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라고 하면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야기꾼들의 무용담(講談)은 물론 교과서에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산 끝에 걸린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을 주소서"
 라고 비는 장면이다. 주군 가문의 부활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2차대전 이전 충군애국을 위한 정신교육에 딱 알맞은 소재였던 것이다.
 그의 인생드라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주군인 아마고 가문[尼子家] 부활을 위해서 싸우는 – 그 집요한 게릴라 활동에 있을 것이다.

 시카노스케의 무용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여 순례자의 모습으로 여러 지역을 유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오우미[近江]의
반바쥬쿠[番場宿]라는 곳에서 어느 노승의 친절로 암자에서 머물게 되었다. 2~3일 지났을 즈음 십여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들어와서는 식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기에 식사만 하고 얌전히 돌아갈 듯한 쌍판이 아니었다. 시카노스케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어서 꺼지지 못할까!"하고 소리치자 무사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 날 밤. 그 무사들이 습격해왔다. 그들은 산적, 도적들이었던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재빨리 노승과 동자승을 숨기고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는 함정에 빠뜨리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는 창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 사람씩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별 어려움 없이 14명의 도적을 잡았지만, 노승의 말을 듣고 생명을 살려주자 두목 같은 남자가,
 "제가 도둑질하기 백여 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길 칠십여 번에 이르지만 이렇게 당한 적은 처음이외다"
 고 말하며 적어도 존명이라도 말해달라 하였다 한다.

 시카노스케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오른 것은 1566년 아마고 씨[尼子氏] 멸망부터였다. 한때 츄우고쿠[中国] 11개 쿠니[国]의 영토를 가지고 패권을 세웠던 아마고 씨도, 신흥 세력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군에게 패하여 멸망해 버린 것이다. 한때는 이 모우리 씨[毛利氏]도 아마고 가문의 휘하였다.
 이 1566년에 아마고의 본거지 이즈모[出雲]
토다 성[富田城]이 함락당하자 당주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와 그 동생 토모히사[倫久], 히데히사[秀久] 세 명은 포로의 몸이 되어 모우리의 근거지 아키[安芸]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나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 등의 활약이 시작된다. 은밀히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토우후쿠 사[東福寺]를 방문하였다. 거기에는 중이 되어 있는 아마고의 혈통이 있었다. 최후의 당주 요시히사의 부친 하루히사[晴久]의 숙부[각주:1]의 아들이었다. 시카노스케들은 그를 환속시켜 '아마고 마고시로우 카츠히사[尼子 孫四勝久]'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카츠히사를 대장으로 옹립한 일당 200여명은 타지마[但馬]로 내려가 해적 나사 니혼노스케[奈佐 日本之助]의 배로 오키[岐]로 건너가 이곳의 사사키 타메키요[佐為清]의 협력으로 대망의 옛 영토 이즈모[出雲]의 흙을 밟게 된 것이다. 옛 주인의 입국에 이즈모는 들끓었다. 각지에 숨어있던 아마고 낭인 3000여명이 곧바로 달려와 그들의 세력은 1개월 안에 이즈모의 반을 석권하였다. 이와미[石見], 호우키[伯耆]에서도 줄을 대는 자가 속출했다. 본거지 토다 성을 되찾으면 옛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할 수가 있었다.
 그 토다 성에도 모우리의 군사는 불과 300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아마고는 60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가 무너졌다. 토다 성의 수비장수 아마노 타카시게[天野 隆重]가 계략을 쓴 것이다.
 "깨끗하게 성을 넘기고 싶다. 그러나 한번도 싸우지 않고 넘기는 것은 무사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그러니 일전을 벌이는 척을 하고 넘기겠으니 군세를 이끌고 오시길"
 아마고 측은 이 사자(使者)의 편지로 기세 등등해졌다. 완전히 안심을 하고 2000의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활과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마고 측은 예상 못했던 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엔 성병 300이 밀고 내려와 아마고 측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1570년 모우리 가문의 이즈모 총공격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집요함을 볼 수 있다. 참수에 처해질 운명이었지만, 모우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여 목숨을 건졌다. 모우리를 위해서 시코쿠[四国] 정벌의 선봉을 자처까지 하였다. 그런 것들은 전부 살아남아 또다시 아마고 부활의 기회를 잡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화장실을 이용하여 모우리 진영에서 탈출하였다. 게릴라 활동가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숨기며 미마사카[美作]를 거쳐 쿄우토로 갔다.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혼간지[本願寺]와 손잡고 있는 모우리 측과 적대하고 있었다. 다시 쿄우토에 모인 시카노스케 일행의 아마고 잔당은 츄우고쿠 담당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휘하로 들어가 하리마[播磨]로 갔다. 타지마[但馬]의 코우즈키 성[上月城]를 함락시키자 히데요시는 아마고 카츠히사의 바램대로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따라 이즈모로 진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 믿는 아마고 일당은 피가 끓었다.

