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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고쿠니히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8.14 야마나카 유키모리 10
  2. 2007.08.09 아마고 츠네히사 2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

1578 7 17모살(謀殺) 34


1545 ~ 1578.

보통 시카노스케[鹿之助]로 알려져 있다. 아마고 카츠히사[尼子 勝久[각주:1]]를 옹립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멸망 당한 주가(主家)의 부흥을 위해서 분투(奮鬪).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츄우고쿠[中国] 평정군(平定軍)을 따르며 하리마[播磨] 코우즈키 성[上月城]을 수비하지만,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공격을 받아 항복. 빗츄우[備中]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아마고 잔당(殘黨)의 성 


 157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모우리 씨()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하리마[播磨]로 출진하였다.

 하리마[播磨]의 코우즈키성()은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의 국경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히데요시는 이 성을 점령하여 이곳에 아마고 씨()의 잔당인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입성시켰다. 그 잔당의 맹주로 옹립되어 있던 사람은 쿄우토[京都]의 토우후쿠 사[東福寺]출가(出家)해 있던 아마고 카츠히사였다.


 코우즈키 성() 천연의 요해(要害)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듯한 성이 아니다. 지금 성터를 돌아 보아도 아무런 특징도 없이 산등성이가 이어진 낮은 산이다. 지키기에 어려운 성이다.

 모우리의 숙적이었던 아마고 군()을 모우리 진영에 대비하여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식적인 작전이었지만 얄궂기도 했다. 아마고 쪽의 장수 중의 하나인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는 이 성에 입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여기서 싸우는 것에 의욕을 보였다.


 다음 해 1578 4.

 모우리는 3만의 군세(軍勢)를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했다.

 유키모리 등이 의지하고 있던 히데요시 군() 이 때 오다 측을 배신한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를 공격하러 가 있있다.

 유키모리에게서 급보를 받자마자 히데요시는 미키 성() 공격을 중지하고,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와 함께 코우즈키 성() 동쪽 2킬로 지점인 타카쿠라 산[高倉山]()을 세웠다. 그러나 모우리 군()의 포위망은 두터워,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모우리쪽은 보급로를 끊어 성을 아사(餓死)시키는 작전을 세워서는 확실히 포위망을 좁혔기에 코우즈키성()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히데요시는 아마고의 구신(舊臣)인 카메이 코레노리[亀井 惟矩]를 성 안으로 잠입시켜,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돌파하여 빠져 나올 수는 없는가?”

 하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성 안의 쌀은 다 떨어지고 굶주림에 괴로워하고 있던 성병(城兵)의 전의(戰意)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는 서둘러 노부나가를 만나 전황(戰況)을 보고하며 코우즈키 성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코우즈키 성()을 포기하고, 미키 성() 공략에 집중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코우즈키 성()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로 돌아와서는 6 26, 타카쿠라 산()의 진을 치우고 철수했다.


아이(阿井) 나룻터의 참극(慘劇)


 유키모리 등의 아마고 잔당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모우리와 아마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코우자이 모토미치[香西 元通]도 함께 농성(籠城)하고 있었다. 유키모리는 모우리의 진영(陣營)에 사자를 보내어,

 이번 사건의 원흉은 코우자이 모토미치이니까, 모토미치의 배를 가르게 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

 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모우리 측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우선 맹주인 아마고 카츠히사의 할복(割腹)을 요구했다.


 유키모리는 8살 연하의 카츠히사에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 자살을 권했다.

 “무운이 다하여 이제는 여기까지 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함께 배를 갈라야만 합니다만 다년(多年)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조금 더 이 생명을 빌리고 싶습니다.”

 카츠히사는 이 대답을 듣고 답했다.

 “법의(法衣)를 두르고 이름도 없이 일생을 끝냈을 터인 몸이면서, 자네들의 충성으로 한 성()의 주인으로써 아마고의 깃발을 세워 싸울 수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후회나 원망은 없다. 아니, 후회라고 한다면 아마고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7 3.

