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일본판을 번역한 것. 발번역이다.

모토나리가 1557년 세 아들(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선 '三子教訓状'이라고 한다.

제1조.

몇 번이고 말했겠지만, 모우리[毛利]의 성(姓)이 절대 끊기지 않도록 유념해라

제2조.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다른 가문(킷카와, 코바야카와)을 잇고 있지만, 모우리[毛利]라는 두 글자를 소홀히, 등한시 해서는 안 된다. 모우리를 잊는다는 것은 절대로 옳지 못한 일이다. 이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제3조.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세 명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세 명 다 한꺼번에 멸망이라고 생각하라. 다른 가문을 멸망시켜 온 모우리의 자손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원한을 받고 있단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고 하여도, 가명(家名)을 잃었다면 자손 1~2명 생존해 있다고 하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행여라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이다.

제4조.

타카모토는 모토하루, 타카카게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지시해라. 또한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모우리가 강력하기에 각각의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기가 뛰어나기에 각각의 집안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모우리 종가가 약해지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부하들의 마음도 바뀌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 속에 새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제5조.

요전에도 말했듯이 타카모토는 모토하루, 타카카게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장남이니까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어떤 것이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형 타카모토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타카모토는 장남이니까 너희들이 따르는 것이 순리다. 모토하루, 타카카게가 그냥 모우리 본가에 있었다면, 가신인 후쿠하라[福原]나 카츠라[桂]와 같이 부하가 되어 어떤 것이건 타카모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지금은 둘 다 다른 가문을 잇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들은 모우리의 가신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좋다고 생각한다.

제6조.

이 가르침은 손자의 세대가 되어도 마음에 새기고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모우리, 킷카와, 코바야카와 세 가문은 언제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고는 있지만 먼 미래까지는 어찌 할 수도 없다. 적어도 너희들 세 명만은 반드시 이런 다짐을 지키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가명도 이익도 함께 잃게 될 것이다.

제7조.

죽은 니들 어머니 묘우큐우[妙玖]에 대한 공양과 명복을 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제8조.

고류우[五龍] 성주(城主)인 시시도 타카이에[宍戸 隆家]에게 시집간 딸을 나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니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니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잘 대해주길 바란다. 그래주지 않는다면 나는 니들을 원망할 것이다.

제9조.

지금 사리분별을 못하는 아주 어린 애들이 있다. 그건 7살의 모토키요[穂井田 元清], 6살의 모토아키[毛利 元秋], 3살인 모토토모[出羽 元倶]이다[각주:1]. 장래 머리와 마음이 남들만큼만 되어 성인이 된 애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겨 어디 먼 곳에라도 땅을 나누어 주길 바란다. 만약 우둔하고 좆병진이라면 어떻게 하든 상관 없다. 아무런 도움을 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니들 셋과 고류우[五龍]와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나는 정말 불행할 것 같다.

제10조.

나는 전쟁에서 많은 생명을 죽게 만들었다. 이 인과응보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기에 마음 한 편에선 항상 슬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너희들 각자도 이것을 마음에 새겨,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이 모토나리가 이 인과응보로 인해 갑자기 죽더라도 새삼 마음의 준비가 된 니들 셋에게는 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11조.

나 모토나리는 20살 때에 형 오키모토[興元]와 사별하고 그 이후 오늘 날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크고 작은 파도에 휩싸였던 모우리 가문도 다른 가문들, 많은 적과 싸워 오며 여러 가지 변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는 변화 속에 나 한 사람만이 거친 풍랑을 헤치고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것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 되돌아보면 내 몸을 위해서 특별히 조심하고 있는 것도 없고, 또한 골격이 크고 건강한 것도 아니며, 지혜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착한 마음을 가졌다며 신불이 특별히 돌보아 줄 정도도 아니다. 어쨌든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난국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내 나름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하다. 그렇기에 지금 하루라도 빨리 은퇴하여 평온한 여생을 보내며, 맘 편히 다음 생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의 세태를 보면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다.

제12조.

