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 武吉]

1604 8 22일 병사 72.

1533년 즈음(??) ~ 1604.

노시마[能島] 무라카미 씨[村上氏] 5대 당주. 가독(家督) 종가(宗家)에게서 가독을 빼앗았다.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이츠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편에 서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와 싸웠고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지배 하에 들어가 치쿠젠[筑前], 부젠[豊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도왔다.








노시마[能島] 퇴거[退去]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수군성(水軍城) 노시마를 뒤로 하고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로 자리를 옮긴 것은 1585년 가을이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모우리 공략(빗츄우[備中] 원정)시에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고, 모우리 씨[毛利氏]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뒤에도 히데요시의 사이카[
] 공략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1585 6시코쿠[]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하여 그를 본거지에서 쫓아낸 한 것이다.


 노시마[能島]는 쿠루시마[來島] 해협의 무시[務司], 나카토[中途]의 두 성()과 함께 노시마 무라카미 씨[能島村上]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 세키제니[関銭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한 바다의 세관(稅關)이었기에, 이곳을 잃었다는 것은 해적중(海賊衆[각주:1])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되었다.


 더구나 3년 후인 1588 7 8일.
 히데요시는 해적 금지령을 발포하여 타케요시 부자(父子)가 이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둘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이때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히데요시의 복심(腹心)인 토다 카츠타카[
田 勝隆]의 주선으로 사형은 면하게 되지만, 그 대신 아키[安芸] 타케하라에서도 쫓겨나 아카마가세키[赤間 시모노세키[]]부터 동쪽 - 즉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를 금지 당한다.


 타케요시는 어쩔 수 없이 이요[伊予]에서 치쿠젠[筑前]으로 전봉()을 명 받은 타카카게를 따라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로 거처를 옮겼고, 곧이어 부젠[豊前] 미노시마[箕島]로 이주 당한다. 부젠[豊前] 미노시마는 히데요시의 복심인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黑田 官兵衛 孝高]의 영지(領地) 위험 분자 타케요시를 칸베에의 감시하에 두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노림 수였다.


 1591년.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の役[각주:2]]을 앞두고 타케요시를 나가토[長門] 오오츠 군[大津郡]으로 이주 시켰다. 이 곳은 모우리 씨[毛利氏]의 영지로 주어진 석고(石高) 1만석이라고 하지만, 예전에 본거지였던 세토 내해와는 멀리 떨어진 한국 동해(東海)측의 벽지(僻地)였다. 이럴 정도로 히데요시는 무라카미 타케요시라는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재기(再起)를 꿈꾼 야망(野望)


 타케요시가 나가토 오오츠 군에서 아키[安芸] 타케하라로 돌아 온 것이 1598년 가을. 이해 8 18일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타카카게는 그 전해인 6 12일 미하라 성[三原城]에서 병으로 죽었기 아키[安芸] 타케하라는 모우리 테루모토의 영지가 되어 있었다.


 이때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海山城]에서 살고 있던 타케요시는 아들인 모토요시[元吉]와 함께 이요[伊予] 노시마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토 내해 중앙부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 형세는 그런 타케요시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생긴 절호의 기회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놓쳤고, 그의 우유부단으로 인하여 천하는 수군을 적대시(敵對視)하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600년 여름.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눈 앞에 두고 타케요시의 몸은 장시간 잠들고 있었던 바다 무사의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무라카미 수군의 온 힘을 다해서 오오사카 만[大坂灣]으로 출동. 오오사카 만()에서 이세 만[伊勢灣]에 걸친 해역을 봉쇄해서 동군을 견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쿠키[九鬼] 수군[각주:3]과 협력하면서 서군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군의 총수(總帥) 모우리 테루모토는 그런 무라카미 수군에게 이요[伊予] 마사키 성[松前城] 공략을 명했다. 그 때문에 무라카미 수군 세력은 둘로 나뉘어 오오사카로의 출동은 빗츄우[備中] 카사오카[笠岡]의 무라카미 카게히로[[각주:4]]과 타케요시의 둘째 아들 카게치카[景親]가 담당하고, 타케요시 자신은 장남인 모토요시나 인노시마[因島]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요시타다[村上 吉忠] 등을 이끌고 이요[伊予] 미츠카하마[三津浜]로 출동한 것이다.


