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

다테 하루무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1. 08:46 Posted by 발해지랑

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

1577 12 5 병사(病死) 59.


1519~1577.

다테(伊達)씨 제 15대 당주(当主). 동생 사네모토(実元)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에 양자로 들어가는 문제로 부친인 타네무네(稙宗)를 유폐하여 [텐분(天文)의 난]을 일으킨다. 가중에서는 권력의 강화에 힘썼고, 외교에서는 11명의 자식들로 동북 여러 가문들과 연을 맺어 다테 씨의 지위를 높였다.






부친은 토우호쿠(東北) 호족들의 영웅.

 

 1522년.

 그 전년에 쇼우군(将軍)이 된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는 대대로 쿄우()에 올라와 인사를 해 온 다테 타네무네에게 므츠(陸奧)국 슈고쇼쿠(守護職)의 임명서를 주었다. 타네무네는 일약 바쿠후(幕府)의 관직을 얻어 일개의 호족에서 다이묘우(大名)로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장군의 이름 한자를 얻어 하루무네(晴宗)로 이름 짓는 것도 허락 받았다.


 원래 토우호쿠(東北)지방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말을 키워 헌상하는 것 외에는 산물을 받칠 수가 없었다. 헤이안(平安) 즈음부터 금()을 산출할 수 있게 된 후 후지와라(藤原) 4대의 화려한 시대가 지난 후부터 차츰 촌락이 발달해 조정의 관직도 임명 받게 되고 바쿠후(幕府)에서도 오우슈우탄다이(奧州 探題)가 설치 되었다. 탄다이의 핏줄을 잇는 오오사키(大崎), 모가미(最上)의 양 가문이 다른 슈고쇼쿠(守護職)의 후예와 함께 차츰 센코쿠 다이묘우(戦囯 大名)가 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다이묘우(大名)다른 지방에서 임명, 파견된 자들의 후손들이었기에 오우슈우(奧州) 지방의 토박이인 다테씨가 슈고쇼쿠를 받은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던 것이다.


 타네무네는 다테군() 외에 10개의 군()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진카이슈우(塵芥集)]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이것은 전시대인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과 똑같다고 하기에 문화적인 후진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내용은 당시 토우호쿠지방 독특한 농촌사정도 반영되어 171개조에 걸쳐 세분화되어 있다. 이렇게 군사, 정치, 경제, 재판권에 걸쳐 영지 지배의 기반을 세워 올렸다.


하루무네와 텐분의 난.


 타네무네의 명예욕은 더욱 커져 모친 쪽의 가문인 에치고(越後)의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実)에게 친아들이 없자 자신의 차남 토키무네마루(時宗丸)를 양자로 보내는 공작을 하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즈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부친)에게 불순한 움직임이 있어 분쟁이 진정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1542(천문 11) 6월.

 정예병을 이끌고 에치고에 가려고 했던 타네무네를 장남 하루무네가 반대하여 갑자기 부친을 유폐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단순한 부자간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내란이 점차 근린으로 확대되어 타무라(田村), 니혼마츠(二本松), 소우마(相馬), 모가미(最上),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 쿠로카와(黒川), 이와키(岩城) 등의 다이묘우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까지 끌어 들여서는 7년에 걸쳐 싸우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러한 사태가 되었느냐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척관계에 의한 동맹은 일대(一代)로 끝나는 것으로 다음 세대가 되면 그대로 동맹이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다테씨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곳도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결국은 세대간의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복잡해 지면 대개혁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무네(다테씨 15대 당주)는 우선 본거지를 대대에 걸쳐 지켜왔던 다테군()에서 데와(出羽) 오이타마(置賜)군의 중심지 요네자와(米沢)성으로 옮겨 다테씨가 명실공히 일신되었다는 것을 내외에 알렸다. 거기에 1553(천문 22) 1월 내란의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영지 재편을 단행하였다. 반항했던 신하의 영지는 몰수하는 식으로 가신들의 영지를 대담하게 맞바꾸었다. 이것은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행한 전국적인 영지 바꾸기의 소규모이지만 선행판(先行版)이라 할 수 있는 효과를 올려 일족(一族), 일가(一家), 토자마(外様)라는 가신단의 서열을 확립했다.


말년은 오우우(奥羽)지배의 포석


 영내의 정비에 성공한 하루무네는 말년까지도 오우우 일대에 다테가문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갔다.

