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 2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4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 약 91cm. [본문으로]
-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 양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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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머리에 시마사콘이 밟고있는 꼬리를 보니 여우인지 모를 사이클롭스(..)는 뭘까 궁금하네요. 시마사콘의 오니 퇴치 전설같은거라도 따로 있는거려나요.
그러고보면 시마 사콘이 진언한 야습내지 기습을 족족 각하시켰다는건 이시다 미츠나리로서는 정공법으로 승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라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가 있으려나요. 만약 그랬다면 요즘 신나게 주가를 띄우고있는 캡콤겜이라거나 코에이겜에서의 미츠나리도 좀 평가절하되야겠습니다만(허헣;)
사족이지만 올려주신 링크페이지를 내려 구족들 훑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수리부분에 빗자루를 달아놓은듯한 투구와 예의 그 쿠로다 나가마사 태양전지판 투구(..)가 굉장히 눈에 띄는군요. 그밑으로도 토도 타카토라는 무슨 프로펠러같은걸 투구에 붙여놓은거라더가(;;)
타치바나 무네시게도 꽤 기이한 투구를 쓴듯 싶은데 이거 전국무쌍3에서의 성기사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터라 실제로 이런걸 보면 갭이 크군요. (어이쿠;;)
아 로또당첨 축하드립니다. 저는 왕회장님과 영광스럽게도 악수하는 꿈을꾸고 한장인가 사봤는데 5등(..)나왔던게 제일 잘나온것이더군요. 도대체 누구와 만나야 1등을 받을수 있는걸련지(..;)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글로 써진 부분에 그런 것이라도 있나? 해서 읽어보아도 그런 것은 없더군요.
근데 그 야습설이라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미츠나리 까기 위해서 쓰인 글들이라...예를들어, 시마즈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야습을 진언했을 때 물리친 것은 시마 사콘인데, 이때 사콘은 "내일 작전대로 정면 승부한다면 필시 이에야스의 갑옷 뒷모습을 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토요히사가 "당신은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기는 한가?"라고 하자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을 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망치는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소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죠.(여담으로 이 일화를 가지고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던 적이 있네 없네 하죠..--; ). 기본적으로 야습이란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적으로 소인수 밖에 움직일 수 없으니 성공한다고 쳐도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상대도 병신이 아니니 대비가 되어있을테니까요.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야습을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지연의 등의 소설이 유포된 뒤에 군담작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각종 야습설이라 생각합니다.
타카토라 투구의 저것은 중국 관리들이 쓰는 모자(冠帽)를 흉내낸 것인데..좀 大袈裟인듯요.
고맙습니다. ^^ 당첨금으로 담배나 좀 쟁여놔야 겠습니다.
천하 3병법이라는 명성에 비해 나오에랑 활약이 적군요. 아니면 모셨던 주군들이 변변치 못했다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