11살 때, 사루가케 성[猿掛城]에 살고 있을 때,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의 집에 여행을 하던 한 스님 와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의하였다. 어머님도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나도 역시 11살에 전수를 받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매일 아침 기도를 빼놓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염불을 10편씩 외우는 것이다. 그러면 앞날은 물론 현세의 행복도 바랄 수 있다. 또한 우리들은 옛날부터 현세의 소원을 태양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 한 몸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니 특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니들 셋도 매일 아침 이것을 게을리 하는 일 없이 실행해 주길 바란다. 물론 태양이건, 달 어느 쪽에 하건 같다고 생각한다.

제13조.

나는 옛날부터 이상할 정도로 이츠쿠시마 신사[厳島神社]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오시키바타 전투[折敷畑の合戦[각주:2]] 때에도, 막 싸우려는 참에 이츠쿠시마에서 사자(使者)로 이시다 로쿠로우사에몬죠우[石田 六郎左衛門尉]가 공양미와 승리를 기원하는 두루마기를 가지고 왔기에, 이것은 (승리를 내려주시려는) 신의 뜻이라 생각하여 분투한 결과 이길 수가 있었다. 그 후, 이츠쿠시마에 성을 쌓으려고[각주:3] 배를 타고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적의 군선 세척이 공격해 왔었는데 교전의 결과 다수의 적을 죽이고, 그 목을 성 앞에 나란히 내 걸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어쩌면 이것은 이츠쿠시마에서 대승리를 거둘 전조일 것이라는 것으로, 내가 건너고자 할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신의 계시라 생각하였고, 이츠쿠시마 다이묘우진[厳島大明神]의 고마우신 가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으로 크게 안도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이츠쿠시마 신사를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며 나 역시도 그것을 정말 바라고 있다.

제14조.

지금까지 자주 말해 두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을 이 기회를 빌려 하나하나씩 말하였다. 이제는 이 이상 더 할 이야기는 없다. 내친 김에라고는 하여도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하니 더 이상 바랄 나위 없을 정도로 나는 큰 복을 받았구나. 좋구나 좋아.

  1. 이들 3명은 모토나리의 아들들로 이 편지의 3형제와는 배다른 동생들이다. [본문으로]
  2. 스에군과 싸운 이츠쿠시마 전투의 전초전. 스에 측 7000을 역시 산으로 유인하여 기습으로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 승리함으로써 모우리는 잠시 동안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본문으로]
  3. 미야오 성[宮尾城]을 말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출처: http://www.toyokeizai.net/life/hobby/detail/AC/5cb184218574b0d2647111bb5f8b7b0a/page/1/

저자: 사사키 노리히코

< Stanford Memorial Church

사진 출처는 위키(en)의 스탠퍼드 대학>


스탠퍼드(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에 와서가장 먼저 놀란 것은 한국인 유학생의 존재감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인 학생도 많습니다만, 그보다는 한국인 유학생의 급격한 증가가 인상적입니다.


현재 스텐퍼드에 있는 한국인 대학원생수는 395. 1995년의 159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제 한국인 대학원생은 중국(대학원생수 457), 인도(382)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텐퍼드의 일대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인구 약 5000만 명밖에 안 되는 한국이 그 26배의 인구를 가진 중국과 필적하는 유학생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기세가 계속된다면 가까운 장래에 한국인은 유학생 중 최대세력이 될 지도 모릅니다.

최근 컬럼비아(Columbia University) 대학에서 놀러 왔던 중국인도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에서 만나는 아시아 사람 중 대부분이 한국인이라고 말하였던 것을 보면, 이런 경향은 뉴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국인 유학생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것은 영어에 대한 높은 학습의욕입니다.

스탠퍼드에서는 유학생 대상의 영어수업이 열리고 있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의 반 이상이 항상 한국인. 때때로 여긴 한국인가?’라고 착각할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글은 언어적으로는 일본어와 비슷할 정도로 영어와는 갭이 큰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말하는 힘을 급속히 키우는 노력에는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한국에서는 영어 조기교육도 활발하다고 합니다.예전에 한국인 클래스메이트가 아장아장 걷고 있는 딸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과 비교하여 영어교육열의 차이를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조국에 대한 상반된 감정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유학이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일까요?

