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큐우슈우[九州] 6개 지역[国]에서 위세를 떨친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로도 유명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여 당시
야마구치[山口]에 머물고 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자기 영지(領地)인 붕고[豊後]의 후나이[府
=현 오오이타 시[大分市]]로 초대하여 회견하였다. 소우린 22살 때였다. 이때부터 이 젊은 붕고의 주인은 이국(異國)의 종교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략)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들은 이 가르침보다 고귀한 말씀은 없었다. 또한 이 가르침보다 도리에 맞는 가르침 역시 없을 것이다"
 이때는 이렇게 고백하였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기독교에 입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붕고 영내(領內)에 포교를 허용하였으며 후나이[府
内]에 교회를 세워 한때 소우린의 영지(領地)는 일본 기독교 활동의 근거지가 될 정도였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까지 지었다.

 한편 청년 소우린은 믿음직한 기독교 보호자이기는 하였지만 호전적이고 빠굴을 굉장히 좋아하는 센고쿠 무장이기도 하였다. 1553년에는 가신의 부인 중에 미모로 유명한 여성을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인을 빼앗긴 핫토리 우쿄우노스케[服部 右京助]를 시작으로 한 이치마다 아키스케[一万田 鑑相], 무네카타 아키히사[宗像 鑑久] 등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각주:1]. 그외에도 소우린은 친족이나 가신들의 부인에게 손을 댔다.

 가독을 상속할 때 피비린내 나는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
義鑑]가 난폭한 소우린[각주:2]을 미워하여 총애하던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시오이치마루[塩一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자상속을 주장하는 두 중신[각주:3]이 1550년 2월 10일 밤에 오오토모 저택의 2층에서 자고 있던 요시아키를 습격하여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미를 죽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이층의 붕괴[二階崩れ]'라고 한다.[각주:4]

 소우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으면 육친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았다.
 1554
히고[肥後]의 키쿠치 요시타케[菊池 義武][각주:5]가 붕고[豊後]를 노렸다는 이유로 나오이리 군[直入郡] 키하라[木原]로 불러들여서[각주:6] 살해하였다. 요시타케는 소우린의 숙부였다. 이 숙부의 수급을 검사할 때 소우린은 "오오토모 가문을 노린 괘씸한 놈"이라며 채찍을 휘둘러 그 목을 마구 쳤다고 한다.

 1559년부터 1570년 동안 오오토모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 사이에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고승 이운 화상[惟雲和尙]을 초대하여 그에게 사사 받아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즈이호우 소우린[瑞峯宗麟]'이라는 법호(法號)를 얻었다. 여전히 소우린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1571년 소우린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軍]에게서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에 임명 받아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히젠[肥前]의 6개 지역을 영유(領有)하는 거대 다이묘우가 되었다. 당시 후나이[府内]에 있던 선교사도 "일본 최대의 영주 중 한 명"이라며 소우린의 위세를 전해주고 있다.

 큐우슈우[九州]에 남은 곳이라고는 명문 시마즈 씨[島津氏]가 영유(領有)하는 휴우가[日向]의 일부, 사츠마[薩摩], 오오스미[隈] 3개 지역이었다. 그 시마즈 씨가 큐우슈우[九州] 제패를 목표로 북상하여 소우린의 이웃 나라인 휴우가[日向]에 침입하였다.

 이해 즉 1578년 49세의 소우린은 불교의 법의(法衣)를 벗고 세례를 받아 '프란시스코'[각주:7]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다년간 그의 입신을 거부해 왔던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여 입신한 것이었다. 신앙도 철저하여 영내(領內)에 있던 신사(神社), 사원(寺院)을 계속해서 불태워 파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우린의 기독교 개종과 동시에 오오토모 가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1578년에 4만 대군으로 휴우가[日向]에 진출한 오오토모 군[
大友軍]은 시마즈 군[島津軍]이 선두에 내세운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깃발에 위압당해 전군이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사상자 2만에 달하는 참패였다. 이것이 유명한 휴우가[日向] 미미가와 전투[耳川の合戦]이다.