 바로 그때 모우리 측이 대군을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군세[각주:2]를 선봉으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군세가 몰려와 아마고 섬멸을 노린 것이다. 모우리 군세는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의지할 것은 히데요시의 원군이었다. 성안의 식량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탈주병도 계속 생겼다. 쿠마미가와 강[熊見川]을 사이에 두고 타카쿠라야마 산[高倉山]에 진을 친 히데요시 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우리 군세 2만이 유리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는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작전변경이 하달되었다. 코우즈키 성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아마고 일당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코우즈키 성은 모우리에게 항복하였다. 당주 카츠히사는 자결, 시카노스케 등 60여 명은 빗츄우[備中]로 보내졌다. 시카노스케는 도중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결국 빗츄우로 들어서는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시카노스케를 부하로 삼으려 했던 것 같지만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
輝元)의 뜻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
1545년생.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를 섬기며 미마사카[美作] 2만석에 봉해져 가로(家老)의 지위에 있었다. 아마고 멸망 후는 카츠히사[勝久]를 옹립하여 싸움을 거듭하였지만 1578년 7월 17일 살해당했다. 34세.

  1. 아마고 가문[尼子家] 최강의 전투집단이었던 신구우 당[新宮党]의 당수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 [본문으로]
  2. 나오이에는 병을 칭하여 동생 타다이에[忠家]를 대신 출진시켰다 [본문으로]

 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
[각주:1]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각주:2]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의 전투 >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각주:3]]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각주:4]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각주:5],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각주:6]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7]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

  1. 누타(沼田) 쪽이 종가였다. [본문으로]
  2. 당시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의 당주는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였기에, 타카카게는 오오토모 소우린이 보낸 원군이라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킷카와[吉'川']나 코바야카와[小早'川']에는 내 천(川)자가 들어있기에. [본문으로]
  4. 제1차 키즈가와 강 입구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참고로 2차는 오다 군의 철갑선으로 복수했다는 전투이다. [본문으로]
  5. 모우리 모토나리의 9번째 아들. 모친이 코바야카와 가문의 분가인 노미 씨[乃美氏]인 연도 있어 아들이 없던 타카카게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벽제관 전투를 말한다. 여기 쓰여있는 30만을 그대로 믿으면 지는 겁니다. [본문으로]
  7.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것. [본문으로]


 모토하루[元春]가 양자로 들어간 킷카와 가문[吉川家]은 아키[安芸]에서 보면 산인[山陰]측으로 붙어 있는 츄우고쿠[中国] 지방의 명문가로, 원래 아마고[尼子] 측의 무투파로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위협하던 존재였다. 모토나리[元就]는 이 킷카와 가문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킷카와 가문은 모토나리의 부인 묘우큐우[妙玖]의 친정이었다. 그리고 모토나리 여동생이 킷카와 모토츠네[吉川 基経]의 부인이 되어 있는 이중으로 엮인 인척이었다. 모토나리는 부인 묘우큐우가 병으로 죽자 킷카와 탈취 공작을 개시. 킷카와 가문의 노신들을 꼬셔 가중을 분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30살을 넘었을 뿐인 당주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를 억지로 당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는, 그의 아들 센호우시[千法師]를 제쳐 두고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모토하루를 후계자에 앉혔다. 거기에 이 가문 강탈을 완벽한 것으로 하기 위해 오키츠네 부자를 살해한 것이다.