 하루무네 자신의 정실은 아시나(盧名)씨의 출신이며, 아시나씨에게는 여동생이 시집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즈(会津)의 유력 다이묘우와는 2중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위에 자매의 연으로 소우마(相馬),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카케다(掛田)씨와는 인척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갖추어지자 하루무네는 세자인 테루무네(輝宗)를 모가미 씨의 딸과 결혼[각주:1]시켰고, 이와키성에는 차남 치카타카(親隆), 루수(留守)씨에게는 삼남 마사카게(政景), 이시카와씨에게는 아키미츠(昭光), 코쿠부(囯分)씨에게는 모리시게(盛重) 등등 정치력을 배경으로 한 강제적으로 양자를 들여보냈고, 딸들을 사다케(佐竹)씨와 니카이도우(二階堂)씨에게 시집보냈다.


 타네무네, 하루무네 2대에 걸쳐 다테씨는 오우슈우(奧州)의 패권을 쥐기 위한 싹을 틔우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1565년 가독을 상속받은 아들 테루무네(輝宗) 조부나 부친의 미지근한 센고쿠(戦囯) 다이묘우(大名)제를 거부해서 부친 하루무네와 대립한다. 테루무네는 인척관계에 의존하는 동맹을 맺지 않고 아들인 본텐마루(梵天丸 후에 마사무네(政宗))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하루무네는 은거한 시나오(信夫)군 스기노메(杉目)성에서 계속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7년 12월 5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테루무네는 불행하게도 뜻을 펼치는 도중에 죽게 되나 그 뒤를 마사무네가 이어받아 무력에 위한 오우슈우 제패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1. 이들과의 사이에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태어났다 [본문으로]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159910 5일 병사(病死) 54.


1546 ~ 1599

무츠[陸奧] 탓코[田子]성주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아들. 종가(宗家) 난부 하루츠구(南部 晴継)의 뒤를 이어 26대 당주(當主)가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협력을 얻어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진압하였고, 새로이 모리오카(盛岡)성을 쌓아 후에 난부 번[] 24만석의 기초를 쌓았다.










오산으로 알게 된 시대의 종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 호응하여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는 일천의 병사를 이끌고 참진하였다. 츠가루 타메노[津軽 為信]에게 난부 가문[南部家의 영지였던 츠가루[津軽] 일대을 빼앗긴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인 노부나오에게 있어서 참진은 영토를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그러나 원수 타메노부는 불과 18기의 기마 무사만을 대동한채 노부나오가 오기 3일전에 히데요시를 만나서 영지 소유권을 받아 낸 상태였다.


 억울함에 흥분하는 노부나오에게 "분노를 참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다독거린 것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노부나오는 이렇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종언을 깨닫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 오우우 총무사령(関東,奥羽惣無事令)]- 즉 사투금지령[私鬪禁止令]을 어기면 난부가의 존립이 위험할 터였다.


 힘에 의존한 타메노부 토벌에서는 몇 번이나 밀렸기에 뛰어난 무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부나오지만, 대세판단의 정확함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천하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유력해진 히데요시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신임이 두터운 토시이에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그 방법은 그때까지 말이나 매의 헌상을 매개로 하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의 방법[각주:1]에 더하여 기청문(起請文-서약서(誓約書))까지 토시이에에게 받아냄으로써 정치적 의도를 명확히 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타메노부의 반란 후 노부나오는 일문의 효웅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에게 배반당한다. 타메노부의 경우에는 사투금지령이 노부나오의 발목을 죄는 덫이 되었지만 마사자네의 경우는 노부나오를 구하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었다.


쿠노헤의 난과 오우우 처리(奥羽再仕置)


 노부나오는 난부가 24대 하루마사[晴政]의 사촌동생이었다. 처는 하루마사의 장녀였다. 하루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 자리를 약속 받았지만, 하루마사의 애첩에게서 하루츠구[晴継]가 태어나자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고 더구나 처가 먼저 죽었기에 후계자 후보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582 1월.

 하루마사가 죽자 하루츠구가 당주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 20여일 후 부친의 장례식을 끝내고 산노헤 성[三戶城]으로 돌아오던 도중 자객에게 습격 당했다고도, 독살 당해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가독(家督) 상속 문제가 대두되어 가문이 둘로 나뉘는 바람에 무력에 위한 싸움은 없었으나 가문 내부에 석연치 않은 앙금을 남기게 되었다. 노부나오는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 하치노헤 마사요시[八戶 政栄]들의 지지를 얻어 26대 당주가 되었다. 나이 37세였다.