 이후 오오토모 왕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1587년 소우린은 실의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30년생. 이름은 요시시게[
義鑑],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 1582년 오오무라[大村], 아리마[有馬] 등과 함께 일본 최초로 유럽의 로마 교황에게 사절(使節)을 파견하였다. 1587년 5월에 죽었다. 58세.

  1. 실은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에 후계자로 보낸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큐우슈우에 있던 오오우치 가문 영지에 손을 썼고 그에 동조하여 상기의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다. 부인을 취한 것은 그 후의 일. 참고로 이치마다 아키스케의 부인도 취했다. [본문으로]
  2. 소우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소우린을 폐적하고 시오이치마루 옹립을 주도적으로 꾀한 이리다 치카자네[入田 親誠='이리다'는 '뉴우타'라고도 읽는다]는 소우린의 후견인 & 스승이었다...지만 여기엔 또 히고[肥後]의 영지를 둘러싼 오오토모 가문 내의 파벌 싸움도 섞여 있었다. [본문으로]
  3. 소우린을 폐적하기 위해 요시아키는 네 명의 중신과 협의하였지만 네 명 다 반대. 그래서 요시아키는 네 명중 두 명을 살해하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두 명이 난을 일으켰다. [본문으로]
  4. 침입한 중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참살. 요시아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틀 후 사망. [본문으로]
  5.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가 히고의 명문가인 키쿠치 가문을 빼앗기 위해 키쿠치 가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의 동생(즉 소우린에게는 숙부가 됨)을 양자로 들여보냈지만 독립심과 야망, 멍멍이 같은 성격에 비해 능력이 딸려 결국 키쿠치 가문의 가신들에게 추방. [본문으로]
  6. 갈 곳이 없는 차에 소우린이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초대하였다. [본문으로]
  7. Dom Francisco. [본문으로]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87 5 23일 병사(病死) 58.

1530 ~ 1587.

이름은 요시시게[義鎮].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城主). 선교사 하비에르를 후나이[府内]로 초대하였고 후에 세례를 받아 이토우 만쇼[伊藤 マンショ] 등 텐쇼우 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각주:1])을 로마로 파견했다. 큐우슈우[九州] 6개국을 지배했지만, 미미가와 강의 전투[耳川い]에서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패하여 쇠퇴(衰退)하였다.








신앙으로 인한 부부싸움.


 센고쿠[戦国]의 시대.
 오오토모 소우린의 전성기 때에는 붕고[豊後]를 중심으로 큐우슈우[九州]의 붕고, 부젠[豊前], 히젠[肥前], 히고[肥後],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의 슈고[守護][각주:2]에 임명 받았고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각주:3]도 병행해서 수행했다. 그러나 말년은 시마즈 씨()의 위협, 부인과의 싸움 건강 악화라는 고난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소우린이란 이름은 불교인 선종()에 들어갔을 때 얻은 호() 원래는 요시시게라고 하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으며 적자(嫡子)인 요시무네[義統[를 낳은 부인은 쿠니사키[東] 반도에 있는 나타 하치만 궁[奈多 八幡宮]의 대궁사(大宮司) 나타 아키모토[奈多 鑑基]의 딸이었다. 이 부인과 소우린은 자주 부부싸움을 하였다.


 젊었을 때의 소우린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남편을 죽이면서까지 남의 부인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그러나 나타 씨[奈多氏]라고 불린 부인과의 부부싸움 원인은 여성 문제가 아니었다. 부인은 해가 갈수록 소우린이 기독교에 빠져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소우린은 해외무역의 막대한 이익에 주목,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권한을 가진 선교사와의 우호를 위해서 가신들 뿐만 아니라 혈연들에게까지 입교를 권했다.