 모토하루는 색다른 에피소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엄청난 추녀를 부인으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토하루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기에 부친 모토나리는 모토하루에게 중신을 보내어, 결혼에 적당한 여성이 있는가 하고 협의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토하루는, '제 휘하에 있는 쿠마가이 노부나오[熊谷 信直]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답한 것이다.
 사자인 중신은 물론 그 보고를 받은 모토나리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쿠마가이의 딸은 추녀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모토나리는 설마 미녀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확인해 보자 추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예부터 여색에 빠져 애써 얻은 명장의 칭호를 더럽힌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모두 미녀의 색향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토하루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데려 가려 하지 않는 딸을 제 부인으로 하면 노부나오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사력을 다해 활약해 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모토하루의 말대로 노부나오의 딸과 결혼하자 노부나오는 전쟁터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맹장(猛將)의 이미지를 가진 모토하루 다운 이야기이다.

 처음 전쟁터에 나선 것은 11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모우리 가문은 아마고의 대군에 포위당하여 불과 3000여의 병사로 필사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때 불과 11살인 모토하루가 출진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노신인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가 넬슨 홀드까지 해가며 막았지만 모토하루는 결국 칼까지 뽑아들며 자기 뜻을 관철하여 끝내는 모토나리의 허락을 얻었던 것이다.

 모토하루는 주로 산인 지방 공략을 담당하였다.
 특히 아마고 씨와의 사투는 유명하여 아마고의 용장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가,
 “불구대천의 원수 킷카와 모토하루에게 한번만이라도 칼질 한번 먹이고 싶다”
 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의 병사들을 굶어 죽이는 장기 포위 공격으로 톳토리 성[鳥取城]을 공략한 히데요시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우키[伯耆] 국경으로 다가왔을 때, 그에 맞서는 모토하루의 병력은 6천에 불과하였다. 부하 장수 셋이 철병하지 않으면 참패를 당한다며 비장한 얼굴을 하고 모토하루에게 진언하러 왔다. 그때 모토하루는 곰 가죽 위에서 하품을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명을 보자 ‘우선 마시게’라는 말을 하였다. 곧이어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는 그 상태로 코를 골며 잠에 푹 빠졌다. 세 부하 장수는 이런 호담함에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물러났다. 모토하루는 이때 배후에 있던 다리를 무너뜨려 퇴로를 끊고서는 히데요시 군을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손을 떼고 물러났다고 한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는 달리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세상이 되어 억지로 끌려 나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출진했지만, 종군 중 등에 악성 종양이 생겨 부젠[豊前] 코쿠라 성[小倉城]에서 죽었다.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30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산인[山陰] 공략에 공을 세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세상이 되자 그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1584년에 은거하였다. 1586년 죽었다. 57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의 비극은 부친 신겐[信玄]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겐이 죽은 뒤 그 대단했던 다케다 가문[武田家]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직 신겐이라는 거인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던 노신(老臣)이나 숙장(宿將)들 사이에 어린 카츠요리[勝頼]를 얕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겐이 죽은 지 11일째에 카츠요리는 숙장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츠요리에게는 초조함이 있었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서 노신들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신겐은 “3년간 죽음을 숨겨라. 병사를 일으키지 말고 영토를 지켜라”하고 유언을 남겼지만, 카츠요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도발해왔기 때문이다. 타케다 측의 미카와[三河] 전선기지인 나가시노 성[長篠城]을 점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츠쿠데 성[作手城]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 信昌][각주:1]가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노부마사의 부인과 동생을 십자가에 메달아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1575년. 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나가시노 성주가 되었다. 이제 카츠요리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노신들의 간언(諫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츠요리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향해서 코우후[甲府]를 출발한 것이 이 해의 4월 5일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城)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그러던 중 오다-토쿠가와의 원군이 도착. 결전의 장소는 나가시노 성 밖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로 옮겨졌다.

 노신들은 주저하였다.
 “결전을 피하고 우선은 병사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오다-토쿠가와와의 결전을 정했다.