추상적인 답으로써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나보았던 한국인 유학생, 특히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 중에서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대다수는 계속 미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 ‘일정기간 미국 연구소나 대학에서 일하고, 그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학생들입니다. [한국인=애국심이 강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반응에는 놀랐습니다(물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애국심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히려 자국경제가 활발하게 발전하는 것도 있어서인지, 중국 유학생 쪽이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듯 합니다.


경제성장률도 일본에 비하면 높으며(2007년은 5.0%), 삼성, LG, 현대라는 글로벌 기업도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나라를 떠나려 하는 것일까요?

우선 장래에 대한 불안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저출산(출생률은 일본보다도 낮다)], [소득격차의 확대(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원의 임금문제 등)], [중국과의 가혹한 경쟁] 등과 직면해 있어,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가지는 것이 어려운 것은 확실합니다. 최근도 통화위기설이 그럴 듯하게 퍼져, 경제의 기초가 강고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그 이상으로 절실한 것은 역시 인생에 대한 적은 선택기일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어느 일본인이 한국에서는 모두가 의사나 변호사를 목표로하며 가혹한 경쟁을 하고 있다. 정말 피곤할 것이다고 한탄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의사, 변호사는 인기입니다만 제조업, 금융업, 서비스업 등 모든 업계에 매력적인 직업이나 일이있습니다. 여러 업계에 세계적인 기업이 있어, 직업 선택기가 풍부한 것은 미국 이외에 일본과 독일 등 일부 선진국에 한할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확실히 중요합니다만, 경쟁으로 싸울 만한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면, 사회는 다양성이 증가하기보다는 획일성이 늘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이상으로 심한 수험전쟁, 학력경쟁이 그 경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뜨거운 교육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에는 배울 만한 점이 많습니다만, 한국인 유학생에게는 [우물 안 경쟁에 지쳐서 도망쳐 왔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확실히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을 하는 것은 한국인


이전 이과계통의 한국인 유학생에서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따면 미국에 남지 않더라도 삼성이건 LG 등어디에건 취직할 수 있잖아?”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저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일하는 것은 싫다”.

물론 회사나 일하는 부서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한국도 일본과 견줄 정도로 근로시간이 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2005년도 OECD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근로시간은 OECD 국가에서 톱. OECD 국가 평균인 주간 약 38시간(휴일은 제외)에 대해, 한국인 평균은 45시간입니다(참고로 일본은 34시간입니다만, 잔업이 있기에 더 길 터).

더구나 삼성에서 일한다고 하여도 일이 기술자나 연구원에게 있어서 흥미롭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삼성의 인기분야는 마케팅이나 디자인으로, 기술자나 연구원은 주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술자천국인 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유학 붐은 [한국인]의 국제경쟁력 향상으로는 이어져도, 국가로써의 [한국]의 저력을 높이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국가의 인재들이 미국으로 유출되는 의미로써는 국가에 있어 마이너스일지도 모릅니다. 중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조국의 산업발전의 중추가 될지도 모르며, 세계에 걸쳐 활약하는 화교(華僑)와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고, 어쩌면 미국시민이 되어 조국에는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부()와 거대한 국내시장 덕분에 젊은이의 유출이 큰 흐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은 일본을 이렇게까지 큰 경제로 키워 올린 앞 세대에 감사함과 동시에 일본경제의 경쟁력을 올리기 위해서 국내에 매력적인 직업, 일 등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야구계와 같이, 일본의 일류인재가 계속에서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내에 매력적인 직업이나 일이 없어져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나가야만 하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해외로 나가 일본경제, 일본기업의 경쟁력향상에 이바지한다 그러한 용기도 지금의 일본인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Ps; 이 글은 자이(東洋経済) 자동차, IT업계를 담당하던 저자(사사키 노리히코(々木 紀彦)가 휴직 후 스탠퍼드 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쓰는 시리즈 기사인 [젊은 기자의 스탠포드 유학기(若手記者スタンフォ学記)]2008-09-16일에 실린 글이다.

