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careerzine.jp/article/detail/1789 

일본 IT 업계 전직 사이트 CAREERzine에 올라온 글입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회사 트렌더스가 20~59세 사이의 일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관심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60%가 ‘있다’고 대답.

 ‘있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센고쿠 시대의 어떤 부분에 흥미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1위는 ‘센고쿠 무장의 캐릭터, 인물상’         77%
2위는 ‘센고쿠 무장이 보낸 격동의 인생’      59%
3위는 ‘혼돈스런 하극상 사회’                    38%
4위는 ‘전투의 전법, 전술’                         36%

 센고쿠 무장 중에서 가장 빨리 출세할 듯한 인물은?

1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秀吉]          41%
2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21%
3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7%
4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5%
5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2%

‘기업가로 성공할 듯한 인물’은?

1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38%
2위 토쿠가와 이에야스                           35%
3위 오다 노부나가                                 32%
4위
타케다 신겐                                    16% 

히데요시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눈치가 빨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잘 만든다’ (23세 여성), ‘하극상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성품’(27세 남성), ‘백성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현명한 노력가에 오기가 센 무장이라 생각’(25세 여성)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저 질문에 가장 출세할 듯한 인물은 이건 뭐 두말할 필요도 없이 히데요시일 듯. 하지만 기업가로는 노부나가,

기업가 히데요시의 단점을 보자면,
무엇보다 주제도 모른 해외침략.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의 규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덩치만 불리려 한 인수합병 혹은 주력 업종 외에 제대로 된 인식도 없으면서 문어발 확장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전 히데요시건 이에야스건 노부나가가 없었음 저렇게 컸을지도 의문.

전편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관한 이야기는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편찬사료들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부의 공식기록이라는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를 위시한 여러 사료들뿐만 아니라 ‘유영부녀전계[柳営婦女伝系]’, ‘옥녀기[玉輿記]’와 같이 토쿠가와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에 대한 기록서에서 볼 수 있는 키요야스의 부인 케요우인[華陽院] 항목에서도 키요야스가 죽게 되는 모리야마의 변을 텐분[天文] 4년 즉 1535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와 개정 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따르면 키요야스의 미카와 군세는 당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각주:1]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키요스가 노부히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1535년 당시 키요스는 노부히데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입죠.

키요스

키요스는 당시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츠[織田 大和守 達勝]의 거성이었습니다.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텐분 원년(1532년)까지 키요스의 서쪽 쇼우바타[勝幡]에 있던 부하격인 단죠우츄우 노부히데[弾正忠 信秀]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죠.

이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집니다만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틈만나면 노부히데를 노렸으며 결국 오와리 제일의 실력자라는 노부히데가 1551년에 죽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좋을 리가 없었겠죠. 당시는 하극상의 시대. 야마토노카미 가문에서 보기에 치고 올라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예전 가신을 좋게 볼 리는 없을 터이며, 단죠우츄우 가문 쪽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요. 노부히데의 입장에서는 미카와의 키요야스가 키요스를 공략해 준다면 그 틈에 떨어진 떡고물을 취하려 할 지언정 도우러 갈 이유는 희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쇼바타 성[勝幡城]과 키요스 성[清洲城],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위치

어쨌든 이 키요스가 단죠우츄우 가문[弾正忠家]의 영지가 되는 것은 1555년 노부나가와 노부나가의 숙부이자 노부히데의 동생인 노부미츠가 손을 잡고 모략으로 키요스를 손에 넣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각주:2]

그렇다면 모리야마는?

자 그럼 모리야마는 누구의 영지였을까요?
위에 언급한 에도 막부의 기록들에는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성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이 모리야마도 노부미츠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지냐 하면, 바로 키요야스와 사이가 나뻤던 숙부 마츠다이라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의 영지였던 듯 합니다.

적어도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526년에 렌가사[連歌師] 소우쵸우[宗長]의 일기에 모리야마에 있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저택에서 렌가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는 1535년까지도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각주:3]

이 모리야마가 언제부터 노부미츠의 영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노부히데가 모리야마의 근방 나고야[那古野]를 손에 넣고 그곳에 있는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4]라는 절의 토지 영유를 인정한 1538년 이후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난 1535년 당시에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였지 노부미츠의 거성이 아니었단 말입죠.

