷을 보냈다. 이 덴노우의 하사품(下賜品) 행사를 빈틈없이 처리한 것이 마에다 겡이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존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다이나곤은?’
 하고, 이 해에 마고시치로우는 기대했지만 결국 히데요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당연했다. 마고시치로우의 관작(官爵)을 너무 높여버리면 이 아기의 장래를 위해선 좋지 않다는 명쾌한 그리고 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히데요시와 토요토미 가문의 관료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마고시치로우의 막중한 임무는 예전과 같았다. 스테가 탄생한 다음 해에 행해진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5]에서도 이 인물은 여전히 부사령관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 정벌이 끝나자 히데요시는 후계자의 위치를 잃은 마고시치로우를 위해서 공경(公卿)으로서의 관작은 올려주지 않았지만 다이묘우[大名]로는 가장 내실있는 위로를 해 주었다. 석고가 일약 100만석이 되었다. 주어진 것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와 그 옆의 이세[伊勢]였다.

 “기쁘지?”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지만, 마고시치로우는 어떻게 기뻐하면 좋을지 몰랐다.

 “열심히 해라”

 라고 히데요시는 또 말했다. 더 이상 열심히 하면 후계자로 한다는, 오랫동안 계속했던 그 말은 없었지만 대신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내 대리인이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하기에 대리인은 직무이지 관작이 아니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자 마자 계속해서 마고시치로우는 오우슈우[奥州] 정벌에 종군하였고, 개선하자 마자 쿄우[京]에서 쉴 틈도 없이 다시 쿠노헤의 반란 진압을 위해서 오우슈우로 출정했다.
 이때는 히데요시가 직접 가지 않고 마고시치로우가 처음으로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참전하였다. 단지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의 실력이 불안하였기에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동행시켰다. 이때 어쩌다 보니 이에야스의 관직이 다이나곤이었기 때문에 격을 맞추기 위해서, 단지 그런 이유 하나 만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 젊은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곤다이나곤[権大納言[각주:6]]에 임명받았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없이 출정하였고 오우슈우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후 반란은 진압된 이 해 10월 오오사카로 개선했다.

