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searchina.ne.jp/disp.cgi?y=2011&d=0415&f=national_0415_069.shtml

일본의 개소문같은 사이트 서치나의 기사입니다.
중국 검색사이트 서치나의 게시판에서 위무제 조조(魏武帝 曹操)와 일본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중 누가 낫냐? 라는 스레가 세워져 중국어를 일본어로 쓰여진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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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레 세운 사람:372436683
내가 생각하기에 노부나가는 500년에 1번 있을까 말까한 야심적인 영웅이다. 조조는 1000년에 1번 나올까 말까한 교활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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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織田龍秀一
노부나가는 영웅이고 조조는 간웅이다. 어느 쪽이 듣기에 좋냐? 현대 일본인은 다들 오다 노부나가를 영웅으로 간주하지. 현대 중국인은 조조가 영웅인지, 간웅인지, 야심가인지 잘 모른다. 시대가 달라도 답은 이미 나온 거 아냐?

● 122.96.254.*
어느 쪽이 강하냐고 하면 어렵군. 둘 다 많이 닮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중국인이니까 역시 조조를 지지해!

● 鳳雛一輝
완성 전투와 혼노우 사의 변. 누가 살아 남고 누가 죽었는지를 보고 알아야지.

● 玉柴政夏
조조는 단지 토지와 농민 획득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 뿐이야. 한편 노부나가는 위대한 개척자다.

● LOVE歩歩ayumi
조조 쪽이 교활하다고 생각해. 노부나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뭐 한때 지랄 좀 떤 거 같지만

● abcdxyz2010
노부나가는 천하인으로서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생각해. 조조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야심뿐이었다고 생각해

● 211.136.115.*
↑ 노부나가에게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까? 조조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야심뿐이었다고? 젊었을 적의 조조는 손권과 함께 한왕조에서도 손꼽히는 충신으로 여겨진 적도 있다구. 정말 이 게시판에 있는 놈들은 어째서 이렇게 조조를 깔려고만 하는거야?

● 陸不遜
그다지 노부나가빠들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닌데, 노부나가는 자기 부하조차 확실히 관리하지 못해 결국 자살했잖아.

● sjy1201
조조가 죽은 뒤 그 자식들을 북방을 계속 지배했지.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적자는 영지를 지키지 못했어[각주:1]. 다른 자식들의 결과도 모두 알고 있을 터.

● blkid
노부나가는 동탁과 닮았지. 동탁도 강했어. 하지만 조조에 비교하기엔 부족하지

● 849319572
그냥 둘을 몇 번 싸우게 해보면 알지 않아?

  1.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는 노부나가와 같은 날 죽음. 아마 글쓴이는 노부타다의 적자 히데노부[秀信]와 헷갈린 듯. 히데노부는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미노[美濃] 기후[岐阜] 13만석.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이 되나, 세키가하라 때 서군 측에 서 영지 몰수 후 얼마 안가(1605년) 죽음. [본문으로]


한국정부에서 보낸 지원물자를 인수

1. 오늘 17일(화요일) 오후 및 5월 18일(수요일) 오전. 한국정부로부터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지역에 보내기 위한 지원물자를 실은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에 도착할 예정입니다(도착시각은 17일 21시 40분(JL094편), 18일 14:15(JL092편)가 될 예정).

2. 이번 한국정부의 지원에는 피해지역의 요청에 따라 비누 1만개, 수건 5만1000장, 물수건 2590개, 실내화 700켤레를 수송하여, 이 물자들은 WFP(국제연합 세계 식량계획)의 협력도 얻어, 이와테 현 토오노 시[岩手県 遠野市],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宮城県石巻市], 후쿠시마 현 후쿠시마 시[福島県福島市], 야마가타 현 카미노야마 시[山形県上山市]에 배포될 예정입니다. 한국정부는 예전에도 식량이나 물 등을 제공하여 피해지역에 차례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3. 우리(일본) 정부는 한국정부의 협력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참고] 한국이 지금까지 보내 준 지원물자 내용

・식량(즉석볶음밥 3만개, 초콜릿 14만 4000개, 양갱 11만 2000개, 초코파이 12만개, 라면 12만 9024개, 스프 4만 8600개, 건빵 3600개, 햇반 10만개, 한국김 225kg, 즉석 비빔밥 2600개)
・음료수(물 580톤, 페트병 차(茶) 1만 4000개)
・이동식 발전기(4대)
・그 외 (장화 4000켤레, 고무장갑 1만 2000개, 모포 6000장, 마스크 2만개, 비누 2만개, 작업용 장갑 3500개)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행해진 전투[合戦]에 대해서는 굉장히 복합적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런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들을 매료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중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전시약탈[乱取り=乱妨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를 축으로 당시의 전투 풍경에 대해 추구하고자 한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한 말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투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남의 영지를 점령하여 자국의 영지를 확대하는 것에 있다. 영지를 확대해야만  자국의 사람들은 은상을 얻어 기뻐한다. 때문에 소령(所領)을 얻고 거기에 또 가증을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사무라이[侍]의 본망인 것이다.
  즉 “창 한 자루로 무공을 세워 언젠가는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는 사상이며 지금까지의 센고쿠 시대 전투 이미지는 이 말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각서[日本覚書]]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시를 보면 ‘1585년 6월 14일’이라고 한다. 전 661항목 중 3개 항목을 소개한다.

