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