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행복하기를 (작사작곡 : 니시다 료우지[西田 遼二]) 

落ち込んでる君に かける言葉見つからない
오치콘데루 키미니 카케루 코토바 미츠카라나이
우울해 있는 너에게 걸 말조차 생각나질 않아

考えてみたところで 君の気持ち分かるはずもなく
칸가에테미타 토코로데 키미노 키모치 와카루하즈모나쿠
생각해 보긴 했지만 너의 마음 알 리도 없고

頑張れって言ったって 気休めにもなりゃしない
간바렛테잇탓테 키야스메니모나랴시나이
힘내라고 말해보았자 위안도 되지 않을 거야
 
流れ星に祈ったって どうもこうもなりゃしない
나가레보시니 이놋탓테 도우모코우모나랴시나이
별똥별에게 빌어보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야

だけど今は声を枯らして願いをかけたら
다케도 이마와 코에오 카라시테 네가이오 카케타라
하지만 지금은 목이 쉬도록 소원을 담아 
 
少しでも力になれると思うから
스코시데모 치카라니 나레루토 오모우카라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니까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無責任な言葉だけど、ひたすら君にエールを贈る
무세키닌나 코토바다케도 히타스라 키미니 에이루오 오쿠루
무책임한 말이지만 무작정 너에게 성원을 보낼께
  
今年も笑って君が春を迎え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와랏테 키미가 하루오 무카에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웃으며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最近気づいた 何も出来ない自分と
사이킨 키즈이타 나니모 데키나이 지분토
요즘 알게 된 일인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나와
 
決してあきらめはしない強い君の事
켓시테 아키라메와 시나이 츠요이 키미노코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지 않는 너

もしも君に僕の声が届いて
모시모키미니 보쿠노코에가 토도이테
만약 너에게 내 목소리가 전해져
 
少しでも勇気づけてやれたら
스코시데모 유우키즈케테야레타라
조금이라도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単純な言葉を投げつける事しかできないけど
탄쥰나 코토바오 나게츠케루코토시카 데키나이케도
이런 단순한 말밖에 전하지 못하지만

今年も君がキレイな桜を見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키미가 키레이나 사쿠라오 미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아름다운 벚꽃을 볼 수 있게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無責任な言葉だけど、ひたすら君にエールを贈る
무세키닌나 코토바다케도 히타스라 키미니 에이루오 오쿠루
무책임한 말이지만 무작정 너에게 성원을 보낼께

今年も笑って君が春を迎え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와랏테 키미가 하루오 무카에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웃으며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頑張れ! 負けるな!’
간바레! 마케루나!
힘내! 지지마!

しょうもないジョークで笑わせる事しかできないけど
쇼우모나이 죠크데 와라와세루코토시카 데키나이케도
썰렁한 농담으로 웃기는 것밖에 못하지만

今年も君がキレイな桜を見られますように
코토시모 키미가 키레이나 사쿠라오 미라레마스요우니
올해도 니가 아름다운 벚꽃을 볼 수 있게

とにかく君に幸あれ…とにかく君に幸あれ…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とにかく君に幸あれ…とにかく君に幸あれ!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토니카쿠 키미니 사치아레!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어쨌든 니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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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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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쿠키 요시타카[九鬼 嘉隆]는 히라도[平戸]의 마츠라 가문[松浦家]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수군(水軍) 대장이다. 요시타카의 선조는 키이[紀伊] 무로 군[牟婁郡] 쿠키 포[九鬼浦] 출신으로, 요시타카의 조부 즈음부터 시마[志摩]에 살았으며, 요시타카는 시마 7개 섬[志摩七島]의 수군을 휘하에 둔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게 되었다.

 쿠키 수군의 위력은 뭐라 해도 유럽에서 전래한 화포중심의 새로운 장비였다.
 1578년 6월. 요시타카는 거함 7척을 이끌고, 키이의 사이가 포[雑賀浦] 앞에서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 측에 선 키이 사이가[雑賀]의 수군 500척을 ‘유럽의 화술[蛮国之火術]’로 격파하였다. 사이가의 고전적 해적(海賊)의 전법으로는 신병기 화포를 장비한 쿠키 수군에 승리할 방도가 없었다.

