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금오중납언'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8.01.06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5- (7)
  2. 2007.12.30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4- (13)
  3. 2007.12.25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3- (5)
  4. 2007.12.2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2- (3)
  5. 2007.12.14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1- (12)

.

 

 다음 해인 1598 4.

 히데아키[秀秋]는 귀환 명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키요마[清正] 이하 수비군을 전장(戰場)에 남겨둔 채 후시미[伏見]개선(凱旋)하였다. 히데아키는 전쟁터에서 얻은 햇볕에 멋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멋진 때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아직 공사 중이었던 후시미 성[伏見城]은 완성되어 있었다. 히데아키는 가슴을 펴고 입성하여 히데요시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히데요시[秀吉]의 노성(怒聲)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이다.

 히데요시는 울산성 구원 때 히데아키가 졸병들과 함께 창질이나 한 것에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나는 너 같은 놈을 상장(上將)으로 삼을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까지 말하여 히데아키의 공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뭔 일이래

 처음엔 멍했다. 이어서 이거야 말로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 모두가 원망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참언(讒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히데아키는 천성이 소심한 탓인지 격앙()하여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더듬은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이 양아버지였으면서 이모부를 공갈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지 않아…아니…않사옵니다. 전하는 트린 틀린 보고를 받으신 거다 아니 겁니다.”

 

 라고 외치곤,

 

 그렇다면 여기에 감찰관들을 불러 주십시오. 그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 놈도 불러주세요. 전하의 앞에서 흑배 아니 흑백을 가릴 테니

 

 니 뭔 말을 한다냐?”

 

 히데요시도 오와리[尾張]의 사투리로 히데아키보다 더 큰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에 비해 히데요시는 이미 (老衰)해 있어 그 쇠약함에는 죽음의 그림자 조차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때 역사를 창조했던 그의 이성(理性)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단지 감정(感情)만이 그의 몸을 가늘게 흔들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이 괴이한 소년을(이라고는 해도 21살이었지만) 귀족으로 만들어 주며, 거대 다이묘우도 만들어 준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이 늙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큰소리 치며 공갈을 하다니 이 무슨 배은망덕이란 말인가.

 

 히데요시는 혓바닥을 잃어버린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가 그를 지배하여 호우(설명, 그림) 속에서 떨었다. 히데요시가 이런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원래 말이 많았으며 재치가 뛰어났고, 너무나도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 그런 점에서도 지금까지의 히데요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 말 않은 채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자리에 들겠다

 

 히데요시는 시중드는 신하에게 그리 말했다. 먼젓번에는 몸이 쇠약한 나머지 잠자리에서 오줌을 지려 몸이 오줌으로 적셔진 적도 있었다. 오늘의 히데요시는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분했고 불안했다. 저 배은망덕한 놈이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 상태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처분을 새삼 결심하였다.

 

 한편 히데아키는 아직도 성안에서 큰소리를 질러대며 히데요시의 측근들에게 욕설을 퍼부는 식으로 지랄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를 이리 내오라~ 고 하였다.
 그
미츠나리가 나왔다.

 

 킨고님 부르셨습니까?”

 

 미츠나리는 양 눈을 똑바로 쳐들고, 히데아키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히데아키님의 지금 상태로는 히데요시님의 분노가 당장 풀릴 것 같지가 않사옵니다. 나중에 히데요시님의 기분이 풀리시면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겠사오니 오늘은 일찍 자택으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조금도 떨림 없이 말했다.

 

 ……지부쇼우!!”

 

 히데아키는 작은 [脇差]의 칼자루를 쥐고 달려 들었다. 진짜로 벨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승이며 가로(家老)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제지했다. 그 손을 히데아키는 떨쳐버리고서는,

 

 네 놈도 저 지부쇼우와 한 편이냐?”

 

 라고 소리질렀다. 이 폭언에는 아무리 마사히로라도 참을 수 없어, 이 일이 있은 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스승 겸 가로의 자리에서 물러나, 그의 영지(領地)카가[加賀] 다이쇼우지 성[大聖寺城](6만석)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때 부속 가로인 스기하라 시게마사[杉原 重政]가 지랄하는 히데아키의 등 뒤에 매달리며 말렸다. 그러는 사이 이러한 소동을 알현(謁見)에 동석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의 대로(大老)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곧이어 일어서서는,

 

 킨고님, 졸자는 성을 나서려 합니다. 함께 나가시지요

 

 라고 조용히 말하자, 히데아키는 일종의 위압감에 굴복했는지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몸이 일순간에 멈추어지며 얌전해졌다. 이 광경은 익살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무게감있고 의지할만한 장로의 풍모로 토요토미 가문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의 뱃속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 반드시 올 것인 정변(政變) 만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예전부터 키타노만도코로[政所]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던 운도 있기에, 키타노만도코로를 통해 그녀를 따르는 다이묘우[大名]들의 신뢰를 얻고자 틈만 나면 은혜를 팔려고 하였다. 히데아키는 어리석다고 하여도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이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에 대해서 과분할 정도의 친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껴안기 듯 성을 나왔다. 자택에 돌아가 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3~4잔 정도로 숨 쉬는 것을 괴로워할 정도로 취했다. 원래 이 남자는 술에 약했다.

 자택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히데아키에게 사자(使者)로 코우조우스[主]가 파견되었다. 코우조우스에 대해서는 제 1 [살생관백]에서 언급하였다. 토요토미 가문 가정 내의 것들을 다스리는 여관장(女官長)이다. 히데아키는 토요토미 일족의 예우를 받고 있었기에, 사자도 딱딱한 관리가 아닌 토요토미 가문의 여관장이 맡았다. 히데츠구의 쥬라쿠테이[第]에서 물러나게 설득한 것도 이 비구니였다. 사람됨이 둥글둥글하여 누구에게나 경애 받았다. 그 비구니가 토요토미 가문의 두 양자인 경우에는 2번 다 저승사자가 되었다. 비구니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치쿠젠[筑前]과 그 외의 영지(領地)들은 몰수 되었습니다. 어여 빨리 에치젠[越前]으로 옮기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외치려 하였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대며 숨이 거칠어 졌다. 코우조우스는 이런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망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비구니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봐~ 내는 죄가 없다

 

 전하의 말씀이십니다. 얌전히 따르시는 것이 신상(身上)에 좋습니다

 

 죄가 어없단 말이다. 그런데

 

 히데아키의 뇌리에, 형 뻘이었던 히데츠구와 그 처첩들의 비참한 최후가 떠올랐다.

 도 죄라고 하던 모반의 사실 등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다.

 

 나를 죽여라

 

 라고 외쳤다. 미친 것은 아니었다. 히데아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냉정하다고 생각하였다.

 

 죽여 주길 바란다. 살아 있는 동안은 전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에치젠[越前]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을 내리신다면 더 이상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구니! 그렇게 전해주게. 차라리 이 킨고[金吾]를 죽이라고

 

 코우조우스는 도망치듯이 저택을 나왔지만, 그러나 이런 상태로 성으로 돌아가 아까 본 모습을 보고할 순 없었다. 곤란한 나머지 타고 있던 가마를 재촉하여 큰 길의 서쪽으로 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하고자 한 것이다.

 

 어찐 일이신가?”

 

 이에야스는 잘 여문듯한 볼에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킨고님에 대한 것입니다

 

 킨고님?”