 오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형식적인 치하를 받았지만, 놀랍게도 이 외숙부의 자랑이며 육체적 특징 중에 하나인 북을 치는 듯한 목소리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말에 힘이 없었기에 떨어져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예전엔 시끄러울 정도로 활기찼던 쥬라쿠테이[聚楽第]도 마치 절간과 같이 조용했다.
 마고시치로우는 그 이유를 개선하는 도중 들었다. 2개월 정도 전에 츠루마츠[鶴松 – 스테를 말 함]가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1. 고급 귀족인 공경(公卿)의 가문의 격(格) 중 4번째에 해당하는 문벌. 코노에쇼우쇼우[近衛少将],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 등 무관을 거쳐 다이나곤까지 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2.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면 좌의정이나 영의정 급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후에 요도도노[淀殿]를 말함. [본문으로]
  4. 버린 애라는 뜻. 즉 내 놓은 자식은 오래 산다는 미신. [본문으로]
  5.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멸망시킨 전쟁. [본문으로]
  6. 곤[権]은 정규인수 외에 임명받은 사람에게 붙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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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1 0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되고 말았군요.
    더군다나 양자인 그는 히데요시에게 적자가 생기면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구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2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는 나름 능력있었기에,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고도 합니다.
    역사의 패자(敗者)란 없던 사실도 뒤집어 쓰는 것이다 보니, 정말 실제로는 어땠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3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 그런 경우도 많죠. 역사는 승자가 써내려간 것이라고들 하니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5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ㅎㄷㄷ군요.. 이녀석을 보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떠오르는군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무능의 극치로만 그려진다지만 실체는 어땠을련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5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갸는 무능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좋게 생각할려고 해도 그렇게 삽질만 하는지... 뚜렷하게 뭔가를 정해놓은 것도 없이, 그 때 그 때 땜빵메우기 식이다 보니 줏대도 없어보이고...결국엔 배신자라는 낙인밖에 남은 것이 없으니까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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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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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espylaco BlogIcon 세이버 2006.04.20 0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비운의 삿사 나리마사...정리가 잘 된 자료네요..담아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_jegal BlogIcon 도리구름 2006.07.16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이 잘돼있네요.. 저도 담아갈게요ㅎ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polarstar BlogIcon 북극성 2006.07.22 1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overmint BlogIcon 한걸음씩 2006.07.28 2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것도 담아갈게요.. 요즘 <토시이에와 마츠> 보고 있거든요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도 담아가겠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omet2her BlogIcon 루시안 2006.08.28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겠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jjang1798 BlogIcon 쌀집 2006.09.10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tpress BlogIcon beltpress 2007.01.04 1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자세하게 정리 되어 있군요 저도 도시이에와 마츠를 보고 있는중입니다.감사하게 읽고 갑니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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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jjang1798 BlogIcon 쌀집 2006.06.03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overmint BlogIcon 한걸음씩 2006.07.28 2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갈게요... 정말 잘 쓰셨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갔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지나가다 한마디 적고 갑니다. 말년에 이에야스 암살계획 시 직접 이에야스를 베겠다고 자청한 자가 바로 토시나가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봉행자(미츠나리 등)들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던 사람은 토시이에였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08.13 1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오히려 전 유코유코님의 토시나가 주도설을 처음 듣는군요. 토시나가가 그렇게 과감했다면, 토쿠가와 막부가 아닌 마에다 막부가 들어섰을 것 같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ovenoran BlogIcon 럽노란 2006.10.09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가 딸 치요가 결혼한 사람은 호시카와 타다타카 였습니다. 타다오키의 아들입니다. 타다오키의 부인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 부인이었구요~ 세키가하라 이후 치요히메는 호소카와 가로부터 이혼당합니다. 하지만 타다타카는 아버지의 이혼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채 이혼후에도 교토에서 치요히메랑 몇 년간 함께 살았다고 하더군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10.09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럽노란'님의 말씀이 맞군요.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입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16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라고 좋게 말을해도 우리입장에서는 국토를 유린하고 인구의 1/3이상이 죽었으며..10만명가량이 포로로 끌려간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정권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이죠..내가 일본사람이었다면 뭐..조금은 멋있었다고도 생각할수도 있으나..한국인의 입장에서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6.16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시각에서의 주장 고맙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군요. 종국엔 토요토미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세금을 낸 일반 시민들 까지도 모두 미워해야 할테니까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25 0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인전체를 미워한다는 시각이 아니라..특정정권의 중심인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위에 자료는 정말 좋은 자료인것은 분명하나..저건 분명 일본인의 시각에서의 역사적사실이니까요..토시이에라는 인물이 임진왜란때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는데..위의 자료 이상의 자료는 찾을수가 없네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noir3197 BlogIcon 누와르 2007.08.02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토시이에와 마츠를 보면서 알게?榮쨉 주인공이라 그런지 호감도가 팍팍 상승하더군요.. 히데요시에게 이런 멋진 가신이 있었다니..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02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케일이 워낙 커진 토시이에다 보니, '가신'이라는 말씀에 위화감이 드는군요. ^^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830922790210 BlogIcon 830922790210 2008.04.03 0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830922790210 BlogIcon 830922790210 2008.06.28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토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함께 임진왜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시대 통일 후, 즉, 도요토미 정권의 모든 무장이 전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지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은 정권의 정점에 있던 대명(다이모)들보다 전국시대 이후 공적을 세울 수 없어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의 참전이 더 많았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는 도요토미와는 오다 노부나가의 근습이였던 시절부터 친구라고는 하나 그의 유언장을 보면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향수는 없고 오다가의 가신이었을 때를 회상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오다 노부나가에 더 향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다 차치하고도 일단 한국사람인지라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호감도 상승입니다...;;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음, 굳이 변명하자면 전 황금왕보다는 오다가 좋다는... 그쪽으로 좀 더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토시이에의 유훈의 내용에 대해서도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은 이에야스에게 남긴 말 중에 몇가지만을 기억할 뿐...;; 도쿠가와라는 둥 도요토미라는 둥 떠드는 소리가 만연한데 지나간 도요토미에 몰중에서 도쿠가와를 무시하는 자나 반대로 도요토미를 무시자들을 멀리하라라던지, 전국시대의 유물을 계승하지 말고 천하인으로서 신도나 불교, 상업과 외교 가능하면 크리스찬도 포용하라고 했다든지 말년에 병으로 인해 누워만있던 토시이에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히데요리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진정 도요토미가를 생각한 장은 도시이에 뿐' 이라는 말도 전해지는 것 같고 말이지요. 정말 개인적으로는 전국시대 당시 오다가의 수하에서 함께 싸우던 이누(犬)와 사루(猿),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와 키노시타 토오키치 시절까지가 제가 좋아하는 기간이랄까...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했을 당시부터 지략가로서의 기량을 더 펼치는 도요토미이지만 왠지 싫다는... 그것도 다 저 또한 갖고 있는 전국시대 오와리에서부터 시작한 오다가의 향수랄까요...;;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끔없는 이야기 입니다만...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의 무기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아무리 찾아도 도요토미에게 하사받았다라고 해야할까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여하튼 현재 일본 국보로 마에다육성회에서 소지하고 있는 오오텐타 미츠요(大典太 光世)라는 칼에 대해서만 나올 뿐 애용했던 창의 이름이랄까 하는 것은 없더군요. 혹시 아신다면 리리플 부탁드리겠습니다...

  1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변명을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측면을 살펴 보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근거로 한 가지만을 가지고 내세워서는 조금 그렇지 않나? 라는 뜻에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글쎄요. 저도 아는 것이라고는 그 천하오검의 하나인 오오텐타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토시이에 정도의 인물이 어떤 한 무기에 구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오오텐타는 미술품일 뿐이고).

  1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2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님... 의견 감사드립니다. 다만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 보다는,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원정에 나섰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하신 토시이에의 유훈(遺誡11か条)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위키는 그렇게 쓰여 있는 듯 합니다만).
    히데요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난이 일어날 때의 대처 등이 쓰여있으며, 노부나가에 대한 것은 '공격시는 무조건 침공! 자국에서 방어 즐~. 노부나가공은 한 번도 자국내에서 합전을 한 적이 없다'인데, 그 외는 합전 시의 마음가짐, 중신과 공신에 대한 처우와 평가 등인데 이걸로 노부나가만 짱, 히데요시 그냥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위키는 개인적인 감상이 개입될 수 있는 백과사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