 7척의 거함은 폭 약 13m, 길이 약 22m로, 당시의 상식을 깨는 거대함선이었다. 더구나 선체는 철을 두른 철갑선이었다.
당시 일본에 와 있어 이 배를 목격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우리 왕국(포르투갈)의 배와 닮았다…”고 하며 배에는 대포 3문이 장착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해의 9월. 오다 노부나가도 이 7척의 신예전함을 보기 위해 친히 사카이[堺]로 향할 정도였다. 이후 11월, 쿠키 수군은 이 신예함을 거느리고, 혼간지[本願寺]로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오오사카 만[大阪湾] 키즈 강[木津川] 앞에 나타난 모우리 수군[毛利水軍] 6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요시타카는 이 전공으로 시마와 이세[伊勢]의 각지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새로이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이 일본 해군 역사상 획기적인 전함건조자의 명예는 임진왜란 때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요시타카는 수군의 총사령관적인 역할로 출진하였지만, 일본수군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것이다.
 요시타카는 그 책임을 전가 받아 1597년 은퇴를 명령 받고 가독(家督)을 차남 모리타카[守隆]에게 물려주었다. 모리타카는 토바 성 3만 석을 영유하였고, 요시타카는 은거료(隠居料)로 5천 석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시타카의 운명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암전한다. 아들인 모리타카를 토쿠가와[徳川] 측에 서게 하고, 요시타카 자신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권고에 응하여 서군(西軍)에 선 것이다.
 처음에 요시타카는 아들인 모리타카가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을 떠나는 토쿠가와 군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츠나리의 사자를 두 번 거절하였지만, 쿠마노 신쿠우 당[熊野新宮党]의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가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요시타카] 님만 응해주신다면 곧바로 쿠키 님 밑으로 달려가겠다.”는 것을 전해 듣고, 결국 서군 가담을 수락한 것이다.
 
또한 다시 한번 자신의 힘으로 화려한 영광의 쿠키 수군을 다시 만들고 싶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인 모리타카는 아비가 서군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것을 이에야스[家康]-히데타다[秀忠]에게 보고하여 자신에게 딴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였다. 이에야스는 그 뜻을 기뻐하며 모리타카에게 귀국하여 시마-쿠마노의 수군을 복속시키라 명령하였다.

 모리타카가 귀국하자 이미 토바 성은 요시타카의 손에 떨어져 있어, 본뜻과는 다르게 부자지간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배려하며 자그마한 싸움만 있었을 뿐이었다.
 세키가하라 결전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모리타카는 서군 선박의 통행을 막은 공적으로 5만5천 석으로 가증되었다.

 한편 패한 측인 요시타카는 아고[英虞]의 와구 포[和具浦]에 숨어있었지만 곧이어 자살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리타카의 가로(家老) 토요타 고로우에몬[豊田 五郎右衛門][각주:1]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모리타카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조명탄원이 성립된 것도 모른 채. – 때문에 토요타는 후에 모리타카의 명령으로 참수 당했다고 한다.[각주:2]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542년생.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 처음엔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 휘하였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속하여 혼간지 공략[本願寺攻め]에 참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하여 1600년 10월 자살. 59세.    

  1. 토요타의 부인이 요시타카의 장녀인 것을 보면 가신들 중 필두의 위치에 있었던 듯. [본문으로]
  2. 일설에 따르면, 토요타 고로우에몬은 몸을 땅에 묻고 머리만 남겨놓은 채 옆에 톱을 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토요타의 목을 톱으로 베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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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약사 2012.02.21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 전에 철갑선을 운용했다면 일본에서 쿠키의 해적이 동양에서 최초로 철갑선을 만든겁니까? 그동안 학교에서는 '세계최초'의 철갑선이 거북선이라고들 가르쳐왔죠. 거북선은 임진란 전에는 없었을거 아닙니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1 1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문하여 쿠키의 선박이 동양 최초의 철갑선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던 기억은 있습니다.

      거북선은 조선 초기에도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는,
      네이버캐스트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350
      를 참조해 주십시오.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2.02.21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이 가문의 안전과 도박패를 동시에 쓴 느낌이 강하다면, 구키는 전자만을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군 참가 이후의 군사적 움직임은 그렇게까지 그가 전투에 적극적이었나에 대한 궁금함이 더해집니다. 토바성을 차지한 후 바로 내준다던가, 이와테성을 공략한다던가.

    흥미로운 것은 도요타 고로에몬의 이야기인데, 모리나 시마즈가 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내의 가신들을 숙청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사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구키씨가 미타와 아야베에서 이룩한 산 속의 수군 도시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는지요?

    P.S : 이전 글을 보다보니 로또 당첨 얘기가 나오던데 뒤늦게 축하드립니다 ㅎㅎ 설마 1..1등이신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1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쿠키 수군의 역할은 세키가하라 본전쟁터에서 싸움이 길어질 시 서국 다이묘우의 보급을 막는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서군은 주력의 일부(타치바나 무네시게 등)를 이세伊勢의 육로를 제압하러 보냈으며, 쿠키는 이세 육로가 봉쇄되었을 시 동군이 바다를 이용해서 오와리 지역(후쿠시마 마사노리 영지)으로 보급하는 것을 막는 임무였다 보니, 토바 성이나 이와테 성 등 육지에 있는 성에 과감히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토요타 고로우에몬의 경우 이에야스가 뭐라 하기 전에 미리 요시타카가 죽음으로 사죄하는 편이 쿠키 가문을 위해 나은 판단이라 생각하여 요시타카에게 죽음을 진언했다고 생각합니다.