 

 킨고님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사나워 한번 신경을 폭발시키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

 

 라고 히데아키의 상태를 고한 뒤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수긍하여 부하에게 구두로 계책을 알려 코바야카와[小早川] 저택으로 보냈다. 이에야스의 계책은,

 

 신상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이봉(移封)을 받아들이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치쿠젠[筑前]에서 곧바로 옮기지 말고, 또한 중신들도 옮기지 않으며, 우선은 부속 다이묘우[大名]의 부하들이나, 신규 채용한 부하들을 몇 명씩 에치젠[越前]으로 보내십시오. 한줄 요약하면 옮기는 척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졸자(이에야스)가 어떻게든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 전하에게 부탁하여, 명령을 철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에야스의 이치에 맞는 더구나 마음이 담긴 조언에는 히데아키도 감격하여,

 

 어떻게든 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모든 것을 맡겼다.

 

 다음 날 이에야스는 등성하여 누가 보아도 급한 일이 있는 듯이 히데요시에게 내알(內謁)을 청했다. 히데요시는 자리로 나왔지만 이에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쌍한 척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였다. 그 후 두 마디 정도 날씨나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물러났다.

 다음 날도 똑같이 내알을 청하였고 그러나 역시 똑 같은 짓을 하였다. 3일째도 그러했다. 히데요시는 수상히 여겨,

 

 나이후[内府=이에야스]께서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라고 물었다. 히데요시는 항상 이에야스에 대해서만은 부하라기 보다는 손님의 예를 취하여 다른 제후와는 다른 말씨를 사용했다.

 이에야스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킨고 츄우나곤님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알현을 청하였으면서도 막상 말할 때가 되면 전하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여 이렇게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 그일 때문인가

 

 히데요시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그 후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야스는 굳이 말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다음 날도 성에 올랐으며 또한 그 다음 날도 알현하여 끈질기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왜 그러신가? 아직도 킨고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가?”

 

 몇 일 지나 히데요시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에야스의 대답은 먼젓번과 같았다. 히데요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히데아키의 죄는 명백. 그러나 처분에 대해서는 나이후에게 맡기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희열에 찬 표정을 만들어,

 

 그렇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먼 장래를 위해서 좋은 계책을 내 놓겠습니다.”

 

 고 절을 하며 대답했다. 히데요시는 그 말 만으로도,

 

 아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이후의 그 말 한마디. 부처님의 목소리처럼 성스럽게 들렸습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부탁 드리겠다는 말은 히데아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리를 말한 것이다. 히데요리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처분을 잘 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성을 나와 자택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가로들을 불러 모아 히데요시의 말을 전했다.

 모두 이에야스의 호의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또한 이에야스는,

 

 나는 공의(公儀=정부(政府))의 대로(大老)로서 킨고님의 처분을 행하게 되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영지(領地)에 대해서는 예전과 같이 치쿠젠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싶다. 그러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곧바로 그럴 수는 없다. 히데요시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송구스럽다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처분은 세심했다.

 

 우선 각각의 자택에서 근신(謹愼)할 것

 

 이라는 것과,

 

 그 후 좋은 소식을 기다릴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생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죽어버리면 그 뒤는 흐지부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이 처분은 사무면에서 다소의 혼란을 만들었다. 이미 히데아키의 치쿠젠[筑前]의 옛 영토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되었기에, 미츠나리 등은 코바야카와 가문에게 비우라고 재촉을 하였다. 히데아키는 다시 이에야스에게 울며 매달렸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서,

 

 조금씩 반환하시길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코바야카와 가문은 영지(領地)를 조금씩 반납했다. 때문에 일부의 가신들은 코바야카와 가문에서 받았던 영지(領地)를 잃었기에 낭인(浪人)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낭인들이 100명 정도 생겼을 즈음 히데요시가 죽었다. 히데아키가 죄를 얻어서부터 4달이 지난 1598 8 18일이었다. 이에야스의 예상대로 히데아키는 그대로 옛 영토에 눌러앉게 되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의 막장은 계속되는군요(;;;)
    -쓰던 코멘트가 다 날아가 버려서 이거야 원;;-

    코우조우스는 전하도 돌아가셨는데 어쩔련지 모르겠습니다(-_-ㄲ..)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8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그래서 '가끔' 다 쓰고 난 뒤 우선 Ctrl+C를 눌러 복사를 해 둡니다 ^^
    (문제는 가끔 하다 보니 어떤 때는 왕창 쓰고 난 뒤 그냥 전송했다가 날라가고 난 뒤에야,
    '아~ 왜 하필 오늘따라 복사 해두지 않았지..'하면서 후회할 때가 더 많지만 말이죠..--;)

    코우조우스는 키타노만도코로 쪽 인간이다 보니 그 후에도 잘 살았겠죠.(줄 잘 서는 것도 능력)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이 블로그에서 안전하게 코맨트를 남기려면 메모장에서 우선 써놓고 ctrl+a + ctrl+c ctrl+v 3연타를 때리는게 안전한데...

    군바리다 보니 귀찮군요(...;)

    기다리다 못해서(아.. 근성이 없어서 원;) 긴코츄나곤 뒷쪽도 좀 읽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후, 이에야스 앞에서 쭈삑쭈삣되는 히데아키를 외면하는 키타노만도코로 당 애들을 보니 참.. 한편의 블랙코메디랄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킨고'가 맞겠지요..(이런 실수를;;)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8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리 읽으셨다면 저도 허투루 할 수 없으니 더 조심해서 써야겠죠 ^^

    그 애들도 우스웠겠죠. 자신들은 피를 뒤집어 쓰며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혈통으로 그 자리에 오른 킨고가 좋게는 보이지 않았겠죠.(더구나 비굴한 모습을 보았으면 더욱 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9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7.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 수완이 대단하네요. 계속 찾아가서 될때까지 뚱하니 있는다ㅎㅎ

.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31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허.. 치쿠젠 52만이 에치젠 15만석이 됐더라면야.. 세키가하라에서의 그 참혹한 꼴도 없었겠군요;

    킨고 녀석에게도 미츠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품을 만도 했겠는데요..(그런데도 뭘 믿고 미츠나리는 킨고 녀석이 서군에 남을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1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곳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칸파쿠 + 카미카타(上方)에 1개국 추가... 로 꼬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이 글에선 히데아키의 소령이 52만석이라고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후 얻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영토 55만(혹은 50만석...) 카미카타에 가까워 졌다곤 하지만, 전투를 결정지은 것에 비하면 적을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이 때는 33만 여석 근처가 아니었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어도 일본 위키를 보면 52만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군요.(ㅁㅎㅎ)