한국(나름 '중도우익' 인지라 작년만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주로 썼지만, 요즘에야 뭐..)은 독도로 나라가 흔들리고, 이런 기사("동해 일본해 아닌 한국해"<리아 노보스티>)로 승전가를 울리고 있을 때, 일본은 다음 날 17일에 이렇게 역습을 하였다.

< http://www.mofa.go.jp/mofaj/shin/index.html>

저 붉은 칸을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화면으로 이동한다.

< http://www.mofa.go.jp/mofaj/area/nihonkai_k/russia/index.html>

저 화면에서 '개요(概要)'와 '본문(本文)'을 해석하였다.

* 地図リスト(PDF) -> 지도 리스트(PDF)는 차후 번역하겠다.

개요(概要)

< http://www.mofa.go.jp/mofaj/area/nihonkai_k/russia/gaiyo.html >

日本海呼称問題(ロシアにおける調査):

일본해 호칭 문제(러시아에서의 조사) : 개요


외무성(外務省) 2006 11월부터 2007 2월에 걸쳐 러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17세기부터 19세기의 지도에서, 일본해 해역의 명칭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그 결과, 조사한 고지서 51점 중, 일본해 해역에 어떤 명칭이건 쓰여 있는 지도 40점 중 72.5%에 해당하는 29점이 일본해(日本海)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 명확해졌다. 또한 일본이 쇄국을 펼치고 있었던 시대에 발행된 지도 27점 중 63%에 해당하는 17점이 일본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 명확해져, 지금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실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해라는 명칭이 우리가 쇄국을 펼치고 있기에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19세기 초반부터 서구에서는 정착되어 왔다는 것이라는 것이 새삼 확인되었다.

(: 한국은 [일본해의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의 하나로써 한국측의 독자적인 조사에 따라,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 및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작성된 고지서 19점을 조사한 결과로써, 52.6%에 해당하는 10점이 [한국해(韓国海] [동해(東海)] , 한국과 관련된 명칭이 표기되어 있으며, 일본해라고 표기된 고지서는 15.8%에 해당되는 3점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본문(本文)

<http://www.mofa.go.jp/mofaj/area/nihonkai_k/russia/honbun.html>

日本海呼称問題(ロシアにおける調査

일본해 호칭 문제(러시아에서의 조사)


* 외무성은 2006 11월부터 2007 2월에 걸쳐서 러시아에 있는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17세기부터 19세기의 지도에서, 일본해 해역의 명칭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조사를 행했다. 이는 [일본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가 쇄국을 펼치고 있기에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19세기부터 유럽에 이미 정착되어 왔던 것이다]는 우리나라의 주장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러시아 국가 도서관(구 시도린(??) 국립 도서관) 및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4개소에서 조사했다).

* 한편 한국측은 예전부터 [일본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전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 [19세기의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동해와 일본해 두 명칭이 세계 지도에 쌍방이 평범하게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해 왔다. 한국측은 그 근거로써 독자적으로 행한 러시아에서의 고지도 조사를 들고 있으며, 그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러시아의 공립 도서관 및 고문서 보관소가 소유하고 있는 지도 중 19점에 대해서 조사를 행한 결과, 한국에 관련된 것은 10(Sea of Korea(7), East Sea(1), Eastern Ocean(1), Gulf of Korea(1))이며, 일본에 관련된 것(Sea of Japan) 3장뿐이었다고 한다()

: [East Sea in Old Western Maps with Emphasis on the 17~18th Centuries] The Society for East Sea, The Korean Overseas Information Service 출판(2004)에서


1. 조사 목적


(1) 우리나라는 일본해라는 호칭이 그 해역에 국제적으로 확립된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그 주요한 논거로써 이하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A) 일본해라는 호칭은 현재 국제적으로 확립되어 있다는 것.

