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토시카게가 죽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느 귀족은,
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 외에도 다이죠우 원[大乗院]의 진손[尋尊]이나 이치죠우 카네요시[一条 兼良]가 토시카게의 행동에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을 정도로 당시의 귀족이나 중들에게 있어서 토시카게는 장원(荘園 - 귀족이나 사원의 영유지)을 빼앗아 갔기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토시카게는 구질서 아래서 온존되어 왔던 귀족의 특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렸던 것이다.
아사쿠라 씨[朝倉氏]는 대대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 1 시바 씨[斯波氏]의 가신이었다. 토시카게 때 삼가로(三家老 2)의 하나로 승진하였다. 토시카게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시바 가문의 가독 상속 싸움으로 인해서였다.
1452년.
시바 요시타케[斯波 義健]가 죽자, 그의 양자(養子) 요시토시[義敏]가 필두가로인 카이 씨[甲斐氏]와 싸워 카이, 아사쿠라, 오다의 삼가로에게 추방당하였고 새로이 요시카도[義廉]가 양자로 들어왔다. 시바 가문의 이 두 양자간의 상속 싸움이 '오우닌의 대란[応仁の乱]'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처음 토시카게는 요시카도의 밑에서 막부[幕府]의 실력자인 야마나 소우젠[山名 宗全]의 서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 토시카게에게 은밀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야마나에 대항하는 실력자인 동군의 총대장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 勝元]에게서였다. 서군을 배신한다면 에치젠 슈고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1472년.
토시카게는 에치젠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실직적인 슈고 다이묘우가 되었다. 이 때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黒丸城]에서 이치죠우다니[一乗谷] 계곡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치죠우다니 계곡은 에치젠 지배의 요충지이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후츄우[府中], 키타노쇼우[北ノ庄], 오오노[大野]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후에 이치죠우다니는 '북국의 작은 쿄우토[北国の小京都]'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로 발전하였다.
토시카게는 그야말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 大名]의 선구자였다.
이치죠우다니에 가신들을 집결시켜 살게 하는 등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중앙집권제를 행한 것도 토시카게가 제일 먼저였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등도 이를 모방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합리 정신은 토시카게가 정한 '가훈17개조'에서도 볼 수 있다.
우선 문벌 타파와 인재의 등용이다.
가훈 제 1조는,
제 2조에서는 군비(軍備)에 대해서,
미신 타파에도 힘써
사람을 쓰는 것에 있어서 규정한 조항을 보면,
이렇게 불과 17개조 이면서도 토시카게의 가훈은 하극상(下剋上)으로 일어난 센고쿠 다이묘우의 통치 방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굉장히 흥미 깊은 자료이다.
아사쿠라 가문은 이런 토시카게 덕분에 5대 100년간 이치죠우다니[一乗谷]의 땅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아사쿠라 도시카게(朝倉 敏景)]
1428년 에치젠[越前] 사카이 군[坂井郡] 쿠로마루 성[(黒丸城]에서 태어났다. 타카카게[孝景]라고도 한다. 1471년 주군인 시바 씨[斯波氏]를 대신해서 에치젠[越前] 슈고[守護]가 되었다. 미신 타파에 힘쓰는 한편 당시 종교계의 신흥 세력인 렌뇨[蓮如] 4와 친교를 맺어 에치젠 요시자키[吉崎]에 절을 만들어 주었다. 1481년 54살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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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전국시대의 무장 사이에선 미신이 널리 행해졌다고 합니다. 출진의 길일을 택해주거나 하는 술법을 쓰는 이들을 군사軍師라고 칭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생사를 넘나드는 가혹한 환경에서 미신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군사같은 경우...저같은 경우는 삼국지연의의 제갈량 이미지가 강해서 인지, 군사~! 라고 하면 왠지 참모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더군요. 알려주신대로 일본 전국 시대의 군사는 그 군사가 아니더군요.
어, 그러면 이 아사쿠라 집안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목이 따인 아사쿠라 요시카게 집안인가보네요? 이치죠다니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 토시카게의 4대손이 요시카게입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오다 노부나가를 무시했다고 하는데,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사쿠라 가문과 동격인 [오다 종가]의 아래의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키요스 오다씨)]에 속해있던 세 가로(三家老, 三奉行)의 하나인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배출되었으니....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있어서 노부나가는 동료의 부하의 부하 가문 출신인 셈이죠.
소-테키 아버님이군요(ㅎㄷㄷ) 한창때 죽어서 아쉬운 사람이네요 10여년만 더 살았어도 요시카게녀석보다는 좀 나은 계보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쿨럭, 노부나가 말투는 힘들군요; 혹시 총리대신 오다모부나가에서의 원문이 혹시 어떤 것인지..?)
이번에 이 글을 쓰려고 조금 찾다보니, 소우테키가 오히려 적자에 가깝다는 듯한 말이 있더군요.
소우테키가 죽을 때, [3년만 더 살았으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다]는 식의 말을 할 정도인 것을 보면(그 외의 것을 포함해서) 뛰어난 인물이었을텐데 말이죠.
^^ 그리고 원문은...
[天下の事は家康殿におまかせしようと
おまかせしちゃってもいいかなぁと思わんでもない] 입니다.
원문도 멋지군요. ㅎㅎㅎ... 소-테키도 당시 기준으로 따지면 상당한 장수지만 5년만 더 살았어도 오케하자마의 서커스를 볼 수 있었을텐데..(허허..)
저 말....한 때 입에 붙어서는 잘 떨어지지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