    徳川家康 (関東に256万石)
    前田利家 (加賀など83万石)
    宇喜多秀家(吉備東半57万石)
    毛利輝元 (吉備西半・安芸など120万石)
    小早川隆景(筑前33万石)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なお小早川隆景死後、上杉景勝(会津120万石)が大老となり、前田利家死後、嫡子の利長がその地位を継い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바야카와 석고가 의외로 적었군요. 뭐, 많은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 종가에 비하면..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8.01.03 0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히데아키의 그릇이야 그렇다지만 다른 소설속에서의 미츠나리는 음모에 능하고 째째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기도..
    반면 요즈음 評도 그렇고 葵徳川3代였던가? 드라마에서는 忠義者로 나오던데...긍정적으로 보는 면도 많은 것 같아요^.^
    만약関ヶ原에서 미츠나리가 이겼다면..이라던지...
    어쨌든 미츠나리는 고지식한 점으로 자신을 파멸시켰지만 센스만점에 교양도 겸비한..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 놓고 봤을 때 흥미만점 인물인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그 봉토라는 것이 저한텐 복잡 미묘하더군요.
    종가인 모우리 가에 비하면 (같은 오대로급이지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모우리 가문이 츄우고쿠 국인 연합체 중 맹주 격인 역사를 가졌다 보니, 히데요시가 이 만큼 다 니 땅~ 이라고 인정을 하여도, 동급의 다른 도자마(국인)들에겐 어쩔 수 없이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직할령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지...
    그에 비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치쿠젠에 새로 영지를 하사받은 만큼, 데리고 있던 국인들을 직신화 & 영지의 직할령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52만석의 근거는 후에 기어 들어 온 쿠로다 가문이 신고한 영지가 약 50만석 근처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쨩님//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방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이시다 미츠나리는 굉장히 유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소위 문치파 관료 조직이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꺼라 생각합니다.(후방 행정 보급 지원 없이 십만 단위가 넘는 인원을 움직일 순 없을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시다 미츠나리는 패장이기에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가모우 우지사토의 유능한 전투 집단이 그대로 미츠나리의 품에 안긴 것이나, 참언했다고 알려진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부하들도 세키가하라 때는 미츠나라 측에서 목숨을 던진 것을 보면,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나 세키가하라 때와 임진왜란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제가 과문한 탓일지도...), 갑자기 임진왜란 때와 세키가하라 사이에 두고 이시다에 대한 안 좋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혼자 음모론 놀이 하기에도 재미있더군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업데이트는 일요일 즈음이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부분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일단 히데아키의 봉토는 치쿠젠일국, 치쿠고와 히젠의 일부분 도합 35만7천석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

    그런데, 치쿠젠은 영제국상으로는 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일개국 만으로도 30만석强에 해당하지요. 그러면 치쿠고와 히젠을 더하지 않고도 표고 35만석에 달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히데아키 이후에 입봉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아키와는 달리 치쿠고, 히젠을 제외한 치쿠젠국 1개국 만으로도 50만석 이상(52만석인가 53만석인가)의 석고거든요.

    이것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고무줄 석고가 되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태합검지라는 실시의 과도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할 부분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생각해 보면, 히데아키가 치쿠젠에 재봉하던 당시, 表高는 35만석이라 해도, 實高는 50만석 이상(60만석 까지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후 쿠로다씨가 치쿠젠 일국에 입봉되었을 때는 검지결과가 반영되어 표고가 실고에 맞게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위 내용에서 히데요시의 독백인 "치쿠젠 52만석은 너무 많다."라는 말은 치쿠젠 검지가 끝났으나, 아직 실제 표고 상향조정은 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중에는 그래도 고증을 잘 해주는 시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
    그런데, 제가 큐슈쪽 검지 완료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뻘쭘하네요.
    단순히 쿠로다 나가마사의 후쿠시마번 52만석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시바선생의 면목을 봐서라도 검지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6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흐르는 돌입니다 ^^(流石)
    저는 그 쪽으론 생각도 못하고, 혹시 쿠라이리치(蔵入地)를 코바야카와 가문이 담당하기에 그런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서(어느 책인가에 있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적었는데... 이야~ 역시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요. ^^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6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 리플은 거의 추리(...) 수준이어서 신빙성은 없어요. ^^;;

.

  어느 날 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히데요시소소(小小)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생각난 듯이,

 킨고[金吾]님에게도 좋은 양갓집이 생긴다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만만세겠군요.”

 하고 히데요시를 찔러보았다. 양자(養子)로 보낼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죠스이가 뭔가를 꾸미기 시작한 것을 알아채었다. 거기에 동참해 주고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뭐 그렇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선 곧바로 말을 딴 데로 돌렸다. 그 한마디만으로 죠스이는 족했다. 나머지는 양갓집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모우리 가문[毛利]이 좋겠군
 이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천하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인 것이다. 전성기를 구축한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등장한 이후 그 영지(領地)산인[山陰], 산요우[山陽] 10개 지역[]에 이르며, 노부나가[信長]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오다 가문[織田家] 최대의 적이었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자, 히데요시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모우리 가문은 무릎을 꿇고 토요토미 가문의 종속 다이묘우가 되었다. 마침 당주(當主) 츄우나곤[中納言] 테루모토[輝元]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킨고를 거기로 보내자
 서쪽의 거대 제후와 끈을 이어두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토요토미 가문도 든든할 것이고 또한 모우리가문 자신들에게도 든든하니 쌍방에게 득인 것이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小早川 隆景]를 꼬시자
 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참고로 모우리 가문가정(家政)은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항설(巷說)에 말하는 [세 대의 화살]이며 죠스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모토나리가 죽기 직전에 세 명의 아들을 불러, 세 대의 화살을 건네주고는 꺾어 보라고 하였다. 한 대씩 꺾을 때는 간단히 부러졌지만 세 대를 한꺼번에 꺾고자 하니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모든 일이건 협력하라는 교훈이며 그것이 가법이 되어 있다. 이때의 삼형제가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며, 이후 모우리 씨[毛利氏]를 중심으로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가문은 하나의 연합국가처럼 되어 있었다.

 지금은 장남 타카모토가 죽어 본가(本家)는 그의 아들 테루모토가 잇고 있다. 킷카와 모토하루도 죽어 지금 삼형제 중에서 생존해 있는 것은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으로, 이 타카카게 스스로도 큰 영토를 가진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동시에 본가인 모우리 가문의 최고 고문을 겸하고 있다.
 설득하고자 한다면 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일 것이다.

 죠스이건 타카카게건 둘 다 후시미[伏見]에 집이 있다. 죠스이의 집은 이와야마 산[岩山] 기슭에 있으며, 여기서 산을 넘은 다음 동쪽으로 가면 성 밑에서는 가장 광대한 코바야카와 저택이 있다.
 
죠스이는 집을 나섰다. 만약을 위해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라는 노인과 동행했다.
 
치카마사는 히데요시가 직접 키워낸 다이묘우[大名] 중 한 사람으로, 260석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사누키[岐] 타카마츠[高松] 17만여 석의 신분이 되어 있다.

 둘이서 산을 넘었다. 왼편에 아키야마[秋山]의 언덕에 자라고 있는 거먕옻나무의 단풍이 눈에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Rhus succedanea L.
Rhus succedanea L. by kodamatic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거먕옻나무]

 일이 있을 때는 둘이서 가는 것이 일본인의 풍습이다. 나중에 서로가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카게는 이미 환갑을 넘기고 있었다. 온후한 인품이지만 센고쿠[戦国] 한창일 때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그의 능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둘을 별실로 인도한 후 그 사이 다실(茶室)을 준비하고 곧이어 거기로 옮겨서 ()에 둘러 앉아 잡담을 하였다.