(B)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일본해라는 명칭이 19세기 초반부터 유럽의 지도에 정착되어 왔다는 것.

(C) 지리적 명명법을 보더라도 일본해라는 명칭은 타당하다는 것.

(2) 이 중 상기의 (B)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서는, 국토지리원의 연구자 2명이 유럽에서 발행된 200점 이상의 고지도를 조사한 결과, 18세기 말기부터 이 해역에는 [중국해(中国海], [동양해(東洋海], [조선해(朝鮮海], 일본해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19세기 초반부터 유럽의 지도를 중심으로 일본해의 명칭이 다른 것을 압도하며 사용된 사실이 확인되었다(1). 또한 외무성이 행한 대영도서관 및 케임브리지 대학 소장 고지도 조사나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지도 조사에 있어서도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2). 유럽에서 발행된 지도 중에서 19세기 초반부터 일본해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의 탐험가가 일본해 주변을 탐험하여, 일본해가 일본열도로 인해 태평양과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형상이 명확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생각은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일본 주장의 정당성을 더욱 검증하기 위해서, 풍부한 지도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미의회 도서관에서, 1300년부터 1900년에 발행된 지도들에 일본해라는 호칭이 정착되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조사를 행해, 일본해역에 어떤 명칭이든 호칭이 기재되어 있는 지도 1435점 중 77.4%에 해당하는 1110점의 지도가 일본해라는 표기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어서도 앞서 말한 듯이 영국, 프랑스의 결과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3).


1: 외무성 작성의 [일본해] 팜플렛 참조(링크: 일본어)

2: 외무성 홈페이지 [대영도서관 케임브리지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에 관한 조사] [프랑스 국립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에 관한 조사] 참조(링크: 일본어)

3: 외무성 홈페이지 [미의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에 관한 조사]참조(링크: 일본어)


(3) 외무성은 이 주장의 정당성을 더욱 검증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미, , 프랑스의 조사에 이어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조사를 행해, 특히 19세기에 발행된 지도 중에서 일본해의 호칭이 정착되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4) 또한 이 조사의 배경에는 [‘일본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전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 [19세기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동해] [일본해] 양쪽의 명칭이 세계지도에서 평범하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한국측의 주장이 있다. 한국은 상기의 주장을 하는 근거의 하나로써 한국측 독자적인 조사에 따라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 및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제작된 고지도 19점을 조사한 결과, 52.6%에 해당하는 10점이 [한국해] [동해]등 한국과 관련된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일본해라고 표기된 고지도는 15.8%에 해당하는 3점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조사 개요.


(1) 본 조사는 주러시아 일본대사관을 통해서 실시했다. 동 대사관은 러시아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하 4곳의 러시아 도서관 및 고문서 보관소에서 지도의 연구를 행했다.

l 러시아 국립 도서관(모스크바)

l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l 러시아 국가 도서관(상트페테르부르크)

l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2) 우선 처음에 러시아 국립 도서관에서, 일본해 해역이 기재되어 있는 지도 300점 중에서 19세기 이전에 출판된 92점의 지도 리스트를 작성했다.

(3) 상기 리스트를 기준으로, 조사할 수 있는 허가가 내려진 상기 4곳의 도서관 및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 중 촬영, 복사 등이 허용된 지도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51점을 이번 조사 대상으로 했다(정해진 기간 내에 조사해야 했기에 모든 것을 조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


3. 조사 결과


(1) 조사한 총 지도 수: 51.