고난 속에서 죽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오오사카로 출동한 수군 부대는 거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伊予]에 상륙한 무라카미 수군의 육전대(陸戰隊)는 부대장이며 타케요시의 장남 모토요시를 포함하여 후루미츠[古三津]에서 전멸 당하였다.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의 야습에 당한 것이었다.

우치노뉴우[內入] 겐세이 사[元正寺]에 있는 타케요시의 묘(墓).

 때문에 타케요시는 세키가하라[ヶ原]의 패배에 따라 영지(領地) 대부분을 잃은 모우리 씨를 따라, 스오우오오시마[周防大島]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주한 곳은 스오우오오시마 동부의 우치노뉴우[]였다. 한 때 일본 최강의 해상군단(海上軍團) 총수(總帥)로 천하인(天下人) 히데요시에게조차 공포심을 안겼던 바다의 효장()도 지금은 불과 120명의 부하를 거느린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패사(敗死)한 장남 모토요시의 뒤를 이은 것은 불과 7살의 손자 모토타케[元武], 둘째 아들 카게치카가 자신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모토타케를 보좌했지만, 모우리 씨에게 하사받은 영지는 다 합쳐서 3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기에, 농부가 되어 밭을 가는 것 말고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부하들은 계속해서 새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 섬을 떠났다.


 이런 고난 속에서 타케요시가 노시마의 바다를 추억하며 죽은 것은 1604 8 22.

향년 72(79세라는 설도 있다)였다.

  1. 일반적인 해적질을 목적으로 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바다의 용병집단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본문으로]
  2.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3. 과거 모우리 가문[毛利家]과 오다 가문[織田家]이 다툴 때, 오오사카의 혼간 사[石山本願寺]에 병량을 반입시키기 위해 싸운 키즈 강 입구 전투[木津川口の戦い]에서 싸웠던 사이이다. 여담으로 두 차례 수전이 일어났는데, 1차는 무라카미 수군의 승리. 2차는 철갑선을 앞세운 쿠키 수군의 승리. [본문으로]
  4. 타케요시의 사촌. [본문으로]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1579 6 13 병사 36

1544 ~ 1579.

통칭 한베에(半兵衛).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龍興[각주:1])의 신하였으나, 오다 가문(織田)으로 배를 바꾸어 탄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요리키(与力[각주:2])가 된다. 아자이(浅井)씨 공략이나 나가시노(長條) 합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나가(信長)츄우고쿠(中国) 지방 공략의 선봉으로 출진하지만 하리마(播磨) 미키(三木)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진영에서 죽었다.










이나바야마(稲葉山)성 탈취극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통칭인 '한베에(半兵衛)'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외견은 아름다운 부인(婦人)과 같아 전장에서도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말 가죽으로 둘러싼 투구와 목면의 하오리(羽織[각주:3]), 이치노타니(一ノ谷)의 갑옷을 입고 조용했다는 것이 [상산기담(常山紀談)]이 전해주는 이미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삼고지례로 맞이한 천재 군사라는 이야기는 [絵本太閤記]의 기술로 시게하루가 섬긴 것은 어디까지나 오다 노부나가이며 노부나가에게서 요리키라는 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한 것이다.


 시게하루가 군략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그 군략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1564 2로 20살 때의 일이었다.