 건께~ 딴게 아니고 말이지

 라고 죠스이는 고향인 하리마[播磨] 사투리가 혀에 남은 말투로 히데아키 양자 건에 대해서 말했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과 각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모우리 가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이 이상 좋을 것이 없지요

 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과연~ 이는 정말 좋은 이야기군요

 라고 타카카게는 차를 끓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지만 속마음은 반대였다.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모우리 가문 최대의 위기다'
 하고 생각하였다.

 모우리 가문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선조(先祖)도 모르는 벼락치기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타카카게의 망부(亡父) 모토나리가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1000관에 불과한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고는 하여도, 모우리 가문 그 자체는 옛부터 명족(名族)으로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의 만도코로[政所][각주:1]의 최고책임자인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 ] 이래의 역력(歷歷)한 가계(家系)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가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르는 히데요시의 친척을 들인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성스러운 신전(神殿)에 똥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타카카게는 생각했다. 역대의 선조들은 둘째치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남보다 더 신경 쓴 죽은 모토나리가 저 세상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이는 내가 어떻게 되건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타카카게는 결심했지만, 그러나 얼굴엔 미소를 계속 지으며,

 말씀하신 대로 모우리 본가에게 있어서 이 정도로 축하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주 테루모토가 들으면 굉장히 기뻐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둘은 돌아갔다.

 이 후 타카카게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슬며시 집을 나와 후시미 [伏見城]해자(垓子) 근처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세야쿠인 젠소우[ 全宗]를 방문했다.

 세야쿠인 젠소우는 무로마치[室町] 말기의 명의(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의 제자로 그 능력이 뛰어나 처음엔 궁정의(宮廷醫)였지만 지금은 히데요시의 시의(侍醫)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의 그림자처럼 곁을 떠나질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전제군주(專制君主)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세야쿠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들도 세야쿠인을 정중히 대했다. 타카카게도 이 시의장(侍醫長)에게 예물(禮物)을 보내어 히데요시 근처에서 일어나는 정치 쪽 정보를 얻거나 하였다.

 세야쿠인에게 물어보면 죠스이가 말한 것이 히데요시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허허~ 저는 처음 듣는 소리군요.”

 세야쿠인 젠소우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히데아키를 양자로 보낸다는 듯한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보낼지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심……’
 타카카게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데요시의 생각이 아니라면 아직 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좌담(座談)에서라도 "모우리"라고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날, 타카카게는 후시미 성의 대문을 지나 성 안에 있는 -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저택이 있어서 이름 붙여진 이시다 성곽[石田廓]에 있는 미츠나리의 집을 방문하였다.

 미츠나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죠스이와는 다르게 공식적인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며 또한 히데요시의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기에, 때로는 히데요시의 의사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가(權勢家)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미츠나리를 통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이미 출근하여 집에 없었다. 타카카게는 실망했다.
 
아니지.. 그렇다면……'
 하고 타카카게는 다시 생각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미츠나리에게 부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히데요시 곁에서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는 세야쿠인 젠소우의 입에서 타이코우[太閤]의 귀에 사적인 말로 흘려 보내는 것이 빠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여 곧바로 세야쿠인 저택으로 길을 서둘렀다. 타카카게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로서는 이 이야기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
모우리 본가'라는 계획이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혼자 생각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이미 이코마 치카마사가 옆에 있던 자리에서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이었다. 생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곧바로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가 그대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타카카게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었다. 이쪽에서 선수를 친다.
 
-
부디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님을 저희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양자로 얻고자 합니다. 이를 허락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고 타이코우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가로 향해진 총구를 분가(分家)인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소리를 치는 것과 같았다.
 
죠스이가 생각해주는 척 하는 계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없다
 타카카게는 전쟁터에서 머리를 쓰는 듯한 심경이었다. 죠스이와는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모우리 공격군 사령관일 즈음, 빗츄우[備中]의 전쟁터에서 서로의 지략으로 무기로 불꽃튀기며 싸웠다. 그때의 인연(因緣)이 쌓이고 쌓여 좋은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 억울한 것은,
 
저 킨고 좇병신 때문에
 라는 것 때문이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인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도 분가이긴 하지만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명문가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대대로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지토우[地頭]였던 가문으로, 카마쿠라 막부의 가문 목록[御家人帳]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명문가를 모토나리가 책략을 써 3남 타카카게가 그 가문을 이었다. 타카카게에게는 양갓집이라고는 하여도 이 명문가의 피에 히데아키의 피가 섞여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타카카게의 감정은 그에게만 있는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다이묘우에는 카마쿠라 때부터 이어지는 명문가가 몇몇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사타케 씨[佐竹氏], 모가미 씨[最上氏], 모우리 씨, 코바야카와 씨, 시마즈 씨[島津氏] 등이 그런 명문가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토요토미 가문의 위세에 굴복하였다고 하여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비천한 피를 경멸하고 있었다. 만약 토요토미 가문이 그들에게 사위를 보내준다고 하면 전부가 타카카게처럼 전율(戰慄)할 것이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서자(庶子)가 있었다. 그런 자기 자식을 제쳐두고 자신의 가문에 히데아키를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그 감정을 죽였다.

 다행히 세야쿠인 젠소우는 아직 집에 있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자신이 히데아키를 굉장히 원하고 있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그 말을 전해달라고 이 늙은 의사에게 부탁했다.

 졸자는 타이코우 전하의 깊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우선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쓰러진 직후 전선(前線)에 있던 히데요시는 정면의 적인 모우리 씨와 급히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 화친 교섭에 히데요시의 군사 쿠로다 죠스이가 활약하였다. 타카카게의 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는 적극 반대하였지만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인물을 꿰뚫어보고 히데요시와 싸우는 것 보다 오히려 그에게 천하를 잡게 하고 그 세력하에서 모우리 가의 안태(安泰)를 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그렇게 되었다.

 만약 그 때 화친하지 않고 모우리 쪽이 결전에 임했다면 히데요시는 쿄우[]의 미츠히데를 물리치지 못하고 어쩌면 천하를 놓쳤을 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타카카게를 두텁게 대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임에도 독립된 거대 다이묘우로 만들어 치쿠젠[筑前] 1[]이라는 광대한 땅과 치쿠고[筑後], 히젠[肥前]의 각각 두 군() 4개 군()을 잘라 주었고, 관위(官位)도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으로 하여 본가의 모우리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하였다. '깊은 은혜'라는 것은 그걸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늙고 앞으로도 얼마나 살지 몰라 이제는 타이코우 전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사 받은 이 땅들을 전하의 양자이신 킨고님에게 물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야쿠인도 이 미련 없는 태도에는 놀랐다. 다이묘우라는 자가 그 봉토(封土)를 버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츄우나곤 미치신건가? 그렇지 않음 어지간히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으신건가?’
 하고 세야쿠인은 오랫동안 침묵하며 그 진짜 뜻을 살피기 위해서 타카카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타카카게에서는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구 세야쿠인도 고개를 숙여,

 잘 알겠사옵니다

 하고 말한 후 고개를 들어,

 그 후 츄우나곤님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많이는 바라지 않습니다. 산요우도[山陽道] 어딘가에 조그맣게 은거할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은거할 곳이라면 보통 기껏해야 3000석 정도이다. 세야쿠인은 말을 잃었다.

