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73 8 20 할복 41

1533년 ~ 1573년.
아사쿠라씨 제 5대 가주. 에치젠(越前), 카가(加賀), 노토(能登)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와 싸웠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과 대립.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와 손을 잡고 아네가와(姉川) 천에서 싸웠으나 패배. 본거지 이치죠우다니(一乗谷)를 노부나가에게 공격 받아, 친족인 카게아키라(景鏡)에게 배반당해 할복하였다.









이치죠우다니의 망명객


 1533년.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우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 孝景)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시카게는 1573 4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문가 아사쿠라에게 몰락의 징조가 나타난 것은 난을 피해 에치젠으로 도망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이치죠우다니를 떠나 오다 노부나가의 기후(岐阜)로 향한 1568 7월로 볼 수 있다. 이 때 요시카게는 36세였다.


 오히려 요시카게 자신은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전년인 1567 11월에 에치젠 츠루가(敦賀)에서 이치죠우다니로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이 때는 아직 義秋)가 아사쿠라 저택으로의 비공식적인 방문이 성사 되었으며, 새해가 밝은 1568 요시아키의 추천으로 요시카게를 낳은 모친의 위작이 이위(二位)에 서임되었다. 또한 봄에는 경치가 뛰어난 객관(客館)인 난요우(南陽)()로 요시아키를 초대하여 화려한 연회를 열어서는 화려하게 핀 벗나무를 주제로 요시카게는 참석한 귀족(公家)들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겼다. 이어 아사쿠라 저택에서 요시아키(義秋)는 성년식을 치르고 [義昭]로 개명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공식적인 방문이 실현. 요시카게는 최고의 명예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와는 달리 굉장히 정치적이며 야심가이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에치젠까지 내려올 리가 없었으며 아사쿠라 가()의 무력 지원을 받아서 쿄우()로 올라가 쇼우군()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8개월 정도 머물고 있는 동안, 요시카게에게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요시아키는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노력으로 새로운 지원자가 되어 준 노부나가에게로 향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다.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을 이루고 천하를 향한 발판을 마련했다. 반대로 요시카게는 요시아키를 놓쳐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되었다. 오히려 그 당시 요시카게는 세력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족끼리의 다툼이 방해를 하였다. 오오노(大野)()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와 츠루가(敦賀) 군(郡)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 景恒)와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며, 이 둘의 중재에 요시카게는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시아키가 떠나기 직전, 요시카게의 적자 쿠마키미(阿君)가 독살당하는 괴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진상은 확실치 않지만 요시아키를 둘러쌓고 요시카게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아케치 미츠히데 쪽의 책모는 아닐까 하는 말이 있다.


 다음 해인 1569년.

 쇼우군 요시아키의 어소(御所)를 만들기 위해 노부나가는 여러 나라의 다이묘우들에게 쿄우로 와서 건설에 참가하기를 원했다. 요시카게에게도 상경의 재촉이 있었으나 회의 결과 무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노부나가와의 적대 관계가 명확히 되어 1570년에 아네가와 전투라는 결과가 되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 1 5천과 아자이 나가마사 군() 5 ~ 6천이 아네가와를 사이에 끼고 오다-토쿠가와(德川) 연합군 3 4천과 대치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격전 끝에 아사쿠라-아자이측이 대패배를 당했다는 듯이 알려져 있지만 양 측 다 많은 전사자를 내며 물러났으며 나가마사도 오다니(小谷) 성을 지킬 수 있었으니 우선은 비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요시카게보다도 노부나가가 위기에 빠진다.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노부나가가 원망스러운 쇼우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아사쿠라, 아자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 잇코우잇키(一向一揆), 히에이잔(比叡山), 마츠나가(松永), 미요시(三好) 등의 세력과 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까지도 참가하는 강대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형성된 것이다. 요시아키의 생각을 받들어 요시카게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배반당한 요시카게의 최후


 하지만 노부나가군과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요시카게는 한 번만 더 밀면 되는 곳에서 철군하는 등 승기를 놓쳤다. 한 편 각개 격파로 포위망을 뚫고 위기를 탈출한 노부나가는 1573오우미(近江)로 쳐들어 온다. 오다니성 구원을 위하여 달려온 요시카게였지만 이미 노부나가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두 개의 지성(支城)이 함락되어 오다니성도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알고 구원을 중지하고 퇴각하였으나 추격해 온 노부나가 군과 오우미 토네사카(刀禰坂)에서 조우하여 요시카게군은 대패하였다.


  5 ~ 6기(騎)와 함께 이치죠우다니로 도망 온 요시카게는 사촌인 요시아키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에치젠 오오노로 도망가 토우운(洞雲)()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대하고 있던 헤이센(平泉)() 중도(衆徒)의 지원을 얻지 못하였고, 더구나 카게아키라의 꼬임으로 로쿠보우켄쇼우(六坊賢松)()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배반한 카게아키라의 군세에 포위되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된 요시카게는 8 20일 오전 10시경,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진 40년 인생.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七転八倒 四十年中
 無他無自 四大本空

 이라는 사세구를벽에 피로 쓴 후,배를 열십자로 그어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