(다른 도서관 또는 고문서에서 중복된 지도는 포함하지 않았다)

(2) 연대별(1630~1899년까지)

(A) 16세기: 0

(B) 17세기: 2(3.92%)

(C) 18세기: 13(25.49%)

(D) 19세기: 36(70.59%)

(3)호칭 별

조사한 지도의 호칭 별 일람

당해 해역의 명칭

1601~1700

1701~1800

1801~1867

1868~1900

지도수

비율

일본해

 

2

15

12

29

72.5%

조선해

 

5

2

1

8

20.0%

조선해협

 

 

1

 

1

2.5%

동해

 

1

 

 

1

2.5%

중국해

 

1

 

 

1

2.5%

(표기없음)

2

4

5

 

11

 

(합계)

2

13

23

13

51

 

 

* 각 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 중 중복되는 것을 제외한 것

 

(4) 조사기관별

 

조사기관별 조사한 지도 일람

N

기관명

일본해 해역이 들어간 지도수

복사할 수 있었던 지도수

1

러시아 국립 도서관

(모스크바)

42

37

2

러시아 국가 도서관

(상트페테르부르크)

41

11

3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45

1

4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

(모스크바)

14

2

5

러시아 제국 외교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조사 불허

-

6

국립 지리학협회 고문서 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조사 불허

-

 

: 4개소의 보관소에서, 일본해 해역이 기록된 17세기~19세기까지의 지도 142점을 확인. 그후 각 보관소에서 중복된 지도를 제외하면서, 정해진 기간 내에 조사 가능했던 지도(무작위 추출)은 전부 51.

 

4. 분석

 

(1) 1630년에서 1899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발행되어, 이번에 조사할 수 있었던 지도 51점 중 일본해 해역에 어떤 명칭이건 호칭이 기재되어 있는 것은 전부 40점이었다. 그 중 72.5%에 해당하는 29점이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2) 또한, 이들 40점의 지도 중 일본해 해역을 [조선해]라고 기재된 지도는 8(20.0%), [중국해], [조선해협], [동해]라 기재된 지도는 각각 1(2.5%)에 지나지 않았다.

 

(3) 또한 지도의 발행연대에 주목하면, 18세기까지 발행된 지도에서는 일본해 해역에 어떤 이름이건 호칭이 표기되어 있는 9점의 지도 중 5점에 [조선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 외에 일본해(2), [중국해](1), [동해](1)의 명칭이 각각 사용되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자 일본해 해역에 어떤 이름이든 표기된 31점의 지도 중 27(87%)에 일본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5. 결론

 

 이번 조사로 인해, 일본해의 명칭이 19세기에 들어서자 다른 명칭을 압도하며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어, 지금까지의 고지도 조사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쇄국을 펼치고 있었기에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19세기 초반부터 일본해라는 표기가 정착되어 와 있었다는 것이 러시아에서의 고지도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6. 한국측의 조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

 

 본 조사를 기준으로, 한국 정부가 2002년에 같은 도서관에서 행한 같은 조사의 결과를 검토해 보면, 이하의 의문점을 지적할 수가 있다.

 

(1) 조사대상의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한국측은 우리나라가 행한 조사 장소인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국립 고문서 보관소(모스크바), 러시아 국립 해군성 문서보관소(상트페테르부르크) 3개소에 보관되어 있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합계 19점의 고지도를 이용하여 조사하였지만, 19점의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도서관 등의 조사 허가 문제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일한의 조사 결과에 이렇게까지 큰 차이(특히 일본해라고 표기된 지도의 점 수 차이)가 있는데도, 한국측이 그 선정 기준을 공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선례에 따라 보건대 한국측의 조사 결과에 의문이 남는다.

 

(2) 한국측은 20세기 초반의 고지도에 대해서 대부분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않았다.

 

 한국측은 [‘일본해라는 명칭이 지배적이 된 것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결과이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반의 지도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않고 있다.

 

(3) 한국측은 [동해]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명칭도 그 주장의 근거로 하고 있다.

 

 한국측은 [동해]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해] [조선만(朝鮮灣)]까지 [한국과 관계가 있는 명칭]으로 하여 [동해]와 동일시해서는, 이들 전부를 합계한 수와 일본해 표기의 지도 수를 비교하여 조사 결과를 공표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주장하는 [동해]가 한국측의 조사에 있어서조차 대부분의 고지도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地図リスト(PDF)

 

스트(PDF) -> 일본어 링크

 

참고로 우리 측 주장.