 세야쿠인은 서둘러 성으로 등성하여 히데요시에게 전했다. 히데요시는 아이같이 기뻐했다. 이 인물의 천재성은 그런 것 즉 지금보다 나이를 덜 먹었을 때는 뭐든 다 꿰뚫어 본 상태에서 누가 보아도 아이같이 행동하여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굉장함 에 있었지만 말년의 이 시기가 되자 노쇠가 뚜렷하여, 그런 천진난만함은 단순히 소박함으로 끝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가문이 명문가라고 기뻐하는 것에, 보는 세야쿠인이 창피할 정도로 기뻐하며,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히데아키 녀석에게도 명예다.

 타카카게 안도감에 빠졌다. 그러나 이후 바빠졌다.
 문제가 된 본가의 후계자 자리를 서둘러 메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타카카게는 무리를 하였다. 모우리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타네다 모토키요[種田 元[각주:2]]라는 사람이 있다. 모토나리 말년[각주:3]에 얻은 서자로,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배다른 동생이 되지만 생모의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아들로 미야마츠마루[宮松丸[각주:4]]라는 소년이 있어, 그를 모우리 가문에 양자로 들였다.

 종삼위(三位) 츄우나곤[中納言] 킨고 히데아키로 보면 - 피의 존비(尊卑)라는 점에서 모우리 가문 가신의 자식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무사히 낙착(落着)되었다.
  1. 카마쿠라 막부의 정무와 재정을 담당. [본문으로]
  2.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 元清]'를 말한다. [본문으로]
  3. 모토나리 54세 때. 당시 평균 수명은 50세 근처라고 한다. [본문으로]
  4. 후에 정유재란 때 일본군 우군(右軍) 총사령관이 되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25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듯 37만석의 주인이 되는거군요... 도무지 히데아키 녀석도 살생관백처럼 '재능'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녀석인듯;; 모든건 주변인들이 힘써준 결과라(..)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25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휘둘렸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 책 자체가 히데요시라는 거대 소용돌이에 빨려 든 인물들의 이야기 이지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7.12.28 1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아키의 초임관위가 사에몬노카미인줄 알았는데, 발해지랑님 글을 보니 우에몬노카미로 나오는군요. 제가 잘못알고 있었던듯 하네요. 뭐 어차피 그관직이 그관직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29 1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의 말씀이 맞을 것입니다.
    시바 선생이 일부러인지 착각인지 몇몇 부분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이 있더군요.
    ...그쵸...어차피 그 관직이 그 관직 ^^

  5.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죠스이와 다카카게간의 공방전이 정말 재밌군요

二.

 조선 출병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6살의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은 이미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내려간 히데요시를 뒤따르기 위해서, 새로 하사 받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亀山城]에서 준비 중이었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이 행군에 특히 총애하던 요도도노[淀殿] 한 명만을 데려갔다. 많은 측실 중에서 특히 요도도노가 선택된 것은,

 “저번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각주:1]] 때 요도[淀] 녀석과 함께 하여 바라던 대로 승리를 얻었다. 요도 녀석은 이젠 전장(戰場)의 길례(吉例)이다”

 며 다른 측실의 질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있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요도도노에게서는 자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접한 수 많은 여성들 중 요도도노만이 히데요시의 아이를 낳았다. 츠루마츠[鶴松]였다. 이 츠루마츠는 안타깝게도 일찍 죽어지만 다시 한번 임신할 수도 있는 법. 이 희망이 히데요시에게 요도도노를 함께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음 해인 1593년 3월에 히젠 나고야로 향하였는데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함에 앞서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성으로 갔다. 17살 때였다.

 “수고하는구나”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누구를 만나건 계속 미소를 띄우는 이 여성이, 킨고츄우나곤 히데아키에 대해서만은 미소를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물었고 이때도 역시 입술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히데아키가 가진, 살아있는 생물의 추잡함이 배어 나오는 끈적끈적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런 주제에 히데아키에게는 뻔뻔함이 없었다. 두꺼운 얼굴로 양어머니에게 비위를 맞추면 좋을텐데, 그녀가 안 좋은 기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자 갑자기 겁먹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고 불쌍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 표정이 반대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위를 더욱 더 상하게 만들었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들어가 더욱 더 찡그리는 얼굴을 만들어 버렸다.

 옆에 있던 히데아키의 수하는 조마조마했다.
 이 즈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가신(家臣) 중 한명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스승을 겸한 부속 가로(家老)가 되어 있었다.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히데요시가 오우미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를 하던 때부터 섬겼으며 전쟁터에서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데도 밝아 히데요시의 가장 중요한 토지 정책이었던 소위 태합 검지(太閤 検地[각주:2])의 실무 담당자로서 이름을 높였다. 백성을 잘 다스렸던 만큼 세상 물정에 밝았고 처세에 능했다.
 앞으로 나가서는,

 “키타노만도코로님. 실례입니다만 킨고님에게 여행 떠나는 석별(惜別)의 말씀이라도 받고자 합니다”

 라고 히데아키를 대신하여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 전쟁터로 떠난다고 하는데 양어머니가 이래서만은 안 되었다.

 “그런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젠[肥前]에서는 마시는 물에 신경을 쓰시길”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우라면 통례인 여행길에 쓰라고 주는 선물도 없었다. 히데아키는 면목을 잃은 채 성을 나섰다.

 히젠 나고야에 도착한 것은 3월 22일이었다.
 히데아키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나고야 성에 입성하여 양아버지인 히데요시를
알현(謁見)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가 몸에 건친 갑옷의 화려함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출발에 앞서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받았나 보구나”

 라고 기분 좋은 듯 물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라 하였다. 히데요시는 어느 정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기분은 어떠시던가?”

 하고 야마구치 마사히로에게 물었다. 마사히로는 정직히 그 모습을 전했다.

 “허허~ 길 떠나는 자식에게 두 마디뿐인가”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끄덕거렸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히데츠구[秀次]에게 만일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히데아키를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로 세워야 하는데도 양어미라는 처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당신은 잘못했네
 하고 질책하는 뜻을 담은 편지를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의 처에게 보냈다.

킨고는 22일에 나고야에 도착하였소.
수하들도 많이 동원해 왔으며, 거기에 행장(行裝)도 화려해서 나는 칭찬을 해 주었네.
히데아키가 오오사카에 고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신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필요한 도구들도 준비해서 주지도 않았다고 하더군. 왜 그러하였는가?
당신에게는 자식이 없네. 저 아이를 귀여워하지 않고 어느 자식을 귀여워하려고 하는가?
킨고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나는 저 아이에게 나의 은거료(隱居料[각주:3])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네.[각주:4]
그 정도로 이 히데요시가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당신도 너무 구두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오.
라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날부터 2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 토요토미 가문의 사정이 변했다. 요도도노가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기쁨을 곧바로 오오사카의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써 보냈지만 내용이 미묘했다.