썰렁한 결말

즉 이 모리야마의 변에서 오다 가문이 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츠다이라 종가[松平宗家]의 키요야스[清康]와 그 종가에 개기는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 간의 싸움이었습죠. 미카와∙마츠다이라 일족[三河∙松平一族]라는 책을 쓴 히라노 아키오[平野 明夫]라는 분은 마츠다이라 가문 종가와 분가의 다툼에 더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다툼과도 관련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마츠다이라 가문 내부의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 수상한 점.

◀왼편에 있는 그림은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기록된 모리야마 변에 관해 기록된 곳입니다. 모리야마에 진을 친 키요야스에게 나이젠 노부사다가 노부히데와 내통하여 키요야스의 거성을 노리고 종가를 빼앗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키요야스가 군사를 되돌리려 할 때 사카이[酒井], 오오쿠보[大久保]의 말에 따라 우선 군사를 되돌리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라고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에 관해선 토쿠가와실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오른편의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 가문의 면면들이 보이는군요.

사카이 사에몬노죠우 타다츠구[酒井 左衛門尉 忠次]와 오오쿠보 가문의 유명인인 오오쿠보 시치로우에몬 타다요[大久保 七郎右衛門 忠世],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 治右衛門 忠佐] 등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사카이 타다츠구 1527년생. 오오쿠보 타다요 1532년생 오오쿠보 타다스케 1537년생입죠. 그리고 모리야마 변이 일어난 해는 1535년.

그러니까 모리야마 변이 일어날 당시, 사카이 타다츠구는 9살. 오오쿠보 타다요는 4살, 타다스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입죠. 여담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개정미카와후풍토기의 저본인 미카와후풍토기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까지 등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모리야마의 변 당시 3살이옵죠.

이런 이유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영무자설[徳川家康の影武者説]을 발표하며 모리야마의 변이 1535년 키요야스 때의 일이 아니고 156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키요스에 있던 것은 노부나가이며, 뒤에서 획책했던 것은 나이젠 노부사다가 아니라 당시엔 이에야스와 적대적이었던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 信元]라고 합니다.

1561년 이에야스가 죽어 영무자가 교체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기를 바꾸려다 보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된 것이며, 역시 미즈노 노부모토가 아닌 나이젠 노부사다가 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은 이는 키요야스가 아닌 이에야스였으며 이때 세라타 지로우사부로우[世良田 二郎三郎]라는 이가 역사상의 이에야스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라오카의 주장대로 1561년이라면 위에 사카이나 오오쿠보의 나이도 해결이 됩지요. 사카이 타다츠구 35세. 오오쿠보 타다요는 30세. 타다스케는 25세. 확실히 이정도 나이라면 옆에서 진언할 나이는 되겠지요.

뭐 저도 무라오카 씨의 주장에는 납득을 못합니다만 그가 이에야스 영무자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한 몇몇 것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군데가 있긴 합죠...뭐 이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기로 합죠.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의 이후

의심도 받았고 또한 자기 아들이 주군까지 살해하였다.
보통 이랬다면 바로 사형이고 실제로 현지 분위기도 그러했으며 아베 오오쿠라 자신도 대역무도의 죄를 지었다며 죽으려 했으나, 야시치로우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전편에서 언급했던 결백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 키요야스의 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용서를 얻어 이후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후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가 종가의 히로타다를 죽이려고 할 때도 히로타다를 탈출시켰고 히로타다의 복귀를 의해서 힘을 써 실현. 히로타다가 죽은 이후 히로타다의 아들인 이에야스[家康]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보호를 받을 때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오카자키 행정관[岡崎奉行人] 중 한명으로 오카자키 주변을 다스리다 죽습니다(생몰년 불명[각주:5]).