이지

 

* 연도는 일본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로 쓰여 있으나, 서력으로 바꾸었다.

** 일본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일본해(日本海)’라는 명칭을 썼다.

*** 일본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우리나라는 일본을 지칭한다.

**** 일본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한일관계일한관계로 표기하였다.

***** 링크로 된 곳은 차후 번역하겠다.







어제 문제의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 시작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7 15 하루.

다음은 사실 무근 -> 그런 말이 있었던 하다 -> 근데 그게 중요한 아니지~..

라는 식의 기사들


프레시안의

"사실무근""사정설명 있었다""본질 아니다"

, '요미우리 파동' 바꾸기 '급급'


연합뉴스의

정부, '日독도 언론보도' 경위해명 요구키로


있었다.

그래서……일본측의 반응은 어떨까 궁금했다.


우선……

일본 외무성 새로운 정보(新着情報)


번째 보라색인


(竹島問題)日本は日本の事情、韓には韓の事情があるので、それぞれの立場を冷に話し合って、その立場を埋めていくことが必要なのでしょう

(타케시마 문제) 일본은 일본의 사정, 한국에는 한국의 사정이 있기에, 각각의 입장을 냉정하게 서로 대화하여, 입장(차이) 좁혀가는 것이 필요하겠죠.



타케시마 문제


() 타케시마 문제로 인하여, 한국 정부와 국내(일본 역자 )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외무대신) 일본은 일본의 사정, 한국에는 한국의 사정이 있기에 각각의 입장을 냉정하게 서로 대화하여, 입장을 좁혀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타케시마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어디까지나 평화적 해결을 꾀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일한 관계 전체가 나빠지지 않도록 냉정하게 대응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기술에 있어서 [우리 나라 고유의 영토다]라는 표현을 해야만 했다던가, 도대체 어째서 북방영토와 타케시마의 표현이 다르냐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 외무성이 [ 있는 온화한 표현을 쓰도록]하는 요구했다는 경위가 있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만, 그것도 포함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외무대신)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 비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담당 대신을 중심으로 , 관방장관, 모두 이야기를 나누고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정한 것입니다.


() 영토문제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면, 어째서 4 일한 수뇌회담에서 확실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요?


(외무대신)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땠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름 대화가 나누어졌을 것입니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

원문은: それなりの話し合いは行われていたでしょう.

저의 번역은 : 나름 대화가 나누어졌을 것입니다.

에둘러 표현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대통령의 방일은 너무도 준비부족이었다고 밖에 말할 없게 되겠군요.


번째 보라색인


中事務次官と哲賢(クォンチョルヒョン)駐日韓大使の

야부나카 사무차관과 권철현 주일 한국대사의 회담.

1. 15(화요일) 오전 11시부터 40분간, 야부나카 미토지(藪中 三十二) 사무차관은, 권철현(哲賢) 주일 대한민국 대사와 회담했다.

2. 권대사는, 14일 공표된 중학교 사회 지도 요령 해설에 독도가 명기된 것에 관하여, 한국측의 입장을 말했다.

3. 이에 대한 야부나카 차관의 답변은, 타케시마에 관한 우리 나라의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 본건을 둘러싸고 일한 관계가 어긋나는 것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며, 양국의 입장 차이는 입장의 차이로써 서로 냉정히 대처하고, 계속해서 [일한신시대(日韓新時代)를 향해서 협력해 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연합뉴스의 기사: 日외무차관 "요미우리 보도 사실과 다르다"(종합)에서 보이는, 요미우리 신문에 대한 시정 요구는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는 찾을 없었다.



(‘권철현 요미우리(読売)’ 넣고 검색했을 아무 것도 없음)


(연합뉴스의 日외무성, 요미우리 보도 공식 부인 보이는 코다마 카즈오(兒玉 和夫)’ 요미우리(読売), 타케시마(竹島) 넣고 검색했을 시의 모습역시 아무 것도 없음)


정말로 공식적인 부인을 했는지는 외무성 홈페이지를 보는 없음


그렇다면, 웹에서는?