요즘 감기에 조금 걸려서 붓을 들지 않았네.
지금은 나아져, 이 편지는 나아서 처음 붓을 들어서 쓰는 것이네
 즉, 붓으로 뭘 쓸 때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일 먼저 쓴다는 것을 말하며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라고 덧붙여서 쓰는 듯이 히데요시는 썼다.
니노마루도노[二の丸殿=요도도노]가 임신했다고 들었네.
고 남 이야기하는 듯 말했다.
경사스러운 일이긴 한데 이 히데요시는 아이가 필요하지 않네. 정말 필요하지 않아. 당신도 그런 생각으로 이 타이코우[太閤]를 이해해주시게.
하긴 이 하데요시에게 아이는 있었지. 츠루마츠[鶴松]라는. 그건 다른 집에 주었지.[각주:5]
그러니 이번 아이는 히데요시의 아이가 아니네. ‘니노마루도노’만의 아이이네
히데요시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런 말돌리기를 하였지만 물론 본심이 아니었다. 다만 이 이상한 논리의 뒤에는 당시의 미신과 관계가 있다.
- 내 아이가 아니다. 주워온 아이다
 이러면 아이가 건강히 자란다고 한다. 죽은 츠루마츠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버린 아이라는 뜻으로 ‘스테[捨]’라고 하였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머지않아 ‘히데요리[秀頼]’가 되지만, 태어났을 때는 주워 온 아이라는 뜻으로 ‘히로이[拾]’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미신을, 즉 요도도노 한 사람만의 아이라는 것을 신불(神仏)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내보네 야마시로[山城]의 요도 성[淀城]으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두번 째 성곽[二の丸=니노마루]로 거처를 옮겨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해의 8월 3일이었다.

*****************************************************************************************

 히데요시는 기뻐서 사람들이 ‘이제는 미치신 건가’하고 걱정할 정도로 날뛰었다.
 이 천재도 이 즈음부터는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노망기(老妄氣)가 들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원정군의 지휘를 내던져둔 채 나고야 성을 나와 오오사카로 돌아왔다. 그 사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쌓인 이야기라도 함께 하세
라고 써서 보냈으며 요도도노에게도,
거듭거듭 말하지만 히로이에게는 젖을 잘 먹이거라. 젖이 많이 나오도록 너도 밥을 많이 먹어라. 또한 여러가지 신경을 쓰면 젖이 잘 안 나오니 신경 쓰지 않도록 해라
라 써 보냈다. 거기에 한 번 더,
건강을 위해서 을 받거라. 단, 히로이에게 뜸은 필요 없다. 엄마(요도도노)가 해 주어도 안 된다.
라는 편지도 보냈다.

 히데요시가 기뻐 날뛰면 날뛴 만큼 킨고츄우나곤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이래서는 토요토미 가문에 언젠가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라고 내다본 것은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였다.

 죠스이.
 통칭 칸베에[官兵衛]. 관(官)은 카게유노사칸[勘解由次官].
 히데요시가 천하를 쥘 즈음부터의 꾀주머니였다. 계략, 책략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지 기묘할 정도로 사리사욕이 없었다. 그에게 책모(策謀)란 사욕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주객(酒客)이 술을 사랑하는 것처럼 책모를 좋아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일종의
선풍도골(仙風道骨)까지 느끼곤 하였다.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 등지에는 죠스이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고, '타이코우님이 세우신 공(功)의 절반은 저 절름발이님(죠스이)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토요토미의 천하가 되어서 죠스이가 얻은 것이라고는 불과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0여 만석으로 보잘 것 없었다.

 여담이 되겠지만 어느 사람이 히데요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히데요시는,

 “농담하지 마라”

 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절름발이에게 100만석이라도 쥐어주면 나중엔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장소에서도 말했다.

 어느 날 밤 측근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제후(諸侯)의 품평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갑자기,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손에 넣을까?”

 라고 물어보았다. 물론 좌흥(座興)을 돋우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했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건 절름발이다”

 라고 말했다. 모두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면 쿠로다 죠스이는 기껏해야 10여 만석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런 조그만 영지(領地)로는 많은 병사를 모으기도 힘들다. 그렇게 이의(異議)를 말하자 히데요시는, '아니지~ 아니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 절름발이의 굉장함을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옛날에 그와 거친 전쟁터에서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나만이 그의 굉장함을 알고 있지”

 라고 말했다.
 

 죠스이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이외라 할 수 있는 야박한 처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뛰어난 공적을 많이 세워 자신의 주군을 떨게 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고 한다. 죠스이의 지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옛 공을 내세워 은상을 많이 바라면 죠스이의 몸은 파멸할 것이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손에 넣자 죠스이를 중요한 자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라면 나의 두려움도, 진심도 알아줄 것이다’
 라는 죠스이의 총명함에 기대는 부분도 있었다. 대신하여 문관(文官)들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공로자들을 거북하게 여겼기에, 히데요시와 그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는 그것에 불만을 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은 하나의 시대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후 죠스이는
보신(保身)을 위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은거를 결심. 가문도 성도 영지(領地)도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물려주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때는 놀라,

 “영지(領地)로 돌아갈 생각은 마시게. 쿄우[京]에서 내 상담상대가 되어 주게”

 라 말하며 쿄우에서 생활할 수 있게 500석을 주었고 이어서 2000석으로 가증해 주었다.
 그 죠스이가,
 ‘토요토미 가문의 평온을 위해서’
 라며 계책을 세웠다.
 취미나 오락 같은 것이다.
 선조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던 가신(家臣)이 아니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죠스이는 히로이 – 히데요리[秀頼]의 출생으로 인해 관백 히데츠구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히데츠구의 행패는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명목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죠스이는 항상 히데츠구의 바둑 상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넌지시 몸조심할 것을
간언(諫言)하였으며 또한,

 “자진해서라도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고 싶다고 하십시오. 타이코우[太閤] 전하는 그런 모습을 가련(可憐)히 여기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지만 히데츠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죠스이는 히데츠구에겐 가망이 없다고 단념하여 그의 저택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다음은 킨고 히데아키였다.
 ‘히로이님이 태어난 이상, 킨고는
폐물(廢物)이 될 뿐이다. 킨고를 어떻게든 해 드려야지..'
 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이었다.
 죠스이는 더이상 히데요시의 꾀주머니도 아니었으며, 또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것을 신경써야 하는 역할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이 죠스이를 특별히 의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디까지나 이 남자만의 취미였다고 할 수 있다.
 죠스이는 그 재능을 표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매일매일이 심심했다.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쓸데없는 참견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씨[北条氏]를 정벌한 전쟁. [본문으로]
  2. 히데요시[太閤]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 등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4. 다른 부분은 관백(関白) 히데츠구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본문으로]
  5. ‘죽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25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 시메온 죠스이께서 저 폐물에게 무슨 계책을 주려고 하는지.. (예수 믿으면 천국갑니다.. 류의 전도?!)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25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예전 김성한 작가님의 '소설 임진왜란'(제가 이길로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에서는,
    물러나는 원균의 조선수군을 무작정 쫓아가자는 킨고님을 돈 시메온이 말리며 계책을 하나 알려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뜸금없는 말이지만, 계책을 준다고하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

  3.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죠스이 소개가 너무 재밌네요 책략 계략이 취미ㅎㅎ 얼마나 심심했으면ㅋㅋ

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통칭 네네(寧々). 히데요시의 정실이기에 당연히 토요토미 가문[豊臣家門] 가정(家庭)의
주재자(主宰者)이다. 소탈하고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종일위(從一位)라는 신분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히데요시와의 대화도 누가 보건 말건 꺼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란부[舞]를 보고 있었다. 보던 중 뭔 일인지 말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언성을 높였지만 둘 다 오와리 사투리로 빨리 내뱉었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히데요시도 등이 휘도록 웃어 제꼈다.
 ‘싸움이 아니었나 보군’
 이라 생각하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안심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런
예인(藝人)들에게,

 “지금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어떤 때이건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어, 쿄우카[狂歌]나 임기웅변(臨機應變)적인 재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예인들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큰 북을 치던 이가,

 “부부싸움에 모두 놀랐습니다요”

 라며 갑자기 북을 쳐 좌중을 놀라게 하며 대답했다. 피리를 불던 이가 곧바로,

 “어느 쪽이건 삐리리비리리♪”

 어느 쪽이건 잘못 하였고() 또한 말이 맞다()……라고 피리의 음에 맞추어 말하였다. 이 재치 있는 대답에 부부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런 귀부인(貴婦人)이었다.

