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기의 대명사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라는 에피소드[각주:1]로 유명한 쥰케이[順慶]는 원래 불문(佛門) 출신이다. 유식론(唯識論 –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에 정통하고 와카[和歌]나 다도(茶道)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

 언제나 성성이의 가죽을 테두리로 한 두건을 쓰고,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적주머니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야마토[大和]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대장을 맡아온 호족이었다. 야마토에는 츠츠이 가문 외에도 오치[越智], 토이치[十市], 와카오[若尾] 등의 승병대장이 있어 츠츠이를 포함하여 '사인방(四人衆)'이라 일컬어졌는데 츠츠이의 세력이 가장 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비호아래 야마토[大和]를 지배하게 된다.

 '호라가토우게 고개'라는 에피소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야마자키[山崎]에서 싸웠을 때 생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포된 이야기에는 이때 츠츠이 쥰케이가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올라가 아케치와 하시바의 싸움을 방관하다가 하시바 측이 명백히 유리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아케치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진상은 이것과 꽤나 다르다.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오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 쪽이었던 것이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은 1582년 6월 2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
国] 공략에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거병이었다. 이 당시 쥰케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등과 함께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츄우고쿠로 출진하기 위해 거성(居城)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출진하여 쿄우토[京都]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도중 혼노우사의 변보를 접한 것이다.

 쥰케이의 입장은 미묘했다. 단순한 아케치 휘하 다이묘우가 아니었다. 친족관계였던 것이다. 미츠히데의 넷째 아들은 쥰케이의 양자로 들어와 있었다[각주:2]. 거기에 미츠히데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은인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빼앗겼던 야마토의 츠츠이 가문 영지(領地)를, 노부나가가 마츠나가를 정벌한 후에 미츠히데가 잘 말해주어서 영지(領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3]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쥰케이는 당초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키자 미츠히데 측에 붙어있었다.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 노부나가의 셋째]의 출병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 성주 이도 요시히로[井戸 良弘][각주:4]와 함께 병사의 일부를 떼내어 아케치의 오우미[近江] 평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쥰케이 자신은 코오리야마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쥰케이의 행동은 미묘하게 변해간다. 미츠히데의 요청을 받고 카와치[河内]에 출진할 예정이었던 것을 취소시키고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서 산요우
[山陽]를 맹렬히 올라오고 있다 – '
 쥰케이에게는 이미 이 정보가 들어간 듯 했다.

 6월 10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경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이제 쿄우토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우고
[兵庫][각주:5]까지 와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앙천했다.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아케치 세력은 1만 수천밖에 없었다. 쥰케이의 가세가 절실했다.

 미츠히데는 쿄우토를 나와 야마자키 하치만[山崎八幡]에 있는 구릉의 일각인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진을 쳤다. 이 고개는 눈 아래로 쿄우토-오오사카[大坂] 간의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야마토 코오리야마까지는 약 20여km. 미츠히데는 "가세하지 않으면 코오리야마를 공격하겠다"고까지 말하여 쥰케이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쥰케이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계속 기다렸지만 이때 쥰케이는 이미 히데요시와 서약서를 교환한 상태였던 것이다. 쥰케이의 조심스러움은 그래도 여전히 눈치를 보는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14일이 되어 그제서야 코오리야마 성을 나온 것이다. 이때 미츠히데는 이미 오구루스[
小栗栖] 마을에서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쥰케이는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타이고[醍醐]에 있는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눈치를 본 태도를 책망하였지만 그대로 용서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이때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츠츠이즈츠[筒井筒]라는 이름 높은 고려차완(高麗茶碗)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9년 생. 대대로 코우후쿠 사[
興福寺]의 중도(衆徒)로, 환속한 후에 후지시로우 후지마사[藤四郎 藤政]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9년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쫓겨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도움으로 영지(領地)를 회복하고 야마토[大和]를 영유하게 된다. 1584년 죽었다. 36세.

