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텔리[각주:1] 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무장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치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행동거지에서 미적인 품위를 느낄 정도이다.

 중세 굴지의 문화인(文化人) 센노 리큐우(千 利休)는 우지사토를 평하길,
 “일본의 무장 중에서도 하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문무 겸비의 명장”
 라 말하며 칭송했다고 한다.

 우지사토 스스로도 자신이 명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서에 따르면 측근에게,
 “
토요토미 타이코우(豊臣 太閤)가 죽은 뒤 천하인(天下人)가 되는 사람은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아니면 나다”
 고 단정지었다고 하다.
 또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야스는 가신에게 땅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미의식을 통한 인물감정이기에 현실과 밀착한 통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뜻하는 바가 웅대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에게서
아이즈(会津) 42만석[각주:2]의 거대한 영지(領地)에 봉해졌을 때 우지사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변경으로 옮겨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를 메이지(明治) 시대의 문호(文豪)
코우다 로한(幸田 露伴)은,
 “내 비록 미관말직이더라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있다면 여차할 때 무슨 일이라도 하여 깃발을 천하에 휘날릴 수 있을 터인데, 이제 큰 영지(領地)를 받았다곤 하여도 산과 강이 사이에 놓여진
시라카와(白河) 관문[각주:3] 저 너머 오우슈우(奥州) 데와(出羽)의 깡촌에 있어서는 평소 가지던 큰 뜻도 펼치기 힘드니…”[코우다 로한의 蒲生氏郷]
 라 표현하였다. 우지사토의 눈이 항상 천하로 향해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 장재(將材)는 노부나가도 눈여겨볼 정도였다. 부친 카타히데(賢秀)가 오우미(近江)의 롯카쿠(六角)씨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을 때 13살의 우지사토는 인질로 오다 가문에 오게 되었다. 우지사토를 본 노부나가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며 장래의 대기(大器)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 해 14살의 데뷔전(初陣)[각주:4]에서는 이름있는 무사의 수급을 취하였다. 이 해 약속대로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姫)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히데요시도 우지사토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의 일이다. 당시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성주였던 우지사토도 출진하였다.
어쨌든 히데요시 앞에서 그의 측근들이 심심풀이로 인물비평에 열중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때,
 “우지사토는 나와 닮았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해내더군. 정말 두려운 녀석이야”
 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즈(会津)의 대봉(大封)을 받을 때 있어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이즈(会津)는 오우슈우(奥州)를 제압하는 주요지점이었다. 히데요시는 누가 적임일지 여러 장수들에게 토의하게 하였다. 10명중 9명이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네놈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라”며 우지사토를 지명했다고 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 부임할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였다. 히데요시의 특기 인심장악술이었다. 자신의 전권대리인으로서 오우슈우(奥州)의 지배자가 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전해진다. 우지사토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이쪽에 두기에는 너무 무서운 녀석이다”
 고 생각한 히데요시가 오우슈우(奥州)의 깡촌으로 쫓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각주:5]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오우슈우(奥州)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같은 자리에 아이즈(会津)와 인접한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와 그의 아들 키요히사(清久)가 있었다.
 “이세노카미. 너희들은 앞으로 우지사토를 주군 혹은 부모라 생각하고 섬기거라. 앞으로 쿄우토(京都)에 올 필요 없다. 그 대신 아이즈(会津)로 출사하거라”
 그리고 우지사토에게는,
 “이세노카미를 자식 또는 동생이라고 여기며 돌봐주길 바란다”
 고 말하였다.
 우지사토는 오우슈우(奥州) 총독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오우슈우(奥州)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자연스레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우지사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사무네가 세이쥬우로우(清十郎)라는 16살의 자객을 가모우 일족의 타무라 나카츠카사노쇼우(田村 中務少輔)의 시동으로 잠입시켰다. 목적은 우지사토의 암살이었다. 어쩌다 편지가 국경초소에서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우지사토는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며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각주:6]

 우지사토는 세례명을 ‘레온[각주:7]’이라고 하여 기독교에 신앙했었다. 센고쿠 당시의 지식계층은 이 서양의 종교를 신지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지사토의 인텔리전트적인 면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풍류의 길에도 밝아 사세구로써,

 끝이 있으니 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질 것을
 성급도 하구나 꽃샘바람
 限りあれば吹かねど花は散るものを
 心みじかき春の山嵐
  라는 것을 남겼다.

 다도(茶道)도 리큐우의 뛰어난 일곱 제자 중 하나[각주:8]로 꼽혔다.

 말년의 영지(領地)는 92만석에 달했지만 안타깝게도 40세에 죽었다.
 가모우 가문 자체의 명맥도 짧아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각주:9]에 단절되었다.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56년
오우미(近江) 가모우 군(蒲生郡) 히노 성(日野城)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마스히데(賦秀)[각주:10], 통칭을 츄우사부로우(忠三郎)라 하였다. 1584년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12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서의 공으로 쇼우쇼우(少将)로 승진하여 '마츠자카 쇼우쇼우(松坂少将)'라 불렸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공을 세워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42만석에 봉해졌다. 1591년 오우슈우(奥州)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각주:11]를 진압하여 타무라(田村), 시노부(信夫) 등 5개 군(郡)이 더해졌고, 같은 해 또다시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2]에 참가하여 다테 군(伊達郡)을 가증 받아 영지(領地)는 91만9320석에 달하였다. 1595년 2월 7일 죽었다.