 이 귀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운명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이 성립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이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하가 살아계신 동안만이다.’
 라 생각하여 다음에 이 천하를 계승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당연 누구의 눈에건 실력을 말해도, 혈통을 말해도, 인물을 말해도, 관위를 말해도
제후(諸侯) 필두(筆頭)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을 존중하고는 있었지만, 뒤로는 이에야스와 끈을 잇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히데요시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은 이에야스와 다이묘우[大名]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면서도 은밀히 이에야스에게,

 “절 부하로 여기시옵소서.”

 라고 까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불행은 혈연(血緣)이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히데츠구 이외에 더 이상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혈연이 아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까지도 양자로 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일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킨고 츄우나곤[金吾 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 된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히데아키는 키타노만도코로의 혈연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친정집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곳이 있다.
 그녀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미관(微官)이었던 스기하라[杉原 = 후에 키노시타[木下]로 성을 바꾸었다] 스케자에몬 사다토시[助左衛門 定利]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이모가 있던 아사노 가문[浅野家]에서 키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과 동시에 이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도 아사노 가문도 제후가 되었고, 기묘하게도(이유는 있지만) 키타노만도코로의 이 두 친정만은 토쿠가와 다이묘우[徳川大名]로 남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살아 남는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할 즈음, 키타노만도코로의 생가 스기하라 가문 당주는 그녀와 연년생 동생 이에사다[家定]였다. 그 이에사다에게는 자식들이 많아 키타노만도코로는 일찍부터,

 “니가 가진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한 명 갖고 싶구나”

 고 말했었다. 그 키노시타 가문에 다섯 번째 남자아이가 1582년 태어났다. 히데아키였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츄우고쿠[中国] 방면 사령관이었으며, 키타노만도코로는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었다. 스기하라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있었기에 당연히 그 집은 나가하마 성 밑에 있었다. 그녀는 성주 부인이면서도 자신의 친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생이자 부하인 이에사다의 집에 방문하였다.

 “얘는 참 귀엽구나”

 아기를 들여다보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아예 이 아이를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에사다에게 말하자,

 “그 정도로 맘에 드신다면”

 하면서 누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서 돌아 온 히데요시에게 그 뜻을 말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양자로 삼자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는 간단히 처의 요청을 승낙하였고, 이로 인해 히데아키는 나가하마 성에서 돌보게 되었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키타노만도코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였기에 아기보기도 –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 치고는 능숙했다.

 히데아키는 무사히 성장했다. 통칭을 타츠노스케[辰之助]라고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흰 피부로 눈동자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똑똑해 보였다.

 “저 아이가 자라면 한 몫을 할만한 인물이 될 거에요”

 라고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히데요시도 고양이와 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 히데요시는 자기 처의 장점 중 하나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도 히데아키에게 기대를 하였다. 집안 내에서 히데아키의 위치는 양자 서열 1위인 히데츠구의 동생이라는 순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에게 만약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가문의 상속권을 주어도 좋다고까지 히데요시는 생각하여,

 “네네, 이 가문을 저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게”

 라고 까지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말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에 요청하여 12살인 히데아키를 종사위하(從四位下)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에 임명 받게 하였다. 이 관을 당명(唐名)으로는 킨고쇼우군[金吾将軍]이라고 한다. 궁문(宮門)의 경비대장이며, 금혁(金革)을 차고 문을 지킨다고 하여 [금오(金吾=킨고)]라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소년을,
  "킨고님"
 이라 부르며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물론 뒤에서는 ‘킨고놈’ 이라고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아키는 아이였을 때의 귀여움이 사라지고 영특함이 사라져, 간단히 말하면 우매해지고 얼빠지기 시작했다. 장래
상급 귀족(公卿) 사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글과 시의 선생을 붙여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이르러 차츰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조정에서도 행동거지가 나빠 코를 흘리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갑자기 웃거나 했다. 아주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조정의 복도에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저 아이만큼은 창피하네요”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푸념했다.
 원래 그녀의 생가인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의 핏줄은 모두 무사(武士)로서의 용기나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닮아서 총명한 인물도 많아, 히데아키의 큰 형 
카츠토시[勝俊 = 지쥬우[侍従], 후에 쵸우쇼우지[長嘯子]] 등은 시에 대한 재능에 있어서만은 어느 제후의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히데요시는 그 점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어렸을 때의 얼간이 짓이라면 자기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옛 주군이며 생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악동(惡童)스러움은 당시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에 비추어보아 어릴 때의 난폭함과 우둔함을 가지고 나중의 그 인물이 현명하게 될지 어리석게 될지를 잴 수 없다.

 “뭐 그런 것일세”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키타노만도코로를 달랬다.
 그러나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은 좋아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아키는 12살의 꼬꼬마인 주제에 성(性)에 대한 관심만은 이상할 정도로 강하여,
여관(女官)들이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르면 미친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히데요시는,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향과 같은 것으로 착하고 나쁘고 현명하고 우둔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킨고도 벌써 훔쳐보기인가.. 나이에 비하면 빠르군”

 이라 말하며 웃을 것이 뻔했다. 호색(好色)과 조숙(早熟)이라는 점에서는 히데요시 자신도 그러했기에 이런 남편에게 호소해 보았자 였다.
 히데요시는 오히려 자신의 친족인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 쪽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588년.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조영(造營)하여 4월 14일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텐노우[天皇]가 신하의 사저(私邸)에 방문하는 것은 요 백 년 동안 없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화려하게 알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날 쿄우토[京都]의 근방은 물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려 몰려들어, 길가와 거리를 경비하는 경비병 만으로 6000명이 동원되었다. 행렬은 화려함의 극을 달했다.
 -텐노우님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존귀하신 것인가?
 라고 다이묘우[大名] 이하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가 기대했던 이 의식의 정치적 효과였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천하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텐노우 다음가는 이는 관백(関白)이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관백의 신성함도 알 수 있게 됨에 틀림이 없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천하가 갑자기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후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의 옛 동료들이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오다 가문과 동맹했던 나라의 국주(国主)로 히데요시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았다. 거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는 옛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무력과 운(運)으로 그들을 휘하에 두고는 있었지만 출신이 출신인만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존비(尊卑)의 가치관만큼이나 완고한 것은 없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부수고자 했다. 천자의 존귀함을 빌려 그것을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비관(尊卑觀)과 질서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텐노우는 쥬라쿠테이에서 4일간 머물렀다.
 머물던 중 마당을 구경하려는 텐노우[天皇]의 짚신을 천하의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마당으로 내려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또한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방 하나에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섯 명의 제후를 모아 놓고 텐노우를 모시고 와 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다이진[内大臣]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다이나곤[大納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곤다이나곤[権大納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 히데요시의 동생]
츄우나곤[権中納言]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산기사코노에노츄우죠우[参議左近衛中将]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우코노에노곤쇼우쇼우[
右近衛権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들에게,

 “너희들은 들으라. 이제 천자(天子)의 고마움과 고귀함에 감루(感淚)를 흘렸을 것이다.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하고 명령하였다. 앉은 자리 앞으로 서약서가 놓였다. 이미 문장은 쓰여있었기에 일동은 여기에 혈판(血判) 서명을 하기만 한 것이다. 서약서에 쓰인 문장의 말미에,

칸파쿠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 따르며 조금이라도 거부하지 않겠다.