  1. 관용어로 "洞ヶ峠を決め込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기회를 엿보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나[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 결국 실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야마토[大和]는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가 슈고[守護]를 두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은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코우후쿠 사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노부나가도 처음엔 자신이 키웠다고 할 인재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반 나오마사[塙 直政]에게 야마토를 지배하게 하나,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야마토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코우후쿠 사의 승병 출신인 쥰케이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의 판단이었지 결코 미츠히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4. 그는 부인은 쥰케이의 딸이다. [본문으로]
  5. 코우베[神戸]의 옛 이름. [본문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에는 아마도 그의 성격적인 면이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信長)는 그의 중후한 체하는 얼굴이 들지 않았다. 이마에 새겨진 듯한 교양이 눈에 거슬렸다. 히데요시(秀吉)처럼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귀여움 받으려는 재주가 없었다.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술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엄청나게 거대한 큰 잔을 내와 여기에 술을 가득 붓고는 미츠히데에게 마시라고 하였다. 미츠히데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칼을 번득이며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를 목에 처넣어주마"하고 미츠히데의 얼굴 앞으로 겨누었다. 어쩔 수 없이 미츠히데가 큰 잔을 비우자 노부나가는 "역시 목숨은 아쉬운가 보군"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코우슈우(甲州) 정벌 때였다.
 시나노(信濃) 스와 군(諏訪郡)에 있는 어느 절에 본진을 두었을 때 미츠히데가,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우리들의 뼈를 깎는 듯한 오랜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맺어 스와 군에 있는 모두가 우리 편이 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하고 노부나가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 뽐내는 듯한 얼굴이 노부나가의 역린을 건드렸다. "메야? 네 놈의 어디 뼈가 깎였고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하는게냐? 자기 혼자서만 분골쇄신한 것처럼 말하는 그 말투가 맘에 안 든다" 라고 외치며 아랫자리에 있는 미츠히데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돌연 미츠히데의 머리를 난간에 뭉개며 "이 대머리녀석!"하고 심하게 팼던 것이다. 미츠히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굴욕에 실로 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각주:1]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는 우선 오다 가문(織田家)의 다른 무장들에게는 없는 외교관적인 특질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전략, 포술, 행정, 축성 등 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넘칠 듯하였다. 노부나가는 신참자인 미츠히데를 예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용하여 출세시켰다. 1571년 히에이잔 섬멸(比叡山討) 후 오우미(近江) 남부의 시가 군(滋賀郡)을 하사하고 사카모토 성(坂本城)의 성주로 임명한 것이다. 거의 10만석에 달하는 봉록이었다. 이 시기 아직 히데요시조차 영지(領地)가 없는 야전부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성격적으로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우수한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츠히데의 마음은 서서히 노부나가에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쓸모가 없어지면 냉혹히 버리는 그런 노부나가의 방식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1578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미츠히데의 동료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돌연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한 무라시게는 홀로 츄우고쿠(中
)로 도망쳤는데 그 일족에 대한 노부나가의 처리가 너무도 잔혹했다. 122명의 여성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가신 512명을 해안가에 있는 집 네 곳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노부나가의 이런 가혹함을 미츠히데 자신도 맛보았다.
 1578년 탄바(丹波) 야카미 성(八上城)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 秀治)를 설득하기 위해 미츠히데는 자신의 모친을 인질로 보내어 항복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런 고심에 찬 미츠히데의 인질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갰다. 아즈치(安土)로 데려간 하타노 형제를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한 야카미 성은 보복으로 인질인 미츠히데의 모친을 죽였다.[각주:2]

 그리고 천하를 진동시킨 1582년이 왔다.
 미츠히데는 이 해의 5월 15일 아즈치 성을 방문한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접대하는 직책에 임명 받았다. 당시 미츠히데는 전투에 종사하지 않고 휴가 중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오다 가문은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각각의 사령관이었다. 미츠히데는 15일~17일까지 이에야스의 접대에 임했지만 17일에 빗츄우(備中)에 있던 히데요시에게서 원군을 요청하는 소식이 노부나가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한창 수공으로 밀어붙이던 중에 모우리(毛利)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몰려들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지금이야말로 모우리와 자웅을 정할 때라 여기고 직접 출진하고자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 미츠히데는 그 구원군의 선봉이었다. 지휘하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들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심경은 복잡했다. 츄우고쿠 공략은 말하자면 히데요시가 메인이며 나중에 달려가는 자신은 그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히데요시의 명성만 높여주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런 마음의 동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노부나가의 명령이었다. 빗츄우 출진을 명령 받은 직후에 노부나가의 사자가 와,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를 새로이 하사하시며 대신 탄바(丹波), 오우미(近江)의 영지(領地)를 거두신다고 하십니다"
 고 전한 것이다. 지금 가진 영지(領地)를 몰수하고 대신 적국의 영지를 준다는 것이다. 영지 몰수나 마찬가지인 명령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뇌리에 예전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오다 가문의 중신 하야시 미치카츠(林 通勝)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줄은……"

 5월 26일.
 거성(居城) 탄바 카메야마 성(
山城)에 입성한 미츠히데는 다음 날인 27일 아타고야마(愛宕山) 산에 올라 기도를 하고 신전 앞에서 2~3번 제비를 뽑으며 길흉을 쟀다고 한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 대체적으로 그가 모반 결의를 굳혔다고 보고 있다.