  1. '지식인'..이라고 번역해야하지만, 왠지 네이버 지식즐~ 때문인지 뉘앙스가 좀... [본문으로]
  2. 46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4. 대다수의 서적들은 1569년 8월의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략이라고 하지만, 우지사토가 이토우 한고로우(伊藤 半五郎)에게 보낸 편지에는 1568년 9월의 노부나가 상경전 때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이와는 반대로 우지사토에게 세례를 한 오르간티노는 우지사토가 죽자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죽었다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다. [본문으로]
  7. 레오(Leo)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리큐우 칠철(利休七哲)을 말한다. 우지사토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오리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우지사토는 이 칠철 중 No.1으로 꼽힌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업치락뒤치락 후 우지사토의 손자 타타도모(忠知) 때 완전히 끊김. [본문으로]
  10. '야스히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11. 상기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가 영내 정치를 잘못해서 '카사이-오오사키의 난'이 일어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는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 [본문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는 대조적으로 강직하고 우직한 장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노부나가의 후계자리를 둘러싸고 히데요시와 격렬한 주도권다툼을 벌이다 패했다.

 전해지는 카츠이에의 목상을 보면 눈꼬리가 치켜 올려진 염라대왕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 내에서도 그의 부대 표식(馬印)인 금색 고헤이(御幣)가 [귀신 시바타의 고헤이]라 칭송 받을 정도로 맹장이었던 것이다.(이곳(링크)에 가보면 중간 즈음에 좌상과 금색 고헤이(御幣)를 볼 수 있다)

 맹장이라는 이미지와 반대로 카츠이에게는 뛰어난 민정가로서의 일면도 있었다.
 농민 반란군(一向一揆)을 멸하고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성주가 된 카츠이에는 칼 단속령(刀狩)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무기를 전부 몰수한 후 그것을 다시 농기구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것은 쇠사슬로 만들어 쿠주류우가와 강(九頭龍川)에 가교(架橋)를 세웠다. 영지(領地)에서 48척의 배를 모아 떠내려가지 않게 쇠사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이어 다리로 만든 것이다. '후나바시(舟橋)'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키타노쇼우를 종단하는 아스와가와 강(足羽川)에 반은 돌, 반은 나무로 평판이 자자한 '오오하시(大橋)'도 만들었다.

 시바타 씨(柴田氏)는 대대로 오다 가문의 가로(家老)를 역임하는 가격(家格)을 가지고 있으며 카츠이에는 중신 필두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때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각주:1]의 모반에 가담하여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였다. 당시 캐찌질이(大うつけ)라고 불리고 있던 노부나가를 오다 가문 번영을 위해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자 곧바로 머리를 밀고 용서를 구하였다. 보통 노부나가는 한번 자신에게 모반을 일으킨 자는 절대로 용서하는 일 없이 곧바로 죽였지만[각주:2] 카츠이에의 경우 그의 우직과 성실함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츠이에의 무공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 깨기 시바타(かめ割り柴田)]라는 에피소드이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하였을 때 갑작스런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했던 시기였다. 오우미(近江) 방어를 위해 카츠이에는 쵸우코우지(長光寺)성()을 소수의 병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 오우미의 옛 주인인 롯카쿠 죠우테이(六角 承禎)가 8000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성의 용수지(用水池)를 빼앗겼기에 이내 성 안에 마실 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적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항복을 권고해 왔다. 갈증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카츠이에는 성 안의 모든 병사를 모아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 간다면 자멸할 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오늘 밤 출격하여 최후의 꽃을 피워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 안에 남은 물을 큰 독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한 후 손수 나기나타(薙刀)로 독을 깬 것이다. 그리하여 시바타의 군세는 전원 결사의 돌격을 감행하여 몇 배나 되는 적을 물리친 것이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은 시점이 카츠이에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되는 것은 필두 중신은 자신이다. –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 토벌을 히데요시가 먼저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간에 주도권 다툼이 펼쳐지게 된다.

 오다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議)가 그 결정적인 장면이 되었다.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를 내세웠으며 히데요시는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산포우시(三法師=후에 히데노부(秀信))를 내세웠고,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를 자기 측에 끌어들인 히데요시가 결국 적통이라는 명분을 이유로 산포우시 추대에 성공한 것이다.

 주도권 다툼에서는 패했지만 카츠이에는 그 대신 당시 절세의 미녀라 칭송 받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카츠이에 61세.
 오이치노카타는 박복한 운명에 휘둘린 여성이었다. 처음엔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가 2남3녀를 낳았지만 오빠 노부나가에게 남편 나가마사는 멸망 당하고 장남까지 살해당하였다.