 고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텐노우[天皇] 앞에서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이번 텐노우의 쥬라쿠테이[聚楽第] 방문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약서를 받는 인물은 히데요시 본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대리인에 히데아키를 선택하였다.
 [킨고님]
 이라고 서약서에는 미리 쓰여져 있었다. 맹세하는 상대는 15살의 킨고 히데아키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는,
 ‘이외로 킨고님이?
 라는 것이 되었다. 당연한
추찰(推察)이었다. 이 서약서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히데아키 지위는 명확해졌다. 비약(飛躍)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에게 천하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킨고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지’
 라 다이묘우[大名]들은 생각하며 이제 막 ‘이방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게 알랑거리기 위해서 다투듯이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저래서는 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걱정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제후들이 떠받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했다.

 “선물 같은 것 받게 내비 두시게. 히데아키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편이 좋은 것일세”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킨고님에게는 독이 될 것입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했지만 그러나 가정(家庭)에서의 히데요시는 팔불출(八不出)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 총명함에 있어서는 고금무쌍(古今無雙)이라 일컬어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은 원래 쓸데없는 걱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육을 받지 않고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문은 갑자기 성립된 귀족(貴族)인 만큼 다른 다이묘우[大名]나 하다못해 촌구석의 조그만 호족 가문에도 반드시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가풍(家風)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관위를 승진시켜주는 것 정도였다.
 히데아키가 15살이 되는 해인 1591년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는데,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는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16살인 1592년에는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어 정삼위(正三位)로 승진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서는,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이라 불렀다. 단 히데아키 승진의 속도는 이 곤츄우나곤에서 우선 멈추게 된다. 왜냐면 이 해에 형 뻘인 히데츠구가 갑자기
약진(躍進). 관백에 임명되어서는 명실공히 천하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7.12.15 1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왜 서약서에 히데아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이때는 히데아키의 성이 도요토미 였을려나?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5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을 읽어보니, 히데아키가 1577년에 태어난건가요? 위키페디아나 여타 자료처럼 1582년에 태어난건가요..(음..)

    도요토미가의 자식교육이 캐실패(;)였다는건 공감합니다. 오히려 거의 손을 못댄 히데요리쪽이 가장 괜찮아 보일 정도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이 당시는 아직 토요토미 성이었죠.

    다메엣찌님//그렇습니다... 본문은 천정 5년이라고 나왔지만, 1582로 고쳤습니다. 문맥상(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함 즈음...)으로 보아도(다른 책들을 보아도 천정 10년 1582년생이라고 하더군요)

    중간에 1584 -> 1585로 고칩니다... 근데 그럼 두살인데 열두살... 책이 잘 못 된것인지... 시바 선생이 착각했는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가 조정의 권한으로 히데요리를 교토로상경하라고 명했을때,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 가토,아사노 2명에게 호위를 하도록하여 상경한것을 보고, "히데요리는 어지리만 얕잡아볼수 없는 인물이다, 살려놓으면 나중에 큰 후환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한적이 있지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이 글에 어째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만남에 대한 덧글을 다셨는지 조금 의문이군요...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 언급하셔서 인가요?)

    미묘하게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군요.

    조정의 권한이라기 보다는 손녀 사위 얼굴 함 보자는 의미였고, 토요토미 가문은 쿠게(公家)에서도 쿠교우(公卿)인지라 텐노우(天皇)가 바뀌는데 참석 안 할 수가 없었죠.

    상경하면 죽인다뇨? 대의명분 없이 자기 주인격인 히데요리를 죽이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할려구...이에야스도 그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 호우코우(方広)사(寺) 종명 사건을 만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의명분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상전을 이유없이 죽였다간 후에 당장은 자기한테 머리를 숙이고 있는 토자마(外様)들에게 나중에 들고 일어날 명분을 줄 수 있으니까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를 언급하셔서 몇자 더 적어보았구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히데요리의 장인어른의 신분이였지만, 정략결혼에 의한것이지요. 도요토미가가 공경가문인것 맞는말이지만 그 당시 시국으로보아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후 도요토미가를 표면적으로 받느는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했지요. 히데요리가 교토로 상경하면 이에야스가 표면적으로 죽이지않고 암살을 할것이기때문이죠. 외냐하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하는시기에 히데요리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는 데리고 교토로 상경할수 없으니, 히데요리는 십중팔구 이에야스의 의지에따라 교토로상경하면 암살될것이란걸 알고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경하지않는다면 반역으로 몰아 도요토미가를 공격하려고 했던것이죠.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멸할 명분은 찾고있었으므로.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기때문에 히데요리가 얻은 방법이 자신에게 교토로 상경할것을 설득하러온 카토,아사노에게 호위를 하도록 하죠. 이렇게되면 이에야스에게있어서는 히데요리는 결국 교토에 상경하였으니 반역으로 몰아넣을수도 없었고, 암살을하자니 가토와 아사노까지 죽이면 도요토미계 출신장수들이 반발할것임은 분명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히데요리는 얕볼수없는 자라고 평하기도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코사종명사건은 상황이 좀 틀립니다. 호코사종명사건은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칩거할때의 얘기죠.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틀어박혀있는동안은 암살은 꿈도 못꾸는것이니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암살에 대의명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암살을해도 대명들은 심증만 있을뿐잊 물증이 없을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 밖은 결코 안전할수 없는곳이였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글 감사합니다.

    미묘하게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전 chaosrinor님께서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라고 언급하시길레 그에 대한 반론으로 상경한다고 죽이면 대의명분이 없기에 나중에 호오코우사 종명 사건을 이으켜 대의명분을 얻었다고 말씀 드린 것이고....

    chaosrinor님께서 오늘 달아주신 말씀은 저와 비슷한 의견이시군요.
    (표면적으로 죽이지 않고 암살을 한다는 말씀은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고, 상경하면 암살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다르지만...)

    상경하면 부하인 이에야스의 명령에 주가인 토요토미 가문이 부하에게 굴복한 꼴이 되고,
    상경을 거부하면 실질적인 힘(무가의 톱인 쇼우군 가문)을 가진 이에야스가 대의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때문에 그 중간책을 사용해서, 손녀 사위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끝나지 않으셨었군요...

    자꾸 반역 반역 하시는데, 반역이란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가는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부하가문은 토쿠가와.
    하지만 토쿠가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이이다이쇼우군 이라는 무가 정치를 만들어서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호코우사 종명 사건은 왜 일어났을 까요?
    토요토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즉 '힘')을 소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쿄우토에서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토요토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쟁이란 그리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이에야스가 그렇다고는 전 생각할 수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