      미타와 아야베는 제가 가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씀을 드리기 뭐하지만(^^; ), 어디서 듣기로는 저수지 등을 만들어 배 띄어 훈련했다거나 하더군요. 여담으로 미타와 아야베로 나뉜 것은 집안 싸움으로 인한 것이니 위키피디아의 쿠키 가문九鬼家에 관한 항목을 함 읽어보소서.

      ps;고맙습니다. 1등이면 좋겠지만 번호 4개로 5만원 되었습니다. ^^

  3. 구귀가륭 2012.07.30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키가 아니라 구키 병1신아. ㅡㅡ;

    • 九鬼 2012.07.31 0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ja.wikipedia.org/wiki/%E4%B9%9D%E9%AC%BC%E5%98%89%E9%9A%86

      구키가 아니라 쿠키 병1신아 ㅡㅡ;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31 0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블로그는 "최영애-김용옥 일본어 표기법 http://ko.wikipedia.org/wiki/%EC%B5%9C%EC%98%81%EC%95%A0-%EA%B9%80%EC%9A%A9%EC%98%A5_%EC%9D%BC%EB%B3%B8%EC%96%B4_%ED%91%9C%EA%B8%B0%EB%B2%95 "을 바탕으로 음소별로 한글과 1:1 대응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くき よしたか'는 '쿠키 요시타카'로 표기된 것이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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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2.19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머리에 시마사콘이 밟고있는 꼬리를 보니 여우인지 모를 사이클롭스(..)는 뭘까 궁금하네요. 시마사콘의 오니 퇴치 전설같은거라도 따로 있는거려나요.

    그러고보면 시마 사콘이 진언한 야습내지 기습을 족족 각하시켰다는건 이시다 미츠나리로서는 정공법으로 승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라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가 있으려나요. 만약 그랬다면 요즘 신나게 주가를 띄우고있는 캡콤겜이라거나 코에이겜에서의 미츠나리도 좀 평가절하되야겠습니다만(허헣;)

    사족이지만 올려주신 링크페이지를 내려 구족들 훑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수리부분에 빗자루를 달아놓은듯한 투구와 예의 그 쿠로다 나가마사 태양전지판 투구(..)가 굉장히 눈에 띄는군요. 그밑으로도 토도 타카토라는 무슨 프로펠러같은걸 투구에 붙여놓은거라더가(;;)

    타치바나 무네시게도 꽤 기이한 투구를 쓴듯 싶은데 이거 전국무쌍3에서의 성기사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터라 실제로 이런걸 보면 갭이 크군요. (어이쿠;;)


    아 로또당첨 축하드립니다. 저는 왕회장님과 영광스럽게도 악수하는 꿈을꾸고 한장인가 사봤는데 5등(..)나왔던게 제일 잘나온것이더군요. 도대체 누구와 만나야 1등을 받을수 있는걸련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0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글로 써진 부분에 그런 것이라도 있나? 해서 읽어보아도 그런 것은 없더군요.

      근데 그 야습설이라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미츠나리 까기 위해서 쓰인 글들이라...예를들어, 시마즈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야습을 진언했을 때 물리친 것은 시마 사콘인데, 이때 사콘은 "내일 작전대로 정면 승부한다면 필시 이에야스의 갑옷 뒷모습을 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토요히사가 "당신은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기는 한가?"라고 하자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을 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망치는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소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죠.(여담으로 이 일화를 가지고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던 적이 있네 없네 하죠..--; ). 기본적으로 야습이란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적으로 소인수 밖에 움직일 수 없으니 성공한다고 쳐도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상대도 병신이 아니니 대비가 되어있을테니까요.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야습을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지연의 등의 소설이 유포된 뒤에 군담작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각종 야습설이라 생각합니다.

      타카토라 투구의 저것은 중국 관리들이 쓰는 모자(冠帽)를 흉내낸 것인데..좀 大袈裟인듯요.

      고맙습니다. ^^ 당첨금으로 담배나 좀 쟁여놔야 겠습니다.

  2. ㅇㅇ 2015.07.05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 3병법이라는 명성에 비해 나오에랑 활약이 적군요. 아니면 모셨던 주군들이 변변치 못했다던지.

아이언 스카이(Iron Sky)

동영상 2012.01.27 02:32 Posted by 渤海之狼
세상에...
이런 작품을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티저 #1


티저 #2



티저 #3 
 
 
[ 독일군 여장교가 '브릴리언트' 하는 것을 보면 영국자유군단 출신인 듯요 ]

제가 만화가 김형배 님의 라스트 바탈리온을 정말 재미있게 보아서 말입죠. 나치에 UFO면 사족을 못 씁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2012.2.8. 추가된 공식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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