우선 구글 뉴스 일본판 기사 검색

코다마(児玉), 요미우리(読売), 타케시마(竹島)로는 검색되는 것이 없음


일본 No.1 검색이라는 야후 저팬에는


역시 없음….

참고로우리 [각주:1]에는, 한국측이 오보에 대해 항의했다는 말은 없음.

가장 하단이 어제부터 문제가 기사.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 차원에 대해 귀국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요미우리 기사에 대한 내용은 줄도 없음.


+++++++++++++++++++++++++++++++++++++++++++++++++++++++++++++++++++++++++++++++++++++++++++++++++++++++++++++++++++


그리고 덧붙여….

현재 조중동 각사의 일본어 웹에는 한국 측이 요미우리 신문에 대해서 항의 했다는 기사가 없다.

(7 15 23 25 현재. 물론 지금까지 실시간으로 일본어 기사가 올라갔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현재 일본어 판에 나와 있는 곳은 연합 뉴스 .

日本メディアの島報道、政府が明要求の方針

( 기사는 한국어판 정부, '日독도 언론보도' 경위해명 요구키로 번역 기사이다) 

  1. 이 문제는 정치에서 다루고 있음. [본문으로]

밤 사이 한국을 강타한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를 번역해 보았음...

 

출처http://www.yomiuri.co.jp/politics/news/20080714-OYT1T00501.htm

저자: 読売新聞

게재시간: 20087142234

 

 정부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의 새로운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타케시마(竹島문제를 처음으로 명기한 것은타케시마의 소유에 관해서 지금까지의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지한국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일한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염려되고 있다.

 

 타케시마 문제를 둘러싸고는, 2005 3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 成彬] 문부과학상(당시)이 국회에서 "다음 번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확실히 써야 할 것이다"고 답변하여이번 학습지도 요령의 개정 작업에서 검토가 되었다하지만 새로운 요령안의 발표시기가 올해 2월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과 겹쳐문부과학성은 일한 관계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기재를 미루었다이에 대해자민당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생겼기 때문에문부과학성은 해설서에 명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측은 민감하게 반응했다기술하는 것의 조정이 마무리에 다다른 이번 달 9이 대통령은 홋카이도우[北海道] 토우야코[洞爺湖] 서미트 회의장인 호텔에서 후쿠다[福田] 수상과 서서 이야기를 하였을 때우려의 뜻을 표명관계자에 따르면수상이 "타케시마를 쓸 수밖에 없다"고 알리자대통령은 "지금은 곤란하다기다리길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한국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말해야 할 것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수상의 의향을 따르면서표현에 대해서는 허용되는 만큼의 최대한 조정을 거듭했다.

 

 토카이"渡海" 문부상은 11수상관저에서 마치무라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2종류의 문안(文案)을 제시했다하나는 북방영토의 기술에 이어 [타케시마 등도 언급하여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영토영역에 대해서 이해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는 A또 하나는 이것에 이어 [또한 타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국의 주장을 기록한 B안이었다최종적으로는 13일 밤, A안의 전제를 [우리 나라와 한국과의 사이에서 타케시마를 둘러싸고 주장이 상반된다는 것 등도 언급]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

 

 자민당 내의 보수파 의원은 [우리 나라의 고유 영토]라는 표현을 미룬 것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나카가와 쇼우이치[中川 昭一] 전 정조회장은 14, [한국에 양보하여애매한 기술이 되어버렸다견해서에 쓰는 것이라면 고유의 영토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한국 측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내세워일한관계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만큼일본 정부 내에서는 [명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마치무라 장관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일한관계가 어긋나 버리면,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6개국 협의의 프로세스나납치문제를 포함한 일본-북한간의 여러 현안 해결에도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일한 쌍방의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ps; 기사의 분위기를 전하려고 하다보니 한일을 일한으로, 독도를 타케시마로 하였음. 이건 이해를...

ps2; 대충 한 것이니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