 한편 '노부나오는 두려워 할 가치도 없다'며 적의를 보이는 마사자네 초대 미츠유키[光行] 때 부터 갈라져 나온 난부 가문의 명문으로 쿠노헤[九戶], 니노헤[二戶]의 양 군()을 영유하고 있던 가문 내에서도 높은 신분이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부에 품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난부 일족에게 결정적인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오우우 처리(奥羽仕置)[각주:2]때문이었다. 처리(仕置)는 오다와라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러 제후들에 대한 본보기였는데, 가지고 있던 영토를 빼앗긴 무장의 원한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떠나자 구영주(舊領主)들과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에 의한 반란이 오우우[奥羽] 각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 히데요시의 계획은 어긋나 버렸다.


 이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마사자네 후계문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장들에게 격문을 날려 호응을 얻자 5천의 병사를 이끌고부 종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거성(居城) 쿠노헤 성에서 농성했다. 1591년의 가을이었다.


 노부나오의 구원 요청에 응해 히데요시는 마사자네의 봉기를 사투(私鬪)로 판단하여, 재처리(再仕置)를 통해서 천하 통일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히데츠구[秀次]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파견. 여기에 오우우의 여러 무장의 병사들을 더한 10만의 대군으로 쿠노헤성을 포위. 4일간의 공성전 후 모략에 의해 마사자네 일당을 섬멸했다.


난부가 중흥의 시조


 노부나오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종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있던 중 하치노헤 마사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피로해 있다. 이것을 히데요시에게 직언하면 처분 받을 것 같기에, 이를 두려워 하여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만 보아도 이곳이 어떤지 알 수 있겠지
 고 하며 히데요시의 광기(狂氣)를 전하고 있다. 이 또한 노부나오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권유를 받아, 거성을 북쪽으로 치우친 산노헤 성[三戶城]에서 중앙부의 모리오카[盛岡]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 받은 것은 이 나고야 재진 중의 일이었다.


 노부나오가 난부 가문 중흥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천하인 히데요시를 따르며 난부 7()을 안도 받아 성 밑 마을(城下町) 모리오카로 전국의 상인이나 직인(職人)을 불러 모아 우대하여 번영시킨 것도 있지만, 거기에 더해서 카즈노[鹿角]의 산 등에서 금을 캐내어 재정을 풍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599, 노부나오는 모리오카성에서 발병. 쿠노헤 성을 수리, 복구하여 이름 바꾼 모리오카 성으로 옮긴 후에 죽었다. 나이는 54. 가독은 토시나오[利直]가 이었다.

  1. 이 방식은 노부나가에게 귀순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부나가가 만들어낸 방법이었다. 즉 이 오우우, 즉 토우호쿠[東北] 지방 뿐만 아니라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나 오오토모[大友]도 노부나가에게 매를 헌상하여 노부나가에게 귀순하였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참전하지 않았던 토우호쿠[東北=오우우[奥羽]] 무장들의 영토를 빼앗아, 자기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본문으로]

쓰가루 다메노부[津軽 為信]
1607년 12월 5일 병사 58세.

1550 ~ 1607.

히로사키[弘前]의 번조(藩祖). 처음엔 오오우라[大浦]씨를 칭하나 난부[南部]씨의 지배가 약화되자 독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 지방의 지배를 인정 받아, 츠가루를 성(姓)으로 삼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동군에 속해 오오가키[大垣] 공략에 참가하였다.

 

 

 




 



전국말기에 주가를 배반한 무장.

 

 오오우라 성[大浦城]의 성주 오오우라 타메노리[大浦 爲則]의 사위인 타메노부[爲信]는 그 때까지 난부[南部]의 성(姓)을 썼었다. 츠가루[津軽]라는 성은 1589년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공략을 위해 참진하여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에 3개 군(郡)을 안도 받으면서 쓴 성이다.


