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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 元親)

1599 5 19일 병사(病死) 61.

1539 ~ 1599.

토사(土佐) 오코우(岡豊)성주(城主). 부친인 쿠니치카()의 뒤를 이었다. 반농반병(半農半兵)의 무사인[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를 활용하여 시코쿠()를 통일하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토사(土佐) 일국()를 안도(安堵[각주:1])받았다. 후에 히데요시를 도와 임진왜란에도 출병하였다.








후계자 문제


 [시코쿠()의 패자(覇者)]가 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이지만 곧이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침공을 받고 항복하여 결국 토사(土佐) 일국()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버린다. 그 후에 모토치카는 [모토치카 백개조(元親百箇)]에서도, “히데요시님에게서 내려오는 명령은 어떤 일이건 따를 것이라 규정하는 등 히데요시를 위해서 헌신적이라고 할 정도로 따랐다.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큐우슈우(九州) 출병이 한창이던 1586 12 14일.

 붕고(豊後) 베츠기가와(次川) 강에서 벌어진 시마즈 씨(島津)와의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가장 사랑하던 첫째 아들 노부치카(信親) 700여명의 장병(將兵)과 함께 잃게 되었다. 모토치카의 낙담은 상상 이상으로 히데요시는 오오스미()()을 하사하여 위로하려 했지만 모토치카는 이를 사양하였다.

 노부치카는 가신들의 신뢰도 두터웠으며 또한 모토치카도 노부치카에게 굉장히 기대하였다. 그 때문에 후계자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모토치카만의 문제가 아니고 가신들 끼리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었던 듯하다.


 모토치카는 넷째 아들인 모리치카(盛親)를 귀여워하고 있었기에 모리치카에게 가독(家督)을 잇게 하려 하였다. 이러한 가중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서 모토치카는 반대파를 숙청했다. 의견을 낸 일족의 키라 치카자네(吉良 親[각주:2])나 히에야마 치카오키(比江山 親興[각주:3])에게는 할복을 명령하는 등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모토치카는 결국 둘째인 카가와 고로우지로우 치카카즈(香川 五 親和), 셋째인 츠노 마고지로우 치카타다(津野 孫次 親忠)가 아닌 넷째 센쿠마마루(千熊丸 후에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사자(使者)를 상경시켜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각주:4])에보시오야(烏帽子親[각주:5])로 삼아 센쿠마마루의 성인식(元服)을 치르게 하여 우에몬타로우 모리치카(右衛門太郎 盛親)라 이름을 갖게 해서 후계자로 결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치카카즈는 스스로 단식(斷食)하여 굶어 죽었다고 한다. 후계자는 노부치카의 전사 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겨우 정해졌다.


모토치카의 말년.


 어쨌든 후계문제를 해결한 모토치카는 영내(領內)에 토지조사인 검지([각주:6])를 실행하여 영국(領國) 지배를 확립함과 동시에 오고우(岡豊)에서 이전했던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에서 한번 더 해상 교통의 거점인 우라도 성()으로 거성(居城)을 옮겼으며 1597년에는 [쵸우소카베 모토치카 백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를 제정하여 법령을 정비하였다. 그와 더불어 히데요시의 요청에 따라 오다와라(小田原) 출병이나 조선 출병 등에 종군(從軍)하여 싸움터에서도 공을 세웠다.

 모토치카는 모리치카를 제 앞가림은 하는 무장으로 키우고자 싸움터는 물론 여러 곳을 데리고 다니거나 했기에 여생을 즐길 여유 같은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1596 8월에 에스파냐 선적인 '산 펠리페' 호가 우라토에 표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각주:7]


모토치카의 최후


 그러던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1598 8 18일에 병으로 죽었다. 히데요시를 존경하고 따르던 모토치카는 충격을 받은 듯 하다.


 1599 3월.

 모토치카는 셋째 아들인 츠노 치카타다를 유폐하였다. 조선 출병에 종군하여 전공도 세운 치카타다는 동생 모리치카가 후계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처분은 가신 히사타케 쿠라노스케(久武 内蔵[각주:8])의 책모에 위한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토치카 자신도 사려가 결여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동시에 육체적으로도 쇠약(衰弱)해 있었던 듯 하다.


 병이 조금 나아 소강상태가 된 4 23.

 모토치카는 모리치카와 함께 상경하여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를 알현하였다. 그러나 모토치카의 몸은 결코 좋은 편은 아니어서 오오사카(大坂)나 쿄우토(京都)의 명의(名醫)들이 달려들었지만 결국 5 19일 모토치카는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


 죽기 9일 전인 5 10일에 모리치카를 머리맡으로 불러 싸움터에서의 마음 가짐 등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유해(遺骸)는 텐류우 사()에서 화장(火葬)하였고, 유골은 토사(土佐)로 보내져, 나가하마(長浜)의 텐보(天甫)()에 묻혔다.


 말년의 모토치카는 자기 주장을 굳히지 않는 고집쟁이가 되었던 듯하다. 1600 9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모리치카는 서군(西軍)에 속하여 모토치카가 목숨 걸며 지켜왔던 토사를 빼앗겨 버린다.

텐보산(天甫山)에 있는 모토치카의 묘[코우치(高知)시(市)]

  1.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를 계속해서 영유할 수 있도록 인정 받음. [본문으로]
  2. 모토치카의 조카가 된다. [본문으로]
  3. 모토치카와는 사촌형제. [본문으로]
  4. 오봉행(五奉行) 중의 한 명. [본문으로]
  5. 성인식(元服) 때 에보시를 씌어 주며,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성인식을 치루는 에보시고(烏帽子子)에게 붙여주는 사람. [본문으로]
  6.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7. 당시 선교사 추방령(1587년)이 내려져 있었지만, 무역의 이익때문에 히데요시는 철저한 단속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리핀을 떠나 멕시코로 향하던 에스파냐 국적의 산 펠리페 호가 태풍을 만나 파손되어 수리를 받기 위해 우라토에 입항. 히데요시는 조사관으로 마시타 나가모리를 파견하였는데 항해사 중 하나가 ‘에스파냐가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포교와 선교사들의 활약 덕분이다’라는 말을 듣고, 기독교의 목적은 자국의 식민지화라는 것이라 깨달은 히데요시는 이후 기독교 금지를 철저히 하기에 이른다. [본문으로]
  8. 치카나오(親直)를 말한다. 형인 히사타케 치카노부(久武 親信)가 지 동생 쓰면 가문멸망할 것이니 쓰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