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619 7 21일 병사(病死) 85.

1535 ~ 1619.

형인 요시히사[義久]와 함께 큐우슈우[九州]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한 후에 가독 상속. 분로쿠-케이쵸우의 역[慶長役][각주:1]에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했지만, 패배 후에도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전쟁터가 어울리는 무인(武人)

 

 1535년.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島津家] 15대 당주 타카히사[貴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요시히사가 후방에서 전군을 컨트롤하고 있었고, 요시히로는 그런 요시히사의 수족이 되어 각지에 출진.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며 화려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본래대로라면 시마즈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生涯)를 끝마쳤을 터였다. 하지만 1595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던 요시히사를 은거하게 만들고, 시마즈 가문의 차기 당주에 요시히로를 앉힌 것이다. 요시히사나 시마즈의 가신들 대부분은 이 명령에 불만을 품었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에는 거부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당주 요시히로의 지위는 토요토미 정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1598년에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정권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요시히로의 지위도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이 때문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요시히로의 동원 명령이 요시히사나 가신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요시히로는 얼마 안 되는 수하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군이 패배하자 적중 돌파를 감행하여 귀국하지만 이 패전으로 인해 요시히로의 정치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다도(茶道)에 몰두

 

 정치 생명이 끝난 요시히로가 몰두한 것은 다도와 그것에 필요한 차제구(茶諸具)의 제작이었다.

 요시히로가 언제부터 다도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카고시마[鹿島] 현립 도서관에는 요시히로가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다도의 오의(奧義)에 대해 질문한, '이신(惟新 = 요시히로)님이 리큐우에게 물어본 조서[惟新より利休江御尋]'사본(寫本)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언제나 츠루쿠비의 차기(茶器 - 鶴首の茶入 학의 목의 형태를 한 차 가루를 넣는 사기로 된 도구(비슷한 형태역자 주)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차를 즐겼다고 한다.

 

 1606. 요시히로는 쵸우사[帖佐]에서 히라마츠[平松], 또 다음 해인 1607년에는 카지키[加治木]로 거처를 옮겼다. 이 카지키에 있을 때 요시히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차를 함께 즐길 상대를 찾았으며 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카고시마에서 열린 다회(茶會)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기대에 부푼 나머지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전날의 오후 8시 즈음에는 카지키를 출발하여 날이 밝기 전에 카고시마에 입성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에 갔을 때, 자신이 원하는 차기를 만들기 위하여 조선인 도공(陶工)사츠마[薩摩]로 데리고 왔다. 이것이 사츠마야키[薩摩焼]의 기원이다.

 데리고 온 도공들은 총 80 여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 김해(金海)라는 도공이 요시히로의 맘에 특히 들었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그에게 '호시야마 츄우지[星山 仲次]'[각주:2]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5년 정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유학시켰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김해에게 쵸우사 저택의 북서쪽에 '우토[宇都] 가마'를, 카치키 저택의 북서쪽에 '오사토[御里] 가마'를 만들게 하여 자신 취향의 차제구를 만들게 하였다.

 동시에 이 당시에는 사츠마[薩摩]에서 사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백토(白土)를 찾지 못하여, 조선에서 가지고 온 백토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히바카리테[火計手]'이다. 조선인 도공이 조선의 흙을 사용하여 만들어 구운 불() 만이(ばかり)[각주:3]이 사츠마[薩摩]의 것이라는 의미이다.[각주:4]

 

 또한 요시히로는 자신이 맘에 드는 차제구가 만들어 졌을 때에는 도장[각주:5]을 눌러 구웠다고 한다. '고한테[御判手]'라 한다. '카지키 영감탱이 이야기[加治木古老物語]'에는 고한테 하나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쯤은 아깝지도 않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진중(珍重)받았다고 한다.

 

 타나카마루 컬렉션[田中丸コレクション]의 '카타츠키 챠이레[肩衝茶入][각주:6]'인 이름()사이노호코[サイノホコ], ‘토우쿄우 국립 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의 '코쿠유우분린챠이레[釉文琳茶入]'[각주:7]인 이름 모치즈키[望月]등. 현재도 '코사츠마[古薩摩]'[각주:8]의 명품으로써 높은 평가를 얻고 있는 다기(茶品) 등도 이 우토와 오사토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병상(病床)에서 울리는 전쟁터의 함성

 

 1618년 봄.