 날이 밝아 28일.
 아타고야마 산에서 렌가(連歌) 모임이 개최되었다. 당대 렌가계 제일인자인 사토무라 쇼우하(里村
紹巴), 사토무라 쇼우시츠(里村 昌叱)가 열석하였다. 곧이어 모임이 시작되어 발구(發口)를 미츠히데가 읊었다.

때는 지금 하늘이 내리는 5월 비려나
時はいま、天が下しる五月かな

 쇼우하는 깜짝 놀랐다.
 '때는 지금'은 결의를 의미하며, '때(토키)'에는 또한 미츠히데의 출신인 미노(美濃)의 '토키' 씨(土岐氏)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天が下しる)'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토키(아케치)가 천하를 통치할 때가 온 것이다' – 쇼우하는 이렇게 해석하여 전율한 것이다.
 렌가 모임은 이틀간에 걸쳐 행해졌는데 미츠히데는 자리에서 간식으로 나온 대나무 잎에 싸서 찐 떡인 쫑즈(粽)를 잎도 벗기지 않고 그냥 입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카메야마 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가장 신뢰하는 아케치 사마노스케 히데미츠(明智 左馬助 秀)를 침실로 불러 모기장 안으로 불러들여서는 모반할 뜻을 밝혔다.

 미츠히데가 츄우고쿠 공략을 위해 전군을 지휘하여 카메야마 성을 출발한 것은 6월 1일 오후 6시였다.
 전군 쿄우토(京都)로 향했다. 이 시점에서 미츠히데는 아직 장병들에게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쿄우토에서 노부나가 앞에서 열병식을 치른다고 속였다. 전군이 쿄우토 근교 카츠라가와(桂川) 강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전투준비의 명령이 전군에게 하달되었다.
 "말의 재갈을 풀고 보병인 자는 새로운 짚신으로 갈아 신으라. 철포를 소지한 자는 화승을 1척5촌으로 자른 다섯 줄에 불을 붙여 꺼지지 않게 꺼꾸로 들고 있으라"
 이렇게 세부적인 명령은 전쟁터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군은 처음으로 미츠히데의 결의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돌입한 아케치 군세가 혼노우(本能)사(寺)에 있던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러나 모반으로 세워진 아케치의 천하는 이어지는 일 없이 10일 후의 야마자키 전투(山崎合)에서 상경한 히데요시에게 패함으로써 무너졌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년 생. 미노(美濃) 토키 씨(土岐氏)의 지족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를 섬겼다는 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이 된 것은 중년이 지나서인 것 같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
)와 함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노부나가에게 알선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 1570년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 성주가 되어 탄바(丹波) 경영을 일임 받았다. 1575년 코레토우(惟任)라는 성(姓)과 휴우가노카미(日向守)를 제수 받았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를 죽였지만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秀吉)에게 패하여 도주 중 오구루스(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이전 번역글.

2008/01/29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아케치 미츠히데

  1. 이때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발길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고 있다. [본문으로]
  2. 회본태공기(絵本太功記)의 창작이라 여겨지고 있다. 야카미 성은 긴 포위에 지친 성 수비병들이 성주인 하타노 형제를 잡아다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 8 11일 병사 35

1549~1584.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각주: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각주:2] 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각주: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 2일에 코오리야마 성()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각주:4], 죠우케이[定慶][각주: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각주:6], 단절(斷絶)[각주: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1. 파란 빛을 띤 진홍색을 말함. [본문으로]
  2. 이전까지만 해도 히사히데가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휘하였기에, 히사히데의 적인 쥰케이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노부나가의 군세에 공격받아 위기에 빠지나, 1571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뜬금없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노부나가를 거역하더니 쇼우군 요시아키 휘하 장수들의 영지를 공격. 이에 요시아키는 히사히데의 적이었던 쥰케이를 옹호하게 된다(자연스레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던 노부나가도 쥰케이를 옹호). 이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가 벌어지자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측에 붙고, 쥰케이는 히사히데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붙는다. 덧붙여 요시아키를 쫓아낸 후 히사히데와 쥰케이의 상위에 자신의 측근 반 나오마사[塙 直政]를 두었으나 전사. 이후에 비로서 야마토를 지배하게 된다. 본문의 글처럼 미츠히데의 힘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긴 쥰케이 노력의 결과라 봐야 할 듯. [본문으로]
  3. 성 안의 건물 배치는 극비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질 않았다. [본문으로]
  4. 쥰케이에게는 사촌이며, 외조카(모친이 쥰케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확실하진 않으나 쥰케이와는 이종사촌지간인 듯. [본문으로]
  6. 무사의 신분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 됨. [본문으로]
  7. 가문이 끊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