아베 오오쿠라는 주군을 죽인 대역무도의 핏줄이라며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그의 측실이 아베 오오쿠라의 씨를 임신한 채로 시나노[信濃]에서 미카와에 와 있던 이노우에 키요무네[井上 清宗]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후에 이노우에 키요히데[井上 清秀]라는 사람이 되며, 키요히데의 자식들은 대대로 에도 막부의 요직에 취하여 후다이[普代] 명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는 清洲,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는 清須 [본문으로]
  2.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 織田喜六郎殿御生害の事. [본문으로]
  3.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오와리∙오다 일족[尾張∙織田一族]”(新人物往来社),p82 [본문으로]
  4. 사족으로 이곳은 노부나가가 어렸을 적에 공부한 절이라고 함. [본문으로]
  5. 위키에는 1549년 죽었다고 하나 1553년에도 오카자키 행정관 중 하나인 사카이 키요히데[酒井 清秀]와 함께 미카와 절들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기에 1549년 사망설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535년 12월 초순.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13살에 가독을 이은 뒤 파죽지세로 마츠다이라 종가[松平 宗家]의 세력을 넓히고, 종가에 개기던 서가(庶家)를 가신단으로 편입시켰으며, 후다이 가신단[譜代家臣団]을 조직화하고, 직할지 농민 지배기구의 정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만드는 등 착착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길을 걷던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각주:1]는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 오와리의 모리야마[守山/森山][각주:3]란 곳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분열된 마츠다이라 종가와 서가와의 사이를 이간질해 미카와에 진출하려는 오다 가문[織田家]을 정벌하기 위해서 였습죠. 그렇습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종가와 서가간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련하면 ‘열 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로 많은 그리고 독립적인 서가가 있었으며 그런 서가 중 실력자로 나이젠 노부사다(wike_jp)[松平 内膳 信定]가 있었습니다. 족보 상으로는 키요야스 아비의 동생 즉 키요야스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됩죠.

 

 노부사다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척들을 구성하는 외교에도 뛰어나, 자신의 부인은 오다 노부히데의 여동생이었으며, 노부사다의 딸들은 오와리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성주인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부인을 시작으로 카리야[刈谷]의 미즈노[水野], 마츠다이라 서가인 오오규우[大給], 나가사와[長沢] 가문에도 시집을 보내어 거대세력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 노부사다에게 종가라고는 하나 날뛰는 25살의 애송이 조카 녀석이 꼴보기 싫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오와리 원정에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서 못 나갑니다~ 하고 꾀병을 부렸습죠. 키요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세가 이겨보았자 그 공은 전부 키요야스가 차지하게 되고 또한 그렇게 키요야스는 더 커질테니까요. 그래서 원정 참가를 하지 않는 대신 방해를 합니다. 내부의 적은 항상 있는 법입죠.

 

 키요야스를 지탱하는 유력한 가로 중에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각주:4]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내정 수완을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키요야스가 저렇게 매년 전쟁을 하는 것도 다 자기가 후방에서 지원을 잘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노부사다는 저 아베 오오쿠라와 키요야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여러 소문을 퍼뜨립니다. 아베가 오다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건가, 아베가 잘난 척을 많이 한다던가 하는…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키요야스도 평소부터 아베에게 거리낌이 있었는지 그 소문을 곧바로 믿고 아베 오오쿠라와 자주 다투게 됩니다.

 

 그런 소문과 키요야스의 행동 때문에 상처 입은 아베 오오쿠라는 모리야마의 본진에서 아들 아베 야시치로우[阿部 弥七郎]에게 말합니다.
 “만약 뜬소문 때문에 내가 죄를 받으면 후대까지 오명을 입게 된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내 무죄를 신께 맹세하는 기청문(起請文)을 쓰니 니가 가지고 있으렴”
 아비의 투덜거림과 기청문을 받은 야시치로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뜬소문만 믿고 공이 많은 자신의 아비를 핍박하는 주군 키요야스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12월 4일.
 키요야스의 본진을 둔 절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나 말이 놀라 날뛰는 헤프닝이 일어났습니다.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병사들이 소리질렀습니다.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어서 닫아~”

 

 이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닫아’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야시치로우는 하필 아비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있었기에 병사들의 저 외침은 날뛰는 말이 아니라 아비를 지칭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아비를 도망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취했습니다. 아비를 구하러 찾아다니다가 시간낭비를 하느니, 어디에 있는지 뻔한 키요야스를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말잡이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휘를 하고 있던 키요야스 곁에는 부하들도 말 잡으러 갔기에 혼란스러웠고 사람도 적었습니다. 아무 제지 없이 키요야스의 뒤로 다가간 야시치로우는 칼을 뽑아 “도망치게 하지 마라”고 외치는 키요야스의 등 오른 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베었습니다. 키요야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 아베 야시치로우도 키요야스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검의 명수 우에무라 데와노카미[植村 出羽守]에게 죽습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서 무명을 떨치던 키요야스가 죽어, 그의 아들이며 이에야스의 아비인 히로타다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엇고, 종가를 쓰러뜨리려는 나이젠 노부사다에게 미카와에서 쫓겨나 이세[伊勢], 스루가[駿河]를 전전하게 됩니다.