 1575년 5월 21일.
 이날 나가시노 성 밖의 시다라가하라에서 펼쳐진 전투는 일본역사상 획기적인 전투로써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예를 자랑하는 카이[甲斐]의 기마대가 출격했다. 아침안개 속에서 중앙대, 우익의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부대에서 함성이 일었다.

 선두가 오다-토쿠가와의 마방책(馬防柵)을 향하고 돌입하여 단번에 유린하고자 했던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의 총성이 일었다.
 오다 군의 일제사격이었다. 일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카이[甲斐]의 인마(人馬)가 연달아 쓰러졌다. 보통이라면 이런 후 적과 아군이 뒤섞여 백병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런 때야말로 카이의 기마 병단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최초의 사격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기마대가 개의치 않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다 하는 타케다 기마대도 이 새로운 전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전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軽]의 철포집단 3천명을 3대로 나누어, 천 정씩 교대하며 쉴 틈 없이 일제사격을 반복하게 한 것이다. 당시 유효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였는데, 노부나가는 카이[甲斐]의 군세를 마방책 앞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섬멸한 것이다.[각주:2]

 타케다 군은 도망. 사상자 1만여에 더해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후사 등 유명한 무장들도 다수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멸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전이었다.

 1582년에 오다 군의 진공이 시작되자 타케다에 속해있었던 장수들의 배반이 이어졌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木曽 義昌]의 모반은 타케다 가문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요시마사는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 소위 친족이었다. 그 외에도 타케다의 앞날이 어둡다 보고 적에게 달려가는 가신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타케다 가문의 본거지 신푸 성[新府城] 최후의 날이 왔다.
 성에서 도망치는 초라한 카츠요리의 모습을 당시의 기록자는, [산길을 맨발로 걸었기에 발은 붉게 물드니, 도망자의 모습 애처롭도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라고 전하고 있다.

 1582년 3월 11일.
 카츠요리 일행은 불과 100여명. 무사는 그 중 43명이 되어 있었다. 후에후키가와[笛吹川] 천을 거슬러 올라 최후의 거점으로 정해두었던 텐모쿠잔[天目山] 산으로 향했다. 산허리의 협곡에 있는 마을 타노[田野]까지 갔지만, 여기도 안주의 땅은 아니었다. 다음날 수천의 오다 군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좁은 계곡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되었다.

 이때 츠치야 소우조우 마사츠네[土屋 惣蔵 昌恒]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외길을 타고 공격해 오는 적병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다음에 칼을 쥐고 싸워 '소우조우 한 손 베기[惣蔵片手斬り][각주:3]'라는 용명(勇名)을 후세에 남겼다. 코미야마[小宮山], 아키야마[秋山] 등의 용사들도 달려드는 군세 속에서 칼춤을 추며 수십 명을 베었다.

 전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츠요리의 아들 노부카츠[信勝]도 십문자[十文字] 창을 들고 눈부신 분전을 펼쳤지만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일족인 승려(僧侶)와 서로를 찌르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족의 최후였다. 카츠요리는 부인[각주:4]에게 살아서 도망칠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19살의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뒤 자신의 가슴에 몸칼을 찔러 자결했다.

 카츠요리는 자결하는 여성 16명의 자살을 일행의 장로(長老)가 도와주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카츠요리는 배를 가르고 자결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46년생. 신겐[信玄]의 넷째 아들로 1573년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미노[美濃]에 침공하였고,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등에도 진출하지만, 나가시노[長篠]의 패전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오다 군[織田軍]과 싸우다 죽었다. 37세였다.

