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가와 요시모토라는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기습을 받아
오케하자마에서 죽은 것으로써 유명하다.
 토쿠토미 소호우[富 蘇峰]는 이 일전을 '귀족적 문약(文弱)과 평민적 무강(武强)의 충돌'이라 하였다. 요컨대 구() 명문가와 신흥 세력의 승부라고 한 것이다.


 요시모토의 풍채에 대해서 기록이 있다.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었다고 한다. 머리를 밀지 않고 머리를 뒤로 넘겼으며(総髪), 이빨은 검게 물들인(漿) 상급귀족[公卿]처럼 화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軍家]과 혈연인 명문가이다.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 義兼]를 선조로 하여, 증손자인 쿠니우지[
氏]가 이마가와 씨를 칭하게 되었다. 쿠니우지의 손자 노리쿠니[] 때부터 스루가[駿河]를 영유(領有). 유명한 사서 '난태평기(難太平記)[각주:1]'의 저자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각주:2]은 이 노리쿠니의 아들이다.[각주:3]


 이마가와 씨는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의 슈고[守護][각주:4]로써 토우카이[東海]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다. 쿄우토[京都]와의 관계도 깊어서 귀족[公家]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요시모토의 모친도 다이나곤[大納言] 나카노미카도 노부타네[中御門 宣胤]의 딸이다.

 요시모토는 부친 우지치카[氏親]의 다섯째 아들로, 우지치카의 첫째 아들은 우지테루[氏輝]였다. 또한 우지치카의 누나는 나이다이진[大臣] 산죠우 사네모치[ 望]의 부인이다.
 쿄우토[京都] 문화에 심취한 요시모토는 순푸[駿府]의 구석구석까지 쿄우토로 만들었다. 지명도 쿄우토에 있는 키요미즈[
水], 아타고[愛宕], 키타야마[北山], 니시야마[西山]라 명명하였고, 케마리[蹴鞠]와카[和歌] 모임도 활발히 열었다.


 쿄우토 문화에 심취한 무장답게 요시모토에게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전투에서였다. 부하에게 적 선봉의 상태를 알아보고 오라며 정찰시켰는데, 이 부하가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정작 중요한 정찰을 하지는 못하는 대신 적의 목을 가지고 왔다.
 요시모토는 화를 내며 명령 위반에 따라 엄벌을 내리려 하였다. 센고쿠 무장으로써는 당연한 처치였다. 하지만 이 부하가 꾀를 써서, 옛 시를 이용한 것이었다. 후지와라노 이에타카[藤原 家隆]

솔새에 빠져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슬에 꺾인 줄기
苅萱に身にしむ色はなけれども、見て捨て難き露の下折
라는 시를 읊었다.
 요시모토는 이를 듣자마자 태도가 변하였다.
 괘씸한 녀석이지만 순간적으로 옛 시를 생각해내다니 기특하구나
 라고 말하며 군령 위반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 만약 노부나가였다면 아니 노부나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령 위반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요시모토가 무장으로써 실각이라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후세에 요시모토에게 나쁜 평판만이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 오케하자마의 패배자라는 것에 있다. 후세의 기록이라는 것은 모두 승리자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법이다. 승리를 한 노부나가는 후에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기에, 그와 대비되면 당연히 요시모토가 불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에도 시대가 되면서 신격화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소년기에 이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여 악의를 가지고 요시모토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요시모토가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될 때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1536
. 형인 우지테루가 죽었을 때 요시모토는 걸승(傑僧) 타이겐 셋사이[太源 雪斎]의 제자로 후지 군[富士郡] 젠토쿠 사[寺]의 중이었다. 그리고 가독(家督)을 둘러싸고 역시 출가해 있던 배 다른 형인 에탄[探]과 다투어 승리하여 패한 에탄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각주:5]
 이때 요시모토는 환속하여 이마가와 가문을 잇고 은사(恩師) 타이겐 셋사이를 군사로 맞이하였다. 요시모토의 시대가 되자 종래의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에 더하여
미카와[三河]도 세력하에 두었다. 요시모토는 결코 쿄우토 문화에 정신 팔린 용렬한 무장이라는 일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케하자마의 전투는 1560 5 19일에 일어났다.
 이 때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의 대군을 이끌고 서상(西上)을 개시하였다. 도중에 있는 오와리[尾張]의 그것도 반밖에 영유(領有)하지 못하고 있는 오다 가문[織田家]은 단번에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깃발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각주:6]
 오와리에 침입한 이마가와의 군세는 이미 오다 측의 성 두 개를 점령하고 있어 기세가 올라 있었다. 19. 요시모토의 본진은
덴가쿠하자마[楽狭]에 도착하였다.
 이날의 요시모토의 모습은 끝부분에 금칠을 한
안장을 얹힌 말을 타고서, 황금으로 용이 세워진 투구에 몸통이 흰색으로 된 갑옷을 입고, 이마가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28( 84cm)의 오오타치[大太刀]를 차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위엄서린 무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전(緖戰)의 승리에 취하여 노부나가를 얕보고 있었다.

 한편 이날 새벽 키요스[清洲]를 출발한 노부나가 군세는 질풍과 같은 기세로 달려와 덴가쿠하자마의 이마가와 본진까지 다가왔다. 때마침 폭풍우가 불어와 이마가와 본진은 혼란에 빠졌다(이에 대해선 아케치 님의 블로그: [ 說 ]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을 참조해 주시길).


 요시모토는 죽는 순간까지 잘 싸웠다.
 돌격해 온 오다 측의 핫토리 코헤이타[服部 小平太]의 창대를 자르고 무릎을 베어 물리쳤다. 거기에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가 달려들어 마운트 포지션을 허용했지만, 요시모토는 목이 베이는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신스케의 집게손가락을 물어 뜯으며 싸웠던 것이다.


 참고로 오다 측에 있던 요시모토의 목은 나루미 성[鳴海城]에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가 건네 받아, 순푸[駿府]로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19년 태어났다. 우지치카의 다섯째로 처음엔 불문에 들어가 쇼우호우[承芳]라고 불렸지만, 환속하여 형 우지테루의 뒤를 잇고 요시모토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2개 지역을 영유(領有)하여 토우카이[東海] 지방 No.1 다이묘우[大名]가 된다. 미카와[三河]를 손에 넣은 후,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상경을 꾀하였지만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습당하여 전사하였다. 42.


Ps; 역자인 저는 상경설을 부정합니다(물론 요즘 분위기도 비상경설이 대세지만요). 이 이야기는 길어지니 차후에……

  1. 이마가와 씨의 역사, 가계, 공적 등이 쓰여 있다. [본문으로]
  2. 1326~1420(?).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무로마치[室町] 중기의 무장. 료우슌[了俊]은 불문에 들어서 부터이며, 이전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 貞世]라는 이름을 썼다. 1371년 큐우슈우[九州] 지역을 관리하는 막부 직책인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가 되어 큐우슈우의 남조 측을 구축하나, 남북조(南北朝)가 합체하자 1395년 큐우슈우탄다이에서 경질된다. 1399년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内 義広]와 손잡고 반항하지만 실패.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지녔으며, 고려의 정몽주와 회담하여 왜구 억제를 꾀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는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의 후손은 아니다. 료우슌이 큐우슈우탄다이[九州探題]에서 물러난 뒤 스루가 절반의 슈고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마가와 종가(宗家)의 당주이며 료우슌의 조카인 이마가와 야스노리[今川 泰範]가 슈고였다. 요시모토는 야스노리의 후손.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5. 이를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근래엔 상락설(上洛說)보다는 오와리[尾張] 점령을 위한 설이 강한 듯. [본문으로]