 난부 가문 츠가루 담당관(郡代)의 집사(執事)를 맡고 있던 타메노부가 츠가루 지역 일원을 난부 가문에게서 무력으로 강탈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난부 가문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타메노부는 불만이 많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와 손을 잡는 한편 아세이시 성[浅瀬石城]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난부 가문의 가신 센토쿠 마사우지[千德 政氏]와 맹약을 맺고 지금까지 츠가루의 영민을 잘 다스린 실적을 기반으로 츠가루 일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이런 강탈 행위가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오우 총무사령[関東奧羽㹅無事令]'[각주:1]이 발령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어 센고쿠 시대 말기에 자신의 영토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속공과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류를 잘 살펴 민정에 힘을 쏟은 점이 특징적이다. 지용겸비의 무장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놀랄만한 전략으로 영토를 안도

 

 군웅할거의 센고쿠 시대는 힘 있는 자가 내키는대로 빼았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타메노부는 신빙성 높은 정보를 모아서 중앙 정국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빨리 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인물에게 접근하면 유리한가를 정확히 판단했다. 센고쿠 무장의 대부분은 중앙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진기한 물건이나 재보를 헌상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타메노부도 그렇게 하여 성공한 무장 중의 한 명이다.

 

 주인이었던 난부 가문에 반기를 든 대담함에 더하여 치밀함을 소유한 타메노부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허례허식에 묶일 필요가 없었다. 창피함이라던가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는 지가 최선인가를 재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희대의 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히데요시에게서 영토를 인정 받으려 할 때 나타난다.

 타메노부는 불과 18기(騎)의 부하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다와라 공략 중인 히데요시의 본진을 목표로 내달려, 누마즈[沼津]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해서는 영토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난부 종가(宗家)의 노부나오[信直]가 히데요시를 알현하기 3일 전이라는 아슬아슬함이었다. 1590년 3월 27일의 일이었다.

 

 타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츠가루 일대의 지배를 인정받은 다음부터 '쿠노헤의 란[九戸の乱]' 출병을 시작으로 많은 군역(軍役)을 부과 받지만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德川]를 선택, 오오카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하여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한편 쿄우토[京都] 조정에서 존중받고 있던 오섭가[五摂家][각주:2]의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과 친교를 맺는 등 여타의 무장들과는 다른 수법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타메노부 자신도 3번 쿄우토에 올라 재물을 받치고 감사의 뜻을 올리면서 쿄우토 산죠우 거리[三条通り]에 있는 츠가루 번(藩)의 저택에 머물면서 때때로 자식들을 불러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곤 했다.

 

말년과 죽음

 

 본의는 아니지만 가문의 안정을 위해서 츠가루 통일의 공로자인 센토쿠 일족을 모략으로 멸망시킨 타메노부는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고치고자 남들보다 더 불교에 정진하여 마음의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해서찾아 왔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장남 노부타케[信建]는 츠가루를 버리고 떠난 뒤 쿄우토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3대 번주로 눈 여겨 두고 있던 손자인 오오쿠마[大熊]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고 계속해서 귀여워하던 딸 토미히메[富姬]가 자신 보다 먼저 죽는 비운을 맞보게 된다.

 

 츠가루 10만석의 번조(藩祖) 타메노부의 말년은 깊은 쓸쓸함과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 가득차게 되었다.

 오오우라 성에서 호리코시 성[堀越城]으로 옮긴 타메노부는 요해지인 타카가오카[鷹ヶ岡]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 했으나 막부(幕府)에 허락 받지 못해 생전에 실현을 보지 못했다.(2대째의 노부히라[信枚]대에 완성).

 중앙 정권에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영지의 안태를 꾀했던 타메노부는 심혈을 쏟아부은듯 1607년 12월 5일 58세를 일기로 쿄우토에서 죽었다. 쿄우토의 츠가루 번의 저택이 아닌, 야마시나[山料]의 칼 장인(刀工)인 라이쿠니미치[來囯道]의 저택이라 한다. 히데요시처럼 심한 기침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타메노부는 죽음을 앞두고 3남 노부히라를 머리맡으로 불러 가독을 물려주었다. 2남 노부카타[信堅]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노부히라는 운 좋게도 후에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滿天姬]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마테히메는 이에야스의 이부제 마츠다이라 야스모토[松平 康元]의 딸이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楅島 正則]의 양자 마사유키[正之]에게 시집갔었으나 마사유키가 폐적, 참살당해 19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부히라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1. 칸토우[関東]와 오우우[奥羽] 지방의 무사들에게 사적인 타툼을 하지 말라는 명령. [본문으로]
  2. '고셋케'라고 발음. 칸파쿠[関白]를 배출할 수 있는 코노에[近衛], 이치죠우[一条], 니죠우[二条], 쿠죠우[九条], 타카츠카사[鷹司]를 말한다. 서열은 필두 코노에 가문을 제외하고 모두 동급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