一. 우리들(유럽인)에게는 하사관, 소대장, 십인조장(十人組長), 백인대장(百人隊長) 등 (계급이) 있다. 일본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一. 우리들의 국왕이나 대장은 병사에게 보수를 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 각각이 종군하면서 먹거나 마시거나 입는 것들을 전부 자비로 해야만 한다. 
一. 우리들은 토지나 도시, 촌락 및 그곳의 부(富)를 빼앗기 위해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의 전투는 언제나 대부분이 밀, 보리, 쌀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지휘계통을 가진 계급제도가 없고, 병사들은 종군 중에 식사나 의복도 전부 자비로 준비하며,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한다.
 프로이스는 일본 무사의 군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갑양군감]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다시 [갑양군감]을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텐분11년[각주:1]에 행해진 [다이몬 고개 전투[大門峠合戦]]의 한 구절이다.
10월 7일에 코우후[甲府]를 출진했다. <중략> 25일에는 우미지리[海尻=현 미나미사쿠 군[南佐久郡]]로 출진하시는 것이 결정되자 주민의 가옥을 부시고[小屋落し][각주:2], 약탈[乱取り], 전답에 남아 있던 농작물 약탈[刈田働き]를 행하는 잡병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중략> 약탈이 3일간 밤낮에 걸쳐서 행해졌다. 내일부터는 조금 멀리 약탈하러 나가고자 하여 아침에 출발 저녁에 본진에 돌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약탈[乱取り]이라는 것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납치, 물건의 약탈 등을 말하는 단어다. 전쟁하러 간 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묘사다. 
 결국 4일 후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에게서 신탁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약탈을 정지시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프로이스가 기록한 것을 방불케 하여 군단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잡병의 약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이 당시 전쟁터 약탈[乱取り]의 실태가 아닐까? 앞서 본 ‘입신출세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약탈[乱取り]을 위한 전투'인 것이다. 유추해 보자면 신겐이 주창한 ‘사무라이의 본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부대를 이끄는 무장(武將)의 마음가짐이지 적장의 목을 베어 은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잡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 4권 19화에 등장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도 ‘약탈[乱取り] 당하였다.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카오 성[中尾城]에서 농성하던 요시테루는 미요시 군의 공세에 결국 철퇴. 성을 넘겨 주고 도망쳤다.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를 살펴보자. 

오늘 밤(11월 21일), 히가시야마[각주:3] 무가[東山武家=요시테루[義輝]]의 성이 함락되었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중략> 그저께 불타고 남은 건물에 다시 불을 질러 약탈했다고 한다. 히가시야마 무가의 성 오늘 미요시 군세 약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미요시 군은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철저하게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쇼우군의 권위도 잡병들의 약탈[乱取り]를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잡병들의 약탈[乱取り]을 묵인했다. 약탈이 전투에 참가시키는 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가 보다 합리화된 텐쇼우 연간[天正年間] 즈음이 되자 ‘약탈[乱取り]’은 주로 인간을 납치하는데 의미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투의 상태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전투의 작법을 볼 수 있다. 
 ①. 출진한 군단은 야전이나 공성 등의 전투를 행한다. 
 . 승패가 결정된 뒤 또는 전투가 행해지던 중에도 잡병들은 약탈[乱取り]을 한다. 쌀이나 일용품 등(또는 인간)을 약탈한다. 사무라이 타이쇼우[侍大将]나 다이묘우는 그런 약탈[乱取り]을 묵인한다. 
 . 전투에 승리하여 약탈[乱取り]이 행해지는 기간(3~4일간) 후에 푯말을 세워 [약탈 금지] 등의 명령을 내린다. 
 . 다이묘우는 점령한 영지(領地)의 지배권, 잡병은 빼앗은 쌀이나 일용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기근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 – 라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하얀 매(鷹)에게 ‘란토리[乱取り] – 즉 약탈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란토리가 나오는 매사냥을 보기 위해서 군중이 모일 정도로 인기를 떨쳤다고 한다.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으면서 사냥감을 잡는 ‘란토리’. 센고쿠 시대의 세상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1542년. [본문으로]
  2. 진영에 세우는 가건물을 세울 때, 나무를 베어 가공을 하면 시간이 걸리기에 주변 가옥을 부셔서 세웠고 이것을 小屋落し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아시카가 쇼우군의 정무소가 있던 지역 이름. [본문으로]
출처: http://www.asahi.com/international/update/1114/TKY201011130389.html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후나바시 요우이치(wiki_jp)[船橋 洋一] 아시히 신문 주필의 인터뷰 일부를 발췌하는 기사들은 있으나 전문은 게재한 곳이 없기에(...있으면 대략 시간낭비) 번역해 올립니다.