 나타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정은 대궁사(大宮司)를 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를 깊이 믿고 있던 나타 씨에게 있어 기독교는 사교(邪敎)였다.

 남편이 둘째 아들 치카이에[親家]에게 세례받도록 권한 것을 따졌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 치카카타[親賢]와 함께 교회를 파괴하거나 선교사를 죽이려고 병사를 보내 크리스천 무사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기에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다.


 선교사들은 이런 나타씨에게 이세벨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세벨이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를 추방한 여자였다. 프로이스의 [日本史] - 나타 씨는 행실이 좋지 못하였고 성격차이가 심했기에 소우린은 그녀를 혐오하였고 너무 고민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나타 씨의 시녀장(侍女長)은 병상에 있던 소우린을 정성껏 간호하였는데, 이 여성은 집안일을 다스리는데 뛰어났다. 소우린은 이 여자를 나타 씨의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 세례를 받게 하여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하였고 나타 씨와 이혼한 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1678년의 일로 소우린 49, 쥬리아 40세였다. 또한 소우린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순수하게 믿게 되어 결국 자신도 세례를 받고 [동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몰락의 시작


 이 즈음인 휴우가[日向]의 영유하고 있던 이토우 요시스케[伊東 義祐]가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에게 패해 도망쳐 와서는 소우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우린은 침략자 시마즈를 쫓아내고 휴우가[日向]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에 해로를 택한 소우린은 배에 인도의 부왕(副王)에게 선물받은 붉은 십자가의 깃발을 앞세웠으며, 거기에 새로운 부인인 쥬리아 그리고 선교사들과 함께 휴우가[日向]로 향했다. 도중에 육로(陸路)를 택한 소우린은 가는 곳 마다 신사(神社) 절을 파괴하였으며 길이 험한 곳은 불상으로 메우면서 진격했다.

 오오토모 5만의 병사들 대부분은 기독교도가 아닌 신불을 믿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신불을 무시하는 소우린을 불신하여 사기는 낮아만 갈 뿐이었다. 또한 소우린은 시마즈를 경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커서 11월.

 7(里)[각주:4]의 산과 들에 2만이 넘는 시체가 널릴 정도로 미미가와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가신들은 신불이 내린 벌이라며 소우린을 비난하였고 이는 오오토모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가독(家督)을 물려주었던 적자 요시무네도 변변치 못하여 지역 호족들의 모반이 이어졌다.

 1586. 57세의 소우린은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큐우슈우[九州]로 군사들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마즈 씨의 압박은 계속 되어 우스키 성[臼杵城]이 포위당했다. 2문의 대포 '쿠니쿠즈시[国崩]'가 성 방어에 크게 활약했지만 성 밑 마을은 재로 변하였고 후나이[府内]도 불에 타고 파괴당했다. 이때 소우린은 전투 지휘는 물론 쥬리아 부인과 함께 영민(領民)들을 도우고자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농성에 의한 피곤으로 인하여 눈에 띌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에 와서 시마즈 씨를 쫓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소우린은 자신의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츠쿠미[津久見]에 은거하며 쥬리아 부인과 함께 기도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낸다. 히데요시는 큐우슈우를 제압해 가는 도중에 소우린의 아들 요시무네에게 붕고[豊後]의 영지(領地)를 안도(安堵)해 주었다. 소우린은 안심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소우린에게 휴우가[日向]의 일부를 은거료(隱居料[각주:5])로 하사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받질 않았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15일 후인 1587 5 23일.

 츠쿠미에서 쥬리아의 병간호를 받는 도중 58세의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1. 텐쇼우[天正]는 당시의 일본 연호. 이토우 만쇼, 치지와 미겔[千々石 ミゲル]의 정사(正使)와, 나카우라 쥬리안[中浦 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 マルティノ]의 부사로 구성된 사절단으로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왔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던 지방관.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가 큐우슈우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장관. [본문으로]
  4. 리(里)는 길이의 단위, 약 4Km. 7리는 약 28Km.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