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정권의 상징과도 같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6년 2월 21일.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의 문서담당관[右筆]인 우노 몬도[宇野主水]의 일기[각주: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즘 '천명 베기[千人斬り]'라 하여 오오사카 시내에서 노동자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여러 소문이 돌고 있다. 오오타니 키노스케[大谷 紀之介]라는 소성(小性) 중 하나가 자신이 걸린 악성 종양(惡瘡)을 치유하기위해 천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리한다는 소문이 있다.
此の頃、千人斬りと号して、大坂の町中にて人夫風情のもの、あまた討ち殺す由、種々風聞あり。大谷紀ノ介と云う小姓衆、悪瘡気につきて、千人殺してその血をねぶれば彼の病平癒するとて此の儀申し付く云々、世情風聞なり

여기서 나오는 오오타니 키노스케[大谷 紀之介]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패배할 줄 알면서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우정을 지켜 서군(西軍)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으로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말합니다. 일본에선 나름 '고결(高潔)'한 사람으로 꼽히는 듯합니다.

범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년도인 1585년 11월 27~28일 사이.
그때까지 이런 소문이 떠돈다는 것조차 몰랐던 히데요시는 격노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데도 보고조차하지 않다니 직무태만이다. 담당자[町奉行]들을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우선 목숨만은 살려둔다"
히데요시의 분노는 당연했습니다. 전년 1585년 7월 텐노우[天皇]의 대리인인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으며 본거지로 정한 오오사카의 성과 도시도 막 완성되어 일본 전역에 자신의 위광을 과시하고자하였는데 발생한 치안사건이었기에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습니다.

님들아~ 이젠 일본의 평화는 제가 지킬께요! - 라며 히데요시가 총무사령[惣無事令][각주:2]을 반포한들, '지 본거지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무슨 일본 운운이냐?'라는 비웃음만 돌아올 테니까요.

미담의 세계에선,
"범인은 오오타니 키노스케라고 합니다. 이유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천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라는 담당관들의 보고에,
"허허~ 키노스케가 그럴 리 없지"
라고 웃으며 히데요시는 단박에 물리쳤기에[각주:3]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우선 미담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히데요시는 우선 담당관 세 명에게 근신처분을 명합니다.
너무 늦은 보고,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바탕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범인에게 황금 10매(枚)를 현상금으로 걸었습니다.

범인이 잡혔습니다.
우키타 지로우쿠로우[宇喜多 次郎九郎].
성씨가 우키타[宇喜多]인 것으로 보아서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로우쿠로우는 히데요시의 친위대[馬廻]에 속했던 자로, 오오사카에서 천 명베기[千人斬り]를 칭하며 사람들을 살해하다가 발각되어 히데요시에게 자살을 명령받아 3월 3일 자살합니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우키타 지로우쿠로우가 죽은 바로 그날 저녁인 3월 3일에 5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 오오타니가 한 것이 아니냐고들 쑤군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에 언급하는 기록이 없기에 어떤 결말로 끝이 났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 이후 오오타니의 활약과 출세를 보건대 범인이 요시츠구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히데요시는 비록 명목상이긴 하나 바로 이해인 1586년 7월 사법을 다스리는 부서 형부(刑部)의 차관 교우부노쇼우[刑部少輔]에 요시츠구를 임명합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살인사건의 용의자에게 사법 담당관에 임명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뭐 예나 지금이나 편견이 문제입죠. 

  1. 우노몬도일기[宇野主水日記]는 사료가치가 높은 일급사료로 유명하다고 한다.별칭 '카이즈카 어좌소일기[貝塚御座所日記]', '이시야마혼간지 일기[石山本願寺日記]' [본문으로]
  2. 사투 금지령(私鬪禁止令). 한 마디로 싸우지 말라는 소리. 텐노우[天皇]의 대리인 칸파쿠[関白]의 이름 하에 반포했기에 히데요시는 이를 어긴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가문[島津家],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었다. [본문으로]
  3. 요시츠구가 범인이래요~ 라고 보고하는 담당관에게 칼을 뽑고 다가가 죽이려 했다는 말도 있습죠. [본문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1.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2.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3.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6.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7. 히데요시가 쥬라쿠다이[聚楽第]를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은거해 있던 곳. [본문으로]
  8. 타다토시는 인질로 에도[江戸]에 가서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후에 폐적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제치고 타다오키의 세자가 된다. [본문으로]
  9.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상경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복하고 그렇게 꼬우면 현피뜨자는 편지까지 받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려 감. [본문으로]
  10.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