 요시히로는 병으로 쓰러졌다. 예전의 전우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나 류우큐우[琉球][각주:9] 국왕 등이 문병(問病)의 사신을 보내고, 막신(幕臣)[각주:10]으로는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11]였던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요시히로의 아들이며 당주인 이에히사[家久][각주:12]의 요청을 받아 쿄우토[京都]에서 명의(名醫)로 소문 난 쥬토쿠안[寿徳庵]을 카치키에 파견하여 요시히로를 진찰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요시히로는 쇠약해져 음식도 먹지 못 하게 되었지만, 가신들이 전쟁터에서의 함성을 지름과 동시에 옆에 있던 가신이 빨리 준비를 갖추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요시히로는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단번에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고 한다. 항상 전쟁터에 몸을 두고 있었기에 전쟁터의 함성을 들으면 멋대로 몸이 반응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허무하게 병은 회복할 조짐도 보이지 않고 다음 해인 1619 7 21일.

 카치키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5.

  1.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본에서 지칭하는 말. [본문으로]
  2. 대대로 타테노 계[竪野系]의 도공은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김해의 자손들이라 한다. [본문으로]
  3. 일본어로 “~만”, “~뿐”일 때 사용하는 부조사. [본문으로]
  4. 여담으로 '테[手]'의 의미는 차제구의 분류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보리 엔슈우[小堀 遠州]'라는 다인과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다기에 붙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자신의 이름 글자 중 하나인 '요시[義]'라는 글자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한 쪽이 돌출 된 형태를 말함. [본문으로]
  7. 검은 광택이 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8. 초기 사츠마 도자기, 즉 조선인 도공인 만든 도자기를 지칭. [본문으로]
  9. 현 오키나와[沖縄] 지역 [본문으로]
  10.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신하 [본문으로]
  11.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京都] 치안 유지를 임무로 하는 직책이나, 쿄우토에 있던 막신들의 총 책임자였기에 황실 및 쿠게[公家], 서국 다이묘우[大名]들의 감시 등을 임무로 하였다. [본문으로]
  12. 타다츠네(忠恒)가 1606년 개명. [본문으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 11 20일 병사 84.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각주:2]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각주:3]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 1585(13). 시코쿠[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2. 1587(15).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3.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4. 1594(22). 분로쿠의 침공[각주:4] 때.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식으로 항상 토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중신으로 활약하여, 히데요시에게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을 때는 아직 26세의 청년 다이묘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히데이에의 영광은 지속되지 않았다.


 1600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각주:5]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각주:6]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각주:7]의 조명탄원(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 그 후 3년 뒤인 1606 4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각주:8]하고 있던 비젠[備前]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각주: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산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
11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1. 임진왜란. [본문으로]
  2. 정유재란.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5. 무장 농민집단. [본문으로]
  6.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사츠마번[薩摩藩]의 초대 번주(藩主). [본문으로]
  7. 토시이에[利家]의 첫째 아들로 히데이에의 부인 고우히메[豪姫]의 오빠. 카가 번[加賀藩] 초대 번주. [본문으로]
  8. 약 54만 7천석. [본문으로]
  9. 섬의 지방관. [본문으로]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600 10 12 자살 59

1542~1600.

토바[鳥羽]성주. 시마 수군[志摩水軍] 두령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나가시마 잇키[長島一揆][각주:1] 토벌,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朝鮮) 출병 등에서 전공을 세우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 측에 서 패배, 할복하였다.










쿠키 수군의 총수


 쿠키 요시타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해적대장군(海賊大將軍)'이며 제독(提督)이다.

 기묘하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쥐었을 때, 반대로 요시타카는 패배하여 자살함으로써 명암이 갈렸다.


 요시타카는 쿠마노 수군[熊野水軍]의 일파로 이세[伊勢] 코쿠시[国司]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에 굴복했던 시마 수군의 두령으로,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578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오오사카[大坂] 혼간사[本願寺] 공격에 참가하여 모우리 수군[毛利水軍]과의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면서였다.


 10 1일.

 철갑 전함 7척으로 구성된 '쿠키 함대'오오사카 만()의 키즈 강[木津川]의 입구로 출동시켜 혼간지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던 아키[安芸] 모우리 가문[毛利家] 휘하의 무라카미[村上], 코우노[河野]세토 내해[瀬戸内海] 수군 6백 수십 척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일본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대해전에서 노부나가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쿠키 함대 중 6척은 요시타카가 이세의 오오미나토[大溱]에서 건조한 것이고, 나머지 1척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이세의 시로코[白子]에서 건조하였다. 최신예의 철갑선으로 사카이[堺]로 회항한 그 모습을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에서는 가장 크며 그리고 또한 화려하다. 우리 포르투갈 왕국의 배와 닮았다. 이걸로 오오사카[각주:2]는 멸망할 것이다. 배에는 대포가 3문 탑재되어 있다

 고 감탄하며 기록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요시타카의 이런 전공에 큰 상을 내려 시마와 셋츠[摂津]의 후쿠시마[福島], 노다[野田] 등을 합하여 7천석을 더해 주었고, 나중에는 3 5천석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뒤로는 히데요시[秀吉] 섬기며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서 활약. 임진왜란 때에는 토바에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거대한 함선인 '니혼마루[日本丸]'를 건조하였다. 토바성은 정문을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당당한 석축[石垣]을 가진 '해적대장군의 본진'에 어울리는 성곽이었다. '니혼마루'는 전장 33.67미터, 1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1.9킬로그램의 탄환을 쓰는 대포 3문과 수부(水夫) 백 명을 태우는 일본 최초의 거대 전함이었다.