 히데요시도 오이치노카타를 남몰래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는 오이치노카타를 빼앗긴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에게 실연당한 복수를 한 것이라는 설이다. 히데요시는 싸움에 패하여 키타노쇼우에서 농성하는 카츠이에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코우야산 산(高野山)으로 물러나라며 3만석의 땅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그 본심은 오이치노카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데 있어 최대의 강적은 카츠이에였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보고서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만을 두려워한다'고 적었다. 에도 시대 초기 바쿠후(幕府)의 유학자인 하야시 가호우( 鵞峰[각주:3])도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는 부하에게, 카츠이에가 살아서는 내 야망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1583년 3월 시즈가타케 전투가 카츠이에의 운명을 정하였다.
 1개월간에 걸친 지구전이 펼쳐지던 중에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 공격에 나선 히데요시의 빈자리를 노려 카츠이에의 부하장수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가 기습을 감행했다. 이 사쿠마의 기습은 성공하여 히데요시 측의 무장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를 전사시키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을 패주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거만해진 사쿠마는 예정대로 철수하지 않았고 카츠이에의 세 번에 걸친 명령도 승리에 취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 패전의 소식을 듣자마자 예전 츄우고쿠 대반전(中大返し)를 방불케 하는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52km를 불과 5시간 만에 주파한 초인적인 속도였다.
 시즈가타케에 나타난 히데요시군을 보고 그 경이적인 신속함에 시바타군은 동요했다. 4월 20일 미명부터 시작된 시즈가타케의 결전은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키요마사(
正)),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 市松=마사노리(正則)) 등 소위 칠본창의 무공 등에 힘입어 히데요시의 승리가 결정되었지만, 이미 개전하기 전부터 카츠이에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즉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와 카츠미츠(不破 勝光),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 長近) 등 시바타 휘하의 여러 무장이 히데요시에게 내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바타군은 붕괴되어 에치젠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카츠이에도 불과 100여기의 수하들에게 보호받으며 토치노키토우게 고개(木峠)를 넘어 에치젠(越前)에 들어섰고, 그 후 마에다 토시이에의 거성 후츄우(府中)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8기로 줄어있었다. 이때 카츠이에는 후츄우 성의 마에다 토시이에를 방문하였다. 배신한 토시이에를 원망하는 마음이 카츠이에에게 없었다. 토시이에가 내온 식사를 다 먹은 후 지금까지 토시이에가 자신에게 해 준 것에 감사를 한 후, "자네와 치쿠젠(筑前=히데요시)은 굉장히 친한 사이. 나와의 약속은 버리고 히데요시와 같은 편이 되어 영지(領地)를 지키시게"라고 권했다 한다. 더군다나 카츠이에는 키타노쇼우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토시이에에게 인질인 딸[각주:4]을 돌려보내었다.

 키타노쇼우의 최후가 왔다.
 이제 성의 병사는 3000도 안 되었다. 이미 밖에는 노도와 같이 에치젠으로 진격해 온 히데요시의 대군이 성(
)을 포위하고 있었다. 카츠이에는 고굉지신이라 부를 수 있는 80여명의 부하를 텐슈(天守)로 불러들여 석별의 주연을 벌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술을 따라주며 돌아다녔고 부하들의 부인과 시녀들, 그녀들의 말상대인 비구니에게까지 시중을 들었고, 가무음곡을 즐기며 취했다고 한다.

 주연이 끝나자 카츠이에와 오이치노카타는 거실로 옮겨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츠이에는 이때 몇 번이나 오이치노카타에게 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오이치노카타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오이치노카타는,

그렇지 않아도 졸린 여름 밤에
꿈길로 유혹하는 두견새려나
さらぬだに
ぬる
夢路をさそうほととぎすかな

 카츠이에는,

여름 밤 꿈길이라는 허무한 흔적의 이름을
저 하늘까지 가져가다오 두견새여
夢路はかなき
雲井にあげよほととぎす

 라고 각각 사세구를 읊었다.

 다음 날 1583년 4월 24일 미명부터 히데요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정오에 이르러 이제는 각오를 정해야 할 때라고 본 카츠이에는 텐슈(天守)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일족들과 함께 자인하고 성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시바타 가쓰이에(柴田 勝家)]
1522년 태생. 통칭 곤로쿠(
). 슈리노스케(修理亮). 오다 가문(織田家)의 필두중신으로 1575년 9월 노부나가(信長)의 에치젠(越前) 농민반란군(一向一揆) 토벌 후 에치젠 국주()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사()의 변 때는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싸우고 있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우()에서 자해하였을 때는 62세로 부인인 오이치노카타(お)는 37세였다.

  1. 보통 노부유키(信行)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내가 알기로는 이런 적 없다. 곧바로 죽인 사례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본문으로]
  3.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초기에 활약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의 아들. [본문으로]
  4. 후에 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가 되는 마아히메(麻阿姫). [본문으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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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