  1. 당시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자 하나를 하사 받은 뒤에 ‘노부마사[信昌]’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상의 이야기는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신쵸우키[信長記]에서 거론된 픽션으로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3.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6번째 딸. [본문으로]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영어판 >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부하 장수로 유명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는 용모가 특이했다고 한다. 거기에 에비스(えびす(모습))다이고쿠텐((모습))이 입고 있는듯한 카미코로모(紙衣 두꺼운 종이에 과일인 감의 즙을 발라 만든 천)로 된 하오리(羽織)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남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각주:1]. 품행은 특이했지만 붓글씨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가(主家)인 타케다(武田) 가문과는 대단히 짙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 타케다 가문의 선조 노부타케(信武[각주:2])의 넷째 아들인 시로우 요시타케( 義武)카이(甲斐)아나야마(穴山)를 영지(領地)로 삼아서는 아나야마 씨()를 칭했다고 한다. 그것뿐이라면 동족(同族)에 지나지 않겠지만 바이세츠의 모친은 신겐의 누나이며, 신겐의 딸 켄쇼우인(見性院)은 그의 부인인 것이다. 신겐은 외삼촌이며 또한 장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나 짙은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적 측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간 것이다.


 신겐이 죽고 젊은 카츠요리()가 타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고 난 바로 다음부터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이세츠는 당시 스루가(駿河) 에지리(江尻) 성주[각주:3],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하마마츠(浜松)성(城)과는 거리적으로도 가까워, 카이(甲斐)의 산골과는 달리 오다(織田)()나 토쿠가와 씨에 관한 새롭고 자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던 장소에 있었다.


 바이세츠가 일찍부터 배신을 마음에 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1575 5월 나가시노(長篠) 전투 때의 일이다. 바이세츠는 아군의 질 것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예상하고는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이탈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강(精剛)을 자랑하던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은 근대전법의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신겐 때부터 무용을 자랑하던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1581.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에게 진언하여 니라사키(韮崎)신푸(府)성(城)을 쌓게 만들었다. 코우후(甲府)에서 이곳으로 타케다의 본거지를 옮긴 것인데, [사람은 성벽, 사람은 성]이라 말하며 성()이라는 것을 쌓지 않았던 신겐 시대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이 축성이야말로 타케다 가문에 말기적 증상이 도래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이 다음 해(1582), 타케다의 유력한 부하장수인 키소 요시마사( 義昌)가 노부나가에게 달려갔다.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둔 일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직후 바이세츠도 배신하였다. 그는 배신에 앞서 신푸 성()에 인질로 보냈던 처자식을 빼돌리는 빈틈없음도 보여주었다. 불쌍하게도 키소 요시마사의 모친과 여동생은 신푸 성()의 정문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린 채 옆구리를 창으로 꿰뚫려 죽었다. 신푸 성()의 인질 천 여명 중 900명이 배신자들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바이세츠가 배반한 이유는 타케다에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명문 타케다 가()의 혈통을 끊어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의 자식 노부카츠(信勝)보다 자신의 자식인 카츠치요(勝千代) 쪽이 타케다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더 짙다고 생각한 듯하다. 언젠가 카츠요리 계통은 전쟁 속에서 끊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계통의 존속을 꾀하고자 고심한 것은 아닐까? 카츠치요의 할머니는 신겐의 누나이며, 모친은 신겐의 딸인 것이다.


 어쨌든 이에야스의 알선으로 오다의 군문(軍門)에 항복한 바이세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일본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

 혼노우(本能)사(寺) 이었다. 이때 바이세츠는 영지(領地)를 안도해준 것에 대한 사례인사차 아즈치(安土)의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후 사카이(堺)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함께였다. 거기에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급히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가(伊賀)를 지나려 했지만 이때 어째서인지 이에야스와는 다른 길을 취한 바이세츠는 그 도중에 쿠사치(草地())의 나루터에서 농민반란군(一揆)의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어렸을 때의 이름(幼名)은 카츠치요(勝千代).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겐바노카미(玄蕃頭), 므츠노카미(陸奥守)를 칭했으며, 1580년 머리를 밀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바이세츠사이(梅雪斎)라는 호를 칭했다. 1582년 타케다 멸망 시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붙어 소유하고 있던 영지(領地)를 인정 받지만 혼노우(本能)() 변 후 귀국 도중 농민반란군(一揆)에게 습격 당하여 살해당했다.

  1. 당시 무가의 사람이나 하이쿠(俳句 - 일본의 시)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행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카이 타케다 10대 당주. 참고로 신겐은 19대 당주. [본문으로]
  3. 정확히는 행정과 사법, 군정을 위임받은 죠우다이(城代)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