- 는 후나바시 요우이치 씨의 질문.
굵은 글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답변입니다.




- G20 의장국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G20을 앞으로 어떻게 키워나가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의장으로서 이번 회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G20이 모인 것은 2008년 11월 워싱턴. 그때는 (금융)위기였기에 선진국, 신흥국 등 대륙을 대표하는 나라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습니다만 걱정은 남아있습니다. 위기 때는 단결하지만 회복기가 시작되면 나라마다 각각의 사정이 다르기에 과연 한마음이 될 지 걱정입니다. 그 고비가 된 것이 서울에서의 회의입니다. 앞으로도 G20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서울에서 합의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회의에는 없었을 듯한 부담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서울 회의로 인해서 G20 역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입니다.[각주:1]

 결과적으로 G20에 속한 나라들은 세계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로써 앞으로도 G20을 대신할 포럼이 없다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회의 마지막에는 모든 정상들이 G20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어려운 때 문제 해결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G20을 대신할 상설 채널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G20 멤버 이외에도 개발문제가 있기에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2개국을 초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까지 G20이 앞으로도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최선진국, 신흥국, 가장 가난한 나라까지 모두가 G20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은 세계의 글로벌 파워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14년전에 가입한 선진국입니다. 한국이 G8에 들어가 G8을 강화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세계 경제문제가 주된 관심사인 G20입니다만 이번 토론에서는 기후변동에서 개발도상국 개발문제까지 다양한 토의를 하였습니다. G20에서 함께 연구하는 편이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 한국은 환태평양 파트너십 협정(TPP)에 어떤 방침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까?

 상징적인 효과는 있습니다만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내의 APEC 국가들이 역내에서 자유무역을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 어느 나라건 (TPP를) 검토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일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많은 나라와 FTA를 맺고 있습니다. 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 자유무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세 장벽과 비관세의 장벽을 없에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당 부분이 일본 측 의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어려움 중 하나는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압력입니다만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를 연달아서 성사시키고 있습니다. 어떻하면 농촌, 농민의 반발, 불안감, 반대 등을 극복하고 FTA 쪽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까?

 농민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TA를 체결하려면 많은 농민을 설득해야만 합니다만 반대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깃발을 휘날리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그런 반대들을 극복하여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가 국제적인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농업도 국제경쟁력을 가져야만 하는 점이 중요하며, 농민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민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면 외국과 경쟁해가면서 잘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 생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전제이며 그 다음이 경제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협력이 실현되면 자연히 통일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북의 비핵화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제라도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취임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국내의 정치적인 목적때문에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반도의 남북전체를 위한 길을 탐색하기 위한 회담을 해야만 합니다.

- 저는 북한이 권력계승기에 진입하고 있으며, 불안정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미리 상정하여 한국의 대응, 한미, 한미일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냐고 생각합니다.

 삼대세습은 일반적,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대세습했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이 위험해 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체,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보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협력할 것이며, 지금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이며 미국과 한국도 동맹관계이기에 자연히 말씀하신 것은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더욱 국제무대에서 상호간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때도 국제연합에서 일본이 앞서서 잘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렇 것을 통해서 상호 신뢰가 깊어지기에 북한 정세가 위험하다거나 위험하지 않다거나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한일 안전보장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는 자연스럽게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화한다고 하면 주변 나라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볼 지도 모르기에, 반대로 그런 의심을 강하게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간다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번 한국에서 대량파괴병기 확산방지구상(PSI)의 훈련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훈련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참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면 다음에도 또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해 나가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 한미의 군사연습을 예전에 했을 때, 일본 해상자위대를 옵저버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미일간 훈련할 때 한국도 옵저버로 올 수 있습니까?

 참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 (한국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화재 인도 서명이 한일간에 행해집니다. 연내에 1205점을 인도할 때 대통령 스스로 한 번 더 일본에 오셔서 가져가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런 문제는 일본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통과된 다음부터 생각하겠습니다.

-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어떤 행동, 태도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한 일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6자회담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적절한 보상을 주더라도 그들은 핵실험을 하여 망친 다음 또 (회담에) 나오거나 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략에는 6자회담을 열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사를 전제로 회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은 같은 생각이며, 중국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러시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북한이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핵을 포기하는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가지고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 언제나 중국을 모델로 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중국정부에 대해서도 북한을 중국과 같이 해 주길 바란다고 말햇씁니다. 우리들이 개방하시오, 변하시오 라고 하여도 그들은 오해하는데, 중국이라는 성공사례도 있으며 체제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직역 반, 의역 반. 제 실력이 딸릴 수도 있겠지만 좀 중구난방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어 가능하신 분은 링크를 직접 참고하시고 보시는 편이 좋을 듯.
  1. 아마도 서울 회의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면 G20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시는 듯.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