 카츠히사는 시 한 수 남기고 죽음의 자리에 앉았다. 26세였다.

 카츠히사의 형 우지히사[氏久], 코우자이 모토미치도 성 안에서 배를 갈랐다.


 1578 7 5.

 코우즈키 성()은 항복하였고, 유키모리는 포로가 되어 빗츄우[備中] 마츠야마[松山]에 있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본진으로 호송되게 되었다. 그러나 킷카와 모토하루는 도중에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중신(重臣) 아마노 모토아키[天野 元明]의 가신(家臣)인 쿠리야 히코에몬[栗屋 彦右衛門], 야마카타 사부로베에[山県 三郎兵衛]의 감시를 받으며, 빗츄우[備中] 타카하시[高梁]에 흐르는 타카하시가와 강에 있는 아이(阿井)의 나룻터까지 왔다. 유키모리는 배를 기다리며 나룻터 한 구석에 있는 돌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키모리가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암살자는 베어왔다.

 순간 유키모리는 눈 앞의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암살자의 칼은 유키모리의 어깨에서 등까지 굉장히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암살자로 선택된 사람은 카와무라 신자에몬[河村 新左衛門]으로 카와무라도 따라 뛰어들어 물 속에서 유키모리와 뒤엉켰다. 후쿠마 히코에몬[福間 彦右衛門], 미카미 아와지노카미[三上 淡路守]도 카와무라를 돕기 위해 달려 들어 유키모리를 뒤에서 잡고 눌러서 죽였다.

 7 17.

 초추(初秋)는 이름뿐인 무더운 날이었다고 한다.

 34세의 생애(生涯)였다.

  1. 모살 된 신구우 당[新宮黨]의 두령(頭領)인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의 손자이며, 그의 아들 사네히사[誠久]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아마고 쓰네히사[尼子 ]

154111 13일 병사(病死) 84

1458~1541

처음엔 이즈모[出雲] 슈고다이[守護代][각주:1]. 갓산토다 성[月山富田城]을 탈취한 후 이나바[因幡] 이서(以西)산인[山陰] 각지를 공략하여 아마고 씨() 전성기를 수립했다. 후에 손자 하루히사[晴久]가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와 대립하여 모토나리의 아키[安芸] 요시다 성[吉田]을 공격하지만 실패. 직후에 죽었다.








세 아들의 말로


 아마고 츠네히사에게는 마사히사[政久], 쿠니히사[国久], 오키히사[興久]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마사히사는 1516 8월. 히가시아요우[東阿用]의 사쿠라이 소우테키[桜井 宗的]를 공략하던 중 죽었다.
 전투 중에 죽은 것이 아니고 한 밤중에 망루에 올라가 피리를 불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총사령관이 피리를 불다가 목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장남은 그렇게 죽었다.[각주:2]


 둘째인 쿠니히사는 아마고 군()의 최정예부대인 신구우 당[新宮党][각주:3]을 이끌던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다.
 그러나 독불장군으로 주변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츠네히사가 죽은 후 조카인 하루히사[
晴久][각주:4]알력이 생겨 하루히사에게 죽음을 당했다. 츠네히사는 장남 마사히사가 죽은 뒤 둘째인 쿠니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비의 눈으로 보아도 일족의 두령으로 삼기에는 불안했다.


 셋째인 오키히사는 엔야[塩谷]라는 지역에 3천관(貫)의 땅을 하사받아 이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지(領地)가 너무 적다고 투정부리기 시작하여 하라테 군[
原手郡] 700백관을 더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아비인 츠네히사에게 반란을 일으키지만 패배하여 장인인 야마노우치 나오미치[山内 直通]가 지키는 빙고[備後] 카부토야마 성[甲山城]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2년 뒤에 자신의 미래를 자책하였는지 자살했다. 38세였다.