 

 이상이 모리야마의 변에 대한 통설입니다.
 ...하지만 말입죠.

미야시타 히데키[宮下 英樹]의 오케하자마 전기 2권.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
제가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처럼 현장에 직접 가서 의문을 느끼진 못 했지만, 알려진 통설에는 의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죠.

계속~ (두둥~)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할애비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애비 [본문으로]
  3. 오다 측 기록에선 守山, 토쿠가와 측 기록에선 森山. 둘다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4. 위키에는 아베 사다요시[阿部 定吉]라는 휘(諱)가 있으나, 당시 기록은 그냥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라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정권의 상징과도 같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6년 2월 21일.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의 문서담당관[右筆]인 우노 몬도[宇野主水]의 일기[각주: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즘 '천명 베기[千人斬り]'라 하여 오오사카 시내에서 노동자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여러 소문이 돌고 있다. 오오타니 키노스케[大谷 紀之介]라는 소성(小性) 중 하나가 자신이 걸린 악성 종양(惡瘡)을 치유하기위해 천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리한다는 소문이 있다.
此の頃、千人斬りと号して、大坂の町中にて人夫風情のもの、あまた討ち殺す由、種々風聞あり。大谷紀ノ介と云う小姓衆、悪瘡気につきて、千人殺してその血をねぶれば彼の病平癒するとて此の儀申し付く云々、世情風聞なり

여기서 나오는 오오타니 키노스케[大谷 紀之介]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패배할 줄 알면서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우정을 지켜 서군(西軍)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으로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말합니다. 일본에선 나름 '고결(高潔)'한 사람으로 꼽히는 듯합니다.

범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년도인 1585년 11월 27~28일 사이.
그때까지 이런 소문이 떠돈다는 것조차 몰랐던 히데요시는 격노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데도 보고조차하지 않다니 직무태만이다. 담당자[町奉行]들을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우선 목숨만은 살려둔다"
히데요시의 분노는 당연했습니다. 전년 1585년 7월 텐노우[天皇]의 대리인인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으며 본거지로 정한 오오사카의 성과 도시도 막 완성되어 일본 전역에 자신의 위광을 과시하고자하였는데 발생한 치안사건이었기에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습니다.

님들아~ 이젠 일본의 평화는 제가 지킬께요! - 라며 히데요시가 총무사령[惣無事令][각주:2]을 반포한들, '지 본거지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무슨 일본 운운이냐?'라는 비웃음만 돌아올 테니까요.

미담의 세계에선,
"범인은 오오타니 키노스케라고 합니다. 이유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천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라는 담당관들의 보고에,
"허허~ 키노스케가 그럴 리 없지"
라고 웃으며 히데요시는 단박에 물리쳤기에[각주:3]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우선 미담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히데요시는 우선 담당관 세 명에게 근신처분을 명합니다.
너무 늦은 보고,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바탕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범인에게 황금 10매(枚)를 현상금으로 걸었습니다.

범인이 잡혔습니다.
우키타 지로우쿠로우[宇喜多 次郎九郎].
성씨가 우키타[宇喜多]인 것으로 보아서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로우쿠로우는 히데요시의 친위대[馬廻]에 속했던 자로, 오오사카에서 천 명베기[千人斬り]를 칭하며 사람들을 살해하다가 발각되어 히데요시에게 자살을 명령받아 3월 3일 자살합니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우키타 지로우쿠로우가 죽은 바로 그날 저녁인 3월 3일에 5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 오오타니가 한 것이 아니냐고들 쑤군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에 언급하는 기록이 없기에 어떤 결말로 끝이 났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 이후 오오타니의 활약과 출세를 보건대 범인이 요시츠구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히데요시는 비록 명목상이긴 하나 바로 이해인 1586년 7월 사법을 다스리는 부서 형부(刑部)의 차관 교우부노쇼우[刑部少輔]에 요시츠구를 임명합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살인사건의 용의자에게 사법 담당관에 임명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뭐 예나 지금이나 편견이 문제입죠. 