부자가 갈라선 세키가하라 합전


 1597. 56.

 조선에서 귀국하여 아들인 당시 24살의 모리타카[守隆]에게 가독과 토바성을 물려주고 이세 지방에 은거료[각주:3] 5천석을 받았다.


 3년 후인 1600년.

 천하의 향방을 결정하는 세키가하라에서 모리타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출진하였고 요시타카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이세, 이가[伊賀], 키이[紀伊]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서군에 참가한다.

 센고쿠[戦国] 무사의 피가 요동을 친 것일수도 있고, 시나노[信濃]의 사나다 가문[真田家]처럼 가문을 지키기 위한 '부자 분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는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옆 지방의 이나바 쿠란도[稲場 蔵人]가 지키는 이와데 성[岩出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시타카가 이와데 성을 공격하던 중 세키가하라에서는 서군이 패했고, 9 11 미츠나리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것을 단념했다.[각주:4]


 '니혼마루'에 타고서 시마의 나기리[波切] 항구를 출항하여 선조의 연이 닿아 있는 시마의 섬들을 한바퀴 돌고선, 토바의 앞바다에 있는 토우시지마[答志島] 섬에 상륙했다. 쵸우온 사[潮音寺]에 머물며, 잠시 푸른 바다와 녹색으로 가득 찬 섬들을 지켜본 후 10 12 토우센[洞仙] 암자로 들어가 할복 자살하였다.

 "나의 목을 이에야스님께 보인 후에는 이 섬 어딘가에 토바성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다오. 쿠키의 가문을.. 모리타카를 부탁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비젠[備前]의 명도(名刀) '신코쿠[信国]'를 왼쪽 배에 찔러 오른쪽으로 그은 후, 다시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근습(近習)인 아오야마 부젠[靑山 豊前]이 카이샤쿠[介錯][각주:5]하였다. 향년 59.

 '해적대장군'에 어울리는 당당한 최후였다. 목 무덤과 몸통 무덤이 지금도 토우시지마에 있다.


모리타카의 오열

 

 그러나 요시타카가 배를 가를 즈음, 아들 모리타카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전공을 바꿔서라도' 부친을 살려달라고 탄원.

 이에야스도 '쿠키님은 세키가하라의 본 전장에는 나오지 않으셨지'라며 허락하여 사면 소식을 전하는 배가 섬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의 죽음을 안 모리타카는 오열했다.

 아오야마 등 근습들을 '아버지께 죽음을 서두르게 한 불충한 놈들'이라 화를 내며 톱 베기[각주:6], 참수[각주:7]에 처했다.

요시타카는 모리타카를 각별히 사랑했으며 모리타카도 부친을 경애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하게 여겨 모리타카에게 2만석을 가증해 주어, 토바성 5만석의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쿠키 가문탄바[丹波], 셋츠[摂津]로 영지를 옮겼으며 더구나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 등으로 영지를 바꾸었다. 해적대장군의 영광을 두려워한 정략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키 가은 지금의 쿄우토[京都] 아야베 시[綾部市]와 효우고[兵庫] 미타 시[三田市]에 '산 속의 수군 도시'를 만들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번영시켰다.

  1. 나가시마 주변의 종교반란군. [본문으로]
  2. 혼간 사[本願寺]를 지칭. [본문으로]
  3. 가독을 물려 준 전 당주에서 주는 땅. [본문으로]
  4. 여담으로 이와데 성을 지키던 이나바 쿠란도 미치토오[稲葉 蔵人 道通]는 이때 쿠키를 저지한 공적으로 2만석을 가증 총 4만5300석이 되어 이세[伊勢] 타마루[田丸]로 이봉(移封)되었다. [본문으로]
  5. 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을 쳐주는 것.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신뢰의 상징이었기에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6. 죄인을 머리만 남기고 땅 속에 파 묻은 다음, 죄상을 적은 팻말과 함께 톱을 놔두어 지나가던 행인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목을 톱으로 베게 하는 형벌 [본문으로]
  7. 당시 무사는 할복을 무사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복을 못하게 하고 목이 베이는 것을 평민의 형벌이라 생각하여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