11(州)[각주:5]의 영주(領主)


 츠네히사는 84세에 죽었기에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선 장수한 편에 속한다.
 이즈모 슈고다이는 대대로 갓산토다 성()을 거성(居城)으로 삼고 있었으며, 일시 여기에서 쫓겨났던 츠네히사는 실력으로 슈고다이의 직책을 되찾아 이즈모 전역에 세력을 뻗쳤다. 그의 실력과 전투 방식은 굉장히 뛰어나 이즈모의 호족들을 계속해서 제압하여 자기 세력으로 편입시켰다.


 이즈모를 제패하자 이어오키[隠岐], 호우키[伯耆], 이나바[因幡]로 진출하였고 이와미[石見], 빙고[備後], 빗츄우[備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아키[安芸], 하리마[播磨]영유(領有)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모우리 모토나리에게 전부 빼앗기지만 츠네히사의 이런 파죽지세는 놀라울 따름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이라도 지배한 나라[国]의 수에 있어서 츠네히사에겐 미치지 못했다.


 1537년. 츠네히사는 80세였다.
 장남 마사히사의 아들 하루히사는 24세가 되어 있었다. 츠네히사가 손에 넣은 11개국 중에서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하리마[播磨]는 하루히사가 원정하여 전과를 올린 부분도 있었기에 하루히사의 실력은 그럭저럭 인정받고 있었다. 1537년 츠네히사는 은퇴하여 손자인 하루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아마고 씨()의 흥망사(興亡史)에 있어서 이 시점이 가장 전성기였으며 빛나고 있었다.


 츠네히사는 동생인 요시카츠[義勝 – ‘시모츠케노카미 히사유키[下野守 久幸]라고도 한다]를 하루히사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츠네히사는 누구보다도 이 동생인 요시카츠를 신뢰하였으며, 장남 마사히사가 죽었을 때 동생 요시카츠에게 가독을 물려주려고 했을 정도였기에 둘째 쿠니히사, 셋째 오키히사가 이런 아비의 마음을 읽고 불만이 생겨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있다.


원정 대패 후의 죽음


 1539. 하루히사는 친척이나 중신(重臣)을 모아서,
 모우리 모토나리의 본거지인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을 공격하려 하는데 모두 어떻게들 생각하나?”

 하고 물었다. 츠네히사는 82세로 이때는 이미 병상(病床)에 누워있었기에 군의(軍議)의 자리엔 없었다. 단순한 노쇠(老衰)인지, 중풍(中風)과 같은 중병이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코오리야마로 공격'에 관해서 참가한 사람 중 가장 격()이 높다고 할 수 있는 츠네히사의 동생 요시카츠가,

 “좀 더 지켜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모토나리는 뛰어난 영걸이기에 그리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하루히사는 듣지 않았고 아키[安芸] 요시다로 원정을 결정했다. 병상의 츠네히사는 요시카츠에게 이 회의의 결과를 듣고,

 “성급해서는 안 된다. 하루히사가 생각을 돌릴 수 있게 잘 말해주길 바란다
 고 말했지만, 하루히사는 역시 듣지 않았다.


 1540 9월 말.
 하루히사는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아키(安芸) 요시다로 원정을 떠났다. 코오리야마 성을 포위한 아마고의 군세는 연전연패하였고, 다음 해인 1541 1월에도 대패(大敗)하여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요시카츠를 시작으로 많은 전사자(戰死者)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마고 휘하 13명의 유력무장이 오오우치 요시타카[
大内 義隆](모우리와 동맹)에게로 도망쳤다. 이 배반은 아마고에게 있어선 뼈아팠다.


 츠네히사가 이 결과를 듣고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해의 11 13일에 갓산토다 성에서 죽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장관(地方長官)인 슈고[守護]의 대리인(代理人). 보통 슈고는 쿄우[京]에 머물면서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였고,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일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는데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 글의 필자는 문약한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인상이 있지만 역사상 마사히데는 아버지를 도와 아마고 씨의 전성기를 이끈 문무겸비의 무장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갓산토다성의 북쪽 기슭에 있는 ‘신구우[新宮]’라는 골짜기에 본거지가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4. 마사히사의 아들. [본문으로]
  5. 일본 지방단위인 국[国]의 다른 표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