  1. 우노몬도일기[宇野主水日記]는 사료가치가 높은 일급사료로 유명하다고 한다.별칭 '카이즈카 어좌소일기[貝塚御座所日記]', '이시야마혼간지 일기[石山本願寺日記]' [본문으로]
  2. 사투 금지령(私鬪禁止令). 한 마디로 싸우지 말라는 소리. 텐노우[天皇]의 대리인 칸파쿠[関白]의 이름 하에 반포했기에 히데요시는 이를 어긴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가문[島津家],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었다. [본문으로]
  3. 요시츠구가 범인이래요~ 라고 보고하는 담당관에게 칼을 뽑고 다가가 죽이려 했다는 말도 있습죠. [본문으로]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島津 兵庫頭 義弘]!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


1600년 9월13일. 사츠마[薩摩] 카모우[蒲生]에 있던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은, 소수의 병력[각주:1]으로 서군(西軍)에 참가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동원령에 응하여 요시히로의 저택이 있던 쵸우사[帳佐]와 자신이 다스리던 카모우[蒲生]의 무사 70여명을 이끌고 8월 3일 출발하여 9월 13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의 난구우산 산[南宮山] 근방에 도착.

아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휘하의 병사 1000명을 파견하여 마중.  
길 양측에 도열해서는 앞을 지나가는 쵸우쥬인 세이쥰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오시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오시다니 정말 군신(軍神)이 따로 없소"
라 외쳤고, 마중 나왔던 미츠나리는 금으로 된 지휘부채[軍配]를 주며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의 노고를 치하.

점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주둔해 있던 오오가키[大垣]에 도착.
요시히로 문밖으로 달려 나와,
”쵸우쥬[長寿]구나! 자네가 가장 먼저 와 줄거라 믿고 있었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라 기뻐하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하사 받았던 흰 봉황이 새겨진 진바오리[陣羽織][각주:2]를 하사.

이틀 뒤인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시작.

서군(西軍)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시마즈 부대의 본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너무도 빠른 서군의 붕괴에 요시히로는 아직 갑옷도 완전히 입지 않은 상태였다.[각주:3] 서군의 좌익 이시다, 우익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는 이미 무너져 전장에 남아있는 서군의 부대는 시마즈 부대 뿐이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탈출할 지를 놓고 토론하였다. 그때 세이쥰이 들어왔다.
”이때가 되어서도 한가롭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텐가? 말로 다툼하는 대신 무공으로 다투고 싶은 사람은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 마지막 무명을 높이세”

막료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요시히로는 할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각주:4]가 와,
“이제 정해진 천운(天運)을 바꿀 순 없습니다. 살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사이 큰아버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사츠마[薩摩]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요시히로는 듣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몸에 시마즈 가문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옵소서”
라고 외치자 그제서야 요시히로는 일어섰다.

그 대화를 보고 있던 세이쥰은 요시히로와 토요히사의 말이 끝나자 재빨리 요시히로의 갑주 쪽으로 가 자신의 무구를 벗은 후 요시히로의 것을 서둘러 입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기에 요시히로는 아무 말 없이 대신 세이쥰이 벗은 무구를 입었다. 이로 인해 세이쥰은 도착했을 때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요시히로의 무구, 거기에 미츠나리가 준 황금 지휘부채로 인해 오히려 요시히로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역할이 정해졌다.
토요히사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호위하며 탈출하기로, 세이쥰은 본진이었던 곳에 남아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기로.

요시히로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느 쪽 적의 기세가 가장 왕성한가?”
부하가 답했다.
“동쪽에 있는 적이 가장 기세 등등합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요시히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세를 향해 돌파할 것. 돌파하지 못하면 효우고 뉴우도우[兵庫入道][각주:5]는 할복할 뿐!”
부하들이 합창하듯이 답했다.
“말씀하신 두 명령. 받자와 메시겠습니다”