 시게하루는 인질로 이나바야마성에 있던 동생 시게노리(重矩)의 병문안을 핑계로 불과 16명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사이토우 타츠오키의 측근 사이토우 히타노카미(斎藤 飛騨守)[각주:4] 이하 6명을 죽였다. 거기에 호응하여 한베에를 사위로 둔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가 카가미시마(鏡島)성에서 병사를 보내어 타츠오키를 쫓아 내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이토우씨에게 비판적인 카이센 쇼우키(快川 紹喜)조차도 쪽팔림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놈들이 타케나카, 안도우 패거리들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는 성을 건네라고 자주 사자(使者)를 시게하루에게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즈음에는 요시타츠에게 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시게하루는 잠깐 오우미(近江)의 아자이(浅井)()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는 미노(美濃)로 돌아왔다고 한다. 1566년 쿠리하라(栗原) 산에 칩거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세번 방문하여 꼬셨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絵本太閤記]의 기술인데 실제로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안도우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했던 다음해 8월 이후일 것이다.


미키(三木)성 포위중에 죽음


 아네가와(姉川) 전투 후 히데요시가 요코야마(橫山) 성주가 되자, 시게하루가 히데요시 부재시에 성을 맡는 일이 많아져 아자이 세력(勢力)의 빈번한 습격에서도 성을 지켜냈다. 1577 히데요시의 츄우고쿠 지방 공략이 시게하루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1578년.

 아리오카(有岡)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히메지(嬉路)성주 쿠로다 요시타카(黑田 孝高)는 무라시게 설득을 명령 받았지만 반대로 무라시게에게 잡혀 유폐되어 버렸다. 요시타카도 배반했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나가하마(長浜) 성에 맡겨 두었던 인질 처형을 명했다. 처치가 곤란해 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는 하나의 계책을 알려 인질을 자신의 본거지인 이와테(岩手)[각주:5]에 감추었다.


 1579 10월.

 아리오카 성이 낙성되어 요시타카도 구출되었고 인질도 요시타카에게 돌려주었다. 이 인질이 후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 나가마사는 죽을 때까지 시게하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78 3월.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미키 성을 히데요시가 공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을 성급히 정면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많은 수의 진지로(陳城[각주:6])를 세워 장기 포위전을 하기로 하였다. 긴 전쟁터 생활로 건강을 헤친 시게하루가 병으로 쓰러진 것은 포위 중이던 다음해 4월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게하루는 쿄우토(京都)에서 잠시 휴양했지만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무가의 바램이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한 시게하루는 부하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하리마(播磨)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왔다. 6 13 시게하루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죽음이 이 글 초반에 언급한 [常山紀談]과 같이 천재지만 여성적이며 선이 가는 이미지를 시게하루에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코우야(高野) 칩거의 꿈


 시게하루의 장남 시게카도(重門)가 기록한 [토요카가미(豊鑑)] 히데요시의 한 없는 슬픔을 [제갈 공명]을 잃은 [유비]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시게하루 죽은 뒤에도 군사 회의를 할 때마다 히데요시는 반드시 시게하루를 언급했다고 한다.([寬永諸家系図伝])


 한편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시게하루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서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시게하루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고생만 시키며 그의 위세를 꺾으려 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은 시게하루는 미키성을 함락하면 코우야 산에 올라가 은퇴하여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한다.([竹中家譜])


 시게하루의 유골은 미키성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졌다. 죽어서도 아군을 고무하며 전군을 지휘하려고 했을 것이다. 미키성이 낙성된 것은 시게하루가 죽은 반년 후인 1580 1월이었다.

  1.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의 손자. [본문으로]
  2. 조력자...를 말한다. 주군이 부하에게 도움이 될 부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격을 따지자면 동격임. [본문으로]
  3. 갑옷 위에 입는 조끼와 같은 덧옷 [본문으로]
  4. 성 탈취의 원인은 이 히타노카미가 시게하루에게 오줌을 쌌기 때문. [본문으로]
  5.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의 별칭. [본문으로]
  6. 합전 혹은 공성용으로 임시적으로 세워두는 주둔용 요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