떠나는 토요히사에게 세이쥰이 다가가 말했다.
“이것으로 금생에서는 더 만나지 못할테니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토요히사는 말했다.
“오늘은 아군이 약하기에 무공을 세우긴 힘들 것 같군요”
둘은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남겨진 쵸우쥬인 세이쥰 부대 200~300에 동군(東軍) 부대 700이 돌진해 왔다.
처음엔 본진에 적들이 난입하기 전에 철포로 물리쳤다.
두 번째는 난전이 되었다.
시마즈 부대의 암구호는 ‘자이[ざい]’였는데, 하필 상대도 ‘자이[ざい]’였다[각주:6]. 같은 편끼리 죽고 죽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두려워 본진 뒤편에 파 두었던 해자[垓字]로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세이쥰은 노하여 외쳤다.
“사츠마까지는 500리나 된다. 설사 도망치더라도 멀어서 가기나 하겠나? 거기에 도망치는 놈은 얼굴 다 알려졌을테니 앞으로의 굴욕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나!”
몇몇이 해자에서 기어나와,
“잠시 동안이라도 미련을 가졌던 것이 정말 창피하옵니다.”
라 말했다.

난전이 된 두 번째 적의 파도을 제압한 세이쥰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까지 가셨나?”
부하들은 모두 입 맞추어,
“적진을 돌파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구나. 이제 내가 주군의 영무자[影武者]로 죽는 일만 남았군”

적의 3차 돌격에서 세이쥰은 죽었다고 한다.
“시마즈 효우고노카미[島津 兵庫頭] 죽으려고 환장했으니 올테면 와라”
라 외치며 돌진하다 무수한 적의 창에 몸이 꿰뚫린 후 힘 다해,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각주:7]

외친 후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죽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283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돌진하여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50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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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퇴각전 중 그가 타고 있던 말만 나타났다고 한다. 토요히사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죽어있을 때 갑주만을 벗겨 전공품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토요히사가 입던 갑옷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福島 正之]의 부대에 꼽사리 끼었던 낭인[浪人] 카사하라 토우자에몬[笠原 藤左衛門]이 가져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소유했다고 한다. 후에 소문을 들은 토요히사의 6대손이 찾아가 살피자, 갑옷에는 창에 꿰뚫린 자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한다.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 1548년~1600년.
盛淳을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항목이나 일본 일반 웹에서는 ‘모리아츠’라고 읽으나 세이쥰은 승려에, 그의 스승이 ‘다이죠우인 세이큐우[大乗院 久]’였기에, 스승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았을 터이니 ‘세이쥰’이라 읽어야 할 듯.
어렸을 적부터 불문에 들어갔다.[각주:8] 처음 입문한 곳은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다이죠우인[大乗院]. 그 후 키이[紀伊]의 네고로 사[根来寺], 코우야[高野]에서 수행 후 사츠마[薩摩]로 돌아와 안요우 원[安養院]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의 부름으로 환속하여 시마즈 가문의 국정에 참가. 후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휘하 가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요시히로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어 전사. 향년 53세.

  1. 약 200명 이하. 여담으로 1600년 8월 토요토미 정권이 정한 시마즈의 재경 주둔병(在京駐鈍兵)은 7000명이야 했다. [본문으로]
  2. 조끼처럼 생긴 갑옷 위에 덧 입는 옷. [본문으로]
  3. 이를 고쿠소쿠[小具足]라 한다. 갑옷의 내피만 입고 외피를 입지 않은 상태. 요시히로는 당시 6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체력 온존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본문으로]
  4. 시마즈 토요히사는 시마즈 4형제의 막내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5. 뉴우도우[入道]는 불문에 입도한 사람에 붙는 말. 요시히로는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빈다며 중이 된 상태였다. – 단 머리는 밀지 않았던 듯 당시 몇몇 종군기에는 머리 묶는 끈에 대한 묘사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전투방식으로, 무사들끼리 대치하면 우선 자기 부대의 암구호를 대어, 상대방도 맞으면 다른 적을 찾아 나서고, 다르면 싸우는 식이었다. [본문으로]
  7. 내가 스스로 죽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내 목을 베었다고 무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 [본문으로]
  8. 이에 대해선 그의 부친 하타케야마 요리쿠니[畠山 頼国]가 “우리 집안은 원래 아시카가 쇼우군[足利将軍]의 중신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서국의 벽지(사츠마[薩摩])에 오게 되었다. 내 자손을 미천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보내고 싶다”고 하여 불문에 보냈다는 설이 있다…카더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